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 동창애들을 만났다. 카톡으로 불나게 주고받더니
나한테 전화가 와서는 저녁에 나오란다. 잠깐이라도 얼굴 보이라고.
그러마 하고서 끊어놓고나니 긴세월을 건너서 낯선곳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동산촌.. 전주 변두리. 전에는 완주군 조촌면이었고
도시도 아닌것이 시골같지도 아닌거여서 애매하기 그지 없는 동네였다.
창문 너머로 고층아파트가 올라가던게 대학들어갈 무렵이었고 그 전에는 만경평야 한자락에
밤이면 전주쪽 반짝거리는 도시가 보였다.
내가 살던 곳은 82년에 이사와서 살게 된 곳이고
그 전에는 70년대에 교회앞에서 살다가 서울에 잠깐 있었고 돌아와서는 장동리쪽.. 화게동이라는 조그마한 동네에 있다가
지금 어머니 살고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대충 30년이 넘은 곳이고 지붕만 약간 손보았기에
거의 벽지나 토방이나 문짝같은 것들은 그대로다.
집에는 금성에어컨이 지금도 문짝에 걸려있다. 선풍기는 한 이십년은 되어서 새카맣게 덕지덕지
파리똥이 묻어있고.. 형광등은 나도 잘 모른다. 굉장히 오래된 것이라는 것 밖에는.
나는 이 동산촌이 싫었다.
어둑한 방과 어디선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냄새 만큼이나
생각하기 싫은 옛날 일들이 불쾌하게 따라올라오는 곳이다.
천장으로 지나가는 쥐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어느 여름날 찌는 듯이 더운날
도저히 무슨 냄새인지 알수가 없는 것들이 너무나 역겨워서는 천장을 다 뜯어버렸던 일이 있다.
이것들이 남겨놓은 배설물들이 수두룩하니 쏟아져내렸고.. 그 기억과 같은 무엇들이 파편처럼
불쾌하게 들어붙어 있었다.
고등학교때 심하게 찾아온 열등감 같은 것들, 칠판앞으로 불려나가서는 손도 못대고 들어왔던 수학시간,
학교생활이 적응 안되어 밖으로 밖으로 내달리던 일들, 한번 떨어진 성적이 올라오지 않으면서
비관적으로 받아들은 학력고사 성적표 같은 것들이
죄다 그 집 일이었고.. 그 안에서는 다 말할 수 없는 집안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의 교회 이탈, 큰형과 작은 형의 일들, 모든걸 내려놓고 출애굽처럼 뛰쳐나와야 했던
90년 1월달 일들은 말로 다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니깐 전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시간은
고향을 향하는 설레임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우울함에 젖어들어가는 거였다.
남들이 고향을 생각하면 행복했던 무엇으로 즐거워하지만
나는 잊고 싶었고.. 잊어서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군대 있을때였다. 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이 다니던 교회를 나오셔서
새로 같이 나온 교인들하고 교회를 세웠다. 장로직분이었으니 결국 데리고 나온 주범처럼
여겨졌을 거고, 그게 그렇게 주관이 특별하신 분도 아니신 분이 한동네에서 수십년 지내다가
등을 지게 되니 완전히 마을에서 남이 되어버린 거였다. 그날 이후였을 거다.
내가 동산촌에 대한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동창애들이 다들
적인 된 것같은 느낌이 들어 서로 연락을 할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고, 그래서 외톨이가 된거 같은
그 일 이후였다. 거기는 내 놀이터였고 어려서 청년이 될동안
학교빼고서 내 생활의 거의 전부였던 곳... 그 곳을 잃어버린 거였다.
물론 그동안 이게 뭔지 몰랐고, 잘 살면 되는 거지, 라고 하며 무시했던 것들이
나도 모르게 무겁게 누르고 있었던 거였다.
"나 모른다고 했다며? 어떻게 그럴수가 있어?"
명절 전날 모인자리에서 수인사하다가 한 친구가 툭하고 던져왔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젠가 전화를 하다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던게 분명하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내가 그렇게 그리 되었던 것들을
다 설명할 수 없는 거였다. 그 삼십년 살아오는 동안 동산촌에 대해 가져왔던 세계를 어떻게
한두마디로 다 할수 있을까.
기억이라는 강이 있어 저쪽에 밀어놓고서는 돌아오지 않을 성 싶게
살아오다가 어느날 퍼특.. 그 쪽의 것들이 돌아온것 같다.
동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