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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악세상-유율 원문보기 글쓴이: 다알리아
- 오두의 역사산책 -
민요 <아리랑>의 유래와 '하리랑(何二娘)':
신라시조 아리영(娥利英)과 송대(宋代) 女 신선 '하리랑(何二娘)'
- 고래해신의 제물 알영(아리영) 소녀에서 에밀레, 하리랑, 심청, 바리공주 거쳐 아리랑으로 -
- 용왕의 일곱아들 중 막내인 처용 신화와 바리공주가 저승에서 낳은 일곱아들 신화의 일치성 -
우리 민요 <아리랑>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 중에 시선을 많이 끄는 아리랑의 유래는 아리영으로도 기록되어 있는 신라시조 박혁거세 부인 알영에서 기원했다는 193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에서 제기된 김지연의 알영설은 가장 설득력이 있다.
아리랑 유래의 가장 오래된 설의 하나인 이러한 알영설은 신라 천년 역사동안 신라 시조가 여신 또는 신선으로 여겨졌을 것을 생각하면 그 파급력이 오랜 역사 동안 이어져 왔을 개연성이 높다.
<삼국유사>에서 신라 시조 알영은 '아리영'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 아리영이 송나라에서 女 신선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히고자 한다. 신라 시조 '아리영(娥利英)'이 송나라에서는 女 신선 '하리랑(何二娘)'으로 불려진 것이다.
그런 신라시조 '아리영(娥利英)'이 '하리랑(何二娘)'의 '하리'에서 다시 나중에 '바리' 공주 신화로 남아졌다는 추가적인 사실도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아리영'과 '하리영'은 민요의 <아리랑>으로 불려지면서 다양한 버젼과 여러 지방의 곡들로 퍼져나갔을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신라시조 '아리영(娥利英)' 송나라의 '하리랑(何二娘)'으로 여자 신선으로 표현되었다면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며 또한 송나라 신선들 가운데 '하리랑(何二娘)'의 위치는 다른 신선들에 비하여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신라 시조 '아리영' 여신이 송나라에서 '하리랑' 여신선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이러한 필자의 가설이 증명이 되려면 두 가지 백그라운드가 설명이 되어야 한다.
그 하나는 신라의 여신 숭배가 송나라로 건너갈 수 있는 국제적인 문화교류가 가능했는다 하는 사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그러한 개연성을 보여주는 문헌적인 다른 종교적인 경우들이 언급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두번째는 박혁거세 부인인 알영 즉 '아리영(娥利英)'을 송나라에서는 왜 '二'자가 들어가는 '하리랑(何二娘)' 신선으로 표기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해결되어야 한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모두 풀어낼 수 있었다.
먼저 신라 시조 '아리영(娥利英)'이 여신(女神) 또는 女神仙 또는 仙女로 숭상되었을 수 있는 개연성은 1천년 신라역사와 그 시조신화 영향으로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시조신이 바다 건너에서도 숭상된 적이 있는가?
신라의 명신(明神)이 동해를 건너 일본에도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는 일본 승려가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충분히 증명이 된다. 그와 같이 신라신이 서해를 건너 당나라에 이어 송나라와의 교류에서도 신라의 종교적인 영향력은 송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 사절과 당나라 조정의 종교적인 대화는 이미 앞선 글들에서 밝힌대로 신라의 일광신(日光神)에 대해서 당나라 파견 신라사절과 대화한 내용이 있다.
신라의 박혁거세 또는 그 어머니를 제사하는데 대한 이야기는 당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 <화랑세기>에 언급되어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예원공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인(唐人) 유향이 신라인의 시조신에 대하여 묻자 신라 사신으로서 예원공(禮元公)은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은 '日光神'이 신라 시조라고 밝히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道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神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神이 시조냐고 묻자 "日光의 신이다"고 하였다. 유향이 묻기를 "日光과 金天씨가 같은가? 하였다. 대개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金天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인 것이다. 공이 반문하기를 "金天씨가 어떻게 神이 되겠는가?" 하니,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김대문著, 이종욱 역주 <화랑세기>, 소나무, 1999, 181-2쪽.
일광신은 시조신을 말하는 거으로 신라 시조 박혁거세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김동찬은 그의 논문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母系血統體制) 연구(硏究)>에서 당인(唐人)이 언급한 '日光'을 박혁거세로 보았다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신라의 종교적인 신이 당나라와 송나라에 미친 영향과 함께 신라 및 고려 사절과 송(宋)나라 사절들의 상호 문화교류 영향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필자는 <신화이야기 116> 고려시대의 박혁거세신사와 중국(宋)의 박혁거세신사 에서 신라의 종교문화가 중국에 끼친 배경을 논한 바 있다.
송나라에서 '고려신'은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처녀 잉태하여 낳은 어머니인 동신성모다. 동신성모는 신라시조 선도성모라는 사실을 문헌들은 설명하고 있다.
고려시대 김부식은 신라시조 선도성모 기원을 사대주의를 기반으로 중국 황제의 딸로 묘사했다. 여신을 남성 황제의 공주로 격하한 것은 수많은 여신 기록들에 나오는 공통점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2 경순왕편 사론(史論)에 선도성모를 옛날 중국 황제의 딸로 왜곡하여 설명하고 있는 송나라 관반학사 왕보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왕보는 송나라의 선도성모 여신상을 신라에서 건너온 여신이라고 김부식에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스스로 그곳 송나라 우신관에서 신라 시조 동신성모를 김부식이 보았다는 것은 "선도성모 = 중국황제 딸"이라는 주장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황제상을 신상으로 모시지 누가 그 딸을 신상으로 모시겠는가. 송나라에는 신라시조 여신상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부식의 기록 그 자체만으로도 신라시조 알영(아리영) 여신이 송나라에서도 신선이나 여신으로 받들어졌을 배경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
一堂設女仙像 伴學士王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12 경순왕편 史論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우리 조정에서 상서(尙書)
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는데, 신(臣) 부식(富軾)이
문한(文翰)의 임무를 띠고 보좌하여 따라갔다가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
한 집에 여선상(女仙像)을 모셔둔 것을 본 적이 있다. 관반학사(伴學士) 왕보가
말하기를 "이는 그대들 나라의 신(神)인데 공들은 그것을 아는가?”하고는
마침내 일러주었다.
"옛날에 황실의 딸이 남편 없이 임신하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바다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海東)의 첫 임금이 되었고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선도산(仙桃山)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의 상(像)이다.”
나는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의 동신성모(東神聖母) 제문(祭文)을
보았는데,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구절이 있었으므로
동신(東神)은 곧 선도산의 신성(神聖)임을 알았다.
