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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줄만. 13~16 (재일 작가 朴慶南 1950년생)
三. 즐김과 웃음
1. 생명체로서의 활력.
일본 고유의 북을 중심으로 하는 타악기 연주를 들으러 갔다. '고동(鼓童)'이라는 그룹에서 독립한 연주자의 일본북에 색소폰과 베이스, 한국의 '사물놀이' 전통 음악 연주자가 더해져 일대 세션이 펼쳐졌다.
그건 정말 대단한 소리와 리듬이었다. 마음껏 온몸으로 치고 울리는 박력의 소용돌이 속에 세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 안에서 서서히 해방감이 퍼져 나간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자신이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생명이 뿌리째 강하게 흔들리고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 활력이 넘치고 터져 나옴을 느끼게 했다.
하루하루 바쁜 일에 지쳐 머리가 포화상태라 한 치도 앞이 안 보이던 때라 더 몸과 마음에 대한 충격이 강렬했다. 안에서 솟아나는 에너지. 그 삶의 에너지라는 것은 원래 생생하게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머리로만 사물을 생각하고 있으면, 그런 간단하고 당연한 것을 알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소리나 리듬은 대단했다. 나라와 민족을 쉽게 넘어버린다. 짐작하고 있던 그대로였는데 더욱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일본의 일본북과 한반도의 장구, 꽹과리 등의 각각의 소리와 소리의 멋진 어울림은 '다름'이 이렇게 각각 살아있고, 훌륭하게 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 깊은 감동을 주었다.
"왜 실사회에서는 이게 어려울까" 연주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머, 얼마 전에 만난 대학 선생님의 어둡고 침울한 얼굴과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대학에서 열린 재일 외국인 문제를 생각하는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패널 중 한 명의 대학교수는 오래전부터 재일 조선인 문제를 성실하게 다루어 온 유명한 사람으로 나도 이름만은 자주 들었던 분이다. 그 선생님으로부터 학생의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탄식이 나왔다.
"절망밖에 없네요. 정말 저는 절망하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활동하여 온 모든 것이 응축된 듯한, 말이기에 가슴을 무겁게 했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일본 사회를 한탄하는 말이었다. 이어서 약 70만 명의 재일 한국 및 조선인이 일본 어딘가에 지방자치단체를 만들어 독립하면 어떨까 하는 꿈 같은 이야기도 하였다.
그말에 나는 "만약 그런 곳이 생겨도 저는 살고 싶지 않아요.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기타 외국인이 일본의 여러 곳에 살고 있어,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라고 나는 속으로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그 선생님이 말하게 된 것은 냉엄한 현실때문이다.
일시적으로는 노골적인 "차별"이라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사회의 저류에는 엄연히 남아 있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저는요, 30년 동안 계속 활동을 해오면서 이미 완전히 지쳐버렸어요."라며 고뇌를 호소하는 표정에서도 그것은 여실히 엿보여 안쓰러워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절망을 말하는 선생님에 대해 마음속에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심신이 지쳐 피폐한 모습에서 희망이 나올 리 없다. 내면에서 솟아오를 만한 활력이 없으면 사회를 변혁할 수 없고, 상대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에 와 닿는 말을 할 수 없지 않을까.
일이든 활동이든 하는 사람 자신이 자신을 가장 빛나게 해야 매력과 힘이 생긴다. 무엇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거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을 살리는 것, 자신을 풍요롭고 충실하게 하는 것이 기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 주변에 너무 피곤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특히 중장년 남성)이 많다. 무엇을 위해 일(활동)을 하는지, 번거로운 눈앞의 잡일에 쫓기다 보면, 그 목표가 흐릿해져 윤곽을 잃어 버리기 쉬운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생명체로서의 힘까지 약해져 있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반성하며 절실히 그렇게 생각한다. 대학 선생님의 말에 기분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반대로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중요한 말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재작년 타계한 일본인 절친이, 병상에서 나에게 보내준 메시지다. "우리는 함께 나란히 걸어가고 싶다. 그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니까."
그런 그녀의 고향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 남동생, 은사, 학우를 포함한 청중에게 서투른 강연을 하였는데, 이쪽이 뭔가를 준다기보다는 청중 쪽에서 강한 격려와 힘의 근원이 되는 따뜻한 "기운"을 받았다. 사람과의 만남은 마음에 자양분을 쏟아준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고마운 강연회였다.
몸을 울리는 소리(리듬)에서 세포가 살아나고, 마음을 울리는 사람과의 만남이 에너지의 근원이 되어 인간은 생명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끔은 마음껏 몸과 마음을 풀어주고 싶다. 거기서 나오는 새로운 활력이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 생명줄만 놓지 않고 있으면 14
2. 벼락치기 배우 박경남
"R" 이라는 수수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 여기다. 고즈넉하고 오래된 그 가게는 눈여겨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것 같았다. 도중에 몇 사람에게 물어서 겨우 찾아냈다. 약속 시간에 5분 정도 늦어버렸다. 빠른 걸음으로 온 나는 숨을 고르며, 설마 그 후, 예상치 못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조금도 모른 채, 잘 손질된 나무 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JR(*일본국철) 요코하마역에서 첫 번째, 사쿠라기초역에서 내리자, 바로 오른쪽에 펼쳐진 '미나토 미라이21'의 초근대적 경관에 먼저 시선을 빼앗긴다. 합리성과 기능성을 추구한 듯한 고층 건축물에, 참신한 디자인의 호텔(원통을 반으로 자른 듯한 형태), 세계 제일이라는 거대한 관람차 등, 현대 사회가 지향해 온 것들이 모양을 갖추어 우뚝 서 있다. 일본의 "풍요(번영)"와 상승 지향의 상징이라고 할만 하다.
