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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0년 3월 1일 화요공부방 - 사리연구
□ 박순명 법우님 강연
강연의 목적
① 사리연구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절실히 안다,
② 내가 평소에 이 중요한 사리연구를 얼마나 공부하고 있었나를 점검해 본다.
③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사리연구 공부를 할 것인가~! 에 해답을 찾아서~
모든 응용에 걸리고 막히지 않기까지, 간절한 참 공부인으로 살자~!!
□ 김제원 교무님 설법
반갑습니다.
여러분, 부모가 자식을 볼 때 저 사람이 이것을 알고 하면 좋을텐데..하는 것을 안하면 속이 답답하겠지요?
이것을 했으면 쓰겠는데 그것을 잘하면 예쁘겠지요?
제가 생각할 때 사리연구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리연구가 중요합니다.
정신수양도 원리적으로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리연구를 제대로 판단해서 알 때,
정말 그 사람의 앞길은 복족족 혜족족하게 됩니다.
오늘 오신 분들 얼마나 도움이 되실런지 모르겠지마는, 일단은 "겁나게 잘와버렸다"하겠습니다.
# 사리연구의 중요성
원불교는 신앙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현실 속에서 수많은 일들과 이치 속에서 복락을 장만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수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도님들을 보면,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분들도 계시고, 생활이 펴시는 분들도 있고,
청년들도 보면, 가면 갈수록 진급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 원인을 보면, 반드시 삼학에 누수가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예를 들면, 사리연구는 잘 하는데 취사가 부족한 경우도 있고,
또 여러가지 봉사활동은 좋아하는데 사리연구가 부족하여 그것이 지속적인 힘을 받지 못하게 되어 외부경계가 닥치면 한칼에 무너져버리는 경우도 본다.
원불교를 다니면 사업도 펴고, 뭔가가 잘 되어나가야 하는데 왜 그 사람이 안되어 나가느냐. 다 사리연구와 연관이 있다.
# 사리연구의 핵심
① 첫째는 이사병행이다.
② 둘째는 자타력병진이다. - 자기 스스로 연구도 하지만, 때로는 스승님 경전 동지들 전문가를 통해서 연구력을 얻어야 하는데, 자기 생각에만 빠져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외곬수와 독단에 빠져버린다. 웅덩이가 고이면 썩어버린다. 그럴 때 혼자만 아파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③ 세번째는 동정일여의 정신이다. 사리연구를 해도, 과거의 공부는 주로 정시공부를 했다. 그래서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정기일기는 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일 당하기 전에는 충분히 연마하고, 일 당할 때는 그일 그일에 일심을 해야 하고, 일 끝날 때는 충분히 대조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가서 묻는 방식으로 계속 해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안된다.
사리연구를 하면,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되게 되어 있고, 교화하는 사람은 교화가 잘되게 되어있다. 사업에 대종사님 법을 들이대어 보라, 망할래야 망할 수 없고, 안될래야 안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 고집으로 하려고 하니 안 된다. 반드시 성공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안 되는 데도 이유가 있다. 그 핵심이 바로 사리연구이다~!!!
"다 잘살고 싶지요? 그 길을 오늘 가르쳐 준다는 말이여~!!!"
# 사와 리의 뜻
(1) 사(事) = 일 = 시비이해
시비 = 옳고 그름
이해 = 나에게 이득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2) 리(理)= 이치= 대소유무
# 시비이해(是非利害)
누구나 원하는 것은 복과 혜다.
* 이(利)= 낙, 복, 혜
* 해(害)=고통, 무명, 업
보통 사람들은 온통 관심이 이득이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복락을 위해서 산다.
그런데 왜 복락을 얻어 사는 사람은 많지 않고, 고통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가.
다른 사람들은 원인을 보지 않고 결과만을 향해서 치달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리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할 일만 하면 되지, 결과는 볼 것이 없다.
명예를 가지려 하면, 명예는 더 도망간다. 명예를 보지 않고, 오직 나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 명예는 어느새 내 앞에 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해를 보지 말고 오직 시비만을 보아라.
중생들은 오직 이해만 보고 산다.
