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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룡산 갑사에서 동학사까지 순례 및 산행
충남 공주 계룡산 갑사(鷄龍山 甲寺)를 찾아서 ①
언제부턴가 계룡산 산행을 하려는 마음을 갖고는 있었으나 오랫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하 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룡산이 명산이면서도 계룡산을 한 번도 못 가본 이가 의 외로 많아서 한 번 추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또한 조치원에 계신 자주감자님과 도 여러 번 계룡산 산행을 함께하시자고 권하고 묵계를 받은 바도 있어 실천에 옮기자 했 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사찰순례도 하고 산행도 하면 일거양득일 것 같아 갑사에 서 동학사에 이르는 탐방로를 설정했습니다.
처음에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던 이상보 선생의 '갑사 가는 길'이란 수필이 떠올라 그 길을 따라 가보려 했으나 교통편이 문제가 되어 정반대 방향으로 역추적하게 되었습니다.
공지를 올리자 여덟 분이 확답을 주셨고 또 몇 분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동참을 못하게 되 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정파님, 묘법님, 보화님과 지인 매은님과 미소님, 비니 초님과 백우 등 여덟 명이 확답을 주셨고, 정효님이 상황을 봐서 가능하면 직접 갑사로 오 시겠다고 하여 가능성을 비쳤고, 묘법님이 지인을 동참시키고자 노력했다가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조치원의 자주감자님과 유성의 도솔님이 직접 갑사로 오신다고 했으니 이번 순 례길은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 특히 이번 순례산행에 매은님과 미소님이 동참하신다고 하셔서 무척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미리 하행은 공주까지는 강남고속터날에서 6시 45분 차를 예매(8,600원)하고 상행은 대전 역에서 6시 46분 발을 예매(10, 500원)하여 사전조치는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형님 아우님하며 반가운 만남을 가진 자주감자님과 묘법님.
6시 30분까지 강남터미날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모두 제시간 안으로 오셔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6시 45분에 출발한 버스는 공주까지 단숨에 달려 8시 30분경 터미날에 도 착했습니다. 도착해서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한 번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 기에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내버스(시민교통)는 8시 50분에 있기에 느긋했는데 터 미날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꽤 먼 곳에 위치해 있어 부득이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택시비가 4,200원 나오더군요. 그러데 터미날에서 갑사까지 택시로 가게 되면 싸게 가면 17,000원인데 보통 2만원을 받는 것 같습니다. 8시 50분에 시민교통(1,200원)을 타고 갑 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9시 30분이었습니다.
갑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내리니 자주감자님이 보살님을 대동하시고 우리를 맞이하셔서 반 가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묘법님과는 지기를 만난 듯이 정다워 보였습니다. ^^ 하늘은 맑고 깨끗하고 우리의 마음은 즐겁고 경쾌했습니다.
갑사 가는 길
매표소(2,000원)에서 일주문을 지나 갑사가는 길은 느티나무 등 활엽수가 숲을 이루어 '오 리숲길'이라고 한다 합니다. 십리는 못 되고 오리가 된다 하나 오리도 좀 못되는 듯합니다.
자주감자님 내외
처음 함께하신 매은님과 미소님
보화님과 김경란님
사진예술가 폼이 묻어나는 묘법님
백우와 비니초
계룡산 갑사 일주문
갑사는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麻谷寺)의 말사입니다.
계룡산 연천봉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앞이 환하게 트인 곳에 자리한 갑사는 양쪽으로 계곡 을 끼고 있는 낮은 능선의 끝부분에 서향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예로부터 춘마곡추갑사 (春麻谷秋甲寺)라 하여 갑사 단풍이 유명한데 아직 단풍이 들기 전이니... ^^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 고려시대엔 묘향산(妙香山) 상악(上 嶽), 지리산(智異山) 하악(下嶽)과 더불어 삼악(三嶽) 중 중악(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입 니다.