위의 내용은 알영신화를 윤색한 것으로 보인다. "남편없이 임신"이라는 말은 <삼국유사>의 알영신화에서 "용이 나타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신화를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 황제의 딸"이라는 표현 또한 막연한 표현이다. 신화적인 '용왕'을 중국적인 표현으로 '황제'라 표현했을 것이다.
김부식이 송나라에서 본‘동신성모상’을 1123년 고려에 왔던 중국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 제 17권 東神祠)에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 개성에 모셔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년 ~ 1153년)이 1123년에 고려를 사절로 방문하여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송나라 문헌이다.
신라시조 선도성모 여신을 신라왕조 이후에도 송나라와 고려왕조 도읍에서도 그 사당이 있다는 것은 신라 시조 여신에 대한 1천년 숭배가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 고려의 문화 종교가 당나라와 송나라에 그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사회적인 배경은 선박 건조에서도 볼 수 있다. 송나라의 거대한 전투함정인 신주(神舟)가고려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송사(宋史)> 권487 고려전(高麗傳)에서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송나라 사절로 올 때 타고 왔던 바로 그 신주(神舟)이다. 오늘날 중국의 우주선 이름에도 들어간 배 이름이 고려의 작품이었다. 이는 필히 장보고 선단이 보여주는대로 신라 또는 그 이전부터 바다의 나라 우리 민족의 항해술과 선박 조선술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임이 틀림없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은 그 시대에 단순한 과학적인 기술의 결과문만이 아니다. 항해에는 풍랑을 이기는 종교 정신적인 믿음도 포함되어 해신에게 기원하는 신령한 힘을 기술과 함께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고려인들이 만든 신주(神舟)를 송나라에서 신주(神舟)라고 칭한 것은 고려신 즉 신라 시조 동신성모가 바다 항해에서 풍랑을 막아준다는 믿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동신성모(東神聖母)의 동신(東神)이란 동쪽의 신으로 바다의 풍랑에서는 절대적인 신라의 태양의 여신인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신라 고려가 동쪽에 있으니 동신(東神)이라고 했는데 비하여 일본은 신라의 태영의 여신을 신라가 동쪽이 아니니 동신(東神)이라고 하지 않고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고 했다. 일본의 아마테라스 태양의 여신이란 사실상 신라의 동신성모 즉 선도성모였다.
<송사(宋史)>에서 신라시조인 동신성모 사당이 있다는 것은 항해와 관련하여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인들이 만든 신주(神舟)를 송나라 함선으로 사용하고 그 이름을 '신주(神舟)'라고 칭한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송사(宋史)>는 원(元) 나라 때 탈탈(脫脫)이 편찬한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천년도 안된 중국사의 정보이다. 그 <송사(宋史)>에서 기록한 신주(神舟)를 타고 고려 사절로 온 서긍은 그의 <고려도경>에서 그 신주(神舟)가 고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 <고려도경>에서 고려 문물을 높이 평가한 배경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항해한 그의 배 자체가 '고려 문물'인 고려인들이 만든 신주(神舟)였다는 것에서부터 감탄과 감사의 책으로 씌어진 것이 <고려도경>인 것이다. 그것은 은근히 신라와 고려의 항해의 신인 동신성모 숭배의 내면의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원(元) 나라의 탈탈(脫脫)이 기록한 <송사(宋史)>에서 고려의 신주(神舟)에 대한 기록은 다분히 종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송 신종(神宗) 원풍원년(元豐元年, 1078년)에 처음으로 안도(安燾)와 좌간의대부(左諌議大夫) 진목(陳睦)을 고려에 보내 임시로 기거하게 하고 사람을 불러 초빙하여 명주(明州, 지금의 절강성 영파 인근)에 두 척의 큰 배(艦)를 만들도록 하였다. 하나는 ‘능허안제치원(凌虚安濟致遠神舟)’이며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神舟)’라 하였는데 모두 신주(神舟)라 명명하였다. 정해(定海)로부터 큰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고려에 도착하니 나라 사람들이 환호하며 마중을 나왔다.”
신주(神舟) 두 척에서 하나는 그 명칭이 '능허안제치원(凌虚安濟致遠神舟)'이라 한 것은 ‘허공을 뛰어넘어 편안하게 바다를 건너 먼 곳에 이르는 신의 배’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神舟)’라 하여 ‘바다를 신령스럽게 넘어 잘 건너는 신의 배’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 힘은 신라인들과 고려인들이 항해에서 숭배한 바다의 해신 동신성모이며 선도성모가 인도하는 신주(神舟)인 것이다.
여기에서 신주(神舟)를 두 척을 만든 것은 그 시대의 신라의 음양신선풍류의 암수 고래인 경예(鯨鯢) 해신 한 쌍을 의미하고자 하면서도 한편으로 풍랑을 잠재우는 태양의 여신과 풍랑을 일으키는 고래 해신의 하늘과 바다 양면의 해신을 뜻하고자 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항해에서 신라해신에게 기원할 때 명신(明神)과 명신(冥神) 두 해신에게 제사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태양의 여신과 바다의 고래의 해신인 두 다른 신이면서 항해에서 빠질 수 없는 신봉의 대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송나라의 신주(神舟) 한 쌍에서 '능허안제치원(凌虚安濟致遠神舟)'은 ‘허공을 뛰어넘어 편안하게 바다를 건너 먼 곳에 이르는 신의 배’라는 하늘의 허공 즉 태양신에 대한 의미에서 태양의 여신 고래를 의미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영비순제(靈飛順濟神舟)’는 ‘바다를 신령스럽게 넘어 잘 건너는 신의 배’라는 의미에서 바다의 신인 고래 해신을 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원(元) 나라 때 기록인 <송사(宋史)>에서 말하는 신주(神舟) 한 쌍은 그 이전
송나라의 서긍(徐兢)의 기록인 <고려도경) 권34 ‘해도’ 편에서 두 척이 건조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신이 듣건대 신종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유사(有司)에게 조서를 내려 거대한 함정 두 척을 건조시킨 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능허치원안제신주’이고 또 하나는 ‘영비순제신주’로서 그 규모가 심히 웅장하였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그 뒤에도 더 큰 신주(神舟) 한 쌍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을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이라 하고 나머지 하나는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라고 명명했다. 이 또한 태양의 여신과 고래의 해신의 양면의 두 신라신을 숭배한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고려인들에게 자랑하면서 쓰고 있는 이유는 그 신주가 신라 고려의 전통임을 보여주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 우람한 모습이 마치 산과 같으며 바다의 물결위에 떠서 움직이면 비단으로 된 돛과 익조(鷁鳥)를 새긴 뱃머리는 바다 이무기를 굴복시키고, 휘황한 황제의 위엄을 해외에 떨치니 고금에 으뜸이다. 고려인들이 조서를 맞이하던 날 나라를 기울여 발돋움을 하여 구경하고 환호 감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송나라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신주(神舟)를 만들었으면서도 왜 <송사(宋史)>의 고려전에만 기록하고 그들의 <송사(宋史)> 본기에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신주(神舟)가 고려인의 기술과 고려인들의 신의 힘을 가진 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주(神舟)의 내력을 청나라 때 기록에서도 다시 고려인이 만들었음을 명기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격치경원(格致鏡原)>을 편찬한 청나라 때 진원룡(陳元龍)은 그 책 권28 주거류(舟車類) 편에서 <패편(稗編)>이라는 책을 인용하여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안도(安燾)와 진목(陳睦)의 두 학사에게 명하여 고려로 하여금 명주에서 만곡선(萬斛船) 두 척을 건조하게 하라고 조서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송나라 신주(神舟)는 고려의 배이며 중국의 우주선 이름 썬저우(神舟)는 이러한 신라 고려인들의 기술과 그 정신적인 종교 신의 이름인 것이다.
