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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추구하다. - A.W 토저
*존 웨슬리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가 이제 우리 눈앞에서 확고히 드러난다. "정통 신앙(Orthodoxy), 즉 올바른 견해는 기껏해야 기독교의 아주 얼마 안 되는 일부분이다. 올바른 마음 상태는 올바른 견해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올바른 견해는 올바른 마음 상태 없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고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에 대한 마음 상태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사탄이 그 증거다.“
훌륭한 성서 공회들과 말씀을 보급하는 여러 뛰어난 단체 덕분에, 오늘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다. 아마도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그 수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참된 영적 예배가 지금처럼 약해진 때가 있었을까 싶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라는 예술이 완전히 사라졌고 그 자리에 '프로그램'이라는 이상하고 낯선 것이 들어섰다. 무대에서 빌려 온 이 단어는 이제 다들 예배라고 여기는 공적 의식의 명칭으로 쓰인다. 한심한 지혜가 발휘된 셈이다.
건전한 성경 강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건전한 성경 강해 없이는 어떤 교회도 엄격한 의미에서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일 수 없다. 그러나 강해를 하면서도 청중에게 참된 영적 양분을 전혀 공급하지 못할 수 있다. 영혼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체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청중이 개인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하기 전까지는 진리를 듣는다고 해서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에 대한 친밀하고 만족스러운 지식으로 이끄는 수단이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마음속 중심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감미로움을 맛보고 알도록 이끄는 수단 말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선행(行) 은총 교리를 가르친다. 선행 은총 교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찾아 나서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올바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내면에서 깨우침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완전할지 모르나 참된 역사이며, 이후에 따라올 모든 갈망과 추구와 기도의 숨은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이 먼저 그런 마음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바로 이런 선행적 이끄심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마저 그분께 공을 돌려야 마땅하다. 하나님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 마음은 그분을 가까이 따라가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내내 이미 그분의 손안에 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시 63:8).
하나님의 이런 '붙드심'과 인간의 '따름'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폰 휘겔이 가르친대로, 하나님이 언제나 먼저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즉 하나님의 먼저 일하심과 인간의 현재적 반응이 만나는 곳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쪽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밀한 이끄심이 인지할 수 있는 경험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성경적 진리요, 무익한 율법주의와 부질없는 자력 구원의 노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복된 교리다. 하지만 이 시대에 와서 이 교리는 안 좋은 요소들과 결합했고 많은 이들이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지경이 됐다. 사람들은 신앙적 회심의 과정 전체를 기계적이고 활기 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도덕적 삶에 대한 부담 없이, 아담적 자아[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자기중심적 본성 - 옮긴이]를 전혀 괴롭히지 않고도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자에게 그분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전혀 생기지 않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는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을 향한 배고픔도, 목마름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그 상태로 만족하라고 말하고 자족하라고 격려한다.
현대 과학자들은 경이로운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이로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라는 것과 그래서 우리가 여느 인격과 마찬가지로 그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망각했다. 인격 안에는 다른 인격을 알 수 있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지만, 한 번의 만남으로 다른 인격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두 인격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래 교류한 후에야 둘이 서로를 제대로 탐구할 온전한 가능성이 열린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사회적 교류는 인격과 인격 간의 상호 반응이고, 여기에는 아주 우발적인 접촉에서 인간 영혼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온전하고 친밀한 교제까지 여러 등급이 있다. 진실한 종교의 본질은 '창조하는 인격'이신 하나님께 '창조된 인격'이 반응하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하나님은 인격이시고, 깊고 능하신 신성 안에서 다른 여느 인격처럼 생각하시고 뜻하시고 즐기시고 느끼시고 사랑하시고 원하시고 고통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인격 간의 친숙한 패턴을 따르신다. 그분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정의 경로를 통해 소통하신다. 하나님과 구원받은 영혼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사랑과 생각이야말로 신약성경에서 울려 퍼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시대마다 나름의 특징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종교적 복잡성의 시대다. 우리 가운데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단순성이 있던 자리에 프로그램, 방법, 조직이 들어가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차지하지만 마음의 갈망은 결코 채우지 못한다.
우리의 얄팍한 내적 경험, 공허한 예배, 세상을 비굴하게 모방한 홍보술 등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불완전하게만 알고 그분의 평화는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온갖 종교적 외형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으려면 먼저 그분을 찾겠다고 결심해야 하고, 그다음엔 단순함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은 지금도 '어린아이들'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에게 자신을 철저히 숨기신다. 우리는 하나님께 단순하게 나아가야 한다. 본질적인 것들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다행히도, 알고 보면 본질적인 것은 몇 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 모든 시도를 버리고 어린아이의 거짓 없는 솔직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분명 빠르게 응답하실 것이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면, 하나님 외에는 달리 필요한 게 거의 없다. '하나님 그리고 더'를 추구하는 악한 습관은 온전한 계시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게 막는 지독한 방해물이다. '그리고 더'에 우리의 큰 재앙이 있다. '그리고 더'를 치워 버린다면 우리는 금세 하나님을 찾게 될 테고, 남몰래 평생 갈망한 것을 그분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할 때 우리 삶이 좁아지거나 마음의 벅찬 움직임이 제한될지 모른다고 두려워할 것 없다.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하나님을 우리의 전부로 삼고, 그분께 집중하고, 그 한 분을 위해 많은걸 희생해도 아무 지장이 없다.
*영국의 진기한 고전 The Cloud of Unknowing(무지의 구름)의 저자는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의 겸손한 추진력으로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지성이나 의지에 작용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영혼의일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 모든 것을, 심지어 우리의 신학까지 다 벗어 버리라고 다시금 권한다. "하나님 외의 다른 어떤 동기도 없이, 그분을 직접적으로 꾸밈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의 이런 생각 아래에는 신약성경의 진리라는 광대한 기초가 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값 주고 사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하나님이다. 그리고 그는 단순함에 찬성한다.
그는 종교를 "한 단어로 정리하여 표현하려고 한다면 "더 나은 내용 파악을 위해 짧은 한 음절 단어를 택하라”고 권한다. "두 음절보다 한 음절 단어가 낫습니다. 짧은 단어일수록 성령의 일에 더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GOD'(하나님)이나 'LOVE'(사랑)가 바로 그런 단어입니다."