갑사 홈페이지의 글을 옮겨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 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 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 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창건(創 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 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 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천불전(天佛殿)과 진광명전(眞光明殿) 대광명전(大光 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 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국중대찰(國中大刹)
로 크게 번창되었다.』
경내로 들어가는 모습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無染大師)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 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사승(寺僧) 인호(印浩)ㆍ경순(敬淳)ㆍ성안(性安)ㆍ병윤(竝胤) 등이 대웅 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사승(寺僧) 사정(思淨)ㆍ신휘(愼徽)ㆍ일행 (一行)ㆍ정화(正華)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 (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 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으며 1866년(고종3년) 개금 불상한 시주추(施主秋)가 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 불교 도량으로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용추교 다리를 지나 경내로
『범우고(梵宇攷) 등에 따르면 영규대사(靈圭大師)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西山大 師) 휴정(休靜)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 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 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으며 청주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한 1000명의 승군으로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찾았다.
한편 금산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 군대가 고바야가와의 왜군에게 패전하여 왜군이 창궐하 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군하여 곧바로 금산의 외곽 에 진영을 갖추고 있을 때 왜병이 쳐들어와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 와 의병들이 전의를 잃고는 의병장 조헌이 이미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물러섬만 같지 못하다고 패퇴하자는 간청이 있었으나 오히려 영규대사는 그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게 되면 죽는것이거늘 어찌 홀로 살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는 흐트 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 토록 싸웠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이로써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병과 싸움으로써 왜군의 호남침공을 끝내 저지하였다. 임진 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그의 충의를 포상하여 복국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를 추증 하고 당시의 뜻을 기리도록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 다. (공주군 진두면 유산에 묘가 있다)』 박희선 시비(朴喜宣 詩碑)
사천왕문에 들어가기 전 공터에 박희선 시비가 세워져 있어 길손을 반깁니다. 여기서 잠 시 쉬며 차 한 잔씩 나누고 옥수수를 먹기로 했습니다. 우선 시를 옮겨 봅니다.
지비(紙碑)
대적광전(大寂光殿) 오래 기두렸던 달이나 떠오를 양이면, 체온이 스민 돌 하나를 남기고 멀리 떠나는 그윽한 새벽이거라.
시비 뒤면에는 건립기가 음각되어 있는데 참고로 옮겨 봅니다.
건 립 기
『야석 박희선(1923-1998)은 충남 강경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 불교시인이며 독립운동 가이다. 평생을 통하여 시집 7권 시선집 3권 소설집 2권 불교서적 14권 등 총 26권의 저 서를 남겼다. 특히 그는 빛과 소망의 세계를 동그라미의 화합구조속에 시의 원리를 구명 하였으며 한 얼과 구원의 순결한 영원성을 추구하였다.
한국문단에 끼친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며 200여명 전국 문인 및 시민들의 정재를 모 으고 전병용 공주시장의 도움으로 한 때 그의 시의 고향이었던 계룡산 갑사 어귀에 이 시 비를 세운다.』
2000년 8월 27일 시비건립위원장 김 용 재 글 김대현 글씨 정태희 돌새김 한대규 후원 시문학사 문예한국사 호서문학회
옥수수를 먹으며 즐기는 즐거운 한 때
이 옥수수는 덕명님이 강원도 찰옥수수를 지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인데 보화님과 비니초에 게 나누어 준 것을 보화님이 이번 순례에 가지고 온다는 것을 비니초가 수고스럽지만 쪄 가지고 오면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으니 좋지 않느냐 하여 보화님이 맛있게 쪄 왔습니다.
계룡산도 식후경입니다.
이렇게 담소하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9시 45분 이곳을 떠나고, 9시 50분 천왕문에 도착했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 지물(持物)은 칼.
동방지국천왕은 건달바(乾闥婆), 부단나(富單那)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동주(東洲)를 수호 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부처님과 제석천이 지국천으로 하여금 동방을 수호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지국천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그런 연유 로 지국천(持國天)이라 합니다.
건달바(乾闥婆)는 식향(食香)ㆍ심향(尋香)ㆍ향음(香陰)이라 번역합니다. 제석천(帝釋天)의 아악(雅樂)을 관장하는 신을 말하며 향만을 먹는다고 합니다. 많은 왕과 이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불법수호(佛法守護)의 팔부중(八部衆)의 하나입니다.
부단나(富單那)는 취(臭)ㆍ취예(臭穢)로 번역하며 냄새나는 귀신인데, 건달바와 지국천의 권속으로 동방을 수호하는 귀신입니다.