그것과 완전히 대비되는 곳이 요코하마의 노게(野毛)거리이다. '미나토 미라이21'과는 역을 사이에 둔 반대쪽으로 음식점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늘어서 있다. 처음 이 거리를 방문했을 때는 그 난잡한 분위기에 몸이 굳어지고 다리가 움츠러들곤 했다.
뒤엉킨 좁은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해질녘이라 그런지 퇴근길 직장인들이 즐비한 가게로 차례차례 빨려 들어간다. 나도 휩쓸려서 그 노게골목길의 아케이드를 지나 한참을 걸은 끝에 ‘R’은 있었다.
배우 다카하시 쵸에이(*高橋長英1943~) 씨는 이미 카운터에 걸터앉아 미즈와리(*얼음넣은 술) 잔을 흔들고 있었다. 애초에는 쵸에이 씨의 취재가 목적이었다. 만남을 주제로 연재하고 있는 신문 칼럼에 싣기 위해서 시간을 할애 받은 것이다.
쵸에이 씨 옆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인 가운데 나는 끼어드는 형국이 되었다. 그 선객은 ‘R’의 바로 이웃에서 '만리(萬里)' 라는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는 후쿠다 유타카 씨였다. 학창시절 럭비로 단련했다는 탄탄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떠나지 않는 다정하고 온화한 표정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후쿠다 씨는 노게다이도게이(野毛大道芸)공연의 관계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노게거리의 부흥을 위해 입안된 이 행사는 봄과 가을 두 차례 거행되어 그해(1994년) 17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백여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와 스태프의 도움으로 국내외 150여 명의 예능인들이 화려한 재주를 이틀에 걸쳐 선보인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그 거리 공연의 일부인 출장연예의 하나로, 길거리 연극을 한 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후쿠다 씨는 쵸에이 씨에게 권유하고 있었다. 첫 시도라는 말에 쵸에이 씨도 "응, 그것 재미있겠다"고 반응했다. 공연제목으로는 하세가와 신(*長谷川伸 1884~1963 소설가) 원작의 "협객무사 스모판에 서다(一本刀土俵入り)"가 꼽혔다. 근처 장어집 2층 창문이 운치 있어서 그것을 사용하면 연극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한다.
"건물의 창문과 골목길을 이용해 거리 연극을 하다니, 꽤 흥미로운 아이디어같다" 고 속으로 감탄하며 옆에서 듣고 있던 나에게, 쵸에이 씨는 고개를 돌리면서 말을 걸어 왔다. "어때요, 같이 해 봐요." 옛날부터 그의 팬으로 존경하던 쵸에이 씨의 권유라 얼떨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덜렁대기 좋아하는 성격이, 나의 구제불능의 단점이다. 연기 경험이라곤 어린 시절 학예회 때 '우라시마 타로'에서 손을 흔들흔들하는 바다 속의 '미역' 역을 한 번 했을 뿐이다.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야기는 점점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배역은 쵸에이 씨가 오코모(お薦 게이샤,여주인공) 역을, 내가 고마가타 모헤에(駒形茂兵衛 남자주인공,스모선수)를 하기로 결정되어 버렸다. 왜 내가 스모 선수인 모헤에지? 나중에 정신을 차린 나는, 후쿠다 씨와 쵸에이 씨에게 배역 변경을 강하게 요청해 보았지만, "이런 적역은 없다,"라며 강경 일변도였다.
좋아, 여자지만 한 번 한다고 했으니, 본때를 보여 줘야지 하고 나도 반쯤 오기가나서 각오를 다짐하였다. 이야기는 조슈(*현 群馬県)의 고마가타(駒形)라는 시골에서 요코즈나(*천하장사)를 꿈꾸며 떠나온 병아리 스모 선수 모헤에가 에도(*현東京)를 향하는 도중 허기져 휘청거리며 걷는 데서 시작된다.
그 모습을 술집 2층에서 보고 있던 게이샤 오코모가 가엽게 생각하고 자신의 기모노띠와 빗, 비녀 등을 허리주머니에 넣어 모헤에에게 주고 격려한다. 감격한 모헤에는 요코즈나가 되어 씨름판을 호령하기로 맹세했지만 10년 후 다시 나타났을 때는 야쿠자(건달패)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옛날의 은혜에 보답한 것은, 오코모의 가족을 불량배들로부터 구하고, 마지막에는 떠나는 오코모의 뒷모습을 향해 유랑자 차림을 한 채 씨름판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신국극의 명배우 시마다 쇼고(*島田正吾1895~2004) 씨가 출연하여 인기를. 끌었다는 전형적인 일본식 고전 연극이다. 그것을 하필 재일교포·조선인인 내가 한다는 것에 스스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중국인 지인으로부터 "사람끼리 오가는 '정'을 그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민족도 국경도 넘는 보편적인 주제다"라고 깨우쳐 주어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치심은 마음 속의 적이다. 먼저 수치심(허세, 외문, 자존심)을 내팽개치기만 한다면 분명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한 번뿐인 한정된 인생이 아닌가(약간 오버). 이것도 한 때의재미라고 스스에게 타이르기로 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어, 어떤 일이든 도전해 나가면 못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공언하고 있는 나이므로 그것을 실증할 수밖에 없다.