옳은 것은 이해가 되는 결과요, 그른 것은 해독이 되는 것이 바로 인과의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른 것이어도 나의 이익만 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물론 얼른은 이득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손해가 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만 본다.
그 중 지성인이라 하는 사람은 시비(옳냐 그르냐)를 본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견리사의(見利思義)라 하였다. 이득을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공자님은 인의를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 이미 나와있는 이야기이지만, 대종사님은 명확하게, "세상 일이 많고 많지만 결국 일과 이치"라 하셨다.
그 일은 결국 시비이해로 이루어져 있다 하셨다. 우리가 이해보다 시비를 보면, 결과는 와버리게 된다.
누구나 이득을 원한다. 그런데 왜 이득을 얻지 못하는가. 옳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 이의 기준은 최후승리, 시의 기준은 시의성
이의 기준은 최후승리요. 시의 기준은 시의성이다. 시의성이란, 상황성이다. "그때 그 때 달라요"라는 말이 맞다.
에를 들어서 초상집에 가서 돈을 빌려주라 하면 뺨이나 안맞으면 다행일 것이다. 초상집에 가면 거기에 맞는 의복과 예절로써 해야지, 그렇지 않고 전혀 관계없이 행동하면 안되겠다. 공부방에서도 똑같다. 다들 공부하고 있는데 따로 이야기하고 있거나, 적절한 질문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시받아버리고 손실을 입게 된다.
그리하여 참 이득은 최후승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은혜가 되는 것, 덕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 시의성 7가지 - 정산종사님
시의 기준인 시의성을 정산종사님은 일곱가지로 설명해 주셨다.
(1) 공이냐 사이냐 -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득을 위해서 공과 사가 겹쳤을 때 사를 취한다. 그러나 공을 취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
(2) 다수이냐 소수이냐. -다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아니면 몇 사람만의 주장인가. 전체를 보아야 한다. 솔성요론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을 믿을 것이요" 왜냐하면, 그 열 사람을 우직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다.
(3) 대국적이냐 소국적이냐 - 국이 큰가 작은가 하는 것이다.
(4) 분수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 안분지족을 하는가 안 하는가이다. 자기 형편에 맞지도 않는데, 돈도 없으면서 빌려서 외국을 갔다오려는 사람은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다.
(5) 시대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 이것 때문에 보수와 진보가 싸우고 있다. 지금 시대는, 과거 몇백년에 변할 것을 일이년에 변하고 있다. 기업도 3년 안에 새 기술을 발명하지 않으면 바로 망해버리게 되어 있다. 시대성에 맞지 않으면 시가 아닌 비가 되어, 결과는 손해가 와 버린다는 것이다.
(6) 영구적이냐 일시적이냐 - 눈앞에 얼른 이득이냐 아니면 잠깐 손해인 것 같지만 멀리는 더 이득이냐.
* 선택의 중요성 어떤 선택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학교 신입생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대학을 선택하고 과를 선택할 때, 내가 이 대학의 학과를 가면, 진로가 어떻게 되고, 내 일생은 어떻게 되리라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못하고 학과를 선택하니. 나중에 다시 수능을 보네, 전과를 하네. 휴학을 하네, 제 2전공을 하네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냐.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는 충분한 사리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에 우리 청년들이 엠티를 어느 콘도로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빨리 가야 하니 일단 먼저 출발하고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
출발을 보류하고, 빨리 인터넷에 들어가서 도로 상황을 충분히 확인한 상태에서 함께 나누어주고 출발하는 것이 빠르다.
그런데 "일단 출발"하고 나서 전화로 "어디로 가야 하나"하고 물어보고, "여기도 아니네, 저기도 아니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인생이 그렇다. 목표없는 인생, 서원이 없이 막 살고 있다. 얼마나 사리연구가 부족한가.
남들이 결혼하니 결혼하고, 남들이 대학간다니 대학가고, 그렇게 선택을 생각없이 하고 있다.