다시 '아리랑'의 기원과 송나라 신선 주제로 돌아가 보자. 신라 시조 박혁거세 부인 '아리영'이 송대(宋代) 女 신선 '하리랑(何二娘)'으로 받아들인 그 신라 영향의 시대 배경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신라가 멸망하고 그 왕조의 박혁거세 시조를 기리는 영향은 나중에 문학적으로 <박씨전> 또는 <흥부전>에서 주인공 박씨로 간접 스토리화 되어 남아졌다는 사실을 필자는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신라시조는 박혁거세 못지 않게 그 부인 알영에 대한 신화 또한 신라 천년 역사 동안 그 시조모에 대한 영향력이 존재했다. 신라가 멸망한 그 이후에도 신라 시조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알영신화가 아리랑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 문화에서 기록문헌이 남아 있지 않은 미스터리들이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유형 또는 무형 문화재는 그 내면의 유래가 무속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1천년 불교와 유교 문화에서 무속에 연유한 문화들은 민간에서는 강력하게 영향을 가지고 있으나 그 기원은 찾아보기 힘든 것은 인위적으로 그 문헌들을 말살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동물토템시대의 뼈나 깃털 신앙은 신라시대에 강력하게 남아 있었으나 고려시대의 불교 강화로 동물토템 문화의 잔재들에 대한 강력한 배제로 인하여 뼈는 돌로 깃털은 헝겊 수술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필자의 <콘디안 문화> 시리즈 글에서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동물토템 신앙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이었다. 그 가운데 코리안의 고대 토속 종교사상에서 고래토템이 가장 강력한 문화를 남겼다는 것은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과 <1만년 고래나라> 시리즈 글에서 여러 다양한 분석을 통하여 증명했다.
불교적이지 않거나 유교적이지 않으면 신선도가적인 면이 제대로 기록이 되어야 하는데도 신라시대 신선풍류도마저 조선시대 음양풍수도에서 무속적인 면들은 대거 제거되었다. 그런 결과 삼국시대 및 통일 신라시대 문화들 가운데 고래토템 숭배와 연관한 유적 및 무형문화들은 그저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모든 문헌들은 사라지고 미스터리로 남아진 것이다.
우리 민요 <아리랑>의 '아리랑' 뜻은 유교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교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이 전하는 유래가 미스터리로 남아진 것이다. 그런 '아리랑'의 유래를 신라시조 박혁거세 부인 알영알영(閼英)에 대한 <삼국유사>의 다른 표현인 '아리영(娥利英)'이었다는 사실을 필자가 주장했다.
'아리랑'의 유래는 신라 멸망을 아쉬워하여 민간에서 알영부인을 기리는 '아리령(娥利英) 고개'의 '알영신모'에 대한 추모 노래였다는 필자의 주장은 여타의 아리랑 음운의 기원설 등에서 독특한 해석이라 자부한다. 이제 이 글을 통하여 그에 대한 새로운 문헌의 내용을 바탕하여 신라시조 '아리영(娥利英'은 송대(宋代) 女 신선 '하리랑(何二娘)'에서 그 음운이 보다 더 '아리랑'으로 여성적인 희생을 추모하는 노래로서 신선도에 이어져 있으며 나중에 바리공주의 무속에도 연결되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리랑 노래의 아리랑 고개는 한이 맺힌 종교적인 노래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아리랑의 어원설은 수백 가지가 될 정도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설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기도 한다.
<아리랑의 어원설>
번호 | 주 장 자 | 년 도 | 내 용 | 비 고 |
1 | 황 현 | 1900 | 啞魯聾(아로롱)설 | ≪매천야록≫에 기록된 설임 |
2 | 김지연 | 1930 | 閼英(알영)설 | 총독부 기관지≪조선≫에 제기 |
3 | 권상노 | 1941 | 啞而聾설 | 경복궁 중수시기에 생성되었다는 설 |
4 | 이병도 | 1960 | 樂浪(아라)설 | 동쪽으로의 민족이동설에 근거한 ‘자비령’설로 悲歌설 임 |
5 | 양주동 | 1962 | 아리(明)嶺설 | 전국각지의 고개지명 유사음에서 추정.고개‘령’의 ‘랑’ 음전설 |
6 | 원훈의 | 1977 | 아리다(疼痛)설 | 정선아라리의 유래 ‘동통설’9) |
7 | 임동권 | 1980 | 後斂(助興)설 | 의미 없는 조흥구일 뿐이라는 설로 민요 원론적인 설 임 |
8 | 김연갑 | 1988 | 뫼(山)아리(메아리)→아리 →아리랑,;
뫼나리→산유화, 뫼나리→메나리 |
민속학자 김강산 등이 제기한 설로 ‘소리’ 또는 ‘노래’를 어의로 한 주장 임 |
9 | 박민일 | 1988 | 啞剌唎(아라리)-阿賴耶(아라야)설 | 박사학위논문 ≪아리랑의문학적연구≫에서 제기한설 임 |
10 | 정호완 | 1991 | 아리다-쓰리다
(아리랑<알ㅎ>- 쓰리랑<슬ㅎ>)설 |
8·10의 설, 확장 임 |
11 | 정익섭 | 1971 | ‘얄리 얄리 얄라리‘설 | 고려 가요 청산별곡 등의 가요 후렴설 임 |
12 | 김덕장 | 我離娘(나는 아내를 여의었다)설 |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 때에 동원된 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과정에서 유래했다는 설 | |
13 | 일인학자 | 1920년대 |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하자)설 | ‘아미일영’이 ‘아리랑’으로 음전했다는 설 임 |
14 | 최재억 | 1960년대 | 卵郞(卵娘)설 | 한자어의 해석에 의한 설 |
15 | 김재수 | 1960년대 | 阿娘(아랑 전설)설 | 밀양아리랑의 근원설화 |
16 | 이능화 | 1930년대 | 상량문의 兒限偉(아랑위) 포랑동에서 유래했다는 이상운 설을 소개 | 경복궁 중수 때에 유포되었다는 설 임 |
17 | 이규태 | 1990년 대 | 아린(여진어 차용)설 | 음가에 대한 여진어와의 연결 |
18 | 서정범 | 1990년대 | 알(卵)아리요설 | 난생설화에 근거한 설 |
여기에서 신라 시조 아리영에서 아리랑이 유래했다는 사실이 신라가 멸망한 사실을 신라시조 알영부인을 노래했다는 그 배경 해석은 필자의 <신화이야기 162> '아리랑'의 유래는 신라 멸망을 아쉬워한 '아리령(娥利英) 고개' 에서 밝힌대로 필자가 처음으로 주장한 이론이다.
