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를 소개하기 전에 저의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한옥으로 다시 읽은 집이야기' 입니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한옥이나 저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검색됩니다.
책내용은 집이 자연환경과 사회환경, 문화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한옥을 중심으로 다른 나라 예와 더불어 설명한 책입니다.
읽어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글이 길어 행간띄기 등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출력하여 보시는 것이 편할 듯 합니다.
2004년 01년 17일(눈)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제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있었다. 눈이 내려 온천지가 하얀 세상으로 바뀌었다. 눈이 내려 눈은 즐거웠으나 오늘 답사길이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과거와는 달리 차를 몰고 다니다보니 눈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은 것이다. 생활의 변화가 자신의 감각도 변화시킨다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다른 답사 때 보다 늦게 답사길에 올랐다. 눈 때문에 오늘의 답사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굳이 서두루지 않은 탓이다. 오늘의 답사예정은 대승사와 김용사 그리고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51호)을 보기로 하였지만 길이 여의치 않을 경우 미륵사지 주변을 볼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눈은 많이 내렸지만 춥지 않아 노면상태가 양호하여 내친김에 대승사로 향하였다. 대승사로 가는 도중에도 눈이 간간히 뿌리는 것이 오는 길이 걱정되었다.
시간 반을 달려 대승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대승사로 가는 산길을 오르니 다닐 만하여 보인다. 조금 오르니 비가 눈으로 바뀌어 내린다. 대승사 입구 일주문에 이르니 눈이 쌓여 쉽게 오를 수 없어 준비한 비상용 스프레이체인을 뿌리고 올라 대승사 앞 공터에 다다랐다. 대승사에 도착하니 눈발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어서 하산하여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추스르며 대웅전으로 향하였다.
대승사에는 몇 가지 문화재가 있으나 제일 유명한 것이 후불목각탱(後佛木刻幀)이다. 후불목각탱은 부처님 뒤에 걸리는 탱화를 그림대신에 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것이다. 후불목각탱은 7점 있다. 이곳 대승사와 예천의 용문사(보물 989호/1684년)에 1점,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보물 923호/1692년)과 보광전(보물 922호)에 각 1점, 서울 경국사 극락전(보물 748호)에 1점, 남원 실상사 약수암(보물 421호/1782년)에 1점 그리고 완주 미륵사에 1점이 있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은 대략 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있다.(조선후기 후불목각탱 연구/이종문/미술사학연구209호/1996.03)
* 후불목각태의 이름은 목각탱, 목각불탱, 목각탱화 등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종문씨의 견해에 따라 후불목각탱으로 부르기로 한다.
후불목각탱를 볼 때마다 늘 그 화려함에 놀란다. 일반 탱화가 색상으로 화려함을 보여준다면 는 황금색의 찬란함으로 대웅전을 밝고 화려하게 만든다. 후불목각탱를 보는 또 다른 맛은 정치한 조각솜씨를 감상하는 것이다. 목재는 석재나 금속과 달라 정밀한 조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다른 불상과는 달리 화려하면서도 정치한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이 대승사의 후불목각탱도 마찬가지이다.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삼배를 한 후 후불목각탱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목각탱의 크기는 높이가 256cm, 넓이가 280cm, 두께가 30cm이다. 후불목각탱의 구성은 가운데 있는 아미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12구씩 모두 24구의 보살 및 신중상이 배치되어있다. 아래로부터 여섯구씩 4단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배치는 보물 922호로 지정된 남장사 보광전의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남장사와 것과 시대의 전후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남장사의 보살 신중상의 자세가 다양하지 못하고 경직되어 있으나 이곳의 대승사의 보살상의 모습이 매우 다양하고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승사의 것이 시대가 앞선 것으로 본다. 또한 이 후불목각탱의 소유권에 관한 문서(1869년)의 내용에는 부석사의 향화가 끊어진지 40년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후불목각탱은 최소한 1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불 수 있을 것이다. (상기서 59쪽)
대승사의 후불탱화의 보살 및 신중상 옆에는 각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4단으로 배치된 보살상과 신중상중 맨 아랫단은 4천왕상과 문수, 보현보살이 배치되어있다. 배치의 순서는 아미타보살을 중심으로 좌측에 북다문천(비파), 동지국천(칼), 문수보살, 보현보살, 남증장천(용과 보주)서광목천의 순서로 배치되어있다. 사천왕상의 지물은 북다문천이 비파를 동지국천이 칼, 남증장천이 용과 보주, 서광목천이 당과 보주를 들고 있다.