(7) 중도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
과불급이 없는 것을 중도라 한다. 과는 넘치는 것, 불급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너무 이쪽 저쪽으로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적당하게, 양면을 다 보면서 살아야겠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진보적으로만 주장하는 것은 옳지만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중도를 취하지 못하면 대중의 이해와 합력을 얻지 못하여 아무리 옳은 것도 이미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을 잡지 못한다. 그래서 중도에 맞느냐 안 맞느냐를 통해서 옳냐 그르냐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교무님, 이런 것을 뭐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십니까"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은 더 사정없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도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판단이라 하는 것은, 한번 판단했으면 거기에다가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것이다. 요지부동으로 나가야지, 판단을 하는 둥 마는 둥, 바꿨다가 이랬다 저랬다 하면 모든 시간과 에너지가 다 다른 곳으로 새어버리지 않는가.
이 짧은 인생, 생각해 보라. 얼마나 짧은가. 먹는 시간, 자는 시간, 화나 있는 시간들을 다 빼면 막상 오롯하게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 과거 지도자의 덕목 = 신언서판 중 판단의 중요성
과거 지도자의 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였다.
신 - 몸이 잘생기고 좋은 것,
언 - 언어가 격식이 있고 그때 그때 필요한 말을 잘한다.
서 - 글을 잘 쓴다. 문장이 좋다.
판 - 그 다음 중요한 것이 판단이다.
배의 선장이 어디를 선택할 것이냐. 장수가 전진을 선택할 것이냐 후퇴를 선택할 것이냐.
회사의 오너가 어디를 선택할 것이냐.
어디에다 선택과 집중을 하여 나아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도자가 자기 중심적인 판단을 해 버리고, 대중의 의견을 무시하는 판단을 하고, 자타력 병진을 하지 않는다면 판단이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그 조직도 잘못되고, 자기도 잘못되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시비이해로..
결국 이 세상은 시비이해로 운전해 사는 것이다. 눈 떴다 하면 시비이해다. 그런데 과연 생각없이 살아야겠는가.
생각없이 살면 나중에 늙을수록 고통이 있다. 항상 그 사람에게는 고통이 있다.
# 이치 = 대소유무(大小有無)
(이것만 가리를 내어도 나는 몇날 며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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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
몸 |
성품 |
우주 |
선악 |
삼학 |
선법 | 부처 |
대 |
전체, 본체 |
몸 전체 |
일념미생전 |
우주전체 |
무선무악 |
수양 |
여래선 | 법신불 |
소 |
부분, 각각나눔 |
백해(팔, 발가락 등) |
생각, 마음 |
형형색색 |
능선능악 |
연구 |
조사선 | 보신불 |
유무 |
변화 |
생로병사 |
생주이멸 |
성주괴공 |
선익/악인 변화 |
취사 |
의리선 | 화신불 |
* 대(大)는 전체를 말하고, 이 안에 각각 나눔이 있는 것을 소(小)라 하며, 각각 나뉜 것이 춘하추동으로 변화하고,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화하고 만물은 생로병사로 변해버리는 것이 유무(有無)자리이다.
* 성품 : 일념미생전이 대 자리이다. "제원교무님이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이전자리를 대 자리라 한다. 그런데 "아, 제원교무님이구나"하고 각종 생각이 든다. 이것을 소 자리라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달라진다.
_어떤 것도 대소유무로 내가 다 말할 수 있다. 한번 말씀해 보시라.
대소유무만 알아도, 저 사람이 과연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아무리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도 때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여기에 원불교의 마음 공부가 들어간다. "아, 대소유무의 원리를 보면 누구나 원래 착함도 나쁨도 없구나. 그런데 경계 따라 나쁜 사람도 있고 경계 따라 착한 사람도 있구나. 나도 경계따라 악할 때도 있지 않느냐. 그런데 그것은 수행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하게 된다.
보통 사람은 대 자리를 모르고 소 자리만 보고 산다. 중생은 소 자리 중에서도 능선만 보거나, 능악만 보게 된다.
그러나 원불교를 만난 마음공부인은 유무자리를 알아서 "그 사람도, 나도 변할 수 있다. 돌고 도는 것이다. "하게 된다. 그 이면에는 성리에 근간한 불생불멸한 참 내가 있다. 도인은 대를 항상 여의지 않고 소와 유무를 활용해 쓰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대 속에는 소와 유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참 대라.
