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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들레헴에 나신 예수
누가복음 1: 1-7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은 것과 같은 아주 엉뚱한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일찍 계획하시고 예언하셨던 일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김정은이가 장성택을 사형시켰다는 뉴스를 처음 듣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 앞에 순간적으로 저의 생각에 장성택의 죽음도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폭악한 김정은이를 통해서 장성택이를 죽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장성택이를 죽이므로 해서 다른 큰 일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당사자들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일을 이끌어 가십니다. 어쩌면 북한의 교회를 재건하실 른지 알수 없습니다. 아니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하실 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의 학대로 이스라엘의 무수한 어린 생명들이 나일강에 던져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장차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킬 영도자 모세를 출생하게 하셨고 바로의 공주의 손에 자라게 하셨고 40년을 왕궁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무서운 바로의 학대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알고 찾아오다가 별이 사라져서 헤롯 왕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헤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사내아이를 다 죽였습니다. 이러한 무참한 아이를 죽이므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마2:18). 그리고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에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는 말씀은 역사적 의미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우상 섬기는 이방인 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엄청난 큰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도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도 전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 때에’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시는 그 일을 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이사가 호적하라는 영을 내림으로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큰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도록 하셨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하신 그 해를 중심으로 주전과 주후로 역사의 중심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다윗을 동네인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입니다. 가끔 길을 가다가 갑자기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 길에서 낳았다고 해서 이름도 길상(도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전에는 KTX안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승객이 갑자기 순산을 하는데 승무원이 아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KTX 회사가 출산한 아이의 출산비용과 얼마간의 장학금을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아이를 낳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탄생도 어쩌다 베들레헴에 마굿간에 나시고 구유에 뉘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찍 예언하신 말씀대로 베들레헴에 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범하게 했던 뱀에게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고 범죄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3: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쳐서 이기시고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입니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사7:14). 일찍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과 이사야가 예언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일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을 하였습니다(눅1:27).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한 것 역시 하나님의 주관으로 된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와 요셉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약혼을 하였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5절에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려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혼은 결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잉태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가 잉태되었다는 것은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처녀가 임신을 하면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러한 관례에도 마리아가 잉태하여도 무사 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과 약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연히 되어졌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심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미가 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일찍 다윗이 양을 치며 자랐던 동네로서 요셉의 고향이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다윗의 동네”라고 했습니다(4).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은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방에 있는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스스로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던지 아니면 요셉과 의논해서 우리가 아기를 낳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순산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일찍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만삭된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조용히 마리아와 요셉만 일으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하게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광대하게 온 천하에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들을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본문 1절에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란 인류의 구세주가 나실 때가 임박한 때를 의미합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습니다. 이미 마리아가 임신한지 열 달이 되어 출산 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서 호적을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가이사가 천하에 호적하라고 영을 내린 것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전혀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기 주관으로 영을 내린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당시 로마 제국의 최초의 황제였습니다. 전쟁으로 무질서한 제국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호적을 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천하에 호적하라’고 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이 세계 최대 강대국이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로마는 지중해에 장화처럼 길쭉하게 생긴 반도에 불과하지만 로마 제국은 유럽 전체와 아프리카와 소아시아까지 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전 세계가 로마 제국에 속했다고 할 정도였기에 ‘천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과 족속들이 로마 제국에 속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하라고 영을 내렸으니 세계 전체가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흩으졌던 사람들이 황제의 영을 따라 모두 일어나 고향을 찾아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호적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고향으로 가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엄청난 이동이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엄청난 일을 하셨을 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가만히 마리아와 요셉을 인도하여 베들레헴을 찾도록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하에 모든 사람들을 다 일어나 고향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6절에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하여 해산할 날이 차서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해산할 날이 되었을 때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임산부들이 해산할 날이 차면 상당히 긴장된 때입니다. 그리고 걸음 한 발자국도 힘들 정도로 무거울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145km 정도의 먼 거리를 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힘든 몸으로 베들레헴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 때문이 아닙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 때문에 온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와 요셉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왔다면 복잡한 때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좀 일찍 와서 조용한 방에서 기도하면서 순산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임신한 몸이라 걸음도 무거웠든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여관마다 방이 다 찾습니다. 더 이상 방이 찾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마굿간에서 밤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7절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찾아도 여관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리아와 요셉이 늦게 왔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고 구유에 뉘울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일찍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신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5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심과 자라는 것을 이사야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다’고 했습니다.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입니다. 예수님이 왕궁에서나 웅장한 성전에서 나셨다면 가난한 자의 복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굿간 탄생은 가난한 자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가장 비천한 마굿간에 나시고 말구유에 뉘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 하셨습니까? 여관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베들레헴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뿐만 아니라 모든 고향 마을마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마굿간에 탄생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역시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알려주었습니다. 천사들이 전하여 준 말을 듣고 목자들이 찾아와서 경배를 했을 뿐입니다. 그 외 많은 사람들, 여러 족속들과 민족들은 예수님의 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고향을 찾아 즐길 뿐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나심을 위해 엄청난 큰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천하에 호적하라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을 받아 천하에 모든 민족들이 일어나 고향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용하게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시었습니다. 그리고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도록 하시면서 첫 번째 성탄의 밤을 축하하게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탄은 천하 모든 민족들의 축제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와 온 백성들은 성탄절을 중심으로 축제를 하며 즐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탄의 축하는 아주 조용히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목자들이였던 것처럼 오늘날의 진정한 성탄의 축하는 떠들썩한 세상이 아니라 조용한 교회에서 찬송을 불러 드리는 이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조용하게 탄생하셨더라면 로마 제국이 역사를 정리할 때 주전과 주후를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최대 강국인 로마 제국이 세계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로마 제국이 주전과 주후를 역사의 중심으로 만들게 된 것은 온 천하에 호적을 하므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만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일류의 역사의 중심이 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호적을 할 때 나이와 성별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해를 중심으로 출생이 몇 년도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 탄생하신 그해를 원년으로 해서 그 전에 출생한 사람은 주전(B.C) 몇 년도에 출생했다고 그리고 그해부터 출생한 사람은 주후(A.D) 몇 년으로 호적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때에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가이사 몇 년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을 역사의 중심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의 중심입니다. 오늘이 주후 2013년 12월 25일입니다. 역사적으로 년도를 말할 때도 주후로 말합니다. 예수님이 나신 년도를 중심으로 전과 후로 나눕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나신 날을 중심으로 세계 역사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에 나심은 가난한자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 가시면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 앞에 더욱 겸손하게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