첫 회의는 중국집 만리의 작은 다락방(안네의 방)에서 진행됐다. 손만 닿아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책과 종이 더미를 헤치고 가운데 놓인 귤상자 주위에 앉아 시끌벅적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곳 분위기는 학창시절을 생각나게했다.
50대인 후쿠다 씨와 쵸에이 씨를 비롯해 모인 몇 명 중에서는 내가 가장 연소자다. 나이 든 분들이 욕심 없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거리극을 만들어내려는 자세와 그 표정에 나는 감동받았다.
이런 가슴 두근거림도 오랜만이다. 또한 이 거리 사람들의 쾌활함과 따뜻함, 개성의 풍요로움과 재미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연극을 매개로 나는 점점 끌려 들어갔다.
"연극을 할 테니 보러 와"라고 친구들에게 말을 건내면, 먼저 돌아오는 것은 "뭐라고!" 라는 느낌표 섞인 반응이었다. 이어지는 문답으로 그것이 놀라움에서 어이가 없어 웃음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상연물은?" "협객무사 씨름판에 서다" "세상에, 세상에... 무슨 역할이야?" "고마가타 모헤에" "에이, 거짓말, 어디서 해?" "요코하마 노게의 길가" "(순간 말문이 막힌 뒤) 아하하하" 엉뚱한 상황과 분위기에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나는 길거리 연극의 벼락치기 배우가 되고 말았다.
연극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나다. 불안이 고개를 들지만 문필이나 강연과 마찬가지로 연극에도 공통되는 중요한 요소는 남에게 "전달한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수비 범위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타고난 낙천주의가 얼굴을 내민다. 무엇보다 길거리에서 한다는 게 재밌다.
극장이라는 격리된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일상의 공간 속에 다른 세계를 창조해버리는 점이 좋다. 연기하는 쪽도 보는 쪽도 피부로 서로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지근거리. 가까이서 표정을 마주하고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이만한 일체감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가슴을 울리면 그 순간에 곧바로 관객은 반응을 보낸다. 만약 변변치 않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그만큼 연기의 보람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능 본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실존하고 있는 마을 건물을 이용하는 것이니 세트를 만들 필요도 없고 경제적이다. "협객무사 씨름판에 서다" 는 노게의 중심 거리에 있는 장어집 2층 창문과 그 아래 길이 무대가 된다. 자유자재한 발상이 길거리 연극의 장점이다. 또한 바로 앞에 있는 바(술집)의 창문이 서양식으로 세련되어 있다.
이것도 아울러 이용하기로 했다. 이 술집의 창문에서는 "웨스트 사이드, 서부극" 공연을 하기로 했다. 각각의 스토리는 그대로 하여 변사가 이 두 연극을 잘 연결해 약 50분의 상연물로 정리한다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생겨났다.
그 변사 역과 그리고 대본의 난제를 도맡아줄 사람이 나타났다. 제 친구인 TBS에서 일하는 세키야 히로시(関谷浩至) 씨이다. 이로써 금상첨화가 되었다. 하려고만 하면 어떤 일이든 어떻게든 되기 마련이다. 점포사용의 양해, 도로 사용을 위한 허가, 배우 모으기 등등 하나씩 클리어하여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모임은 대본 읽기다. 배우 다카하시 쵸에이 씨 이외에는 모두 생짜배기 초보이기 때문에 좀처럼 억양의 조정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모양이 갖추어지는 게 신기하다. 실전까지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연습은 몇 번밖에 없다. 서서 연습하는 데 중점을 둔다. 쵸에이 씨가 건달부터 마리아 역까지 스스로 본보기를 보여주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기 지도를 해나간다.
초보라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진지하게 하나하나의 대사, 동작을 가려쳐 주는 그 열의에 이끌려 벼락치기 배우들은 연기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노게마을에 연고가 있는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중에도 레이코 양과 다이스케 군은 순수한 노게출생의 젊은이이다.
저글러(서양풍 복잡한 공기놀이꾼)의 미즈노 마사히로 씨, 현지의 샹송 가수 겐지로 씨, 평론가 히라오카 마사아키 씨, 문신시술사 삼카쿠 씨, 도서관 직원 오우치 씨, 작가 사노 안나 씨, 근처 돈가스 가게의 아들 고헤이군(초등학교 3학년), 그 외 신나이나가시(*사미센의 길거리연주자)와 춤꾼들도 더해 상당한 인원의 출연자들이 시간을 내어 연습을 거듭해 갔다.
그런데, 공연은 이틀 동안 저녁 때 두 번씩 총 네 번이다. 날씨도 좋아 길에는 관객들로 넘쳐났다. 딱따기 소리로 개막을 알리면, 제가 연기하는 배고픈 스모 선수 모헤에가 휘청휘청 왼쪽에서 등장한다. 그러면 미즈노 씨가 연기하는 무법자가 그 모헤에에게 겁박을 한다. 장어집 2층 창문이 활짝 열리며 겁박하고 있는 무무법자에거 물이 뿌려진다.