신라 시조 아리영에 대한 추모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 까지 내려와 국제사회에서도 우리 민족의 아이덴티티 노래가 되기까지 한 것은 그 '아리영 - 아리랑'이 민속적 종교 사상에 연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하게 전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종교라 함은 신선풍류도에 연결된 신라시대 여아의 신선 이야기에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선도에서 대표적인 신선은 여덟 신선으로 분류하는데 그 가운데 오직 하선고(何仙姑) 신선만이 여자 신선이라는 그 배경을 연구하면 아주 재미있는 '아리랑'의 기원이 밝혀진다.
여 신선인 하선고(何仙姑)를 중심으로 나머지 일곱은 남자 신선들의 일반적인 분류는 다음과 같다. 팔선 중에 남자 신선들인 일곱 신선들은 선임이라 할 종리권(鍾離權)을 필두로 병자들을 돌봐주는 이철괴(李鐵拐), 악공들을 지켜주는 한상자(韓湘子), 악극을 후원하는 조국구(曺國舅), 이발사들을 돕는 여동빈(呂洞賓), 노인들을 지켜주는 장국로(張國老), 약초를 캐는(또는 꽃꽃이 하는) 선인 남채하(藍采何)가 그들이다.
八仙是神话传说中的八位仙人。即铁拐李(李铁拐)、汉钟离(钟离汉)、张果老、何仙姑、蓝采和、吕洞宾、韩湘子、曹国舅八人。传说八仙分别代表着男、女、老、少、富、贵、贫、贱,由于八仙均为凡人得道,
팔선(八仙)은 신화에 나오는 여덟 선인(仙人)을 말하는데, 철괴리(铁拐李 또는 李铁拐)、권종리(汉钟离, 또는 종리권鍾離權)、장과로(张果老 또는 장국로 張國老)、하선고(何仙姑)、남채화(蓝采和 또는 남채하 藍采何)、여동빈(吕洞宾)、한상자(韩湘子)、조국구(曹国舅) 등 여덞 선인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 팔선들은 각각 男、女、老、少、富、贵、贫、贱을 각각 표현하는 것으로서 이들 보통 사람들이 도를 닦으면 누구나 공평히 신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은 엑스트라가 아니라 오히려 '일곱 신선들'을 거느리는 '백설공주'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신선의 역사는 신라의 화랑도에서 원화 및 선도성모에서 보듯이 여신선이 먼저였던 것은 바다의 고래여신이 새끼를 키우는 암고래에 더욱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양신선도라고 하여 음(여)이 먼저인 것이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은 신라 시조 알영부인으로부터 내려오는 고래토템문화에서 바다의 고래여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에서 알영(閼英)은 아리영(娥利英)으로도 표현되어 '아리랑'이 알영부인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학설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 알영이 고래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밝힌 사람은 필자가 최초이다. 여기에서 신선들의 기본인 팔선들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하선고(何仙姑)가 송나라 이전에는 '何二娘(하리랑)'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은 신라 시조 '하리랑 - 아리영' 여 신선이 송나라 신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신라의 동신성모가 송나라에 존재했다는 것은 이러한 신라의 하리랑(아리영) 여신선의 칭호도 송나라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선고(何仙姑)는 송나라 초기에는 《广异记》를 인용한《太平广记》에서“아리랑(何二娘)”이라고 표현했다.
何仙姑是八仙中惟一的女性,有关其身世说法不一。一说她是唐朝人。宋初《太平广记》引《广异记》称有“何二娘”者,是位以织鞋为业的农妇,后因嫌家居太闷,游于罗浮山,在山寺中住下,经常采集山果供众寺僧充斋。一次,远在四百里外的循州山寺僧来罗浮山寺.
하선고 신선은 팔선 중에 유일하게 여성이다. 그에 대한 세상의 여러 설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일설에 의하면 하선고 신선은 당나라 때 인물이라고 한다. 송나라 초기의 기록인 《广异记》를 인용한《太平广记》에서“아리랑(何二娘)”이라고 칭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가장 미스터리한 노래이다. 그 가사는 분명 하늘의 별을 노래하지만, 고래가 넘실대는 파도를 넘으면서 고래에게 바쳐진 알영부인을 노래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런데 알영은 바다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서 다시 살아나온 여아로 <삼국유사> 박혁거세 신화에서 "龍現死. 而剖其腹得之(용이 나타나 죽어 그 뱃속을 갈라 나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린 알영은 에밀레처럼 바다에 희생물로 던저져 고래가 넘실대는 물마루를 탈 때마다 파도의 물마루 고개를 넘어 가는 죽음의 순간에서 고래가 바닷가에 나와 죽어 그 뱃속에서 살아나온 것을 말한다.
팔선들 중에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에 대하여 그 자료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쾅쵸우(广州市) 지역의 연구원 진택홍(陈泽泓)의 연구에 의하면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에 대한 자료가 다른 팔선들보다 월등이 많다(在八仙中,数何仙姑的籍贯出处最多)는 것이다.