이러한 지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천왕상의 지물과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천왕상의 지물은 동지국천이 비파, 서광목천이 용과 보주, 남증창천이 칼, 북다문천이 탑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노명신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불화에 표현되는 사천왕상의 지물과 조각으로 표현되는 사천왕상의 지물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노명신/미술사학연구202호/1994.06)
한참을 들어다보아도 2단 이상에 있는 보살과 신중상의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다. 맨 상단의 경우는 제석천 또는 시왕상으로 여겨지는데 그 정도만을 구분할 수 있었을 뿐이다. 후에 주지스님께 여쭈어보니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6분이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비구의 모습을 한 신중이 10대 제자일 것이다.
* 이종문의 논문에 기록된 신중상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 명칭은 보는 방향으로 좌측부터 )
跋難陀龍王, 月光天子, 須菩提尊者, 富累那尊者, 日光天子, 難陀龍王
帝釋天人, 目健蓮尊者. 地藏菩薩, 彌勒菩薩, 舍利佛尊者. 大梵天王
阿닌尊者, 除障碍菩薩, 大勢至菩薩, 觀音菩薩, 金剛藏菩薩, 迦葉尊者
西方廣目天王, 南方增長天王, 普賢菩薩, 文殊菩薩, 東方持國天王, 北方多聞天王,
이 기록으로 보면 8대보살, 6대제자. 4천왕, 6신중을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불탱화를 본 후 이곳에서 나온 복장문서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 있어 종무소를 찾아갔다.
이 후불탱화는 원래 부석사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소유권에 관한 문서가 복장유물로 발견되어 현재 보물 57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자료에 문서에 대한 내용이 없어 확실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종무소를 찾은 것이다.
* 앞서 소개한 이종문 논문에 복장문서의 내용을 밝히고 있다.
대승사에서 화재를 당하여 1862년 법당을 중수하였으나 불상을 새로이 조성하기가 힘들어서 당시 쇠퇴한 부석사의 부처님을 신법당으로 모시길 원하여 이러한 바램을 1869년 2월 경상우도 각 절에 보냈다. 결국 부석사가 250냥의 조사전 보수비를 받기로 하고 후불목각탱을 대승사에게 넘기기로 하였다고 한다.
종무소에서 스님을 찾으니 주지스님이 나오신다. 몇 가지 여쭐 것이 있다고 하니 우선 들어와 차나 한잔하고 가라고 하셨다. 염치불구(廉恥不具)하고 들어가 앉으니 격식에 따라 정성스레 차를 준비하여 따라 주셨다. 스님은 문서가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하신다. 현재 문서상태가 좋지 않아 보존처리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 동안 스님이 준비한 차는 뽕잎차였다. 뽕잎차는 처음 마셔보았다. 작설차의 맛와 비교한다면 작설차는 담백하고 뽕잎차는 약간 달작지근한 뒷맛이 있다. 차는 역시 분위기와 함께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깊게 느꼈다. 나도 차를 좋아하여 사무실에서 차를 즐겨 마시는데 이곳에서 마시는 차의 맛은 사무실에서 마시던 차와 격이 달랐다. 눈까지 펄펄 날리는 산사의 따뜻한 온돌에 앉아 고즈넉한 경치까지 함께 마시는 즐거움은 도심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여유였다. 바로 이런 것이 절에서 사는 맛이구나 하는 찬탄이 절로 나왔다.
더 앉아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눈길에 혹시 길이 막힐까 걱정되어 서둘러 일어섰다. 밖은 계속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아이들은 올 겨울 제대로 눈을 구경하지 못한 탓인지 눈 장난으로 마냥 즐겁기만 하다. 조그마한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느라 재촉하는 나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참을 재촉한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 이곳의 대승사에는 목각탱화 말고도 휴면암이라는 곳에 마애불과 사방불이 있다. 그러나 내리는 눈으로 보아 그곳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싶어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주변에 있는 김용사도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문경내화리삼층석탑(보물 51호) 향하였다.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은 대승사에서 나와 국도를 따라 단양 쪽으로 4-5k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좌측에 탑이 보인다. 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내화리 삼층석탑은 신라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단층기단의 탑이다. 기단의 갑석(덮개돌)의 윗면은 경사도 거의 없고 특별히 장식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구성되어있다. 또한 지붕돌의 지붕면이 넓고 경사가 급하면서 반전이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그러나 지붕면의 하부는 일직선으로 되어 있다. 지붕돌의 밑면이 일직선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제외한 이러한 특징들은 통일신라후반기에 만들어진 탑들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이 탑에서 주목하여 볼 부분은 지붕돌의 형태이다. 지붕돌과 탑신이 만나는 부분에서 지붕돌이 흘러내려오는 선을 자세히 보면 우동의 상부가 약간 배가 불러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곡선은 고려시대로 가면 더욱 두드러져 지붕돌 상부가 배가 부른 상태로 원호를 그리다가 급격하게 내려오고 다시 우동 끝에서 강한 반전을 이루게 된다.