주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나눠 주셨을 때, 레위지파는 그 땅의 어떤 부분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레위 자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민 18:20, 새번역).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레위를 그의 모든 형제보다 부유하게 하셨고, 세상에 살았던 그 어떤 왕과 군주보다도 더 부유하게 하셨다. 여기에 영적 원리가 있고, 이 원리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모든 제사장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을 자신의 보물로 여기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다. 많은 평범한 보물들은 갖지 못할 수도 있다. 평범한 보물을 갖는 게 허락된다 해도, 그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게 누그러진터라 그의 행복에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보물들이 차례로 그를 떠나가는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는 상실감을 별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신 분을 소유한 그는 그분 안에서 모든 만족, 모든 쾌락, 모든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잃는다 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온전히, 합법적으로, 영원히 소유하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은 땅에 인간을 만드시기 전, 그들이 존속하고 즐길 수 있도록 유용하고 좋은 것들의 세계를 먼저 창조하심으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는 그 모두를 '사물'(things) ['온갖 것들', '다른 것들'로도 옮겼다 - 옮긴이)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인간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언제나 인간에게 외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어야 했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나님 외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들어갈 자격이 없는 성소가 있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밖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퍼부어 주신 수천 가지 선물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여러 문제가 생겼고, 하나님의 선물들이 도리어 우리 영혼을 망칠 수 있는 잠재적 근원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의 성소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온갖 것들'을 허용하면서 우리의 불행이 시작됐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다른 것들'이 권좌를 차지했다. 이제 사람들은 본성상 마음에 평화가 없는 상태가 됐다. 하나님이 마음의 왕좌에 좌정해 계시지 않고, 그곳의 도덕적 어스름 속에서 완고하고 공격적인 왕위찬탈자들이 왕좌에 오르려고 서로 싸우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은유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진정한 영적 곤경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거칠고 질긴 뿌리를 가진 타락한 생명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본성은 소유하는 것, 언제나 소유하는 것이다. 그 본성은 깊고 치열한 열정으로 온갖 것들을 탐낸다.
"my" (나의), "mine"(나의 것) 같은 대명사들은 글로 써 놓으면 무난해 보이지만, 이 대명사들을 끊임없이 어디서나 사용하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는 옛 아담에 속한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1,000권의 신학 서적보다 더 잘 드러내 준다. 우리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을 보여 주는 언어적 징후다.
우리 마음의 뿌리들이 온갖 것들로 깊숙이 파고들어 갔고, 우리는 죽기라도 할까 봐 잔뿌리 하나도 감히 뽑지 못한다. 우리에겐 온갖 것이 기어코 필요하게 됐고, 이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적이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 이제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고, 이 극악한 교환으로 자연의 과정 전체가 뒤틀렸다.
우리 주님은 온갖 것들이 인간을 압제하는 이런 상황을 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4-25).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길은 '영혼의 가난'과 '모든 것을 포기함'이라는 외로운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복 있는 사람들은 모든 외적인 것들을 부인하고 마음에서 소유욕을 모두 뿌리 뽑은 이들이다. “심령이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의 내면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거지의 외양과 비슷하다.
그리스도께서 쓰신 "가난한"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의미다. 복받은 이 가난한 사람들은 더는 온갖 것들의 압제에 시달리는 노예가 아니다. 이들은 압제자의 멍에를 끊었다. 싸움이 아니라 순복함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이들은 모든 소유욕에서 벗어났지만 모든 것을 소유한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마 5:3).
나는 독자에게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싶다.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다른 많은 교리와 함께 머릿속에만 쟁여 둘 성경의 가르침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는 더 푸른 초원으로 가는 길, 하나님의 산의 가파른 경사를 깎아 만든 길로 안내하는 표지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추구를 이어 가려면 이 길을 감히 건너뛰려 해서는 안 된다. 한 번에 한 걸음씩 올라야 한다. 한 걸음을 거부하면 우리의 전진은 끝나고 만다.
자주 그렇듯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 영적 삶의 원리의 최고 사례를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는 하나님께 항복한 삶을 보여 주는 극적인 그림이며 팔복의 첫 번째 복에 대한 탁월한 주석이다.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할아버지가 되고도 남을 만큼 나이가 많았다. 아이는 즉시 아버지 마음의 기쁨과 우상이 됐다. 몸을 굽혀 아이의 작은 몸을 어색하게 품에 안았던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아들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노예가 됐다. 하나님은 이 애정의 강력한 힘을 일부러 언급하셨다. 왜 그러셨는지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아기는 하나님의 약속, 언약, 여러 해 동안 품은 소망과 메시아를 기대하는 오랜 꿈까지,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에 있던 신성한 모든 것을 상징했다. 아기였던 아들이 청년으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노인의 마음은 아들의 삶과 점점 더 긴밀하게 결합됐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위험한 지경까지 다다랐다. 바로 그때, 이 정화되지 않은 사랑의 결과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구해 내시고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성경 기자는 그날 밤 이 노인이 하나님과 결판을 내고자 브엘세바 인근 산등성이에서 고뇌했던 장면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지만, 조심스럽게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별빛 아래 구부린 몸과 홀로 몸을 떨며 씨름하는 노인의 모습을 두려운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씨름하시기 전까지는, 이만한 치명적 고통을 겪은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노인으로서는 자신이 죽는 게 차라리 나았으리라. 그것이 아들을 죽이는 일보다 1,000배는 쉬웠을 것이다.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하나님과 그토록 오랫동안 동행했던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흐려지는 그의 눈에 담기는 건장한 아들의 모습은 마지막 순간에 달콤한 즐거움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아들은 살아남아 아브라함의 계보를 이어 갈 테고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오래전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들을 직접 성취하게 될 터였으니까.
그런 젊은 아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상처 입고 저항하는 마음은 어찌어찌 꺾어 순복시킨다 해도,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들을 죽이는 행위와 어떻게 조화시킨단 말인가?(창 21:12) 이는 아브라함에게 불같은 시힘이었다. 그러나 그는 호된 시련의 도가니에서 쓰러지지 않았다. 이삭이 누워 잠자는 천막 바로 위에서 별들이 아직 하얀 점들처럼 또렷하게 빛나고 있을 때, 어스레한 여명이 동쪽을 밝게 비추기 한참전, 늙은 성자는 마음을 정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아들을 바치고, 하나님이 아들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부활시키실 것을 신뢰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옛 New-England Primer(뉴잉글랜드 초급독본)에 나온 대로 "신학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합의한"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은 '무엇'과 '왜'라는 유구한 질문을 던지고 평범한 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한 문장으로 그에 답한다. "질문: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스물네 명의 장로는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분께 엎드려 경배하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
하나님은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지으셨고, 그분과 신적 교제를 나누며 가까운 인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달콤하고 신비로운 교류를 경험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보고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의 미소에서 생명을 얻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존 밀턴이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의 반역을 묘사하면서 거론한 것처럼 "흉악한 배반"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졌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사랑하지 않게 됐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분의 임재를 피해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대하 6:18: 왕상 8:27. 새번역), 또 솔로몬의 지혜서가 증언하는 것처럼 "주님의 영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데" 누가 달아날 수 있겠는가? 주님의 무소부재(無所不)는 하나님의 한 가지 특성이고 그분의 완전하심에 필요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분의 분명한 임재는 하나님의 또 다른 특성이다. 우리는 아담처럼 그분의 임재를 피해 달아나 동산의 나무들 사이에 숨었고, 베드로처럼 움츠러들며 "주여 나를 떠나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외쳤다(눅
5:8).