* 우리 삼학으로 보면, 대(大)가 수양이요, 소(小)는 연구요, 유무(有無)는 취사라.
* 선으로 보면 대(大)는 여래선이요, 소(小)는 조사선이요, 유무(有無)는 의리선이 된다.
* 법위등급으로 이야기해 보면,
대(大) 자리는 이 안에 다 들어있지만,
소(小) 자리에는 보통급부터 여래위까지 다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본인의 수행여부에 따라서, 때로는 강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열심히 신심 공심으로 공부해서 불지를 향해서 달려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근원적으로 보통급 특신급이냐 그렇지 않다. 근원적으로는 다 처처불상이다. 이것을 정화신불이라 하고, 다른 것을 편화신불이라 한다. 하나를 법신-보신- 화신이라 한다.
이 대소유무만 알아도, 이 세상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원불교를 만나서 대소유무도 모르고 "기도만 할랍니다"한 사람은, 기도만 해놓고 "기도발 안먹힌다"고 원불교 안나와버린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서 동정일여로 그일그일에 까닭있는 마음으로 사리연구를 해야 하는데, 기도만 해놓고 현실 속에서는 마음을 놓은 사람은 현실 속에서 일이 잘 안풀려버린다. 그래놓고 원불교 탓을 하고 안 나오니, 내가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공부위주 교화종, 교화위주 사업종이라 한다. 공부를 하면 교화가 되게 되어 있고, 교화를 하면 사업은 되게 되어있는 것이다.
# 대소유무 시비이해의 실례 1- 체벌이 옳은가 그른가
실례를 들어드리겠다.
내가 텔레비전을 보니 밤늦은 토론 프로그램에 "체벌 옳은가 그른가"하는 제목으로 양쪽 팀이 앉아서 체벌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는 "좀더 생각해 봅시다"하고 마치곤 한다. 그 때 내가 갔어야 하는데, 못갔다.
내가 설명해 주겠다.
(1) 시비이해
먼저 시와 비로, 체벌이 옳냐 그르냐. -여러분들은 먼저 배워서, 시비의 기준은 아까 7가지도 있지만 시의성이라 하였다. 그 사람이 나이가 어떤가. 받아들일 만 한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시와 비가 없다는 사실이다.
(2) 대소유무
영원한 것은 대소유무이다.
대소유무를 보면, 시비이해를 초월하게 된다. 보통 중생들은 이해를 보고, 이득을 바라면서 그른 일을 하면 나중에 손해가 돌아온다. 그런데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은 시비를 따져 옳은 일을 한다.
대소유무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선생님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의 그 마음이, 대소유무로 한 마음이라면 때려도 옳고 안 때려도 옳다.
전달이 되고, 거기에 은혜가 간다는 말이다.
체벌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는데 서로간에 믿는 마음이 있다면 옳은 것이다.
그 속에 하나인 이치를 보아버리면, 때로는 때려도 "나를 사랑해서 때리시는구나"하고 수긍이 되어 은혜가 되고,
때로는 때리지 않아도 "나를 믿어주시니 안 때리시는구나"하게 된다.
그런데 믿음의 관계가 아니니, 때리면 "왜 때리느냐"하고, 안 때리면 "나에게 관심이 없으시구나"하고 나오게 된다.
# 대소유무 시비이해의 실례 2 - 아내의 가계부를 봐야 하는가 보지 말아야 한는가
하나 예를 더 들어보이겠다.
그래서 대소유무와 시비이해의 가늠이 딱 잡아버려야 한다. 그러면 세상 일을 바라볼 때에 딱딱 가늠이 잡혀버린다.
내가 전농교당에 처음으로 발령을 받아 갔는데, 어떤 분이 강연대에 올라오셔서 "여러 부처님들, 마누라 부처님의 가계부를 보자고 하지 맙시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
여기서 시와 비가 나온다.
장부-가계부를 보는 것이 은혜이냐. 아니면 안보는 것이 은혜이냐. 자 손을 들어봅시다.
① 왜 보자고 하느냐. 궁금하니까. 그리고 내외간에 잘 알아야 하지 않느냐.
