저패니메이션의 상징적 거점공간인 지브리 스튜디오는 곧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과 동일시된다. 디지털 시대에도 오랜 시간의 투자와 많은 사람들의 가내수공업적 노력을 필요로 하는 애니메이션 작업은, 팀웍이 특히 중요하다. 그래서 스튜디오의 집단적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모노노케 히메][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미학적 아름다움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동시에 획득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지부리 스튜디오의 집단적 협력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장하고 있는 지부리 스튜디오의 2세대들을 위해 이제 그는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고양이의 보은]은 지브리의 차세대 선두주자인 모리타 히로유키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 등에서 엄격한 도제수업을 받은 그는, 데뷔작에서 경천동지할만한 작품으로 자신의 독창적 개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지금까지 형성된 지브리의 장점을 고스란히 유지시키려고 애쓴다. 이제 겨우 첫 작품인 것이다.
[고양이의 보은]은 [귀를 기울이면](1995년)과 많이 닮아 있다. 히이라기 아오이라는 원작자가 같고 몇몇 중요 캐릭터도 겹쳐지기 때문이다. 고양이 남작 [바론], 뚱뚱한 흰 고양이 [무타], 만물상 [지구옥]은 훨씬 업그레이드 된 모습으로 활력을 불어넣는다. 예로부터 개는 충절과 보은의 상징적 동물이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았다. 제목부터 우리들의 상투적 정서를 자극하지 않는가?
여고생 하루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차에 치일뻔한 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주면서 이야기는 발전된다. 그때부터 하루는, 고양이 왕국의 왕자 룬의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고양이들의 보은을 받는다.
그러나 고양이의 기준에 의한 보은이다. 고양이가 좋아하는 쥐들을 상자에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하루의 사물함에 수없이 넣어둔다거나, 하루의 집 마당을 강아지풀로 뒤덮는 등, 고양이 입장에서는 최상의 보은을 하는 것이다. 이제 한 발 더 나아가, 고양이 왕국의 왕은 하루를 고양이 나라로 데려와서 룬 왕자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고양이의 보은]의 핵심 캐릭터는 하루지만, 그러나 고양이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고양이 남작 바론의 역할은 매우 크다. 아니다. 크다는 말로는 모자란다. [고양이의 보은]을 내면적으로 이끌고 있는 캐릭터는 바론이다. 바론은 인간세계와 고양이 왕국의 중간적 위치에서 두 세계를 넘나든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의 미덕을 꾀하는 바론을 통해 감독은 자신의 정치적 발언을 한다.
지브리의 작품답게 [고양이의 보은]도 맑고 투명한 수채화풍의 셀 애니메이션으로 경쾌한 보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었던 형이상학적 깊이는 많이 모자란다. 유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는 있지만 여운은 길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래도 [고양이의 보은]은 장기적 안목에서 세대교체를 하고 있는 지브리의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부러운 것은, 세대를 이어가며 더욱 튼튼한 노하우로 미학적 완성도와 산업적 안정성을 획득하고 있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시스템 구조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산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창의적 상상력과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집단적 시스템의 확립이 필요하다.
[블루 시걸]의 성인용 애니메이션 실패부터, 비록 작품성은 인정 받았지만 대중들과의 교감에서 실패한 [마리 이야기]의 문제점, 그리고 최근의 [원더풀 데이즈]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은 미학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어렵고 힘든 줄타기를 계속해왔다.
가장 큰 문제점은, 독창적 상상력이 구체적으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복잡한 공정만큼이나 애니메이션 작업은 집단적 협력을 필요로 한다. 범상한 아이디어를 매끄럽게 만들어낸 [고양이의 보은]은 그 좋은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