그러니까 지상의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생명, 우리의 정당하고 합당한 거처이자 첫 번째 상태였던 '행복한 중심'에서 떨어져 나온 생명이다. 첫 번째 상태를 잃어버려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 흉악한 배반의 비극적 결과를 원상태로 되돌리고 하나님과의 올바르고 영원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의 죄가 만족스럽게 처리돼야 하고, 온전한 화해가 이루어져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의 의식적 교제로 되돌아가, 이전처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길이 열려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먼저 일하셔서 우리가 그분께 돌아가도록 마음을 움직이신다. 우리의 불안한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열망을 느끼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내면에서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처음으로 의식하게 된다(눅 15:18). 이것이 첫걸음이며, 중국의 현인 노자가 말한 것처럼 "천리 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된다."
구약성경의 성막은 죄의 황무지를 떠나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상태에 이르는 영혼의 내적 여행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돌아온 죄인은 먼저 바깥뜰로 들어가 놋 제단 위에서 피의 제사를 드리고 그 옆에 있는 대야에서 몸을 씻었다. 그다음 휘장을 지나 성소로 들어갔다. 성소에는 자연광이 들어오지 못했지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금 촛대가 성소 안을 은은하게 두루 비추었다. 그곳에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진설병(하나님 앞에 차려 놓은 떡)과 쉬지 않는 기도의 상징인 분향단도 있었다.
예배자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주 많은 것을 누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또 다른 휘장이 그와 지성소를 갈라놓고 있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의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뜻. 속죄소라고도 한다. 언약궤를 덮는 덮개- 옮긴이] 위에 경이롭고 영광스럽게 나타나셨다. 성막이 서 있는 동안, 오직 대제사장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것도 1년에 한 번,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바치는 피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주님이 갈보리에서 숨을 거두셨을 때 바로 이 마지막 휘장이 찢어졌고, 성경 기자는 이로써 새로운 살길이 열려 세상의 모든 예배자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곧장 들어갈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히 10:20).
*신약성경의 모든 내용이 구약성경의 이 그림과 일치한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이제 지성소에 들어가길 두려워하며 발을 멈출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당당히 들어가 거기서 평생토록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를 의식적 경험으로 깨달아야 한다. 이는 받아들여야 하는 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누려야 할 삶이다.
임재의 불은 레위기 율법 질서 안에서 박동하는 심장이다. 그것이 없으면 성막의 모든 요소는 모르는 문자에 불과할 뿐, 이스라엘에게나 우리에게나 아무 의미가 없다. 성막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호와가 그곳에 계신다는 것이었다. 임재하신 하나님이 휘장 안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교의 핵심 사실이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에는 구원받은 자녀들이 그분의 임재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되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지금 유행하는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임재를 이론적으로만 알 뿐 지금 그분의 임재를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 기독교는 우리가 지위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임재를 실제로 경험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 같은 사람들을 이끌었던 불타는 마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현세대의 그리스도인은 이런 불완전한 척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측정한다. 비루한 만족이 불타는 열정을 대신한다. 법적으로 소유한 것에 안주하고 만족할 뿐, 인격적 경험이 없다는 데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다.
휘장 뒤에서 불로 나타나 거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창조하셨다." 그분은 "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시다. 온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오신 빛이시고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진정한 하나님이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고 태어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셨다." 또 그분은 "성령이시다. 생명의 주인이자 생명을 주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니케아 신경).
하지만 이 거룩한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다.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 위격을 합성하지 않고 실체를 분리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한 위격이시고 아들도 한 위격이시며 성령도 한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격은 하나이며, 그 영광은 동등하고 위엄은 함께 영원하다"(아타나시우스 신경).
*휘장 뒤에서 불로 나타나 거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한 분 하나님,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창조하셨다." 그분은 "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시다. 온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오신 빛이시고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진정한 하나님이다. 그분은 창조되지 않고 태어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니셨다." 또 그분은 "성령이시다. 생명의 주인이자 생명을 주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다(니케아 신경).
하지만 이 거룩한 삼위는 한 분 하나님이다. "우리는 삼위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일체이신 삼위를 예배하되 위격을 합성하지 않고 실체를 분리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한 위격이시고 아들도 한 위격이시며 성령도 한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격은 하나이며, 그 영광은 동등하고 위엄은 함께 영원하다"(아타나시우스 신경).
휘장 뒤에 이 하나님이 계신데도 세상은 이분을 "더듬어 찾아 발견"해야 할 것처럼 느껴 왔다는 것은 이상한 모순이다(행 17:27).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자신을 어느 정도 드러내셨지만 성육신으로 더욱 완전하게 드러내셨다. 이제 하나님은 겸손한 영혼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망하고 있고,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 우리의 종교적 문제 대부분에 대한 즉효약은, 영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문득 인식하는 것일 테다. 이 경험은 우리로 처량한 편협함에서 벗어나게 하고 넓은 마음을 갖게 할 것이다. 덤불에 있던 벌레와 곰팡이를 불에 태우듯 우리 삶에서 불순함을 태워 없앨 것이다.
이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우리가 마음껏 활보할 수 있는 광활한 세계시요, 얼마든지 헤엄칠 수 있는 드넓은 바다시다. 그분은 영원하시다. 이 말은 시간에 앞서 계시고 시간과 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시간은 하나님 안에서 시작됐고 그분 안에서 끝날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에 찬사를 보내지 않으시고, 시간으로 인해 변하지도 않으신다
*사랑과 자비와 의가 그분의 것이다. 어떤 비교나 비유로도 형언 할 수 없는 그분의 거룩함을 표현할 수 없다. 불이 그나마 그 개념을 희미하게나마 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불붙은 가시떨기 가운데 나타나셨다. 긴 광야의 여정에서는 줄곧 불기둥에 거하셨다. 성소의 그룹(케루빔 천사) 날개 사이에서 빛났던 불은 이스라엘의 영광의 세월 내내 '세키나', 곧 임재라고 불렸다. 그리고 구약이 신약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 하나님은 오순절에 타는 불꽃으로 오셔서 각제자 위에 임하셨다.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향한 지성적 사랑에 관해 글을 썼고, 그 말에는 어느 정도 진리가 담겨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은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의 영만이 그분을 실제로 알 수 있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불이 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던 이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그들의 깊고 진실한 헌신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잠깐만 멈춰 생각해도 그들의 이름이 상아 궁전에서 흘러나오는 몰약과 알로에와 계피 향처럼 우리 곁을 우르르 스쳐 간다.
프레더릭 페이버는 어린 사슴이 시냇물을 바라듯이 하나님을 간절히 바랐다. 그 사모하는 마음을 향해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많이 보여 주셨는지, 이 선한 사람은 전 생애에 걸쳐 보좌 앞에 있는 스랍(세라핌 천사)에 비길 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흠모하며 살았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을 향해 똑같이 퍼져 나갔지만, 그는 각 위격에 합당한 특별한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앉아서 하나님만 생각하니
이 얼마나 기쁜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 이름을 호흡하니
땅에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구나.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의 상급이시여!