신라계탑의 석탑의 변화를 보면 초기에 크기와 강인함(고선사지, 감은사지)을 보이다가 비례의 절대미를 보여주는 양식(석가탑, 마동사지석탑 등)으로 변화한다. 신라시대 말에 들어오면서 힘이 약해지고 장식성(진전사지, 의성 관덕동삼층석탑 등)이 강해지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형태의 다양성과 선들 간의 비례의 미보다는 선의 유연함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형식으로 변화된다. 그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신라계탑의 지붕돌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예를 찾지 못하였는데 이 내화리삼층석탑에서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
내화리 삼층석탑주변은 이 지역의 다른 곳에 비하여 그런 대로 넓은 지형을 보이고 있다.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고 강 너머에는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진 산이 있다. 주변이 모두 깊은 산이다. 아마도 이 절은 점촌에서 단양으로 가는 목을 지키고 나그네의 숙소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절은 통행로를 확보한다는 준군사 성격과 숙소의 역할을 한 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화리 삼층석탑을 보고 문경 쪽으로 가던 길 중간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호산춘(瑚山春)을 제조하는 곳이 있었다. 저녁에 마실 것과 선물할 것을 구매하였다. 술은 찹쌀에 솔잎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 것인데 도수가 18도나 되었다. 저녁에 와서 마셔보니 깔끔한 맛이 목으로 잘 넘어갔다. 소주 두병 정도의 양이 들어있는 술이 순식간 사라졌다. 마실 때는 좋았지만 마시고 나니 술이 올라왔다. 술맛이 좋아서 마시다 저도 모르게 취하여 쓰러지게 되는 술을 '앉은뱅이 술'이라고 불린다. 이 술도 '앉은뱅이 술'이라고 불릴 만 하다.
이번 답사에는 급하게 떠났기 때문에 음식점을 물색하지 못하였다. 점심은 아무 곳에서 때울 요량으로 문경 소방서(문경시가 되면서 문경시에 점촌이 편입되었다. 따라서 예전의 지명은 점촌이다.) 근처 대로변에 있는 음식점(갈밭식당: 경북 문경시 신흥동 403-1 054-555-9247)에 들어갔다. 소머리국밥과 청국장을 시키고 기다리고 있자니 먹으라고 전을 내왔는데 예전에는 먹어 본 적이 없는 배추전이었다.
집사람이 배추전을 보더니 얼마 전 인터넷에서 배추전이 맛있다는 글을 읽었는데 이곳에서 먹어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배추전을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었다. 담백하면서도 끝 맛이 달콤하였다. 아무러한 양념을 하지 않고 오직 배추와 밀가루만으로 하였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집사람도 맛을 보고는 집에서 자주 해먹어야겠다고 하였다. 집사람의 말로는 배추전을 할 때 줄기부분은 약간 두드려서 뻣뻣한 기운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 경북지방에서는 배추전이 제삿상에도 오른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경북지방에서는 배추전이 널리 알려진 음식인가 보다.
