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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南 山淸郡 踏査(경남 산청군 답사)(2024. 6. 9 광주민학회)
답사를 시작하는 광주범원 광장에 회원님들이 모여 8시 반에 버스가 출발하였다. 지난밤까지 내리던 비는 개어서 찌푸린 날씨이지만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서늘한 공기로 답사길이 좋을 것 같다. 차 전면에 벼 이양이 끝난 들과 푸른 산에 회색구름 안개 피어오르고, 연변 산에 밤나무꽃이 휘들어 졌다. 야은 노영대 회장님의 인사말이 있었고, 강천사 휴게소에서 휴식 후 이민영 전회장님의 오늘 답사 강의가 있었다. 우리의 답사 여행은 심오한 지식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고, 선현들의 삶을 느껴보기 위한 가벼운 여행임으로 대다수 회원은 설명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眼視心通以外無(안시심통이외무)
遠山雲起感情扶(원산운기감정부)
未知佳景想思好(미지가경상사호)
可睡深深夢走乎(가수심심몽주호)
눈으로 보고 마음에 통하면 이외는 없으니
먼 산에 구름이 일어서 감정을 일으킨다.
알지 못한 경관은 생각해도 좋은니
깊은 잠 꿈속에 달려가도 될 것이니.
10시 30분에 구형왕릉 주차장에 하차하였다. 전에 와 받던 곳이나 주변 환경이 변하여 낯선 곳에 온 듯 어리둥절하다, 오른편으로 포장된 오르막길이 있다, 조금 오르니 「新羅太大角干純忠壯烈 興武王金庾信射臺碑」(신라태대각간순충장열 흥무왕기유신사대비) 표비가 새로 고른 대지에 외롭게 서 있다. 구형왕은 김유신의 증조부로 어려서 이 곳에서 시묘를 했다고 하였다. 길 건너 언덕에 단청된 비각은 들여다보니 「駕洛國始祖王廟遺址--」(가락국시조왕묘유지--)라 써 있으나 글씨는 작고 시간도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하고 길을 오른다.
구형왕릉이 새로 만든 다리 건너서 보이는 곳에 「山淸의 王山」(산청의 왕산) 안내판이 있다. 내용은 <이 산은 왕산인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이 태자에 왕위를 물려주고 말년을 보낸 태왕 유지가 있고, 구형왕릉이 있고, 김유신이 활쏘기 한 장소가 있다> 는 것이다.
구형왕 능을 다리 편에서 바라보니 홍살문 너머 언덕에 검회색의 돌무덤, 혹 돌탑같이 보인다. 정문을 통하여 들어가 앞에 서서 엄숙한 마음에 옷깃을 여미며 바라보니, 삼척 묘표석에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이라 했고, 문무석과 아양을 떠는 듯한 암, 수 사자석은 근래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 능에는 신비함이 있다고 하니 고래로, 칡넝쿨이 침범하지 않으며, 새들이 날아와 똥을 싸지 않으며, 돌에 이끼가 끼지 않고, 풀이 나지 않으며, 낙엽이 쌓이지 않는다고 하니, 참말인지는 또는 구형왕릉이 맞는 것인지는 학자들에게 맡겨두고, 자손들이 믿고 있는 대로 우리는 그저 보이는 것만 믿으면 될 듯하다.
駕洛興亡幾百年(가락흥망기백년)
石陵參拜我心虔(석릉참배아심건)
先知微物護存裏(선지미물호존리)
可否論爭虛事邊(가부논쟁허사변)
가야국 흥망이 얼마나 되었는가?
구형왕릉 참배하니 내 마음 경건하다.
미물도 먼저 알고 보호하고 있으니
가부 논쟁은 모두가 헛된 일이네.