주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황홀할까요!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은 너무나 강렬하여 그를 불살라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사랑이 달콤하고 거룩한 광기로 그의 내면에서 불타올라 그의 입술에서 녹은 순금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설교 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어디로 몸을 돌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중간이시며 끝이십니다. 그분은 종들에게 선하지 않은 면, 거룩하지 않은 면, 아름답지 않은 면, 기쁘지 않은 면이 없습니다. 아무도 가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택하기만 하면 예수님을 자신의 재산과 소유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풀이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기쁨이시고, 슬퍼하는 마음에 들어가시는 것을 기뻐하시니까요.
우리는 많은 것을 과장할 수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얼마나 막중하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자비롭고 풍성한지는 결코 과장할 수 없습니다. 평생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분께 드리는 사랑 고백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부 배우거나 그분이 하신 일을 다 찬양하려면 영원도 짧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과 함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그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어짐으로 휘장이 치워졌기에 하나님 쪽에서 보면 우리가 성소에 들어가는 걸 막는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밖에서 지체할까? 왜 일평생 지성소 바깥에서만 머물고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까? 신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 우리는 그 소리가 우리를 부르는 것임을 감지하면서도 여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성막 바깥뜰에서 늙고 지쳐 간다. 무엇이 우리를 막고 있을까?
흔히 주어지는 답변인 우리의 '냉랭함'이 모든 사실을 다 설명하진 못할 것이다. 마음의 냉랭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 냉랭함 배후에 있고 그것의 원인일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휘장이다. 그것은 첫 번째 휘장과 달리 치워지지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빛이 들어오는 걸 막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우리 육신의 타락한 본성이 심판받지도,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거부되지도 않은 채 우리 안에 그대로 살아 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 삶이라는 이 촘촘히 짠 휘장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지만 속으로는 부끄럽게 여겨 왔고, 그런 이유로 십자가의 심판대 앞에 가져가지 않았다. 이 불투명한 휘장은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알아보기 힘들지도 않다. 그저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거기 있는 휘장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깁고 덧대고 수선됐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 삶의 원수이고 영적 성장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이 휘장은 아름다운 물건이 아니고 우리가 흔히 말하고 싶어 하는 주제도 아니지만, 나는 지금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목마른 영혼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그들이라면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잠시 어두운 산을 통과해야 한다고 해서 돌아서지는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기에 분명 하나님을 계속 추구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불쾌한 사실이라도 직시할 것이고 자기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며 짊어진 십자가를 견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내면의 휘장을 짠 실들을 담대하게 거명한다.
이 휘장은 자기중심적 삶을 구성하는 가느다란 실들, 인간의 영과 직결된 죄들로 짜여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의 모습이고, 여기에 그 교묘함과 힘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기중심적 죄들(self-sins)은 자기 의, 자기 연민, 자기 확신, 자기 충족성, 자기 예찬, 자기애 그리고 이와 같은 다른 여러 죄다. 이 죄들은 우리 안에 너무나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우리 본성의 아주 큰 부분이기에 하나님의 빛이 집중적으로 비치기 전까지는 우리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이 죄들 중에서도 좀 더 심각한 경우인 이기주의, 과시욕, 자기 홍보는 흠 없는 정통 신학을 내세우는 기독교 집단 내에서도 이상하게 지도자들이 용인한다. 이죄들이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많은 사람이 복음과 동일하다고 여길 정도다.
*자아는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불투명한 휘장이다. 자아를 제거하는 일은 영적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며, 가르침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다. 가르침으로 자아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마치 나병을 붙들고 잘 가르쳐서 몸에서 내보내려는 시도와 같다. 하나님이 자아를 파괴해 주셔야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십자가를 초대하여 우리 안에서 자아를 죽이는 일을 맡겨야 한다. 자기중심적 죄들을 십자가로 가져가 심판받게 해야 한다. 우리는 구세주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셨을 때 통과하셨던 것과 같은 고난과 시련을 어느 정도 겪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기억하자. 휘장의 찢어짐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그에 관해 생각하는 건 왠지 시적이고 유쾌할 정도다. 그러나 실제로 휘장이 찢어지는 일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 휘장은 영혼의 생체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전 존재를 구성하는 감각이 살아 있고 떨리는 그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건드리면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것을 억지로 떼어 내면 상처가 생기고 아프고 피가 흐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십자가가 아니라고, 죽음을 죽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는 건 결코 즐겁지 않다. 생명을 이루는 귀중하고 부드러운 조직을 찢으면 극심한 고통이 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십자가는 예수님께 바로 그런 일을 했고,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려 할 때 다시 그 일을 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휘장을 찢겠다고 내적 생명에 어설프게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셔야 한다. 우리의 역할은 맡기고 신뢰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삶을 고백하고 버리고 거부한 다음에는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안일한 '수용'을 하나님의 진짜 일하심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임의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식의 피상적 교리에 만족하면 안 된다. 그런 처사는 사울처럼 양 떼와 소 떼 가운데 가장 좋은 것들은 살려 두는 꼴이다(삼상 15:7-9).
하나님의 일하심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그분께 구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거칠고 치명적이지만 효과적이다. 십자가는 희생자를 영원히 매달아 두지 않는다. 처형이 끝나고 고통받는 희생자가 죽는 순간이 온다. 그다음 부활의 영광과 권세가 나타나고, 희생자는 고통을 잊은 채 기쁨을 누린다. 휘장이 치워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것을 영혼이 실제로 경험할 때 찾아오는 기쁨이다.
*여기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내용이 있다. 구원 사역이 우리 마음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영적 기능은 그의 본성 안에 잠든 채 쓰이지 않고 본연의 목적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는 죄로 인한 결과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사람이 거듭나면 다시 생명력 있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측량할 수 없는 유익 중 하나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의 모습은 어떤가. 그들은 왜 성경이 제시하는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에 그토록 무지한가? 답은 우리의 만성적 불신이다. 우리의 영적 감각은 믿음의 힘으로 작동한다. 믿음에 결함이 생기면 내면이 영적인 일에 둔감해지고 무감각해지는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다. 이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아무 그리스도인이든 만나서 대화를 나누거나 문이 열려 있는 주변 교회에 들어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영적 세계는 우리 주변 모든 곳에 자리한다. 우리 내면의 자아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아우른 채 우리가 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임재에 반응하기를 기다리신다. 이 영원한 세계는 우리가 그 실재를 믿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세계가 될 것이다.
나는 방금 따로 정의가 필요한 두 단어를 썼다. 정의를 내리기가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내가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는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다. 바로 "믿다"와 "실재"다.
내가 이해하는 "실재" (reality)는 어떤 정신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 그에 대해 생각하는 정신이 없어도 존재할 어떤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실재는 그 타당성을 관찰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하기에 관념에 머무는 관념의 유희를 즐기지 않는다. 그는 과시용으로 근사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의 모든 믿음은 실제적이고, 그 내용은 그의 삶에 맞춰져 있다. 그는 그 믿음으로 살거나 죽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과 다가올 모든 시간에 그 믿음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돌아선다.