2층 창문에서 물을 뿌리는 사람은 백분 칠한 얼굴의 오코모역인 다카하시 쵸헤이 씨이다. 백분 칠한 그 얼굴에 라이트가 닿아 효과 만점이다. 감탄의 갈채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모헤에와 오코모의 대화로 1막이 끝난 후, 장면은 일변하여 2막이 시착된다.
장어집 옆 바의 창문을 사용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시작된다. 거기서 실랑이 장면이 한 바탕 벌어진 후, 3막째는 다시 장어집이다. 10년 후 모헤에가 은혜를 갚는다고 나타나며 마지막 장면은 씨름판에 들어가는 것으로 경사스럽게 막이 내린다.
모두들 온 몸으로 열심이 열연을 해서인지 연극은 대성공이다. 감격하여 울었다는 사람까지 있어 배우로서 보람을 느끼게 하였다. 관객들의 많은 격려는 출연자, 스태프 등 모두의 몫이다. 그런데 노게 거리와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중화요리 집 "만리"의 후쿠다 씨는 자신이 사는 거리를 이렇게 재치있는 말로 평가한다. “누구라도 이곳으로 도망쳐 오면 거리 전체가 두손으로 맞아주는 곳이 노게이거든요.”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이곳이 아니냐는 엉뚱한 비유에는 웃고 말았다)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오래된 주민이 많지만 신참자들에게도 영역을 넓혀주고 있다. 겉모습이나 경력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사람이라도 넓고 깊은 품으로 감싸주고 있어 언제든지 바로 일을 하고 살아갈 수 있다. 특히 나를 매료시킨 것은 정을 주지만 간섭은 하지 않고 각자의 다양한 개성을 서로 인정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만리"에서 조금 떨어진 넓은 주차장 한켠에 "자유인" 이라고 후쿠다 씨가 부르는 한 노숙자 할아버지의 공간이 있다. 물욕이 없다는 자유인의 소유물은 인근 술집에서 버린 의자 하나와 빗자루와 쓰레받기뿐이다. 의자에 앉아 햇볕쬐기를 하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일과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자신도 이곳의 주민이라는 의사 표시라고 한다.
주차장 앞을 걷다가 한구석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그 가재도구들(?)를 본 적이 있다(안타깝게도 본인은 부재중이었다). 후쿠다 씨와 함께 지나갈 때도 비가 내리고 있어 의자에는 자유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행방을 걱정하는 후쿠다 씨에게서 자유인을 같은 거리의 주민으로 보는 다감한 시선을 느꼈다. "만약 우리 동네 자유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장례를 치뤄 줘야 해요." 라는 후쿠다 씨의 말에서, 노게 거리가 가진 체온(촉감) 같은 것이 직접 전해진다.
노게에 대한 찬사를 말하자 후쿠다 씨는 "그런 칭찬받을 만한 곳이 아니에요. 서로 견제와 시기도 많고 자주 옥신각신하는 게 노게라는 곳이니까." 라며 하하핫 하고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물론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거나, 음지에 틀어박히거나, 서로 삐걱거리지는 않는다. 만사, 너그럽다. 노게 거리에서는 직함이나 권위 같은 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자신의 개성이 더 중시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일본인, 외국인, 동성애자, 떠돌이, 노숙자, 창녀같은 다양한 존재에 경계선을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연체로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인정는 열린 공간이 넓혀져 있어 마음이 아늑해 진다.
"강자에겐 덤비지 마라"거나 "튀어나온 돌이 정 맞는다" 와 같은 속담도 여기서는 걸맞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을 활발하게 표현하고, 다른 의견이나 사고방식을 정리해 간다. 그 자유활달한 분위기가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인 것이다.
위로부터의 지시가 아니라 자신들의 창의적인 생각으로 거리 공연 등의 '축제'를 만들어 즐기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효율 일변도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쓸모없이 여겨지는 여백으로부터 '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익함을 창출해 냄으로서 사람들을 느긋하게 호흡하게 하고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여 왔음을 잘 알 수 있었다.
바로 옆 랜드마크 타워처럼 위로로만 상승할 뿐 아니라 거리에 뿌리를 내리고 지평으로 퍼지는 것의 상쾌함을 나는 이 거리에서 새삼 알게 된 것 같았다. 근대화로 인해 폄하되었던 소중한 것들이 이 거리에는 살아 있다.
● 생명줄만...15
3. 한국에서의 식중독 전말기
어렸을 때 자주 배탈이 나서 병원에 다녔다. 진단은 으레 대장염이었다. 의사의 설명은 늘 "과식하였군요"라는 한마디로 끝이었다. 아직도 변함없이 식탐이 많은 나는 조금 오래된 음식에도 손을 뻗는다.
그 결과 여러 차례 배탈이라는 낭패를 당하곤 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식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때문에 참기 힘든 고통과 맞바꾸기는 했지만 나의 나쁜 식탐 덕분에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체험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조선인인 나에게는,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흥미롭게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직접 접해 보고 싶어하던 차에, 한국의 병원 응급실에서의 뜻밖의 몇 시간을 보낸 일은, 그러한 의미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인상적인 기억을 남겨 주었다.