지국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로는 대표적으로 비파입니다. 그러나 일정하지는 않습니 다. 지물(持物)에 대한 경전적 근거는 <다라니집경(多羅尼集經)>에는 왼손에 팔을 내려 칼을 잡고, 오른손을 구부려 보주(寶珠)를 쥔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一字佛頂輪經)>에 는 왼손에 창, 오른손을 올려드는 형상이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如來琉 璃光七佛本願功德經)>에는 비파를 들고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
남방증장천왕은 구반다(鳩槃茶), 폐려다(薜荔多)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남주(南洲)를 수호 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증장천은 자타의 선근(善根)을 증진(增進)한다 해서 붙여진 이 름입니다.
구반다(鳩槃茶)는 옹형귀(甕形鬼)ㆍ음낭(陰囊)ㆍ형란(形卵)ㆍ면사동과귀(面似冬瓜鬼)ㆍ염 미귀(厭眉鬼)라 번역하며, 사람의 정기를 빨아 먹는 귀신으로 머리는 말, 몸은 사람 모습이 며 남방증장천왕의 부하로 태장계 만다라 외금강부원에 있다고 합니다.
폐려다(薜荔多)는 범어 프레타로 비리다(卑利多)ㆍ피례다(辟荔多)ㆍ미례다(彌荔多)라 하기 도 합니다. 폐려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부리는 아귀입니다. 아귀(餓鬼)ㆍ조부귀(祖父鬼) 라 번역합니다.
증장천왕의 지물로는 대표적으로 칼을 잡습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은 펴서 칼을 잡고 오른손에는 창을 잡는다 하고,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는 창을 잡고 오른손은 허리에 댄다 하였고,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칼을 잡는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왼손에 영의주를 들고 오른손에 용을 잡고 있습니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
서방광목천왕은 용(龍), 비사사(毘舍闍) 등 두 신을 지배하며, 서주(西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니다. 광목천은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떠서 위엄을 나타내어 나쁜 것들을 물리 치므로 광목(廣目) 또는 악목(惡目)이라 하며, 여러 가지 웅변으로써 나쁜 이야기를 굴복시 키므로 잡어(雜語)라고도 합니다.
용(龍 Nāga)은 비와 바람을 일으키는 신입니다. 나가(那伽)라고 음역됩니다. 인도 신화에 서 뱀을 신격화한 동물로서 인면사미(人面蛇尾)의 신입니다. 용은 큰 바다에 살면서 구름 을 불러 비를 내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경전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이 실 려 있습니다.
비사사(毘舍闍)는 범어 Piśāca로 전광귀(顚狂鬼)ㆍ식혈육귀(食血肉鬼)로 번역합니다. 일명 사람의 정기를 뺏는다하여 담정귀(噉精鬼)라 합니다. 용신(龍神)과 함께 광목천을 따라 서 방을 수호하는 귀신인데 혹은 동방 지국천이 영솔한다고도 합니다.
광목천왕의 지물(持物)은 대표적인 것이 한 손에 용(龍)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여의주 (如意珠)를 들고 있는 형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왼손에 보탑을 들고 오른 손에는 일산?을 들고 있네요.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
북방다문천왕은 야차(夜叉), 나찰(羅刹) 등 두 신을 지배하며 북주(北洲)를 수호하며 다른 주도 겸합 니다. 다문천은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옹호하면서 설법을 듣는 다고 합니다. 야차(夜叉)는 약차(藥叉), 열차(悅叉)라고 음역하며, 능담귀(能噉鬼), 첩질귀(捷疾鬼), 경첩(輕捷), 용 건(勇健), 포악(暴惡) 등으로 한역됩니다. 인도신화시대에는 북방산악지대에 사는 구베라신(財寶 神)의 권속으로서 사람을 잡아먹는 포악한 신이었지만, 불교에 들어와서는 팔부중의 하나가 되어 나찰 등과 함께 북방 비사문천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불법 수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나, 북방의 수호 또는 재보(財寶)를 지키는 역할도 갖고 있습니다. 나찰(羅刹)은 범어로 락샤사(Raksasa)라고 하여 원래는 고대 인도의 신이었는데 불교에 들어온 이후 에는 악귀(惡鬼)의 총칭이 되었습니다. 