하선고(何仙姑) 전설의 역사는 천년을 넘어 그 형성 시기가 당나라 중기 때로 보고 있다. 그것은 신라시대를 의미한다. 《广州志》의 기록에 따르면 당대(唐代) 대력연간(大历年间),하선고 사당(仙姑祠)이 존재했다는 것이다。1200년전 하씨(何氏) 여신선 전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며 그 여신선의 사당에서 제사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하선고 여신선은 어떻게 당나라 시기에 팔선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는 신선으로 받들어졌을까?
당나라때 선고사(何仙姑) 사당은 약 2.2만평팡미터가 되고 명나라 초기에는 6.4만 평방미터로 확대되어 그 역사가 끊어지지 않아 그 규모다 부단히 확대된 것이다.
하선고(何仙姑) 전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북송(北宋) 때부터였다. 그 당시 민간에서는 팔선이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북송 초기의 기록인 《太平广记》에 따르면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은 꽝뚱 지역에서 하이랑(何二娘)의 고사로 기록되어 있다.
而关于何仙姑传说的记载,最早见于北宋。当时,民间还没有出现八仙,成书于北宋初年的《太平广记》,记载了一个广东何二娘的故事。
그런데 왜 하선고(何仙姑)로 개명했을까? 남송 때의 문헌인 《舆地纪胜》 에는 “何氏女”와 “何仙” 조목이 있는데 같은 인물로 나온다. 그러나 '何仙姑'라는 칭호는 없다. 명나라 때에 와서 맹사영(孟士颖) 편찬《何仙姑井亭记》에서 하씨 성을 가진 선고가 마을의 하씨의 장녀이고 당나라 초기(681~482年)에 출생했다(仙姑姓何,邑人何泰女也,生唐开耀间(681~482年)”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필시 그 이전에 하이랑(何二娘) 여신이 하선고(何仙姑) 전설에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오랫동안 제사를 하는 신(民间久祀之神)으로 받들어져 온 것이다.
하이랑(何二娘)으로부터 하선(何仙)、선고(仙姑)를 거쳐 다시 하선고(何仙姑)로 전이과정을 밟았다(从何二娘到何氏女、何仙、仙姑,再到何仙姑).
중국에서는 꽝뚱 지역에 있는 증성(增城) 현에서 제사를 드리는 여신으로 시작하여 청대(清代)에 들어와 그 지역 사적기(史籍记)에 기재되어 민간에서 보호신으로 받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필시 바다를 건너온 여신 수호신 숭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여신일 수 있다는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이 본래 당나라 시기 하이랑(何二娘) 여신선으로서 신라 시조 '아리영(알영)'과 유사한 음운으로서 신라로부터 당나라로 바다 건너 간 여신숭배라는 이유의 또 하나는 신라 시조 알영부인의 신화가 어린 여아로서 "바닷가에 나타나 죽은 고래(용) 뱃속에서 살아나온 여신"으로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바닷길 뱃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중국측의 기록을 보니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의 처음 명칭은 '何素女(하소녀)'였다는 점이다. 신라의 아리영 소녀 여신에 이어지는 소녀신으로서 수호신인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 신라 해신을 받아들인 何素女(하소녀) 숭배를 당나라 출생으로 그 스토리를 명나라시기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대로 하이랑(何二娘을 하선고(何仙姑)로 개명하고 광뚱 증성현 사람(增城人)으로 당나라 영순원년인 서기 682년 출생(生于唐永淳元年 公元682年)이라는 구체적인 출생년도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아버지 이름이 하태(何泰)이며 그 하씨 집안의 우물이 말고 단 물이 솟아 그 우물물로 두부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다(她的父亲叫何泰。何家的水井清甜可口,以井水制作豆腐为生)라고 까지 기록하고 있다." 과연 한국 역사에서는 <심청전>으로 알영신화가 문학화되는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보인다.
하소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 영리하고 성품이 안정되고 명랑하여 14살 때에 여행 중에 우연히 팔선 가운데 검을 메고 다니는 신선인 여동빈(吕洞宾) 신선을 만나 여동빈 신선은 그녀에게 하나의 운모 조각을 주어 먹게 했다. 그루부터 그녀는 인간행복을 알수 있게 되고 더불어 항상 라부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何素女自小聪明伶俐,生性安静恬淡,14岁时幸遇云游到此的吕洞宾,吕洞宾给她吃了一些云母片,从此能知人间祸福,并常去罗浮山里访仙。
그 후 그녀는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당나라 중종(中宗) 경룡(景龙) 연간 모년 8월8일에 집안의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는데 우물에 뛰어들기 전에 한 짝의 신발만을 신도 뛰어들어, 한 짝의 신발만이 우물 옆에 남아 있었다(이것을 보면 신라와 고려시대 우물로 들어간 용녀 신화와 그대로 이어져 있다).
后来,她不满父母背着自己选婿,于唐中宗景龙年间某年八月初八自投家门前的水井,投井时只穿着一只鞋,留下一只鞋在井台上。
그 후 라부산(罗浮山) 마고단(麻姑坛) 석상(石上)에 모셔지고 하소녀는 등선(登仙)하여 사방으로 날아다닌 신선이 되었다(何素女于是自此登仙,成为云游四方的神仙)는 것이다.
이러한 하선고 여신선의 기원과 그 후대의 스토리 재구성 등의 변이과정에서 여러 추측과 가필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하선고 여신선은 본래 무당출신(出身于女巫)이었다는 설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신라의 선도성모처럼 바닷가의 여신선은 무속에서 비롯되어 사당에 모셔져 숭상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광뚱의 하선고 연구가인 진택홍(陈泽泓)씨는 하선고 여신선의 스토리의 복합화 과정이 있었으며 여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는 특히 꽝뚱의 증성현이 하선고 여신선의 근원지라는데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增城何仙姑何以最 正宗?(증청현이 하선고 신선의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선고 전설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 유독 증성현에 하선고가 가장 숭배되는 지역이 된 것은 증성현에 민간의 토착 문화와 관련이 있다.
何仙姑的传说在全国不少地方流行,唯独增城何仙姑被视为最正宗,这与增城深厚的民间文化土壤有关.
광뚱의 증성현은 동한(东汉) 시기에 현으로 등재되어 당나라 시기에 문화와 경제가 발전한 지방이 되었다. 이 지역이 전설 중의 8-9가지가 하선고 선설이며 모두 동남과 남방 해안지대 일대의 전설로서 해안지대 여자 무당의 성행과 유관하다.
