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가을에 온 여인
02.가을편지
03.눈이 내린다
04.동심초
05.라메르
06.망향
07.물망초(勿忘草)
08.빠담 빠담 빠담
09.빨간 풍차(風車)
10.사랑의 찬가(讚歌)
11.사랑하는 마음(1968년 앨범)
12.사의 찬미
13.세노야
14.쉐난도
15.아마다미아
16.잊어도 좋았던 사람
17.장미빛 인생
18.죽도록 사랑해서
19.태양(太陽)은 가득히
20.파리(巴里)의 다리 밑
21.험한 세상의 다리되어
22.황혼의 엘레지(1970년 앨범 )
**최양숙 가수 프로필
출생 :1937년 데뷔 1965년 1집 앨범 '황혼의 엘레지'
학력 : 서울대학교 성악학과
경력 : 중앙방송국 합창단
수상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주최 전국콩쿨 대상
최양숙(崔良淑), 본명이다.
'양(良)'자는 '좋다, 뛰어나다, 또는 아름답다'라는 뜻을 갖고 있고
'숙(淑)'자는 '맑고 깊다, 혹은 정숙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 이름 그대로 '맑고 깊은, 그리고 뛰어난
가창력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주로 부른' 가수였다.
"그저 평범한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은데 그 것도 쉽지 않아. 이름
석자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병원 같은 데서
이름이라도 불려질라치면 누가 보는 것 같아 아직도 불편해. 그저
잊혀져 조용히 늙고 싶은데 말이지... "
서울대 성악과를 나온 음악도로 국내 최초의 샹송가수라 일컬어지며
'황혼의 엘레지' ‘모래 위의 발자국’ ‘초연’ ‘호반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꽃피우는 아이’ ‘세노야’ 등을 발표했던 최양숙은 샹송에 관한한 독보적
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가창력이 뛰어났고 분위기 또한 매력적이었다.
1937년 원산에서 태어난 최양숙은 경음악평론가이자 DJ로 활동하던
최경식씨의 동생.원산 명석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1.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임시로 문을 열었던 무학여중에 들어간 뒤 환도 후
지금의 서울예고에 진학한다.
당시 노래 실력이 뛰어나 서울대 음대 주최 전국콩쿠르서 '시인'을
불러대상을 차지한 뒤 60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한 최양숙은
2학년 때 중앙방송국(현 KBS) 합창단원으로 입단해 활동을 시작한다.
그녀가 솔리스트로서의 자질을 주목받기 시작한 때는 이 무렵, 지휘자
이남수의 인솔로 해병대 의장대원들과 함께 한국예술사절단의 일원
으로 해외 공연을 떠나던 해군 항공모함, 즉 LST 안에서였다.
여흥시간 중 게임에서 져 벌칙을 받아야 했던 그녀가 부른 노래는
샹송 '고엽', 이어 앙코르 요청에 의해 부른 노래가 '자니 기타'였다.
망망대해 선상에서 반주 없이 부른 이 노래로 함께 동행 했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당시 방송국 관계자들이 이를 놓치지 않고 눈여겨보았음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다음 해, 그녀는 솔로로 마이크 앞에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된다.
대학 3학년 때였다.
무대에 나서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데 음악부장이 찾아와 지금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녹음 중인데 그 주제가를 한 번 불러
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처음 그녀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냥 연습 삼아 불러보자는
말에 악보를 받아 쥐고 마이크 앞에 섰다.
당시 최양숙은 이 노래가 실제로 녹음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첫 방송되는 드라마에 자신의 노래가
주제가로 방송되고 있었다.
이 드라마 제목이 '어느 하늘 아래서(한운사 극본)'이다.
이 주제가는 후에 한명숙씨에 의해 '눈이 나리는데'라는
제목으로도 발표되었다.
이 드라마는 당시 HLKA 라디오 연속극에 이어 이후 64년도
말부터 동양 TV(D-TV, 채널 7)에서 최초의 TV 일일드라마로
리바이벌, 제작되기도 했다.
이 때 드라마 제목은 '눈이 나리는데(황운진 연출)'.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노래가
연속극 주제가로 방송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최양숙은
서울대 음대 학장실에 불려간다.
그리고 당시 학장이었던 작곡가 현제명씨로부터 '소리의
주인공이 아니냐' 추궁을 당한다.
