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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외 10편
맹문재
책(冊)이란 한자를 찾다보니
부수로 경(冂)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읍(邑)이라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교(郊)라 했고
교의 바깥 지역을 야(野)라 했고
야의 바깥 지역을 림(林)이라 했고
림의 바깥 지역을 경(冂)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선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100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시계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100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시집
“증말 저런 데 살아봤으면 소원이 읎겠네. 나는 글쎄 지하에 산다구.”
출근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내게
머리카락을 연탄재같이 날리며 다가온 할머니
나는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할머니가 가리키는 손짓을 따라 아파트들을 바라보다가
투르게네프의 「거지」를 중얼거렸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구려.”
동냥을 청하는 거지에게 주려고
호주머니며 지갑을 뒤졌지만
손수건마저 없었을 때 느꼈던 투르게네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용서하세요, 할머니. 가진 것이 없네요.”
나는 말하지 못했다
가방 속에 시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책이 무거운 이유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책이 나무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시험을 위해 알았을 뿐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그 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무를 떠올리는 버릇이 생겼다
나무만을 너무 생각하느라
자살한 노동자의 유서에 스며 있는 슬픔이나
비전향자의 편지에 쌓인 세월을 잊을지 모른다고
때로는 겁났지만
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 그루의 나무를 기준으로 삼아
몸무게를 달고
생활계획표를 짜고
유망 직종을 찾아보았다
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
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
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박고 서 있는
그 나무 때문이다
사과를 내밀다
1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담장 가에 달려 있는 사과들이 불길처럼
나의 걸음을 붙잡았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행동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가난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 어기고 싶었다
손닿을 수 있는 사과나무의 키며
담장 안의 앙증한 꽃들도 유혹했다
2
콧노래를 부르며 골목을 나오는데
주인집 방문이 열리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사과를 허리 뒤로 감추었다
마루에 선 아가씨는 다 보았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3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다시 놀랐다
젖을 빠는 새끼를 내려다보는 어미 소 같은 눈길로
할머니는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나는 감추었던 사과를 내밀었다, 선물처럼
품
여름이 되었으니 아이들에게 수박을 먹여야 한다고
지갑을 털어 사든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극적인 결정도 아니다
아무리 심심해도 아이들이 여름에 썰매 타는 흉내를 내지 않는 것처럼
언 땅이 녹는 봄에 가을 운동회를 떠올리지 않는 것처럼
내 몸에 든 질서에 따랐을 뿐이다
질서의 잔등에 올라타서 바람을 쏘였을 뿐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깨달은 사실은
사장의 품이 어머니의 품과 다르게, 안길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평범한 질서에 무릎 꿇고
수박을 사든 것이다
때로는 화내고 야단쳤지만
투박한 손으로나마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아버지의 얼굴에도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삶에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때는 그 질서가 가시가 되어
패배감과 굴욕감에 젖어 있는 나를 찔러댔지만
이제는 품을 수 있다
빚에 쪼들린 작은아버지가 자살한 후부터 그랬을 것이다
별 새끼
지난 토요일에 형삼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보름 전엔 광락이 아버지 장사가 있었고……
아들의 밑반찬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는
별들의 부음을 전한다
부음을 들을 때마다 나는 부끄럽다
이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영어단어를 외우면서
별들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막걸리 한 사발도 못 낸 것이다
별들은
서울에서 포장마차를 하거나 하수구를 치거나
울산이나 포항의 공장에서 볼트를 조이거나 운전을 하거나
부산 같은 데에서 신발이나 청바지를 박는
새끼들을 남겼다
커피숍이나 밤업소에 나가는 새끼들도
버리지 못했다
새끼들은 별의 별이 되려고
이 사막 같은 세상을 담쟁이같이 타고 오르다가
무좀에 걸리고
때로는 허리를 다치고
도로교통법을 어기고 연체 이자에 쫓기는 것이다
입 안이 헐고
눈물을 눈물로 흘리며 술을 마시고
종합병원 응급실에도 다녀오는 것이다
나도 별들이 남긴 한 새끼라고 생각한다
약속
― 단양 신라 적성비 앞에서
적성현 사람인 야이차의 전공(戰功)을 기리면서
충성하면 똑같이 대우하겠다고 고구려 사람들에게
진흥왕은 약속했다
자신의 약속이 진실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말로 전하거나
종이에 쓰지 않고
돌에 새겼다
그 약속은 지켜졌을까?