가외(可畏)ㆍ속질괴(速疾鬼)ㆍ호자(護者)라고 번역합니다. 나찰 중에는 지옥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이들을 아방나찰(阿傍羅刹)이라고 합 니다. 그들은 바다 가운데의 섬에 나라를 이루고 산다고 합니다. 남성신은 나찰사(羅刹娑) 혹은 나 차사(羅叉娑)라고 음사하며, 여성신은 나찰사(羅刹斯) 또는 나차사(羅叉私)라고도 음사합니다. 남 자는 추하고 여자는 아름답게 생겼으며, 언제든지 사람의 혈육(血肉)을 먹는다고 합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데 아주 빠르며 무섭고 포악한 귀신이라고 합니다. 불교에 수용되어 호법외호신이 된 이후에는 야차와 함게 호법천왕인 사천왕 가운데 비사문천의 권속이 들어가 활동합니다. 소머리 에 사람 손을 가진 우두인수(牛頭人手)에 소발굽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힘이 세다고 합니다. 또는 말, 사슴, 양, 토끼 모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다문천왕의 대표적인 지물로는 대표적인 것이 불탑(佛塔)입니다. <다라니집경>에는 왼손에 창(혹 은 방)을 잡아 땅을 짚고, 왼손에 불탑을 든다고 하며, 일자불정륜경>에는 왼손에 창, 오른손에 금 강저(金剛杵)를 든다고 하고,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에는 왼손에 봉(棒), 오른손에 불탑을 든 다고 되어 있어 일정치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파를 들고 있습니다. 갑사 사천왕의 지물은 정통적인 지물과는 다름을 느꼈습 니다.
축대 위에 세워진 계룡갑사의 강당
사천왕문을 지나면 처음 만나는 건물입니다.
축대와 어울어진 모습
계룡갑사 강당사액
왼편에 글씨를 확대해서 보니 정해국추절 도사 홍재희서(丁亥菊秋節 度使 洪在羲書)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해년은 고종 24년(1887)년 이라 하니 1887년 음력 9월에 충청감사 홍 재희가 쓴 글입니다. 음력 9월을 국추(菊秋)라 합니다.
범종루 모습입니다.
☞ 다음은 갑사 2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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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법우님들과 함께한 순례및 산행 사진을 보니 더욱 새롭습니다 _()_
이번 순례 및 산행에 청량한 미소를 듬뿍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_()_
백우님의 설명을 곁들여 사진을 보니 금상첨화 입니다. 백우님 수고 많으셨구요, 법우님들 좋은 나날 되십시오. _()_
매은님과 함께한 이번 순례길 경쾌하고거웠습니다. 우리는 도반이며 선우입니다. _()_
언제 찍힌줄도 모르는 사진이 있내요. 특히 자주 감자 형님과 함께한 사진 넘 좋으내요. 감사 합니다....나무묘법연화경()()()
언제 찍힌 줄도 모르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형님 아우하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_()_
여기를 신혼초에다녀왔으니까 꾀오레전이지요 잘보았읍니다
갑사는 이제 세 번째인 것 같은데 이번에도 안 가본 곳이 있네요. _()_
자주감자님을 처음 뵈었는데 인자하시고 좋은분이였습니다.차를 가지고 오셔서 동학사로 내려가면 다시 갑사로 돌아와야
하기때문에 폭포까지만 오시고 하산하시더군요.자주 뵙기 바람니다_()_
함깨 넘기를 바랬지만 자주감자님이 바쁜 일정 때문에 차를 가지고 오셨네요. 그 차가 이번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네요. 그 이야기는 제4부에... _()_
매은님과 미소님이 부부이신가 봅니다. 자주감자님, 반갑습니다. 준비가 철저합니다. _()_
예, 다정다감하신적 부부이십니다. 미소님은 화초도 많이 가꾸시고 을 무척 좋아하시는 화초박사이십니다. 자주감자님을 오랫만에 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일을 추진하려면 사전 정보가 많이 필요합니다. _()_
계룡산 무척 가고 싶었던 곳인데 드디어 올랐네요.
예전에 두 번의 기회를 다 놓쳤었지요.날 정상도 가봐야지요 _()_
백우님 우리가 오른곳이 정상이 아니옵니까
정상은 아닙니다. 비정상(非頂上)입니다. ^^
에공 우리 아우 경란이 땀시 근심을 끼쳐드려 죄송 하였습니다
그래도 계롱산은 통화가 되니 다행이었습니다. 통화가 되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하산할 뻔 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자주감자님이 계셨으니 또한 다행이었습니다. 모두가 감사한 일입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