增城在东汉时已立县,到唐代时已是一个文化、经济发达的地方。传说中的八九个何仙姑,都在东南和南方沿海一带,这和这些地方女巫的盛行有关。
이러한 진택홍(陈泽泓)의 연구를 보면 이로써 뱃사람들이 가져온 바다의 여신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명대(明代)의 꽝초우부(广州府)의 기록을 보면 그 지역의 풍속에서 "귀신 숭배가 많아 세집에 필히 한 곳은 여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习尚俗素尚鬼。三家之里,必有淫祠庵观)"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증성현의 하선고 여신 숭배는 민간에서 쉽게 받아들여 그 지위가 권위가 생겼을 것(正是这样的氛围,使得增城何仙姑在民间取得更为权威的地位)이라는 것이다.
하선고가 신선이 되었다고 믿어 또 허다한 관련 여신선에 대한 인위 적인 점복과 관련한 전설이 만들어져 여무의 전설로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尤其是何仙姑成仙之后,又有许多关于她以女仙身份为人占卜的传说,女巫的味道更浓。
이러한 하선고 여신선 신화는 복건성의 마조(妈祖) 신화와 꽝쩌우 의 금화낭낭(金花娘娘) 여신 등의 영향이 모두 여자 무당 출신이고 선고(仙姑)가 선녀(仙女)라는 칭호가 도고(道姑: 신선도의 오랜 여신)와 여무(女巫)가 합해져 세 가지 칭호가 겸해졌다는 것이다.
因此,福建的妈祖、广州的金花娘娘等很有影响的女神,都是出身于女巫这一行。仙姑之称,有仙女、道姑和女巫各种含义,何仙姑可谓三者兼有之。
이미 신라시조들은 무속적인 무당의 위치에 있어서 박혁거세 뒤를 이은 남해차차웅의 '차차웅'은 왕의 뜻이면서 무당이라는 사실을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을 정도라는데서 신라 시조 신화가 중국 해안가의 여자 무당 신화에 이어졌을 개연성은 아주 높은 것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한반도 지역에서 더욱 바다 항해는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은 울산반구대 고래암각화에서 보여주는 세계 최고 오래된 고래잡이 배는 물론, 신라 때의 장보고 선단이 당나라와 그 시기 일본인들의 항해수단의 주요 선박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한 무사항해 신라 선박을 타고 온 사람들이 풍랑에서 기원했던 신라 해신에 대한 기원은 신라시조 알영 부인 '아리영'이 '하리랑'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다시 나중에 중국화의 과정을 밟아 하선고 여신선으로 정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팔선도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되 여신을 모시고 오는 의미에서 하리랑 여신은 가장 중심이며 '어머니 신선(仙母)의 위치에서 팔선도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바다에 던져져 고래 뱃속에서 다시 환생했다는 알영부인의 전설은 에밀레종 전설에 이어서 한국 문학사에서는 심청전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고래 뱃속에 던져져 다사 살아 나온 것을 작제건 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민요 <아리랑>은 그래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신라시조 때부터 이어져 온 뱃사람들의 고래토템 숭배에서 환생한 여아의 신선에 대한 노래라고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래 뱃속에서 환생한 아리영 여신 신화를 기원으로 에밀레처럼 심청처럼, 작제건처럼 바다에 던져진 '아리영'에 대하여 다시 돌아올 것을 기원하는 애증의 표현으로 <아리랑> 가사에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라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이어서 아리영(알영)이 파도의 물마루를 넘어 가는 것을 "아리랑(이) 바다의 거센 (물마루)고개를 넘어간다"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2절에서 <아리랑>은 '청천하늘의 잔별도 많다'라고 한 것은 고래가 고래상어처럼 점박이 고래의 뱃속에 들어갔다고 여겼던 흔적일 수 있다. 점박이는 무속적으로 하늘의 별이 내려온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래 뱃속에 들어간 알영은 고래 가슴에 들어간 것이며 알영을 보낸 사람들의 가슴에도 수심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말하는 수심이 근심을 의미하는 수심(愁心)에 바다 깊은 수심(水心) 또는 수심(水沈)의 pun으로 내려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리랑(何二娘)>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즉 알영부인은 고래여신의 환생인 것이다. 다시 신화적으로 재구성을 해보면 '하리랑(何二娘)' 바다고래 신선 즉 알영(閼英)의 아리영(娥利英) 신선이 환생하기 전의 여용왕의 일곱 아들 중에 막내가 처용(處容)이었을 것이다.
신라 향가 <처용가> 기록에서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이 동해 바다 용왕의 일곱아들 중에 막내라고 했는데, 그 일곱 아들의 어미가 귀신고래이며, 팔선으로 말하면 하선고(何仙姑)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선고(何仙姑)의 하(何)는 필히 바다를 의미하는 하(河)로서 본래는 하선고(河仙姑)에서 변이된 글자라고 생각된다.
아리영(娥利英)에서 영(英)은 꽃봉오리를 의미하여 공주를 뜻한다고 본다면, 아리(娥利)는 신라 초기의 어린 아이라는 뜻이 된다. 김알지의 알도 아리가 된다. 하리랑(何二娘)에서 랑(娘)은 어린 여아를 말하는 것에서 아리와 하리는 같은 뿌리인 것이다.
그래서 아리영을 고래 어미로 하여 처용과 그 형들 여섯이 합쳐 모두 팔선(八仙)이 되며 아리영 즉 하리랑(何二娘) 신선만 여신선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녀의 아들이며 일곱 남신선인 것이다.
바리공주 신화에서 바리공주가 저승에 가서 일곱 아들을 낳아 돌아오는 이야기는 결국 알영공부 즉 아리공주가 바리공주가 된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는 바리공주에서 어미와 일곱 아들이며, <처용가>에서는 여신 용왕과 그 일곱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리 - 하리 - 바리로의 변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노래로는 아리랑으로 남아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리영(娥利英) - 하리랑(何二娘) - 바리(바리공주) - 아리랑(민요)
나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에서 에밀레종의 에밀레의 뜻이 '아이 + 미르'로 풀이했다. '미르'는 우리말 용에 해당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용은 본래 바다의 고래의 다른 표현으로 본다면, '에밀레 - 에미르'는 '새끼 고래'가 되어 '고래 뱃속에서 나온 여아'라는 알영이 된다. 에밀레는 알영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심청전은 아리랑 민요의 스토리를 보여주며, 그 심청전의 전형은 에밀레종의 에밀레 스토리이며, 그 이전에는 바다의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나온 아리영(娥利英) 즉 하리랑(何二娘)이 그 원형이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흔히 신선도에서 말하는 팔선 가운데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은 '하리랑(何二娘)' 여신선으로서 '어머니 신선'이기 때문에 나머지 일곱 신선의 '어머니'로서 바다를 건너는 '도해팔선도'로도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팔선과해회도(八仙过海繪圖). Eight Immortals Crossing the Sea
팔선: 何仙姑、韓湘子、曹国舅、藍采和、漢鍾離、李鉄拐、呂洞賓。船外:張果老
하선고(何仙姑) 여신선 나머지 신선들을 싣고 노를 저으며 바다를 건너고 있다.