때는 1988년 9월 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 장소는 서울이다. 올림픽 관람 권유로 취재도 할 겸 방한했다. 배구 경기를 본 뒤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에 거주하는 지인과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 배도 고픈 참에 나는 불고기를 비롯해 테이블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차례차례 엄청난 기세로 먹어 치웠다.
가장 좋아하는 게장(생게를 맵게 양념한 것)을, 냄새가 좀 신경 쓰였지만 "뭐, 괜찮겠지" 하며 덥석덥석 입에 넣었다. 지인은 내 먹는 모습이 걱정이 되었는지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날 밤의 일이다. 배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갑자기 엄습했다. 새우처럼 배를 움켜 쥔채 신음조차 낼 수 없다. 여름철 게는 주의하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칠 줄 모르는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병원 응급실로 가게 됐다.
지인의 손에 이끌려 택시로 병원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넘었다. 배를 움켜쥐고 구부정한 자세로 한걸음 한걸음 걷지만, 가도 가도 응급실은 멀기만 하다. 시간이 걸려 중간에 두 번 정도 화장실을 거쳐야만 했다.
그 긴 복도가 겨우 막다른 곳에 이르러 겨우 응급실에 다다랐다. 온 힘이 다 빠진 내 눈에 불쑥 보이는 것은, 남의 눈도 꺼리지 않고 침대에 매달려 심하게 통곡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아, 난처한 장면에 마주쳤구나. 사람이 죽게 된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에 조심조심 옆을 지나 잠시 후 다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너무 격변한 상황에 배의 아픔도 달아났다. 세상에, 조금 전까지 울부짖던 남성은 멀쩡한 얼굴로 침대 위의 사람과 담소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그럼 그 울부짖음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잠시 아연실색하고 말았지만, 단지 환자의 상태를 슬퍼하고 있었을 뿐인 것 같다. 일본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지만 우리 민족은 마음이 가는 대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어느 쪽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문화와 국민성의 차이는 인간의 개성과 마찬가지로 다름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각자의 차이를 아는 것이 상호 이해의 대전제가 되어야 즐거울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격렬하다. 그때마다 농락당해 왔지만 민족성이라는 필터를 통과시켜 보면 납득할 만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안정을 되찾고 다시 응급실을 둘러본 나는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초등학교 체육관 같은 너른 공간에 침대가 즐비하다. 그리고 그 침대 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기, 노인 등 다양한 환자들이 누워 있는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의 침대에 누워 있다. 그리고 아마 식중독이라는 진단하에 링거를 맞게 되었다.
고개를 옆으로 틀면 오른쪽 옆은 볼이 홀쪽한 할아버지, 왼쪽에는 고등학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응급실은 (남북의) 대치체제하에서 어떤 사태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항상 24시간 오픈하며, 응급환자는 이 장소에서 모두 돌본다는 것이다.
링거 덕분인지 통증이 가라앉았고 꾸벅꾸벅 잠들어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고성에 잠이 깨였다. 시계는 새벽 2시다. 응급실 입구에서 쉰 살 전후의 아저씨가 뭔가 아우성치고 있다. 그 목소리 때문에 깨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온 방안에 퍼진다.
"이 병원은 입구에서 여기까지 너무 멀다. 만약 환자가 도중에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고성은 그런 내용이다. 아저씨의 불처럼 타오른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그 마음은 나도 알만하지만, 당신의 목소리가 훨씬 환자에게는 독이에요, 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리고 만다. 아저씨가 드디어 떠나고 정적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20분도 채 계속되지 않았다.
"어이, 바늘과 실 좀 빌려줘!" 라는 천둥소리 같은 큰 소리가 고요를 깬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졸음도 복통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나는 가슴 두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소리치는 사람은 40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었다.
그는 두 다리를 벌리고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병원 직원을 붙잡더니 왜 자신에게 바늘과 실이 필요한지 빠른 말로 지껄였다. 침대 위의 나는 귀에 신경을 집중했고, 간신히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그 남성은 서울 시내 호텔에 묵고 있는데 난감하게도 양복 단추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바늘과 실을 빌려줄 만한 곳을 찾던 중 불이 켜져 있는 이 병원을 어렵게 발견하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바로 결혼식장으로 서둘러 가야 하기 때문에 빨리 단추를 달고 싶다며 초조해하는 필사적인 모습이 이마의 땀에서 엿보인다. 병원에서 별걸 다 보는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간호사들은 이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당연하게도 상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응급병원이라고 해도 떨어진 단추의 응급처치까지는 소관 밖의 일인 것이다. 하지만 "바늘과 실은 없습니다" 라며 매섭게 거절당한 남성은 물러나기는커녕 점점 열기가 올라간다.
"병원인데 수술용 바늘과 실 정도 있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곤란한데 정말 불친절한 병원 아닌가...” 〈그렇구나〉 하고 나는 남성의 억지에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바늘과 실을 가져다 줄 때까지 꿈적도 않겠다고 언성을 높이는 남자 앞에 마침내 인내가 한계에 다달았다는 듯 한 여의사가 벌떡 일어섰다.
