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 Daniels 의 탐험-생산지에서는 마시지도 못하는 위스키
내가 애틀랜타 총영사이던 93년10월이라고 생각된다. 미국 동남부에 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으로서 Tennesse 주의 서쪽 끝에 위치한 Memphis 시에서 연설기회도 있고, 또한 교포행사도 있어, 멤피스 시를 방문하였다. 이 기회에 중부에 위치한 “린치버그 카운티”에 일부러 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군(County)은 본래 Dry County(술을 팔지도 먹지도 못하는 주)로서 세계적인 버본 위스키인 Jack Daniels 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영사관이 위치한 Georgia 주의 Atlanta에서 관할하던 Tennesse 주의 Memphis 를 갔다 왔으니 가고 오는 길에 위치하였다고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으면 이상하겠지만, 세계적인 버본 위스키를 주조하면서도 막상 이 군에서는 어떠한 술도 “판다든지 맛을 본다든지 마시지도 못하는” 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즉, 술을 못 먹게 하는 예규가 오래 전부터 채택되어 온 것이다. 자기들이 생산한 술을 포함하여 어떠한 술로 안 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많이 살아, 이들의 희망에 따랐으나, 점차 이것이 군 조례 그리고 주 법으로 채택되고 완전한 지방 자치에 의거 고착화되어 버렸다.
나는 Jack Daniels 양조장엘 갔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지켜지고 있다는 데에 대하여 또 한번 놀랬다. 이곳에서는 일체의 주류 판매행위나 음주행위를 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 같다면 다를지도 모르는데, 여북하면 생산된 Jack Daniels 의 시음 실이나 전시시설도 없었다. 무슨 공장인지를 써 놓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칠 뻔 하였다. 그만큼 엄격하였다. 다른 지역 같다면 무역을 핑계 대고 시음 실이나 시험시설 정도는 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오래 전에 밀조하여 오던 양조(Moonshine)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미국에서는 서부개척 당시나 남북전쟁 당시 이런 밀주들이 득세한 것으로 알려 졌으나, 꼭 그래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기독교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무릎을 친 이유도 있었다. 이 주는 그만큼 Bible Belt (미국 남부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 중의 하나로서 지금도 기독교 전통이 근본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George Bush Jr. 대통령 같은 사람도 Bible Belt 의 하나인Texas 출신으로서 기독교 원리주의자의 하나로서 유명하였다.
술은 사고 싶어도 살수가 없었고 맛을 보려고 하여도 맛 볼 곳이 없었다. 어찌 하랴? 나라가 다르고 관습이 다르며 또한 역사가 다르면 아무리 좋다고 하여도 안되었다. 그리고 나는 한가지 비슷한 우리 속담을 생각해 봤다. 이 상황에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유사하였다.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다고 하면 그만인 것을!” “하긴 우리나라에는 고주망태들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 아닌가?”
그런데 이 군에 P 라는 우리 교민이 한 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분은 대학까지 서울에서 나왔지만 미국에 하도 오래 전(70년)에 건너 와서 미국 사람이 다 되었고, 우리 교민 사회에도 잘 나타나지 않는 분이었다. 그저 사람 좋고 순박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한번에 두 가지 일은 못하는 분이었다.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어느 분마냥, 걸으면서 껌은 못 씹어 서있으면서 껌을 씹든지, 걷던지 둘 중에 한가지 밖에 못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순박하고 거짓말을 못해 이 동네에서는 대단히 환영을 받는 인사였다.
본래 농사꾼도 아니었던 이 분이 Tennesse 주의 화강암으로 된, 돌맹이 천지의 땅을 부지런히 일구고 씨앗을 뿌린 덕분에 꽤나 농토를 넓히었다. 그러나 이 분은 당시 73세인데도 결혼을 안 하여 부인이라든지 손자가 없었다. 그래서 요즈음 손자 자랑을 하느라고 서울에서 친구들간에 1-2만원씩 내고 이야기하는 관습도 몰랐다. 이야기가 좀 삼천포로 빠졌읍니다만, 나의 경우, 아직도 직장에 다닌다고 손자 자랑이 5분에 2만원인데 내가 손자 자랑을 하려고만 하면 전직장관이란 친구가 2만원을 먼저 내고, 자랑을 못하게 하는 몰상식한 사람도 서울에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만났을 때에도 이 분에게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분에게는 이런 것들이 절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만큼 순진하였다.
들리는 소문엔 미국에 유학 와서 대학에 다닐 때에는 미국인 애인도 있었다고 하는데 결혼을 안 한 것인지 재혼을 안 한 것인지 아무도 물어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가을이 오면 풍성한 수학을 하고, 행복하기만 한 이 할아버지는 수학한 옥수수를 창고에 쌓아 둔다든지 돈을 만들지 않고, Bible Belt 에 사는 충실한 기독교도로서 자루에 넣어 가난한 사람 집 앞에다 가만히 놓곤 하였다. 평생 동안 이렇게 착한 일만 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만 갔다. 이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가족이 없어 쓸쓸함을 느꼈다. 먼 곳으로 떠나자니 남겨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함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는 이 “P 라는 한국출신이 80세가 된다면 진정한 기독교도로 살았다는 표창을 하고 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할아버지의 생일날을 할아버지의 날로 선포하여 주겠다”고 의견을 모으고, 이를 통보하여 주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이 분을 찾아 왔다.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이를 완강히 반대하였다.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표창을 합니까? 안 됩니다. 저보다 훌륭하신 일들을 많이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회라는 것은 규율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한 사람 혼자서 살아 왔고 운이 좋았지만, 이 동네에는 운이 없어 농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곡식을 나누어 먹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거든 혹시 그때까지도 나에게 뭔가를 해주시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해 주십시오. 우리 농부들의 땀을 식혀주고, 선선한 그늘을 제공하여 준 저 느티나무(Zelkova Tree) 밑에 나를 묻어 준다면 그 것으로 만족합니다. 저 나무 밑에서 저 나무에게 그 동안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컸던 한국에서는 요즈음 이런 풍습이 많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네 어구에는 몇 백 년 된 느티나무가 대부분 있게 마련이었습니다. 고향에 계신 조상들께 불효한 사람이 무슨 바램이 있겠습니까? 이억 만리에서 혼자 살다가 가버리게 놔 둘 수 밖에 더 있나요?”, 끝.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한. 독 미디어대학원대학 부총장/전 주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대사, 애틀랜타 총영사, 외무부 외교정책실장 역임/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졸/저서: 자네 출세했네 등>
PS; 재독 동포 여러분,
이미 예고해 드린대로 안녕히 계세요. 서울 오시면 연락하시어, 같이 소주한잔 기우리구요, 감사하였습니다.
권영민 배상
Bonn 에 있던 대사관저에서 내다본 Rhine 강 건너 Sieben Gebirge 쪽
첫댓글 항상 좋은 경험과 고견을 들려 주셨슴에 감사드립니다.
고마움에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