특히 노래 중 '모두가 세상이 새하얀데...' 라는 후렴구의
고음 부분에서 최양숙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인 목소리의 노래가 방송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장실에 불려가 추궁까지 당했던 가수
최양숙. 당시 여건에서 명문대생이 대중가요 가수로
활동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 무렵 연습 삼아 불러보았던 또 한 곡의
노래가 '내 옛날 온 꿈이(김영랑 시, 손석우 작곡)'.
가수 최양숙이 처음 취입한 이 노래 역시 매우 생소한 이름,
'주미옥'이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발표된다.
본인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양숙은 대학을 졸업한 것과 때를 같이해 방송국 합창단
활동을 접고 모교인 서울예고의 음악교사로 교단에 선다.
그러나 1년 뒤 교편생활을 접고, '최양숙'이라는 본명으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한다.
첫 히트곡은 '황혼의 엘레지(박춘석 작사, 작곡)'.
이 노래를 시작으로 그녀는 작곡가 박춘석씨를 비롯해
손석우, 김광수, 최창권, 김호길, 김인배, 김민기 등
대부분 대중적이라기보다는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작곡가들과 손잡고 분위기 있는 곡들을 주로 발표한다.
가창력과 표현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해외무대로도 진출한다.
67년, 몬트리올국제박람회장의 한국관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던 그녀의 활동을 지켜본 작곡가이자 일본 NHK방송국의
합창단 지휘자인 '고지 요시유끼(新律善行)'에 의해 일본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받고 일본 진출을 시도한 것.
최양숙씨가 이 때 사용한 예명은 '베로니끄(VERONIQUE)', 그녀의
카돌릭 본명이다. 음반 타이틀은 'MIDNIGHT SPECIAL 11 P.M'.
타이틀 그대로 '매혹적인 밤의 무드'를 달콤하게 그리고 있는 이
노래들은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접목이라 할 만큼 음악적 완성도
가 높은 세미클래식의 장르를 한껏 구사하고 있다.
정통 음악도의 길을 걷고자 했다가 대중가요가수로의 전향해
활동하던 그녀가 비로소 일본무대를 통해 역행했던 자신의 길을
다시 되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했다.
'클래식 기법의 노래들을 클래시컬한 창법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노래를 아름다운 발성으로 채색해, 들을수록 여자의 사랑스러움이
배어난다.'는 것이 당시 한 일본 평론가로부터 받은 호평의 일부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를 받을 만큼 뛰어난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이내 묻혀지고 만다.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일본인 매니저로부터 이전 한국에서의 활동 경력을 접고 다시
신인으로 시작해야 할 것을 요구받았고 아울러 '한국인 가수임을
가급적 강조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을 제시해왔기 때문이었어요.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녀의 회고다.
결국 이 조건에 응할 수 없었던 최양숙씨는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욕을 잃고 음반만을 취입한 뒤 곧바로 귀국한다.
70년. 다시 고국무대에 선 최양숙은 해외무대의 미련을 떨치고
새로운 음반 '꽃피우는 아이'를 발표하며 국내 활동을 개시한다.
이 음반은 당시 방송국 PD로 있던 오빠 최경식씨로부터 서울대
후배인 가수 겸 작곡가 김민기씨를 소개받으면서 취입이 이루어
졌다.
이 음반은 특히 노래 전반에 깔리는 김민기씨의 기타반주가
압권으로 그녀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우러진다.
사실 최양숙씨는 반주에 매우 예민한 편으로 반주가 거슬리면
노래에 몰입을 못하는 성격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이 음반을 통해 김민기의 곡 '가을편지', '꽃피우는 아이'
를 비롯해 '세노야' 등 포크 명곡들을 발표한다.
최양숙씨는 90년대 중반, 극작가 김숙씨의 제의로 드라마에도
간간히 출연, 오랜만에 브라운관을 통해 연기자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지금까지도 연예인으로써 대중 앞에 섰던
것이 잘 선택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는지 분명한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는 그 간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제금 본명 '최양숙'으로 돌아와 아름다운 노래
'황혼의 엘레지'처럼 어느덧 황혼을 맞은 그녀. 그녀는 현재
그 이름 그대로 '맑고 깊은,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듬직한
두 아들 가족과 더불어 아름답게 황혼을 펼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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