오른편 계단을 내려와 「護陵閣」(호릉각)과 비어있는 수호인 집을 지나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멀리 왼편 아래로 보이는 「덕양전」을 들리지 못하였는데, 조선 정조 17년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11시 16분 왕산 반대편에 조성된 「東醫寶鑑村」(동의보감촌)을 찾았다. 들어서니 산골짜기에 큰 마을이 형성되고, 대형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하다. 차는 계속 올라가 위에서 내리게 했는데, 내려가면서 구경을 해야 한다고 한다. 모든 것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처음 궁궐 같은 집이 있어 「氣天門」(기천문)을 통해 들어가니, 정면에 2층의 집에 東醫殿(동의전)이라는 편액이 있고, 이곳에서는 氣(기)를 받는 곳이라 한다. 과연 억센 氣(기)가 있는 것 같다. 오른편에 있는 기각전 뒤의 煙突(연돌)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東醫殿(동의전) 뒤로 가니 암벽에 8m 정도 높이의 거북이를 새겨 놓고, 이를 「龜鑑石」(귀감석)이라 하는데, 거북문과 글자가 새겨 있다. 이 귀감석에는 王山(왕산)에서 주맥을 지나 위에 있는 石鏡(석경)에서 나오는 降氣(강기)와, 팔봉산 석경에서 나온 文氣(문기)가 합쳐 강한 기가 나온다고 하여 모두 만지고 몸을 비벼 기를 받고자 하고있다. 앞에 보이는 天氣在山淸(천기재산청)이라는 편액이 모두를 말해 준 듯하다. 뒤로 백여 층의 돌 계단을 올라가니 작은 정자 안의 큰 바위에 石鏡(석경)을 새겨 놓았는데, 설명판에는 <석경은 하늘의 뜻을 담아내는 降氣石(강기석)이다.> 했고, 많은 설명이 되어 있으나 다 읽지 못하였다. 아마 이곳이 동의보감촌을 한눈에 바라보는 정수리인 듯하다. 나무 층계를 타고 내려오며, 전망대인 義興樓(의흥루)에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초객루를 지나 길고 긴 나무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니 해부동굴이 조성 돼 있다. 등에 피뢰침이 솟은 곰의 입속에서 전망하고, 내려와 곰 모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커다란 금색의 거북이 모형을 구경하고 나오니 언덕에 허준 동상과 비석이 있다, 또 보지는 못하였으나 허준묘와 유의태 사당도 있다고 하니, 이는 모두 관광객을 모으기 위한 허구이니, 무식자의 지식이 될까 두렵다. 허준의 호가 龜巖(구암)이어서 거북이를 주제로 하여 동의보감촌을 꾸민 듯하다.
東醫優秀煽揚村(동의우수선양촌)
小郡山淸傾注魂(소군신청경주혼)
受氣欲人波浪溢(수기욕인파랑일)
怕成虛構變眞根(파성허구변진근)
동양의학 우수성을 선양하는 마을
작은 산청군이 혼을 불어넣었네,
기를 받고자 하는 사람 물결 넘치니
허구가 진실이 될까 두려운 마음이다.
주차장 가에 있는 <동의보감 보쌈>집에서 보쌈정식으로 점심을 하고, 장소를 옮겨 한방쌍화차를 마시고 차를 탔다.
다음은 德川書院(덕천서원)이다. 끝없는 산길은 마치 하늘길인 대관령 길을 달리는 기분으로 차창 아래로 멀리 뻗은 산맥이 아름답다.
14시 20분에 도착하니 문 앞에 4개의 다른 종류의 나무가 한 나무를 이룬 신비한 은행나무가 우리를 처음 반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 (1576) 남명 조식선생(1501-15720)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서원의 구조는 모두 같으므로 관심은 없으나, 정문을 時靜門(시정문)이라 했고, 강당인 敬義堂(경의당)에서 경과 의를 중시했던 남명의 사상을 헤아려 보고, 왼쪽 서재에는 進德齋(진덕재)라 하여, 고등학생들 연마처로 하고, 오른쪽 서재는 修業齋(수업재)라 하여 하등 학생을 수용한 듯하다. 뒤편에 있는 사당은 崇德祠(숭덕사)라 했으니, 선생의 학덕을 우러러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모두 이름으로 추정하여 본 것이다. 길 건너 강가에 정자가 아담하다.
讀聲已斷只風聲(덕성이단지풍성)
敬義堂名敎訓明(경의당명교훈명)
儒學將來何所去(유학장래하소거)
流雲離合體難成(유운리합체난성)
독서 소리 끊어지고 바람 소리뿐
경의당 이름에서 가르침이 밝네
유학은 장래 어디로 갈 것인가?
유운은 이합하며 몸 이루기 어렵구나.
天王寺(천왕사)에 15시 19분에 도착하였다. 한 20여 년 전 천왕사를 찾았을 때는 도로변에서 산길을 넘어 작은 와가인 천왕사에 도착하고, 마당 옆 언덕 바위에 모셔진 천왕 성모상을 보면서, 주지인 慧凡(혜범)에게서 지리산 천왕봉 돌담 안의 조그만 판잣집에 있던 성모상을 이곳에 모시게 된 내력과 지금 산청군과 소유권 다툼을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몇 년 후 신문을 보니 군이 패소하여 천왕사에 모시기로 하였다고 하였으며, 경상남도 시도문화재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이 상은 푸르스름한 옥돌로 만들었고, 높이는 74㎝ 정도인데 조성 시기는 고려 초로 추정한다고 한다.
처음 보았을 때와 모신 자리와 방법은 같으나, 주변 산을 모두 깎아 내어 바위를 드러내게 하였고, 와가였던 천왕사 대웅전이 임시 건물로 변했고, 주차장에서 오르는 골짜기 주변에는 다른 절들이 들어서고, 또 절을 짓는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성모상은 부처님과 모양이 다르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천왕모를 그대로 보지 않고, 무속이나 신선 사상에 결부시키려고 하니 답답하다, 모신 곳 문 앞에 주지가 게시한 안내판이 마음에 든다.