진실한 보통 사람은 세상이 실재한다는 걸 안다. 깨어나서 정신이 들면 세상이 여기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이 생겨난 게 아님을 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세상이 여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이 땅에서 떠날 준비가 될 때 떠나는 그에게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할 것임을 안다. 인생의 깊은 지혜를 가진 그는 의심하는 1,000명의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 그는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얼굴에 불어오는 바람과 부딪치는 빗방울을 느끼고, 그것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안다. 낮에는 해, 밤에는 별들을 본다. 어두운 뇌운에서 뜨거운 번개가 번뜩이는 것을 본다.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기쁨과 고통의 외침을 듣는다.
그는 이것들이 실재한다는 걸 안다. 밤에 차가운 땅에 누워 잠든 사이에 이것들이 환각으로 밝혀지거나 사라져 버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침에 깨어나면 전날 밤에 눈을 감았을 때처럼 발아래는 견고한 땅이, 위에는 파란 하늘이, 주위에는 바위와 나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실재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기뻐한다.
그는 오감으로 이 실재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를 창조하시고 이와 같은 세계에 그를 두신 하나님이 선사하신 기능들을 가지고 물리적 존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파악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분명히 실재하신다. 그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절대적이고 최종적 의미에서 실재하신다. 다른 모든 실재는 그분의 실재에 의존한다. 위대한 실재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한 피조물의 총합을 구성하는 '더 낮고 의존적인 실재'의 창조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에 관해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관념과도 독립적으로, 별개로, 객관적으로 존재하신다. 예배하는 마음은 예배의 대상을 창조할 수 없다. 거듭남의 아침이 밝아 도덕적 잠에서 깨어날 때 여기서 그분을 발견할 따름이다.
*명확히 해야 할 또 다른 단어는 "믿다"(reckon)이다. 이 단어는 시각화나 상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상은 믿음이 아니다. 두 단어는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날카롭게 대립한다. 상상은 실재하지 않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투사하여 거기에 실재성을 부여하려 든다. 믿음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이미 거기 있는 걸 의지할 뿐이다.
하나님과 영적 세계는 실재한다. 우리는 주변의 친숙한 세계를 믿는 것만큼이나 확신 있게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믿을 수 있다. 영적인 것들은 분명히 존재하면서("여기 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신뢰를 요구한다.
우리의 문제는 나쁜 사고 습관이 굳어졌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육체적 눈에 보이는 세계만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밖의 다른 모든 세계의 실재성을 의심한다. 영적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세계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의미에서 실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밤낮으로 밀고 들어와 우리의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떠들썩하고 멈출 줄 모르고 자기를 과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호소하지 않는다. 우리의 오감을 공략하면서 자기를 실재하는 최종적 세계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죄가 우리 마음의 렌즈를 잔뜩 더럽혀 놓은 바람에 우리는 주위에서 빛나는 다른 실재, 하나님의 도성(都城, city)을 보지 못한다. 이에 감각의 세계가 승리한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의 원수가 되고, 일시적인 것이 영원한 것의 원수가 된다. 이것이 비극적인 아담 종족의 모든 구성원이 물려받은 저주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 실재다. 우리의 생각은 맹목적인 우리의 본성적 마음과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는 보이는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따로 교정받지 않으면 영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둘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실재하는 것과 가상의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대립이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은 대립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은 실재한다.
진리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손짓하는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영적인 것을 무시하는 고질적인 습관을 깨뜨려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관심을 옮겨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실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는 믿음 생활의 기본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한한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첫 번째가 없이는 두 번째도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뿌리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 실재다.
우리의 생각은 맹목적인 우리의 본성적 마음과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는 보이는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따로 교정받지 않으면 영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둘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 진다. 실재하는 것과 가상의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사이의 대립이다. 여기서 영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은 대립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은 실재한다.
진리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손짓하는 빛과 능력의 영역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영적인 것을 무시하는 고질적인 습관을 깨뜨려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관심을 옮겨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실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는 믿음 생활의 기본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한한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첫 번째가 없이는 두 번째도 없다.
하나님을 정말 따르고 싶다면 '다른 세상'을 지향해야 한다. 나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다른 세상'이라는 말을 경멸조로 사용하고 책망의 표시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라고 하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모든 사실을 앞에 놓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관심 영역으로 선택한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를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로 인해 손해를 본다면, 그건 우리 몫이다. 우리가 이익을 본다면, 그 이익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얻은 게 아니다. 이 세상이 멸시하고 술꾼이 노래로 조롱하는 '다른 세상'은 우리가 신중하게 선택한 목표이고 우리 의 가장 거룩한 갈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다른 세상'을 미래로 밀어내는 흔한 잘못은 피해야 한다. 다른 세상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다른 세상은 우리에게 친숙한 물리적 세계와 동시에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의 문은 열려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이 문장은 분명히 현재 시제다).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이 모든 내용은 "만질 수 있 는 산과 들리는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와 대조를 이룬다(히 12:18-19). 시내산의 실재들을 오감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시온산의 실재들은 영혼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도 안전하지 않을까? 그것도 상상력의 묘기를 부려서가 아니라 완전한 현실로서 말이다. 영혼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약해졌을지 몰라도, 이제는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손길로 살아나 가장 날카롭게 보고 가장 예민하게 들을 수 있게 됐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 물질이 아니었다. 물질은 스스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이 생겨나려면 그 이전의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원인이시다. 태초에 법칙이 있지 않았다. 법칙은 모든 창조 세계가 따르는 과정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 과정은 누군가가 설계해야 하고,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있었던 건 정신도 아니었다. 정신 또한 창조된 것이고 그 배후에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 태초에 물질, 정신, 법칙의 자존하는 원인이신 하나님이 계셨다. 우리는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아담은 죄를 지었고, 겁에 질린 나머지 불가능한 일을 미친 듯이 시도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숨으려고 했다. 다윗도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달아날 생각을 했던 게 분명하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쓰지 않았던가(시 139:7).
이 구절에 이어서 하나님의 내재성의 영광을 찬양하는 대단히 아름다운 시편이 펼쳐진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편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8-10절). 다윗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그분의 보심이 같은 것임을 알았다. 보시는 하나님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와 함께하시면서 생명이 펼쳐지는 신비를 지켜보셨음을 알았다.
솔로몬은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대하 6:18). 바울은 아덴[아테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7-28).
만약 하나님이 공간의 모든 지점에 임재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을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면, 왜 그 임재는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찬양받는 사실이 되지 않았을까? 족장 야곱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이 질문에 대답했다(신 32:10). 그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경이감에 사로잡혀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 야곱은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원을 단 한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문제였고 우리의 문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 줄 모른다. 그들이 안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질까.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지 않았지만 지성을 갖춘 평범한 사람이 이 성경 본문(요 1:1] 을 접한다면 이런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사도 요한은 '말씀하시고 자기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임을 가르치려 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의 생각은 옳을 것이다. 말은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영원하신 성자께 적용하면, '자기표현'이 하나님의 속성에 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영원히 피조물에게 자신을 알리려 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성경 전체가 이 생각을 지지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지금' 말씀하신다. 그분은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신다. 세상을 그분의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채우신다.