② 왜 보지 말자고 하느냐.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믿어주자는 의미에서다.
자, 어떤 것이 시냐.
"그때 그때 달라요" -시의성이다.
① 서로 신용의 관계일 때는 믿기 때문에 봐도 옳고, 안봐도 옳다.
서로 믿음의 관계일 때는 보자고 해도 선뜻 내어주고, 보지 말자 하여도 불만이 없다.
② 불신의 관계일 때는 보자 하면 "니가 나를 못믿어서 보자고 하는구나"하고, 안보자 하면 "관심이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시비를 아는 사람은 원불교의 초짜라 생각한다.
원불교를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 대소유무를 본다. 어때요, 멋있지 않습니까?
기준을 잡아도 기준이 없는 공 자리에 근간한 참 기준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소 자리와 유무자리까지 알아야 그 사람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이 된다.
성리-성품의 이치를 크고 온전하게 알아나갈 때, 그 사람이 원불교를 탄탄하게 아는 사람이 된다.
# 일상수행의 요법 안의 대소유무
일상수행의 요법 |
대 |
소 |
유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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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 |
1조 |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
소(小) |
2조 |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
유무(有無) |
3조 |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 따라 다 각 부분으로 있어진다. 그러나 그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지속되지 않고 "없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 원불교 공부가 쉬운 것 같으면서 어렵고, 어려운 것 같으면서 쉬운 공부이다. 얼마나 체계적인 공부이고 진리의 사진을 팍 찍은 공부인가. 대강대강 하면 안된다.
# 연구(硏究)
"여태 두 자 했습니다"
* 연구 = ① 연기지혜(硏其智慧) : 지혜를 연마하고 -갈고 닦는 것
② 구기본원(究其本原) : 본원을 궁구한다 -깊이 있게 파고든다.
모든 의심을 모으고 모아 돌려본다. 그것을 끝까지 파고든 것이 구(究)자이다.
여러분들이 부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 "질문 있는데요"하다가 "조금 이따가 질문해라"고 하면 "잊어버렸는디요" 한다.
모든 의심을 모으고 모아서 "이 뭐꼬"라 한다. "시심마"라 한다.
왜 이러한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것은 무엇인가?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알아야 한다.
신심만 있으면 사실 관계없다. 그런데 신심도 없으면서 연구도 안하니, 계속 겉도는 것이다.
# 사리연구의 목적
"이 세상은 대소유무의 이치로서 건설되고, 시비이해의 일로서 건설해 간다."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하신 말씀이 어디 있는가. 많은 책을 보려고 다들 난리이지만 내가 보면 안타깝다.
대종사님이 이 세상을 보니 이치는 대소유무로 탁 뽑아버리시고, 일은 시비이해로 탁 뽑아버리셨는데,
그것에 근간해서 일과 이치로 해 놓은 것이 경전이다. 경전을 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일과 이치가 다 나와있는데
그 경전은 보지 않고, 소설책을 보며, 무슨 박사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만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한가 말인가.
그러니 동정간 연구력 얻는 빠른 방법에 "다른 종교의 경전도 참고해라"하셨다.
그것은 참고하라는 말씀이지, 주는 대종사님이 밝혀주신 경전을 먼저 보면 공부에 길이 잡힌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주장과 학설과 유명한 사람의 논문을 보면, 결국 대소유무의 이치요, 사은 사요 삼학 팔조를 적용해서 얻어낸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든가 이 세상의 성공한 사람을 놓고 보면, 사은 사요 삼학 팔조가 들어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을 보면, "이 사람은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사은 사요 삼학 팔조 중에서 이러한 부분을 활용해서 성공을 했구나~!"하는 것을 그냥 알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데 대종사님 법은 공부하지 않고 어떤 책만 보고 그 일부분만 따라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 사리연구 = 문(聞) 사(思) 수(修)라 한다.
(1) 문(聞)= 견문 : 많이 보고 들으라.
오늘 사와 리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들었는데, 혼자 책보고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여러분들께 강의를 해 드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겠는가.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와서 단 몇십분 만에 다 배워버리지 않는가. 얼마나 좋은가. 견문이 이렇게 좋은 것이다.