하선고(何仙姑) 신선이 연꽃을 든 모습은 새끼를 키우는 어미 귀신고래 해신이 심청으로 변화하는 것과 같은 불교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뱃사공들이 심청을 뱃전에 모시고 가는 장면은 심청이 팔선 가운데 유일한 여신선인 하선고(何仙姑) 신선이며 하리랑(何二娘) 신선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선고(何仙姑) 여신 즉 하리랑(何二娘) 신선이 들었다는 연꽃은 본래는 고래가 먹는다고 여긴 미역이었을 것이다. 팔선들은 각각 소지품으로 그 특징을 드러내는데 아래와 같다.
*팔선(八仙)의 각각의 상징물인 표주박(葫芦), 검(剑), 파초선 부채(扇), 어고(鱼鼓), 음양판(阴阳板), 피리(笛子), 약초바구니(菜篮), 연꽃(荷花)을 여덞가지 보물인 팔보(八寶)라고 한다.
*신선은 바다 고래해신으로서 여신선에서 유래했으며
그 신선 옷 또한 고래의 미역이 그 상징물이었다.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고래 신선의 옷고름, '해대(海帶)' 미역 이야기
*하선고(何仙姑) 여신선 즉 '하리랑(何二娘)' 신선이 어머니 신선임을 보여주는 중국의 전통 팔선도.
*팔선도(八仙图)
'암팔선(暗八仙)'이라고도 하는 팔보(八宝)는 팔선들 각각의 상징물을 말한다. 해당 신선과 그 상징 보물은 다음과 같이 신라의 고래토템 신선사상에 대입하여 풀이할 수 있다.
미역을 닮은 신선 띠옷을 입고 연꽃(荷花) 또는 바다의 배에서는 팔선 중에 노를 젓는 하선고(何仙姑) 여신선, 고래 꼬리 지느러미를 닮은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있는 신선은 종리권(钟离权) 신선, 신라 시조 신화에서 바다에서 온 호공들이 허리에 차고 있는 표주박(葫芦)을 들고 있으면 철괴리(铁拐李) 신선, 해조류 바구니 또는 약초 아니면 꽃바구니(花篮)를 들고 있으면 남채화(蓝采和) 신선, 고래잡이 작살을 상징하는 검(剑)을 들고 있으면 여동빈(吕洞宾) 신선, 귀신고래 소리가 내는 피리소리를 상징하는 피리(笛子)를 들고 있으면 한상자(韩湘子) 신선, 낚싯대 또는 곡괭이처럼 생긴 어고(鱼鼓, 때로는 털이 달린 불진(拂尘)으로도 표현)를 들고 나귀 또는 노새를 타고 있으면 장과로(张果老) 신선, 고래를 부르기 위하여 음양판 또는 옥판(玉板) 또는 단판(檀板)을 두들기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으면 조국구(曹国舅) 신선을 뜻한다. 신선도의 감상은 이들 상징 보물로 그 주인공을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팔선과 팔보의 구분은 명나라 이전에는 일치하지 않았다. 한대 팔선과 당대 팔선, 송나라 원나라 때 팔선은 서로 달랐다. 명나라 때의 오원태(吴元泰)의《八仙出处东游记》에서 처음으로 위의 여덞 신선인 팔선이 정착된 이름들이다.
아리랑에 연관한 하리랑 신선인 하선고 신선에 대해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문헌들에는 이에 대하여 다양한 자료들이 있다. 하선고(何仙姑)는 송나라 초기에는 《广异记》를 인용한《太平广记》에서“아리랑(何二娘)”이라고 표현했다.
何仙姑是八仙中惟一的女性,有关其身世说法不一。一说她是唐朝人。宋初《太平广记》引《广异记》称有“何二娘”者,是位以织鞋为业的农妇,后因嫌家居太闷,游于罗浮山,在山寺中住下,经常采集山果供众寺僧充斋。一次,远在四百里外的循州山寺僧来罗浮山寺.
하선고 신선은 팔선 중에 유일하게 여성이다. 그에 대한 세상의 여러 설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일설에 의하면 하선고 신선은 당나라 때 인물이라고 한다. 송나라 초기의 기록인 《广异记》를 인용한《太平广记》에서“아리랑(何二娘)”이라고 칭했다. 그녀는 신발을 짜는 농부일을 했다. 나중에 집에서 머무는 것을 크게 답답하고 싫어하여 라부산(羅浮山)으로 떠났다. 라부산 산사에 머물면서 산 속의 열매를 따다가 산사의 모든 승려들에게 공양했다.
하선고 선녀가 "라부산(羅浮山)"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 것은 어딘가 신라의 바다 섬에 이어진 스토리일 수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하선고 선녀의 출신에 대해서 제대로 일치하는 설이 없다. 중국의 기록들에는 때로 하선고 신선이 당나라 측측무후 때의 광동 사람(广东增城县人)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태어날 때 머리 정수리에 여섯가닥의 머리 털이 나서 빛이 났다고 하며 13세에 산중의 도사를 만나 도사가 주는 선도 복숭아를 먹었는데 그로부터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고 몸은 가볍게 날아 오를 것 같이 되어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하선고 신선은 북송의 영주 영능 사람(北宋永州, 零陵人)이었는데 선도 복숭아를 먹어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무속적인 여무(女巫)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하리랑(何二娘)'이라고 한 것은 알영부인이 박혁거세와 함께 이성(二聖)이라고 불렸던 것의 영향으로 이(二)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알영이 태어난 우물을 아리영정이라고 한 것은 우물에서 '용알뜨기' 풍속에서 보여주듯이 태양이나 달이 우물에 비친 것을 뜨는 것은 많은 문헌들에서 시적으로도 신화적으로도 표현해주고 있다. 시조신화들에서 우물은 그래서 많이 등장한다.
그 우물은 남성보다 여성의 우물로 강조되었다. 아리영정과 함께 박혁거세 탄생의 나정(蘿井), 김유신 장군 부인의 우물을 의미하는 재매정(財買井), 금성정(金星井), 요내정(遙乃井), 분황사의 우물 등의 용이 오간다는 신라의 우물들이 있고 고려시대의 왕건이 마셨다는 왕정(王井), 조선시대 왕들이 사용하던 마니(摩尼), 유리(琉璃), 옥정(玉井) 등이 있다.