하여간 매우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간장이 또 맛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담갔다는 간장으로 만들어낸 양념장의 뒷맛이 그렇게 깨끗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음식을 먹고 보니 음식이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조금 후 나온 음식 또한 훌륭했다. 소머리국밥(5000원:원래는 소대가리국밥이다. 머리는 사람에게만 쓰는 것이고 기타의 동물은 대가리라고 하는 것이 맞다.)은 중상의 수준이지만 청국장(4000원)은 맛이 일품이었다. 또한 주변의 반찬도 하나같이 깔끔하고 깊은 맛이 있어 추천할 만하다.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분은 일흔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이다.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장은 따로 계시다고 하니 음식 맛은 아마도 할머니손맛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음식을 만드시는 할머니가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면 아마도 음식의 맛이 변할 것이다. 하여간 점심한끼를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점심을 먹은 후 눈이 계속 내려 숙소로 일찍 돌아가기로 하고 가는 길에 사자빈신사지석탑(보물 94호)보기로 하였다. 석탑이 있는 송계계곡으로 가는 길은 눈이 쌓여 있었다. 다행히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모래를 뿌려 그런 대로 통행이 가능하였다. 이 석탑은 몇 년 전에 답사하려하였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우리 나라에는 사사자 석탑이 3개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홍천의 괘석리사사사삼층석탑(보물 540호), 그리고 이곳에 있는 사사자 석탑이다. 화엄사와 홍천의 것은 솜씨에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비슷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탑은 다른 두 탑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탑에는 명문이 있다.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佛弟子高麗國中州月 岳獅子頻迅寺棟梁 奉爲 代代聖王恒居萬歲天下大 平法輪常傳此界他方 永消怨敵後愚生塔婆 卽知化藏迷生卽悟正 覺 敬造九層石塔一坐 永充供養 太平二年四月日謹記 (KOREA ART:탑파/박경식/예경/324쪽) 탑파라는 책에 표기된 띄어쓰기가 조금 이상한 것은 탑에 쓰여진 상태대로 그대로 옮겼기 때문이다. 정확한 변역은 다시 전문가에 문의하여보아야겠지만 대충 뜻을 보면 고려국 중주 월악에 있는 사자빈신사지를 봉안합니다. 왕이 대대로 만세를 누리고 천하가 태평하고 불법이 이 세상과 여러 지역에 퍼지고 우리의 적을 영원히 없애고 미혹한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9층탑을 1좌 만들어 영원히 봉양하겠다는 내용이라고 파악된다.
이 명문을 보면 1022년(현종13년)에 세워졌고 이 탑은 9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종 13년에는 거란족의 3차 침입(1019년) 후 강화가 이루어진지 3년도 되지 않은 시기이다. 따라서 여기서 永消怨敵(영소구적)의 의미는 거란족을 영구히 제거하자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상태를 보아도 원래 9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탑에서 2층에서 삼층사이가 급격히 변한다. 탑신부의 모양은 체감이 급하지 않아 아마도 월정사 구층석탑의 체감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탑을 보면 사자가 있는 부분이 2층 기단에 해당된다. 초층기단은 마치 불대좌를 보는 듯하다.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과 같은 구성으로 되어있다. 상부의 탑신이 부처님을 상징한다면 기단을 부처님이 앉아있을 불대좌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하대석에는 각면에는 세 개씩의 첨두형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부분이 기단의 갑석이다. 다른 사사자석탑처럼 네 마리 사자가 갑석을 이고 있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갑석 상부에는 복련의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갑석에 복련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석탑을 이고 있는 사자는 뚱뚱하다. 사자의 얼굴도 사나운 얼굴에서 장난기어린 얼굴로 변화하고 있다.
석탑 가운데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 보살상이 있다. 일부에서는 비로나자불이라고도 하지만 본존불에 두건을 쓴 예를 보지 못하였고 화엄사의 사사자석탑도 보살상이기 때문에 보살상이라는 것이라는 맞다고 생각한다. 보살상 역시 뚱뚱하다. 왜 이렇게 변화된 것일까. 혹시 당시의 경제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못사는 시절에는 뚱뚱한 사람을 선호한다. 당시도 전화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2004년 01년 17일(눈)
오늘도 날씨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눈이 오다보니 오늘 역시 서두르지 않았다. 11시 30분이 되서야 숙소를 나와 오늘 답사지인 제천으로 향하였다. 오늘 답사는 제천 금성면에 있는 제원정원태가옥(중요민속자료 148호)와 제원박도수가옥(중요민속자료 137호)이다.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 있는 문화재명칭 앞에 제원이라고 한 것은 금성면이 이전에는 제원군에 속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도농복합도시로 행정구역을 변경하면서 제원군이 제천시로 편입되었음에도 아직 이름을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천으로 가는 38번 국도는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렸다. 요사이는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고 직선화되면서 예전보다는 시간이 덜 걸린다는 좋은 점도 있으나 산을 감아 돌면서 산천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사라졌다. 특히 마을을 지나가는 부분에는 방음벽을 해놓아서 어느 곳을 지나고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예전처럼 경치를 즐긴다는 맛은 이제는 찾기 힘들다.