약속은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이거나
개인적인 윤리가 아니기에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약속을 어긴 상대방에게
순교하듯 등을 돌렸다
조건으로부터 고립되는 패착을 둔 것이다
배신이 목적이 아닌 한
약속으로부터 전향할 수 있음을
천 년이 지난 길 끝에서 깨닫는다
김규동 시인
의지로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슬퍼했다
의지로 친구들과 해방가를 불렀다
의지로 하숙집 쌀밥 앞에서 울었다
의지로 함북 종성에서 서울 을지로까지 걸어왔다
의지로 개미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의지로 하늘을 바라보며 동생의 이름을 속삭였다
의지로 조곤조곤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의지로 아버지의 마음을 나무에 새겼다
의지로 아내의 결혼반지를 시집에 끼웠다
의지로 느릅나무에 긴 편지를 썼다
의지로 아이들 편에 서서 데모를 했다
의지로 인연을 끌어안았다
의지로 이데올로기를 끌어안았다
의지로 운명을 끌어안았다
의지로 시인의 길을 걸어갔다
전태일
나는 완전에 가까운 그의 결단을
지천명처럼 믿네
그에게는 하루 14시간의 작업이나
단수(斷水) 같은 월급이
문제가 아니었네
위장병이나
화장실조차 막는 금지도
문제가 아니었네
바늘로 졸음을 찌르며
배고파하는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준 일이
문제였네
내게 인정으로 치는 배수진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
최후까지 알려줄 사람
利子 클럽
이 도시에서 나를 유인하는 건
이자 클럽이다
클럽 회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땀 흘리지 않는다
기름 묻은 작업복 대신 품위 있는 정장 차림으로
팁도 거절한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경찰서며 보험사며 심지어 병원 영안실이
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들의 손짓을 싫어한다
그러나 나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클럽 회원증을 찢지 못한다
땀 흘리는 숲이 새들을 유인하는 광경을
헌 책에서나 바라볼 뿐이다
이 도시에서 나를 배척하는 건
이자 클럽이다
탱자나무
해일처럼 밤이 몰려와도 탱자나무는 어깨를 풀지 않는다
무서운 기색 없이 전선을 응시하고 풍자를 모르는 자세로 진지를 구축한다
황사도 태풍도 경적도 저 견고한 진지를 뚫지 못하리라
유언비어도 명령도 저 거대한 발밑에 깔리리라
탱자나무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한다
불패의 칼도 뽑았다
퇴각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온몸을 가시로 무장했다
【나의 시론】 할머니와 제철소를 품고 가는 길
나의 시를 지탱하는 힘은 할머니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를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기쁘거나 자랑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도, 힘들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에도 할머니를 떠올린다. 할머니가 세상을 뜬 지 열다섯 해나 되었지만 그리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어쩌면 할머니가 내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삶은 죄다 큰손자인 나를 위한 것이어서 당신은 먹을 것도 제대로 들지 않고 내게 주셨다. 나와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일뿐만 아니라 봄에는 나물을 뜯고 겨울에는 약초를 캐 한 짐 잔뜩 지고 산길을 내려오던 할머니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가 살아 계신 동안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 집이 마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데에 유리한 면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할머니가 인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않고 항상 불러들여 삶아 놓은 강냉이도 좋고 고구마도 좋고 막걸리 한 잔이라도 좋고 하다못해 곰방대 한 대라도 내셨다. 그래서인지 식사 때에는 우리 식구 외에 언제나 이웃 분들이 한둘 끼게 마련이었다. 밥맛이 없다고 오신 분, 집안이 적적하다고 오신 분, 며느리하고 말다툼을 해서 푸념을 하러 오신 분, 닷새마다 서는 장에 할머니와 함께 가려고 오신 분……. 그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내려온 방물장수며 곡물이나 약초를 사러 다니는 장사꾼들이며 옷가지나 생선을 팔러 다니는 장수들도 우리 집에 들렀다. 하룻밤을 묵고 가는 이들도 있었고 여러 날을 묵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산판이 벌어지면 산판꾼들도 우리집에서 밥을 먹었고, 객지에 나갔던 이웃 사람들도 고향에 오게 되면 우리집에 들렀다. 나는 인정을 가지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와 같은 자세로 시를 쓰려고 했다.