갸름한 얼굴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작게 뒤로 묶은 백의 차림의 여의사는 지적이고 늠름하다. 그녀는 입을 열자마자 예리한 말투로 남성의 언행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고, 둘 사이에 곧바로 격렬한 말의 응수가 개시되었다.
“도대체 당신 같은 비상식적인 사람은 뭘 보고 배웠나.” “내가 할 말이다. 이런 독한 여자를 낳은 부모의 얼굴을 보고 싶다." "그말 잘했다!" ... 숨도 쉴 틈 없는 치열한 언쟁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여의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는 느낌으로 바늘과 실을 찾는 남성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것을 그녀의 동료들이 뒤에서 팔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나는 내가 환자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침대에 상체를 일으켜 그 용감한 여의사의 일거일동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 치열한 공방전은 한 간호사가 어디선가 찾아온 바늘과 실을 남성에게 건네자마자 막이 내렸다. "당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구나. 저 여자랑은 아주 다르다. 젠장." 간호사에게 한마디하고 남자는 떠났다. <그래, 한국 여자들은 강하군! >
봉건적 남존여비의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남성사회의 한국이지만 여성들은 씩씩하고 확실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여성이 해방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일본 쪽에 자기주장이 없는, 남성에게 맞춘 인형 같은 여성이 많은 것은 왜일까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한국 남성은 일본 여성을 매우 동경하고 있다).
시간은 이미 4시에 가깝다. 슬슬 새벽이다. 병원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시작되어, 차례차례로 전개된 광경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 흥분과 문화 충격으로 지쳐버린 나는 금세 깊은 잠이 들었다. 동행해준 지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눈을 감자마자 제트기 엔진 같은 코고는 소리를 병실 안에 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내가 환자들의 수면을 방해한 것이다. 아, 부끄럽다. 아침이 오고 통증도 가라앉아 나는 퇴원하게 되었다. 병원 결제를 하러 갔다 온 지인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것이야말로 드라마틱한 응급병원 체험의 마무리에 어울린다며 놀라움을 넘어 감동마저 느꼈다.
나그네인 나는 당연히 한국의 보험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료비는 십만원 단위의 상당한 고액이었다. 지인이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다고 협상했더니, 무려 반값으로 깍아 주겠다(! )고 했는데 지인이 그래도 여전히 많다고 했더니 "괜찮요. 그럼 돈은 필요 없으니 약은 동네 약국에서 위장약이라도 사먹으세요." 라고 했다고 한다(!? ).
호텔 방에서 구입한 위장약을 먹으며 종일 잔 다음 날, 아직도 휘청거리는 몸 그대로 나는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길로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로 서둘러 갔다. 코너를 맡아 진행을 하던 생방송 공개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격렬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동감과 이해타산 따위는 상관 않는 대범함을 보여준 한국(서울)은 역시 파워풀하다.
마시지도 먹지도 못한 사흘 동안, 게다가 병석에서 일어난 몸인데도 이상하게 활기찬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기분으로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좋아, 신경쓰지 말아요)." 한국을 관통하여 푸른 하늘로 퍼져나가는 듯한 이 말. 가끔 몸에서 숨을 훅 빼고 싶을 때 흥얼거리곤 한다.
● 생명줄만...16
4. 즐거웠던 일, 웃었던 일
기가죽거나 침울할 때가 많다. 해변의 잔모래는 없어질지언정 세상의 골칫거리는 없어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그렇다. 계속해서 골머리를 앓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생각해 보면 나의 삶에도 언제나 어려움의 벽에 부딪혀 망설이고 고민하는 일상을 살아 온 것 같다.
타고난 경박함 탓인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기운이 넘치고 밝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 적극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 괴로운 일과는 무관하고 복 받은 사람 등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 절대 그렇지 않은데... "사는 게 힘들어요" 라고 한숨을 쉬면서 어떻게든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본심이다.
반항기가 한창인 아들 셋은 차례로 속을 썩이며 머리를 아프게 해주고 있어 철모를 쓰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운 것이 요즘의 나의 현실이다. 그래서 "힘든 일 많은 이 세상, 왜 살아가야 하나..." 하고 침울해져 있는데,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가슴속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일까. 기억의 밑바닥에서 떠올라 격려를 해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자주 들리는 캄보디아 음식점 "앙코르 톰" 에 나는 늘 빠져들지만 맛있는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과의 다양한 만남도 큰 매력이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치아 삼피아라 군이 있다. 도쿄이과대학 전기공학과 4학년(지금은 졸업했을 것)으로, 몇 명의 동료들과 떠들썩하게 가게에 찾아온다. 다소 작고 날씬한 몸, 크고 정다운 눈동자, 끊임없이 쏟아지는 미소, 그의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자리는 언제나 밝은 분위기다.
캄보디아가 폴 포트 정권의 통치하에 놓인 것은 치아 군이 열두세 살 무렵이었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만 모은 집단 속에서 4년째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아버지도 그사이 실종돼 살해됐다고 한다.
16, 7살 무렵 태국을 경유해 일본에 온 치아 군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왕따도 겪으면서 열심히 공부해 공립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중학생이었던 치어 군을 가르쳤다는 선생님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굉장히 부지런하고 열심이였다고 말하고 있었다(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일본어를 처음부터 배워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고교에서는 축구부에 들어가 수험공부도 병행해 멋지게 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학원이다, 과외다 하며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들은 부모의 등골을 갉아먹고 있는데, 너는 훌륭해!