하나님의 세상에 있는 그분의 음성은 우리가 상대해야 할 위대한 실재 중 하나다. 가장 간단하고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우주생성론은 이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 [도다] "(시 33:9). 자연법칙의 원인은 창조 세계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생겨나게 한 하나님의 이 말씀이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기록되거나 인쇄된 말이 아니라 만물의 구조 안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생명의 잠재력을 가득 채우는 하나님의 숨결이다. 그분의 음성은 자연에서 가장 강력한 힘, 아니 유일한 힘이다. 모든 에너지가 존재하는 건 오로지 능력으로 충만한 말씀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고, 기록되어 있기에 잉크와 종이와 가죽으로 제한되고 한정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주권자 하나님이 자유로우신 것처럼 살아 있고 자유롭다. “내 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음은 오로지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응하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된 말씀을 전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현재의 음성이다. 이 음성이 없다면 기록된 말씀은 그저 책의 앞뒤 표지 사이에 갇혀 잠들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과 물리적으로 접촉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은 저급하고 원시적인 견해다. 성경은 이와 다르게 가르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 9).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깨닫는다(히 11:3). 우리는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그분의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음성임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세상을 채우는 그분의 음성은 성경보다 헤아릴 수 없는 세기를 앞서고, 창조의 새벽 이래로 한 번도 침묵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여전히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두루 울려 퍼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빠르고 강력하다. 태초에 하나님은 무(無)를 향해 말씀하셨고 무가 유(有)가 됐다. 그 음성을 듣고 혼란이 질서가 됐고, 어둠이 빛이 됐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
원인과 결과가 짝을 이룬 이 문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줄곧 나타난다(창 1:6-7, 9, 11, 14-15, 24.29-30). "이르시되”가 “그대로"를 설명한다. “그대로"는 "이르시되"가 끊임없이 현재가 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말씀하신다. 이 두 진리가 성경의 다른 모든 진리의 배후에 있다. 이 두 진리 없이는 계시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성경은 멀리 떨어진 우리가 아무 도움 없이 읽도록 하나님이 쓰셔서 사자 편으로 보내 주신 책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책이고, 하나님은 이 말씀들 안에서 살아 계시며 끊임 없이 말씀하시고 그 능력이 대대로 이어지게 하셨다.
하나님의 호흡이 흙에 닿자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호흡이 사람에게 닿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들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죽음을 정하셨다(시 90:3). 추가로 더 말씀하실 게 없었다. 지구상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출생에서 죽음으로의 인류의 서글픈 행렬은 하나님의 처음 그 말씀으로 충분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경청하는 사람은 누구나 천국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지금은 경청하라는 권고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시대가 분명히 아니다. 오늘날 경청은 인기 있는 종교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경청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다. 소란스럽고 규모를 키우고 활동적이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신다는 흉측한 이단적 주장을 교회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용기를 내도 될 것 같다. 하나님은 마지막 큰 싸움의 폭풍에 휘말려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이 말씀을 하신다. 마치 우리의 힘과 안전은 소란이 아니라 침묵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중요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다. 성경을 펼쳐 놓고 있으면 더 좋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그분이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이 과정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 그다음에는 여전히 또렷하진 않지만 보다 알아들을 만한 음성이 들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성령께서 성경을 밝혀 주시는 행복한 순간이 찾아온다. 이전에는 소리에 불과했고 잘해야 음성이었던 것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말, 친한 친구의 소리처럼 따뜻하고 친밀하고 또렷한 말이 된다. 그러면 생명과 빛이 찾아올 테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와 모든 것 되심을 인정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우주 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살아 있는 책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죽어 있는 비인격적인 곳으로 여기던 상태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로 넘어가는 건 대부분의 사람에게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시도해도, 그 말씀이 실제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겉으로는 "이 말들은 내게 주어진 거야"라고 말할지 몰라도, 마음속에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거나 모를 수 있다. 그는 분열된 심리의 희생자다. 하나님을 책에서만 말씀하시고 다른 모든 곳에서는 침묵하시는 분으로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민수기의 극적인 이야기에서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민 21:4-9). 이스라엘은 낙심했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런 그들 사이에 주님은 불뱀을 보내셨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6절). 그러자 모세는 그들을 위해 간구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뱀에게 물렸을 때의 치료법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볼 수 있게 장대에 매달라고 명하셨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모세는 그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9절).
역사의 이 중요한 한 조각에 대한 해석이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빌려 등장한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청중에게 구원받는 법을 설명하시면서 그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그 내용을 분명하게 나타내시고자 민수기의 이 사건을 거론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 평범한 사람은 중요한 발견을 할 것이다. '보다'와 '믿다가 동의어라는 데 주목하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뱀을 '보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한 행위다. 즉, '보는 것'과 '믿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은 외적인 눈으로 보았지만, 믿는 일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그는 믿음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그가 전에 읽었던 구절들이 떠오를 것이고 그 구절들의 의미가 홍수가 밀려들 듯 깨달아질 것이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시34:5).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1-2). 이 구절들에서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분이 자비를 베푸실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이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셨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마 14:19). 정말이지 예수님은 언제나 내면의 눈으로 아버지를 보심으로 그분의 일을 하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의 능력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었다(요 5:19-21).
*그렇다면 믿는 것은 곧 마음의 관심을 예수님께 두는 일이다. 마음을 들어 올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는 것'이고 남은 평생 동안 그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려울 수 있지만, 경이로운 그분을 무리하지 않고 차분하게 꾸준히 바라보다 보면 점점 쉬워진다. 딴생각이 방해 거리가 될 수 있지만, 일단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 잠시 딴생각을 했다가도 다시 주의를 되찾고 그분께 주목하게 된다. 새가 여기저기 떠돌다가도 둥지 튼 창으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 한 번의 헌신, 예수님을 영원히 응시하겠다는 의사(思)를 확고히 하는 한 번의 커다란 의지적 행위를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은 이 의사를 우리의 선택으로 받으시고, 우리의 주의가 1,000번이나 분산되어 악한 세상에 갇혀도 너그럽게 사정을 헤아리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의 방향을 정했다는 것을 아신다. 우리도 그것을 알 수 있고, 영혼의 습관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얼마 후면 그 습관은 더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 없는 일종의 영적 반사작용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믿음은 가장 덜 자기중심적인 덕목이다. 믿음은 그 본질상 자신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보지만 자신은 절대 보지 않는 눈처럼, 믿음은 그 대상에 몰두하고 자신에겐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다. 자신이 안 보이는] 그 복된 후련함이란.