아리영의 아리는 알에 연관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알은 태어나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한이 되는 옹아리가 된다. 산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도 산고개 마루의 한을 가진 뫼+아리가 메아리가 되었을 것이다. 아리랑이 메아리에서 나왔다는 설은 아리영 고래 설과 합류되는 것이다.
이 글을 바로 이해하는 첩경은 중국 사대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야 하는 일이다. 의외로 신라문화가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물론 당 송 시대에 종교적으로 과학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송대(宋代) 女 신선 '하리랑(何二娘)'은 중국 팔선(八仙) 가운데 유일한 여신선인 하선고(何仙姑)의 다른 표현이다.
신라 신선이었던 '하리랑(何二娘)'을 그대로 표현하기 싫어서 '하선고(何仙姑)'로 개명시킨 것이다. 일본이 신라명신이라는 칭호를 그들 지역 이름을 넣은 ㅇㅇ명신으로 개명하거나 선도성모 동신성모를 천조대신으로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일본에서는 황실의 여신으로 존재한 신라시조 여신이 송나라에서는 여덟 신선 가운데 유일한 여신으로 하선고(何仙姑) 즉 신라 여신 '하리랑(何二娘)'이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하선고 여신선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선녀상의 원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팔선과해도(八仙过海繪圖)
유일한 여신선인 하선고 여신은 신라에서 건너간 아리영(알영) 신선으로
송나라 기록에서는 '하리영(何二娘)'이라고 했다.
*바다를 건너는 팔선과해도(八仙过海繪圖)
*바다를 건너는 팔선도.
중앙의 여신선인 하선고 신선 왼쪽에 남채하(藍采何) 신선은 여기에서 여신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약초 대신에 꽃을 강조한 후대의 표현이다.
*팔선과해도(八仙过海繪圖)
*팔선도 상아 조각.
하선고 여신선이 노를 저어 나머지 남자 신선들을 '아들들'로 태우고 간다는 의미다.
하선고 여신선은 일곱신선들을 배에 잉태한 어머니라는 뜻이다.
중국의 하선고(하리랑) 여신선이 신라 시조 아리영 신선의 영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증거가 있다. 하선고 여신선 숭배가 강하게 남아 있는 꽝뚱 지역의《续通考》에 따르면 "출생시에 머리에 여섯 가닥의 빛나는 털이 나 있었다(出生时头顶出现六道毫光)"는 것이다. 이는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태어날 때 육촌장이 왕으로 모시는 과정의 여섯 촌장과 연관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팔선도 그림에서 하선고 여신선을 그릴 때에 사슴의 등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도 신라의 왕비들의 금관에 사슴 뿔의 형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뿔 달린 사슴을 올라탄 하선고 여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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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후들의 제의적 관으로 사용되었다는 신라 금관.
사슴뿔 형상이 구성되어 있다.
더더욱 하선고는 도사를 만난 나이가 13세라는 것이다. 하선고가 13세에 도사를 만나 그 도사가 준 선도를 먹고 나서는 마시고 먹지 않아도 몸이 날을듯이 가볍고 세상사를 내다보는 여신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十三岁时 在山中遇一道士,吃了道士一只仙桃,从此不饥不渴,身轻如飞,并可预见人生祸福
하선고의 '13세'란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육촌장이 받들어 신라 시조로서 왕위에 오른 나이이다. <삼국유사>의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이 13세에 왕이 되는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 井. 故或云 林國以其 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得金閼智. 而 鳴於林中. 乃改國號爲 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 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우고 이들 두 성스러운 어린이를 모셔다가 길렀다. 남자아이는 알에서 낳았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았는데, 향인(鄕人)들은 박을 '박(朴)'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성(姓)을 박(朴)이라고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삼았다. 두 성인(聖人)은 13세가 되자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전 57)에, 남자는 왕이 되어 이내 그 여자로 왕후(王后)를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혹은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편.
신선 그림은 본래 바다와 함께 그려졌다. 신라의 항해술과 함께 신라인들의 초기 무속적인 바다 여신 숭배는 충분히 당나라 바닷가로 건너갔을 개연성이 높다. 중국의 팔선도는 바다를 건너는 신선들로 그려지며 그 중심에 여신선인 하선고 중심이다. 그 하선고는 본래 신라시조 아리영 부인 음운과 같은 '하리영'이었다.
일곱 남자 신선들과 하리영 여신과의 관계는 <처용가>에서 말하는 동해 용왕이 여신이며 고래해신일 때 그 일곱 아들을 합해 팔선이 된다. 그 중심에 고래해신은 여신이며 유일한 여 신선으로 송나라에서 일곱 남자 신선들 가운데 신라의 '하리랑(何二娘)' 즉 '하선고(何仙姑)' 여신선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팔선도 네폭병풍 / 촬영 오두
송나라의 팔선(八仙) 이 일본에서는 유일한 태양의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중심으로 남성적인 큰 뱀으로 표현된 팔기대사(八岐大蛇)로 표현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팔선도>가 두보에 의하여 <음중팔선가> 시로 표현된 이래 여덟 술 신선 그림인 <음중팔선도>가 그려져 왔던 전통이 있듯이 팔기대사(八岐大蛇) 신화에는 술독 여덟 개가 등장하여 여덟 마리 큰 뱀을 잠들게 했다는 내용은 '음중팔선도'의 또 다른 버젼일 수 있다.
그것은 신라의 팔선 사상이 오히려 그 시대의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처용가>의 동해 용왕과 그 일곱 아들 이야기에서도 추측이 가능하다. 신선은 술과 관련이 있으며 춤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 '죽림칠현'이라는 것도 사실은 신라에서 건너간 선도성모 어머니 여신 또는 아리영 신선이 즉 팔선 가운데 '히라영' 신선이라고도 하는 하선고 신선을 뺀 나머지 '일곱 남자(아들) 신선'을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팔선의 팔보에서 나온 칠보와 그 신선을 의미하는 칠현은 남자 일곱명으로서 생략된 여신선이 암시되어 있는 죽림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 향가 <처용가>에서 신라 헌강왕이 만난 동해 여신 용왕과 그 일곱 아들의 '팔선(八仙) '에서 바리공주 신화에서 바리공주와 그녀의 일곱아들은 같은 구조를 가지는 것만큼 송나라의 팔선과 일본의 팔기대사는 결국 아리영 - 하리랑(何二娘)에서 오늘날 우리 민요 <아리랑>에 남아져 있는 것이다. (05/28/11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