머리가 좋고 긍정적이며 끈기가 있고 낙천적이며 게다가 외모가 단아하다. 부러울 정도로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치아 군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감탄하던 나에게 어느 날 치어 군이 해준 말은 충격이었다.
캄보디아에서 강제노동을 당하던 중 어떤 이유였는지 볼보트 병사들이 소년들을 한명씩 죽여갔다고 한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모 대신 치아 군을 키워주던 이모까지 그의 눈앞에서 살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친구들이 차례로 몽둥이에 맞아 죽는 것을 그는 바라만 볼 뿐이었다. 죽음이 일상화되고 있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지고 있었다. 치아 군의 차례가 와서 병사들 앞으로 끌려 나갔다. 체념하고 가해질 일격을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얘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죽이는 건 내일 하자." 막대기를 치켜든 채 한 병사가 가볍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극한 상태 속의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목숨은 하나로 누구에게나 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병사의 기분에 따라 너무나 쉽게 좌우된다니,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처형이 다음날 아침으로 미뤄진 치아 군은 그날 밤 역시 마찬가지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동료들과 함께 이대로 죽임을 당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하여 태국을 향해 도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동료들은 매설된 지뢰가 터져 하나 둘 쓰러져 간다. 그래도 그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수많은 지뢰 사이를 기적적으로 무사히 지나 태국에 도착한 것은 치아 군뿐이었다.
너무나도 험난하고 끔찍한 체험을 말하고 있는 치아 군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담담하게 감정을 억누르며 때로는 마음을 조리게도 하고, 두근거리게도 하는 체험담을 담담하게 이어가던 그가 잠시 말을 끊은 뒤 부드러운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인간은 왜 살고 있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 왔거든요.” 생사의 경계를 넘니드는 나날을 버텨내고 일본에 온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 물음이었다.
"사람은 즐겁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 즐거움을 즐기지 못하면 삶의 힘이 나오지 않는 거죠." 이것이 오랜 자문 끝에 그가 찾아낸 답이다. 맞는 말이다. 이후 그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즐거운 일을 찾아 살아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렇지, 치아 군. 치아 군이 지나온 극한 상태에는 비할 바 없지만 사람은 살다 보면 온갖 고통과 슬픔, 절망에 부딪힌다. 늘 케세라세라(라고 생각한다)인 나도 기죽을 때가 많다. 고생이 있으면 낙도 있다.
모든 불행을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지 말고, 즐거운 일을 찾아내고,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삶의 힘은 분명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면서 문득 고교 시절 절친한 친구가 던진 말 중 하나가 우연히 생각났다.
마음이 침울할 때는 스스로를 격려하려고 활력의 근원이 되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왜 인간은 만들 수 없을까 하는 나의 물음에 허무주의를 자처하던 그녀가 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인류가 평화를 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금가버린 평화라는 글자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아마 사람들은 '웃음'을 결코 잊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웃을 수 있으니까 내일을 향해 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사람은 '웃음'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이 무척 마음에 남았다. 웃음 하면 치아 군과 같은 캄보디아를 모국으로 하는 펜 세탈린의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 친한 친구 세탈린은 앞서 말한 대로 1974년 문부성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왔다.
그런데 이듬해 그녀가 도쿄학예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캄보지아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폴 포트 정권하에서 치아 군이 받은 수난은 그녀의 가족에게도 닥쳤다. 부모님과 동생들을 잃은 것이다. 귀국 후 문부대신이 되어 나라를 위해 힘쓰고 싶었던 그녀는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현재 캄보디아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한편 번역, 통역, 교사, 강연...등 동분서주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 빡빡한 일정 속에서 모국의 아이들에게 수만 권의 교과서를 만들어 나눠주고, 지금 다시 프놈펜에 모자자립센터를 세워 여성의 자립을 돕고 있다.
저 가냘픈 몸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 하고 감탄하는데, 그녀의 힘의 근원은 웃음에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튼 잘 웃는다(배꼽을 잡을 정도다). 캄보디아에는 앙코르와트의 고대 유적 부조에서 보듯 "크메르의 미소" 라는 표현이 있다는데 세탈린은 "크메르의 너털웃음" 으로 불릴 정도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 어려움을 안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그 밝은 웃음소리로 주변 사람 모두를 밝은 얼굴로 만들어 준다. 나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별 것 아닌 것에 웃음을 떠트려 그러다 보면 두 사람 모두 배꼽을 잡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고 있는 것이다.
세탈린은 8남매의 맏이로 네 명의 동생들이 희생되고 말았지만 남은 세 명의 동생들을 찾아냈다. 태국 난민캠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온 세 사람을 그녀는 공항에서 맞이했다.
물론 감격의 대면은 있었지만 웃는 언니와는 대조적으로 세 사람은 전혀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세탈린은 의아해하며 그들에게 물었다. "폴 포트는 너희에게 웃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니?"