*믿음 자체는 공로가 되는 행위가 아니다. 공로는 믿음이 향하는 대상이 되시는 분께 있다. 믿음은 우리 시선의 방향을 조정하는 일, 자신을 향하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다. 죄는 우리 내면의 시야를 왜곡시키고 자기중심적이 되게 했다. 불신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자아를 두게 했고,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고 했던 루시퍼의 죄에 위험할 정도로 근접하게 이끌었다(사 14:13). 믿음은 자기 내부가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고, 삶 전체를 거기에 맞추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도움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내려가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씀이 네게 곧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이 말씀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주님을 바라볼 때 믿음의 복된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 내면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응시하면,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다정한 눈을 틀림없이 만날 것이다. 주님의 눈이 온 땅을 두루 살핀다고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대하 16:9). 하갈은 자신이 경험한 바를 이렇게 고백한다. "주는 나를 보시는 하나님" (창 16:13. 우리말성경). 영혼의 눈이 바깥을 내다보고 우리를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과 만날 때, 천국이 바로 여기 이 땅에서 시작된다.
400년 전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5세기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법학자. 수학자]는 이렇게 썼다. "제 모든 노력이 주님을 향하는 것은 주님의 모든 노력이 저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만 바라보고 제 마음의 눈이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은 주께서 한결같은 시선으로 저를 감싸기 때문입니다. 제 사랑을 주께로 향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 자체이신 주께서 제게만 향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의 포옹이 제 생명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 포옹 안에 주님의 기분 좋은 달콤함이 너무도 큰 사랑으로 저를 안아 주지 않습니까?"
*니콜라우스의 말을 들어 보자. 영생은 "주께서 저를 끊임없이 바라보시는, 곧 제 영혼의 은밀한 곳마저 줄곧 바라보시는 그 복된 시선입니다. 주께는 보시는 것이 곧 생명을 주시는 일입니다. 가장 감미로운 사랑을 끊임없이 나누어 주시는 일입니다. 사랑을 나누어 주심으로 제가 주를 향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시는 일이고, 타오생사가 달린 단 한 가지 본질적인 일이 변덕스러운 우연에 좌우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장비는 고장 나거나 분실될 수 있고 물은 샐 수 있고 기록은 화재로 파손될 수 있고 목사는 늦을 수 있고 교회는 불에 타 버릴 수 있다. 이것들은 영혼에 외적인 것이고, 사고나 기계적 고장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보는 것은 마음에 속한 일이므로 누구라도 서서든 무릎을 꿇고서든, 심지어 가장 가까운 교회와 1,000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임종의 고통을 겪으며 누운 상태에서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믿는 것은 보는 일이기에 '언제라도 가능하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 행위를 하는데 따로 더 나은 시기는 없다. 하나님은 구원이 월삭(초하루)이나 절기나 안식일에 의존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8월 3일 토요일이나 10월 4일 월요일보다 부활주일이 그리스도께 더 가까운 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한, 매일이 좋은 날이고 모든 날이 구원의 날이다.
*탕자 이야기는 후자를 보여 주는 완벽한 그림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연하게 누렸던 지위를 포기함으로써 엄청난 곤경을 자초했다. 근본적으로 그의 회복은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던 부자(父) 관계, 악한 반항의 행위로 잠시 달라졌던 그 관계가 재확립 된 것일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구원의 법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지만, 구원의 경험적 측면은 분명하고도 아름답게 보여 준다.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는 고정된 중심점이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상대성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예외 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중심점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이름을 알리실 때 "스스로 있는 자"(I AM)보다 더 나은 말을 찾으실 수 없었다. 하나님이 일인칭으로 말씀하실 때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는 "스스로 계신 분" (He is)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릴 때는 "스스로 계신 주여"(Thou art)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사람, 모든 것은 이 고정 점을 기준으로 측정한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출 3:14).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다(말 3:6).
뱃사람이 태양의 '고도를 재서' 바다에서의 위치를 파악하듯,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도덕적 위치를 확인한다. '하나님'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그때만 옳다. 그 외의 다른 위치에 있다면 거기에 계속 머무는 한 우리는 잘못된 상태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겪는 어려움은 상당 부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각자의 삶을 조정하길 주저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을 수정하고 그분을 우리 자신의 모습과 더 가깝게 만들려는 시도를 고집한다. 육신은 하나님의 바꿀 수 없는 엄격한 선고에 맞서 훌쩍이고, 자비를 좀 베풀어 달라고 육적인 방식을 좀 누리게 해 달라고 아각처럼 간청한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을 계속 알아 가다 보면 그분의 모습이 지금과 같다는 데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경건하게 그분을 흠모하며 보내는 시간에 더없이 황홀한 순간들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거룩한 순간에는 하나님이 변하신다는 생각만 해도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려 한다면 전 인격을 그분의 위격에 맞추려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법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말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합당한 자리로 하나님을 자발적으로 드높이고, 창조주 - 피조물의 관계에 합당하게 예배하며 순복하는 자리로 우리의 전 존재를 기꺼이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든 것 위로 드높이기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행렬에서 빠져나온다. 세상의 길과 어긋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거룩한 길에서 진보할수록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는 새롭고 다른 심리가 형성될 것이다. 새로운 힘이 솟구치고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단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진 데서 나타나는 직접적 결과일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세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고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간단한 시험을 해 보면 하나님이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존경받지 못하시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높은가?" 하는 질문을 시험대로 삼으면 그들의 진짜 입장이 낱낱이 드러나리라.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사람들, 하나님과 개인적 야심, 하나님과 자아, 하나님과 인간적 사랑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 보라. 그러면 하나님은 매번 두 번째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떠받들 것이다.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평생에 걸쳐 그들이 매일 내리는 선택이 확실한 증거다.
"높임을 받으소서"는 영적인 승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다. 엄청난 은혜의 보화가 있는 방의 문을 여는 작은 열쇠다. 이는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핵심이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생활과 입술이 함께 끊임없이 "높임을 받으소서"라고 말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그러면 1,000가지 작은 문제들이 일시에 풀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는 이전처럼 복잡하지 않고 단순함 자체가 된다. 그는 의지를 발휘하여 삶의 경로를 정했고, 자동조종장치의 인도라도 받는 것처럼 그 경로를 유지할 것이다. 역풍을 만나 한동안 경로를 이탈한다 해도 영혼의 은밀한 경향에 이끌리듯 다시 제 길을 찾을 것이다. 성령의 감춰진 움직임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별들이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그를 위해 싸운다(삿 5:20). 생명이 달린 문제의 핵심을 해결 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따라오기 마련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너희는 나를 멸시하는구나"(요 8:49. 우리말성경).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 아주 충격적인 이 말씀은 질문의 형태로 제시됐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영광을 바라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믿음이 불가능하게 됐다는 두려운 원칙을 가르치셨다.