장호원에서 제천을 가는 38번국도도 예전에는 박달재라는 고개를 넘었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곡으로 유명해진 박달재를 이제는 넘을 필요가 없다. 고개 아래로 굴을 뚫어 놓아 순식간에 박달재를 지나가 버린다. 시간은 벌었을 지는 몰라도 고개를 넘는 정취는 잃어버린 것이다. 박달재 근처에 도착하니 문득 예전의 길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애들에게도 박달재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싶어 박달재를 오르기로 하였다. 박달재 길은 어제와 오늘 내린 눈이 쌓여 편하게 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 모래를 뿌려놓아 천천히 오른다면 그리 어려울 것을 없어 보였다. 설경을 즐긴다는 편한 마음으로 운전하니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고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달재 마루에 오르니 눈이 더욱 세차게 흩날린다. 애들은 오히려 눈이 많이 내려 즐거워한다. 몇 년 전 같으면 차로 가득할 박달재 휴게소에는 이제는 예전의 정취를 상기하려는 몇몇 사람들만이 한가하게 경치를 즐기고 있다. 아이들은 눈싸움을 하면서 눈을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눈 때문에 걱정이 앞선다. 내려갈 때를 대비하여 준비해간 스프레이체인을 뿌리고 애들을 기다렸다. 애들이 노는데 정신이 빠져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억지로 달래 길을 떠났다.
원남리에 도착하여 정원태가옥을 찾아보니 생각보다는 길에서 한참을 들어갔다. 정원태 가옥은 마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매우 좋았다. 처음 이 집을 지은 분은 좋은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위치를 찾아 집터를 잡은 것 같다. 집 전체를 최근에 개수한 것 같다. 담장도 새로 쌓았다. 제천시청 문화재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화재로 일부 소실되어 다시 지을 때 원 위치보다 약간 아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사랑채는 기와로 안채는 초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하였는데 현재는 모두가 초가로 되어있었다. 변화과정에 대하여 제천시청에 문의한 결과 시청에서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과 사진을 보면 문화재지정당시 사랑채도 이미 초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집주인의 증언에 의하면 맨 처음 집을 지을 때 돈이 없어 안채는 초가로 사랑채는 기와로 하였다고 한다. 자료를 볼 때 초기에는 안채는 초가 사랑채는 기와로 하였던 것이 화재로 집을 고쳐지으면서 모두 초가로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ㄴ자 안채는 ㄱ자 형태로 되어 있어 집의 배치가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 형태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이 6칸이나 되는 규모로서 사랑채의 규모로서도 그리 작지 않은 규모이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안방을 두었다. 안방은 두 칸으로 되어있는 윗 쪽에 골방을 한 칸 더 붙여 놓았다. 부엌은 두 칸인데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사랑채나 안채 모두 한 칸 반 구조로서 방 앞에 반칸의 툇마루를 설치하여 방간의 연결을 원활하게 하였다. 문화재청자료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랑채 앞에 괴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랑채 앞에서 괴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이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채로 들어가는 협문의 옆의 공터에는 정원태선생의 추모비가 있었다. 문화재명이 정원태가옥으로 등재되어있는 것을 보면 문화재 등재 당시에는 정원태선생이 생존하고 있었을 것이다. 추모비를 읽어보니 정원태선생의 집안은 송강 정철의 집안이었다. 정원태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하셨고 이 곳에서 중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또한 노년에는 정신문화원에서도 연구활동을 하셨다고 되어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의 명칭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의 명칭은 대부분 지정 당시 집을 소유한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지금 정원태가옥도 당시의 주인이었던 정원태씨의 이름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문화재명칭은 문화재의 성격을 모호하게 한다. 또한 정원태가옥처럼 정원태씨는 이미 타계하셨는데 명칭은 아직 정원태가옥이다. 이러한 문화재명칭은 정서가 배제된 행정편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관가정처럼 당호가 있다면 당호로 기타 다른 특징이 있다면 그 특징을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집의 성격을 파악하여 새로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정원태가옥의 답사를 마치고 금성에 있는 박도수가옥을 찾아보았다. 근처에서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여 찾아보았다. 주인 할머니에게 선물을 드리면서 집 구경을 하러 왔다고 하니 돌아보고 가라고 하신다. 안마당에 들어가니 방금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가 커다란 대야에 하나 가득하게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손두부를 보니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러한 저의 마음을 아셨는지 안주인께서 두부를 먹고 가라고 하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양념장과 같이 한 접시 가득 가져오며 사랑채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저의 식구가 들어간 사랑채에는 두 딸과 며느리, 손자며느리가 와있었습니다. 이날 두부를 만든다고 여자식구를 모두 불러모은 것이다. 손자며느리는 콩도 할머니가 직접 재배한 것이라고 하였다.