나의 시를 지탱하는 또 다른 힘은 제철소의 동료들이다. 포항―, 제철소가 있는 그곳의 이름을 길을 가다가 보거나 듣게 되면 나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춘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볼 때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살피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들을 때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곳은 나의 제2의 고향이다. 나는 그곳에서 삶의 절망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했고, 인간의 배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으며, 또한 어떠한 삶이 바른 것인가를 깨달았다.
나는 그곳에서 안전사고로 죽어간 동료들을 보았고, 그 죽음을 둘러싸고 통곡하는 유족들과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관리자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보았다. 또한 내 아버지와 같은 연배의 고참들이 아들뻘 되는 상사에게 그저 굽실거리고, 그러면서는 돌아서서 욕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승진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춤을 추러 다니고 카드를 치러 다니고 일확천금을 꿈꾸고 복권과 주식에 기대는 동료들을 보았다. (물론 성실한 동료들이 더 많았다.) 나는 처음에는 그들을 무시하고 마음속으로 비난했지만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점차 그와 같은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료들의 삶이 가슴 아팠고 서글펐지만 그들로부터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배웠고, 그들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불만과 절망을 희망이라는 푯대로 담아내고 싶었고 그들을 억압하고 조종하는 모순된 구조를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나는 시를 쓰면서 조금씩 나의 자존심을 찾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시를 써야 하는 이유를 서서히 깨달아 책과 신문을 보거나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적극성을 띨 수 있었고, 사소한 일에 짜증부리지 않았다.
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여름날 새벽,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시동생의 병문안을 아침저녁으로 정성스레 다니더니 감기에 걸린 듯 누우셨다고 어머니가 전했는데, 나는 할머니가 곧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운동회날 학부모 달리기대회에서 할머니는 꼭 1등을 하실 정도로 근력이 좋으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내가 서울에서 시를 쓰고 있는 동안 너무나 힘없이 이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도 차가 없었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갈 수 없는 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밤새 타자를 쳤다. 안개가 뿌옇게 낀 아침, 나는 원고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못한 채 신인상 마감이 임박한 한 잡지사에 부치고 고향에 내려갔다. 그리고 가을 어느 날, 나는 학업과 아르바이트 생활에 바쁘게 지내고 있었는데 잡지사로부터 당선 소식을 들었다. 잡지사측이 전화로 전한 말에 의하면 내가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었는데, 작품을 보내면서 주소며 연락처를 쓰지 않아 나를 오랫동안 찾았다고 했다. 나는 원고를 보내면서 설마 주소를 쓰지 않았을까 하고 의아하게 여겼지만, 어쩌면 정신없이 고향에 내려가느라고 안 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가끔 주위의 시인들로부터 시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다르게 여기고 있다. 내가 시를 썼기 때문에 이만큼이나마 나의 주체성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정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낮은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고, 시대의 흐름에도 관심 갖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습작기 때 못지않게 한 편의 시를 쓰는 데에 끊임없는 퇴고의 과정을 거치지만, 나를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고 즐거워한다. 나는 변증법을 쉽게 믿지 않지만 할머니와 제철소를 품고 꾸준히 가는 길이 그 지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출전 : 최동호, 『인터넷 시대의 시창작론 2』,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