실제로 난민으로 일본에 온 캄보디아인으로부터 들은 말로, 캄보디아에서 집단노동을 하고 있을 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고 들은 적이 있다. 웃는다는 것은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이고, 운다는 것은 현재의 생활을 슬퍼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무표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질문에 남동생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누나, 웃을 수 없어. 웃으면 체력이 많이 쓰이니까 웃으면 쓰러져 죽을 지 몰라."
그렇게까지 체력이 쇠약해져 있었다는 것으로 가슴 아픈 설명인데, 그 말을 들은 세탈린은 갑자기 크게 웃고 말았다(그녀가 폴 포트 시대의 캄보디아에 있었다면 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체력 소모로 죽게 될 것이다. 일본에 남아 있어줘서 다행이야,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동생들은 "누나(언니), 너무해, 웃다니" 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웃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다, 체력을 쓰면 죽는다, 그래서 웃지 않는다는 논리가 그녀에게 웃음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또한 세탈린의 배려, 상냥함도 담겨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후에도 표정이 어둡고 굳은 동생들을 늘 웃으며 대했다고 한다. 미소를 되찾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탈린의 남동생도 여동생도 웃는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감으로써 웃음을 되찾아간 것일까. 유학을 떠난 이후 17년 만에 세탈린은 앙코르 유적 학술조사단의 통역으로 캄보디아 땅을 밟았다.
전란과 폴 포트 지배로 완전히 국토도 인심도 황폐해져 버린 모국의 모습 앞에서 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체류 마지막 날을 맞아 세탈린은 앙코르 톰의 바이욘 유적 벽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의 정경을 그는 저서 "나는 '물방울 얼룩말' "(고단샤 刊)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유적 안은 정적으로 가득 차 있고, 혼자 있기에는 불안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한 단계 더 올라가 보려고... 복구용 쇠사다리를 기어올라 저는 최상단에 섰습니다. 순간 기절할 뻔했습니다.
그곳에서 보이는 유적의 대가람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돌에 새겨진 얼굴들이 저를 향해 웃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대단해! 여기가 어디야?" 아...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조금 전까지 정적이 지배하던 공간은 지금 너그럽고 잔잔한 웃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이 웃음이야말로 크메르 바로 그 지체인 것입니다.
이렇게 웃고 있는 사람이 크메르인입니다! 16일 동안 계속 바라보고 느끼던 크메르의 비극의 세계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밝음과 그윽함으로 가득 찬 웃음이 부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바라고 있던 행복이었습니다.
"크메르의 너털웃음" 세탈린은 앞으로도 쾌활하게, 굴탁 없이 웃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캄보디아 사람들이 웃음의 소용돌이를 넓혀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러고 보니 너무 힘들 때 나를 버티게 해준 것도 웃음이었던 것 같다.
또다시 우리 본가의 어두운 이야기가 되고 말지만, 어릴 때부터 집안은 매일같이 풍파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맨정신일 때도, 또 술을 마시면 더욱 그 용암 같은 격렬함 성미를 화산처럼 폭발시켰다.
뭔가 이유가 있기도 했지만 대개는 별것 아닌 일로 시작됐다. 그 대상은 늘 얌전한 어머니였다. 추석과 설날 며칠을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아침부터 밤까지 가업인 철물 가게와 집안일을 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계속 화를 내고 있었다.
가녀린란 어머니의 몸은 이리 뛰고 저리 부딪혀 온몸이 멍투성이었다. 고함, 물건 부서지는 소리, 비명, 울음소리.... 이런 소리들은 반드시 비참한 결과로 이어졌다. 소리가 날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었다.
밤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를 말리면서 자신의 무력함과 슬픈 운명의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생각 등으로 그저 나는 계속 울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웃음을 잊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잊지 못할 장면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심한 폭력을 당해 녹초가 된 어머니 앞에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이어이 울고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표정을 바로 바꾸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익살스러운 몸짓을 하며 웃이 보였다.
어떻게 이럴 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하고 어린 마음에 신기해 했지만, 엄마의 웃는 얼굴은 찌그러져 있던 내 마음을 활짝 펴 주곤 했다. 지금도 우울하거나 울고 싶을 때는 그때의 어머니의 웃음을 문득 떠올리곤 한다.
한편 악역의 아버지지만 분화가 일단락된 뒤에는 온화해지곤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지 부엌에 가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곤 했다(아침이 이른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직접 아침 준비를 하여 식사를 끝내고 일하러 간다. 어머니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마음인 것 같았다).
또 아버지에거서 감탄(?)하는 점은 아무리 때려도 급소만은 피하고 있다는 것(아니면 어머니는 진작 저승에 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병 등으로 약해져 있을 때는 결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간병도 확실히 한다).폭력을 쓸 때도 아버지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차 있던 본가에서의 나날들, 돌이켜보면 그 안에서도 밝고 가벼운 색조의 웃음이 꽃처럼 떠오른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엄마뿐 아니라 엄격하고 무서운 아빠도 가끔 씩씩하게 웃었다. 어떤 삶의 터전에나 인간이 있는 한 유머가 생기고 웃음이 있다.
누군가와 함께 즐겁게 웃었던 장면이 하나라도 있다면(그리고 그걸 떠올려 가슴속에서 재현시켜 보면), 절망 속에 있더라도 분명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웠던 일, 웃었던 일, 삶의 중심에 이 두 가지를 확고히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