<천왕 성모님 전에서는 참선, 염불, 기도만 하십시오, 천왕 성모님 전에서는 오방기, 방울부채, 북, 꽹과리, 술, 고기 제물을 절대 금지, 기도 중 잡담, 취침, 음식물 섭취 등을 금지합니다. 다른 신도님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天王聖母姿依然(천왕성모자의연)
靑玉紫光千歲傳(청옥자광천세전)
世異所移靈不變(세이소이영불변)
正心信者正心遷(정심신자정심천)
천왕성모 자태가 의연하니
청옥의 푸른 빛 영원히 전하네.
세상과 장소가 변했으나 신령은 남아
바른 마음 믿으면 바른 마음 옮기리.
오늘 예정 답사 일정에 修禪寺(수선사)가 있었는데, 도로가 좁아 입구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돌렸기에, 대신 山天齋(산천재)를 들리기로 하였다, 南冥(남명) 선생의 講學所(강학소)로 말년을 보내신 곳이다. 桑田碧海(상전벽해)라고 하였던가, 예전 왔을 때는 德川江(덕천강)가에 있던 산천재가. 주변에 새로운 도시가 조성되어 있어, 겨우 찾으니 돌무더기 덕천강은 새롭게 정비되어 도로와 녹지로 멀리하였고, 새로 탄생한 듯 낯설다.
도로변에 커가란 <賜 祭文>(사 제문)을 새긴 비와 <산천재 국가 문화재 305호 > 안내판이 큼직하게 있다. 담 밖의 멋들어진 소나무를 감상하고 문을 들어서니,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아담하고 고색이 창연했던 산천재가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나타났다. 전서로 쓴 산천재 제액은 여전하고, 柱聯(주련)은 바뀌었는데, 예전에 있던 주련 즉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천석들이 큰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꼬,
하는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씀)는 작은 판에 써서 문지방 우편에 걸어두고, 새로 주련을 걸었는데 시 제목을 보니 남명선생이 처음 이곳에 들어와 지은 德山卜居(덕산복거)라는 시이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猶餘(은하십리끽유여)
봄 산 어느 곳에 방초 없으리
하늘 가까이 있는 천왕봉을 사랑해서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겠는가
은하수 같은 십 리의 물 먹고 남으리
이 두수의 시는 선생이 이곳에서 지은 것이라 한다.
마당 가운데 커다랗고 잎이 무성한 매화나무가 있다. 돌 표지석이 있어 읽어보니 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서 심은 매화라고 하여 이름하여 南冥梅(남명매)라 하고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朱點小梅下(주점소매하)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高聲讀帝堯(고성독제요) 큰 소리로 요전을 읽어본다.
窓明星斗近(창명성두근) 북두성이 낮아지니 날이 밝아오고
江闊水雲遙(강활수운요) 강 넓으니 아련하게 물안개 인다.
산천재에서 남명선생을 생각하며.
天王峯屹偉容然(천왕봉흘위용연)
淸水德川今有衍(청수덕천금유연)
音讀柱聯深想像(음독주련심상상)
先生氣槪可知全(건생기개가지전)
천왕봉 높이 솟아 위용은 여전하고
덕천강 맑은 물은 지금도 넘쳐흐른다.
주련을 소리를 내 읽으며 상상해 보니
선생의 기개를 모두 알 것 같도다.
도로를 사이하고 남명기념관이 있다. 정문 편액이 惺惺門(성성문)이라 했다. 들어서니 넓은 광장 서편에 남명 造像(조상)과 벼슬을 사직하는 상소문을 새긴 큰 돌비석들이 있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니 神明舍圖(신명사도)가 있는데 內明者敬(내명자경), 外斷者義(외단자의)의 남명사상을 응집하여 도식화한 것이다. 안에 들어가서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는 佩劍(패검)과 惺惺子(성성자) 사진을 보고. 또 남명의 제자를 알아보았는데, 鄭仁弘(정인홍), 郭再祐(곽재우), 崔永慶(최영경), 金宇顒(김우옹), 趙宗道(조종도) 등이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이들은 남명의 정신인 敬(경)과 義(의)를 이어 南冥學派(남명학파)를 이루고, 강력한 實踐指向的(실천지향적)인 학풍을 후세에 잇게 했다고 한다.
聖賢何事奉尊崇(성현하사봉존숭)
日月照天山野同(일월조천산야동)
蒙昧人間何處去(몽매인간하처거)
擧光先導萬年功(거광선도만년공)
성현을 어찌하여 높이 모시는가?
하늘에서 비치는 일월과 산야도 같네.
어리석은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빛을 들고 선도하는 만년의 공이 있다네.
17시에 버스에 올라 광주로 향하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답사를 떠나서, 돌아와서는 추억과 그리움을 정리하면서 다음 답사를 기다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