두부의 생긴 모습은 투박했지만 맛은 어느 두부보다 맛이 깊었다. 고소한 맛이 서울에서 사서먹던 두부와는 맛을 비교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강릉의 초당두부보다 맛이 좋은 것 같다. 또한 양념장 역시 두부에 어울릴 만한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이러한 장맛을 내지 못한다고 하면서 딸과 며느리들이 할머니의 음식솜씨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였다. 넉넉한 인심과 다복한 분위기에서 먹는 두부라서 그러한지 더욱 맛이 있었다.
두부를 먹고 집을 돌아보았다. 이 곳에서는 그간 오랜 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 보게 되었다. 이 집의 사랑채에는 외양간이 붙어있는데 이 외양간에서 소를 키우고 있었다. 그간 많은 집을 돌아보아도 실제로 외양간에서 소를 키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70년 중반 이후 소로 논밭을 매는 것이 점점 사라지면서 소는 육우로만 사육하게 되었다. 따라서 집안에서 소를 전혀 키우지는 않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외양간에 소를 키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쇠죽을 끓여 먹이지는 않고 여물만 먹이고 있었다.
이 집 안채의 상량에서 同治三年 甲子五月初三日寅時立柱 五日未時上樑이라는 묵서가 발견되어 1864년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집은 일자로 배치된 사랑채와 ㄱ자 형태의 안채 그리고 별채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의 형태는 트인 ㅁ자 형태이다. 안채는 측면이 한 칸의 몸채와 반칸의 퇴칸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랑채와 별채는 측면이 한칸이고 방이 있는 부분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었다. 사랑채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대청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이 양반집의 구조와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 집의 특징은 안채에 있다.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는 고방이 대청에 붙어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구조이다. 신영훈 선생께 이 점에 대하여 문의하여보니 고방이 안채에 있는 경우가 몇 있다고 하시면서 아마도 예전에 객주집이었던 것 같다고 하신다. 장사꾼들의 고급물건을 보관하기 위하여 안채에 고방을 들인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랑채의 구조도 전형적인 양반의 가옥과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양반가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보관할 귀한 물건이 많았기 때문에 안채 가운데 고방을 들였을 것이다.
다른 특징은 대들보에서 종도리를 받치는 구조이다. 대부분의 경우 대들보에서 종도리를 받치는 방법은 대공을 이용한다. 민간집에서는 판대공이 주류를 이루고 가끔 고급건물에서 화반대공을 쓰는 경우는 있어도 이처럼 단장혀 형태의 첨차에 소로를 얹어 도리를 받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첨차는 대들보 위에 얹혀진 두공 위에 설치되어있다. 이 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청에 신주를 모실 수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신주를 감실을 만들어 모신 예는 많이 있다. 조선은 건국된 이래로 집에 사당을 짓는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사당을 짓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되는 것이어서 사당을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은 대청에 신주를 모시는 것도 허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가끔 대청에 감실을 만들어 신주를 모시거나(곡성의 군지촌정사) 건넌방의 부분을 제실(아산의 성준경가옥)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주인은 이 집에서 50년 정도를 살았다고 한다. 안주인의 증언으로는 집은 원래 같은 집안 사람이 지었던 것으로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었는데 자신이 시집올 즈음에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하였다. 집의 기둥과 문에는 페인트가 칠해져있다. 이렇게 옛날 집에 페인트를 칠한 예는 종종 볼 수 있다.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고 나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페인트를 칠하는 것은 나무를 위하여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나무도 자연상태에서 숨을 쉬는 것이 좋다. 페인트를 칠하면 공기가 유통되지 않는 부분이 생겨 습기가 스며든 곳이 빨리 건조되지 않아 오히려 쉽게 썩을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첫댓글 후불 목각탱이 경북북부지방 남장사,용문사 대승사 등에 보이는 것은 왜 일까요? 아시면 글 좀 남겨 주십시요.
축하드립니다..좋은 책을 출간하셨군요....내일쯤 지역여행후기게시판으로 선생님 글을 옮기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좋은 책출간 응 경상북도에있는 대승사절 저의고향에있는데 .가볼만한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