책도 보라.
(2) 사(思) = 생각 : 그 일 그 일에 생각
서원 열정 신념 까닭이 있는 사람은 일이 보이게 되어있다. 주인인 사람, 집안의 어머니 아버지는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생각이 있어야 한다. 직원이 주인보다 못 보는 이유는, 주인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직원이 주인과 같은 사상과 생각으로 근무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가서나 환영받고 보호받을 것이다. 누가 예뻐하지 않겠는가.
(3) 수(修) = 실행
# 사리연구 = 전(前), 중(中), 후(後)가 모두 중요
(1) 전 - 미리연마/예습을 해야 한다.
(2) 중 - 그 때 그 때 알음알이
(3) 후 - 감정받는 공부 : 나중에 점검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다.
이것이 맞아들어가면, 그 사람은 착착 커나가게 되어있다. 그 일 그 일에 알아서 깨달아간다면 여기서 자타력 병진으로 커 나간다. 그런데 사리연구가 안 되는 사람은 사리연구가 안 되어 그 일 그 일을 지내며 상처입고, 자기의 못남을 확인하게 된다.
# 사리연구 : 정시공부법과 동시공부법
과거에는 정시공부를 통해서 동시에 잘 하도록 하는 것이 주였는데,
내가 만약 시험 준비를 위해 공부한다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그 때에 끝내야 하고,
내가 만약 새로운 것을 맡아서 한다면, 그 새로운 것을 상당히 공부해서 거기에서 실력을 얻어야 한다.
그 때 그 때 잘해야지, 그때는 대강대강하고, "나중에 잘할게요"하고 그 때 도움이 안되면 안되지 않겠는가. 언제 우리가 이 세상에 자격증을 얻는 학원을 다 다닐 것이며, 공부를 다 할 것이냐. 그때 그 때 공부하는 것이 동시공부다.
# 순간순간 깨어서 알음알이를 구하는 그 마음
우리가 결국 공부한다는 것은, 어디가서나 도움이 되고 필요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순간순간 깨어서 알음알이를 구하는 그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머리가 좋고 나쁘고에 관계가 없다. 신심있고 공심있고 서원이 있다면 다 되게 되어 있다.
만약 포장마차 아저씨가 "기어이 이 포장마차 성공하리라"는 분발심이 있다면, 어떻게 이 포장마차를 잘 이끌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어가고 연구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학력은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사람이 서울대 나온 사람보다 몇 배의 발명을 해내게 되어있는 것이다. 예전에 대우중공업 명장인 김규환 씨가 그렇게 하여 회사에도 도움이 되고 자기도 발전하였다.
이 사람은 동시 사리연구 공부를 끊임없이 한 것이다. 회사에도 남들보다 한시간 먼저 출근하고, 찬바닥에서 깔고 자면서 연구했더니 알아서 명예도 들어오고 돈도 들어온다. 신분의성을 들이댄 데다가 동시 연구를 들이대면 학벌이 무슨 소용이냐. 지금은 학벌 시대가 아니라 실력 시대요, 능력 시대이다.
사리연구의 동시 공부만 잘 해도, 미리연마가 잘 되어 그 일 지나고 나면 쑥쑥 커간다.
# 사리연구의 정기훈련법
아까 정기훈련법에서 사리연구 과목은 경전 강연 회화 의두 성리 정기일기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전 의두 성리는 수양적 연구과목이요,
강연 회화 정기일기는 취사적 연구과목이다.
아까도 이야기하였지만, 과거 시대에는 이치에만 밝으면 도인이지만, 지금은 이치를 보아다가 일 잘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연구 결과가 첫째는 "사리통달"이요, 둘째는 "중생제도"다.(사리연구만 잘해도 교화가 절로 된다) 세째는 "만사성공"이다. 여러분 그 일 그 일에 깨어있는 마음, 항상 연구하는 마음으로 하고 보면, 자기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알음알이를 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이 성공하게 되어있다.자기의 본래 갖추어진 지혜가 솟아나게 되어있다. 자기 맡은 일에 대단한 역량을 가져서 자기 스스로도 자기에게 놀라게 되어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못하느냐. 서원이 없고 신심과 공심이 없으면 에너지가 없다.
똑같이 사리연구를 해도, 사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어있으면 사리연구가 더 잘 된다. 감사한 마음을 품고 연구하고, 일을 맡고 하라.
내 능력으로 잘먹고 잘살아야겠다. 한 사람은 일이 안 되게 되어있다.
# 수양 연구 취사의 관계
내가 아무리 사리연구를 하려 해도, 정신수양을 통해서 참 마음의 안정을 얻지 않고는 안된다. 마음의 안정이 없이 어찌 생각이 깊이있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수양과 연구는 절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수양과 연구, 연구와 취사가 기가 막히게 맞물려 있는 것이 대종사님 법이다.
사리연구도
(1) 이치 - 비우는 공부 - 내연진리
(2) 일 - 쌓는 공부 -외학지식
안으로 진리를 깨닫고, 밖으로는 지식을 많이 갖추어야 하겠다.
이 둘에 능란해야 한다. 과거에는 데이터를 많이 저장한 사람이 먹고 살았다. 그러나 현대 시대에는 도학과 과학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편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 사리연구의 주의점
(1) 욕속심
(2) 사견에 빠진 것 - 누구에게 묻지 않고, 자기 혼자 "이것이겠거니"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축원문에도 "사견을 버리고 정견을 가지라"는 말이 나온다.
(3) 삼학의 편수 - 나는 수양 연구 취사 중 하나에만 치우친 것. 대종사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작업하는데 선을 좋아해서 벽장 속에서 선을 하다가 대종사님께 혼나고, 경전보다가 혼난 선진도 있었다.
수양 연구 취사가 맞돌아간다. - 일심, 의두, 취사가 있어야 그 안에서 대각이 있게 된다.
잘못 살아서 자기는 행복의 길로 간다고 하는 것이 고통의 길로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신심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가 경험해본 만큼 인정하고 실천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성자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속에서 은혜가 나오게 되어 있다. 자기가 아는 것만 수용하고 혼자 앉아있다 가버리면 안되겠다. 어차피 할 것, 최대한 하고 가야겠다.
시비이해를 몰라서 당하는 고통, 대소유무를 몰라서 당하는 고통도 있지만, 우연한 고는 "천지배은"에 나온다. 또 변의품에 보면, 부지불식간에 벼락맞아 죽은 사람은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였다. 모르니 우연이라 하지만, 알고는 우연이 아니다. 전생에 지은 것은 몰라서 우연이라 하고, 어제 지은 것은 아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자기가 짓지 않고는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대소유무를 쪼물딱 쪼물딱 해서 인과에 토가 떨어지지 않고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다.
# 인과를 받아들이는 단계
(1) 고수(苦受) - "아이고 죽겄네, 인과가 있다네"하고 쓰게 받는 것
(2) 감수(甘受) - 인과를 받아들이는 사람 "내가 전생에 무슨 빚을 졌길래 그런갑다.." 생산적은 아니고 방어적 방법이다.
(3) 종은(種恩) - 은혜를 심으라. 인과에 토를 뗀 것이다.
인과를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치고받고 하는 것이다. -악순환
그러나 인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악순환을 멈추는 것이요, 종은(種恩)하는 것은 선순환으로 돌이키는 것이라 하겠다.
□ 질문과 답변
Q. 김선익 : 천지배은의 결과에 "우연히 돌아오는 고나 자기가 지어서 받는 고"가 "천지 배은에서 받는 죄벌"이라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A. 교무님 : 주는 주체자가 어떤 사람에게 바로 받지 않고, 천지에게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람을 괴롭혔는데, 그 사람이 나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천지가 나에게 갚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Q. 윤효근 : 성리공부를 상시에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은?
A. 교무님 : 여태 공부한 것이 그것이다.. 성리공부를 하는 방법 중 정시공부는 정기훈련법이요, 상시공부는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이다. 교전 전체가 성리공부라 할 수 있겠다.
첫댓글 와.. 정말 대단해!! 입이 안다물어지는고마요^^ 강연도짱 정리도 짱!! 순명이 부러워 둑겠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