이 죄가 종교적 불신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을까?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이유로 꼽은 '지적 어려움'은 그 배후의 진짜 원인을 가리는 연막에 불과한 것일까? 사람의 영광을 바라는 이 탐욕 때문에 사람들이 바리새인이 되고, 바리새인들이 '신을 죽인 자들'이 된 것일까? 이것이 종교적 독선과 공허한 예배의 은밀한 배후일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그분의 합당한 자리에 모시지 않을 때 삶의 경로 전체가 엉망이 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높일 때 저주가 따라온다.
하나님을 바랄 때 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도 바라시는 바가 있고 그분이 바라시는 대상은 사람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무엇보다 높이기로 단번에 결정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땅이나 바다의 모든 보물보다 더 귀중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에게 넘치는 친절을 보여 주실 무대'를 그들 안에서 발견하신다. 하나님은 그들과 거침없이 동행하실 수 있고, 그들에게 스스로 계신 하나님답게 행하실 수 있다.
*인류가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그 상태를 상당히 정확하게 알려 줄 방법이 무엇일까? 성경에 나오는 팔복의 내용을 뒤집어서 "이것이 인류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면 된다. 팔복에 나오는 미덕들과 정반대되는 모습이 인간의 생활과 행동을 구별 짓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유명한 산상설교의 서두에서 말씀하신 미덕들에 근접하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가난한 심령이 아니라 지독한 교만이 보인다. 애통하는 자들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보인다. 온유 대신에 오만이 있다. 의에 주림 대신에 "나는 부자라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들려온다(계 3:17. 우리말성경). 긍휼이 아니라 잔인함이 있다. 깨끗한 마음 대신에 타락한 상상이 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없고 싸우고 분개하는 이들만 보인다. 박해를 받고 기뻐하는 대신에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무기로 저항한다.
문명사회는 이런 도덕적 특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회 분위기도 이런 특성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숨 쉴 때마다 이런 특성을 호흡하고 모유처럼 마신다. 문화와 교육으로 이런 특성들이 다소 순화되긴 하지만 그 본질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삶을 유일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작품이 만들어졌다. 이런 특성들이 우리 모두의 삶을 쓰라린 투쟁의 장으로 만드는 폐해임을 생각하면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온갖 상심과 많은 신체적 질병이 다름 아닌 우리의 죄에서 기인한다. 교만, 오만, 적개심, 악한 상상, 탐욕은 이제껏 인간의 육신을 괴롭힌 모든 질병보다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인류가 짊어진 짐은 무겁고 참담하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사람을 녹초로 만들 만큼 무거운 짐이나 고된 일을 뜻한다. 쉼은 그 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무엇을 행할 때가 아니라, 행하기를 멈출 때 찾아오는 어떤 상태다. 예수님의 온유, 이것이 쉼이다.
우리의 짐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전적으로 내면의 짐이다. 그 짐은 마음과 정신을 공격하고 내면에서 몸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영향을 미친다. 우선, '교만'의 짐이 있다. 자기애의 노고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 우리의 슬픔은 많은 부분 우리를 경멸하는 말을 하는 사람 때문에 생기지 않는가. '나'를 충성을 바쳐야 할 작은 신으로 내세우는 한, '나'라는 우상을 신나게 모욕하는 사람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내면의 평화를 바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모욕을 당할 때마다 맹렬히 자기를 보호하려 들고 친구나 적수의 부정적 평가에 과민하게 대응하면서 명예를 지키겠다고 달려들면 정신은 결코 쉬지 못할 것이다. 이 싸움을 몇 년이고 계속하다 보면 그 짐이 주는 부담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자녀들은 이 짐을 계속해서 짊어진 채 모든 부정적인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모든 비판 아래 움츠러들고,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속상해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선호도에서 밀리면 잠 못 이루고 뒤척인다.
우리는 이런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분의 쉼으로 부르시고, 온유가 그분의 방법이다. 온유한 사람은 누가 자기보다 대단한지에 개의치 않는다. 세상의 존경은 애써 얻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오래전에 판단했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열등감에 괴로워하는 겁쟁이 생쥐가 아니다. 오히려 도덕적 삶에서는 사자처럼 담대하고 삼손처럼 강인할 수 있다. 그는 더는 자신에 관해 속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그는 하나님이 선언하신 대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알고, 역설적이게도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자신을 천사보다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도 안다. "내 안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모토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보시듯 세상이 그를 바라볼 일은 결코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세상의 평가에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치 평가에 자신을 맡기고 완전히 만족하며 안식한다. 모든 것이 제 가격표를 받고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을 날을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이다. 그때 의인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밝게 빛날 것이다. 그는 그 날을 기꺼이 기다린다.
그러는 동안 그는 영혼의 안식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온유하게 행하면서 하나님의 보호에 자신을 행복하게 맡길 것이다. 자기방어라는 오랜 싸움은 끝난다. 그는 온유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발견한다.
그는 '가장'의 짐에서도 벗어날 것이다. 내가 말하는 가장은 위선이 아니라, 좋은 인상을 남기려 하고 내면의 진짜 빈곤을 감추고 싶어 하는 인간의 공통된 마음이다. 죄는 우리에게 여러 사악한 속임수를 부리는데, 그중 하나가 거짓 수치심의 주입이다. 더 좋은 인상을 주려고 꾸미지 않고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대담하게 드러내는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드물다.
*성례가 내적 은총의 외적 표현이라면 우리는 앞의 명제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전 자아를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성별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후의 모든 행위가 그 성별의 표현이 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그 소박한 짐승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평생 우리를 실어 나르는 육체를 더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가져가며 그 주인에게 했던 말인] “주께서 필요로 하십니다"라는 말을 우리 죽을 몸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눅 19:34, 우리말성경).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옛날에 그 작은 나귀가 영광의 주님을 태우고 군중에게 "가장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칠 기회를 제공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광의 주님을 모시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성속의 딜레마라는 덫에서 벗어나려면 이 진리가 '우리 핏속에 흘러야' 하고 우리 생각의 양상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단호하게 실제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이 진리를 숙고하고, 기도로 자주 하나님과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이 진리를 자주 떠올리면 그 경이로운 의미가 우리를 사로잡기 시작할 것이다. 평온하고 통일성 있는 삶 앞에서 오래되고 고통스러운 분열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모두 받으셨고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으셨다는 지식이 우리 내면의 삶을 통합하고 모든 것을 거룩히 여기게 해 줄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진 않는다. 오랜 습관은 쉽사리 죽지 않는다. 성속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지적인 사고와 많은 경건한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일상적 노동을 예수 그리스도에 힘입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의 행위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또 오래된 성속의 이분법이 가끔씩 머리 한구석에 떠올라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다. 옛 뱀 마귀는 잠자코 드러누워 이 상황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귀는 택시 안이나 사무실 책상이나 생활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인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세상의 일들을 하는 데 할애하고 신앙적 의무를 수행하는 데는 주어진 시간의 극히 일부분만 쓴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것이다.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혼란과 낙심을 초래하고 마음을 무겁게 만들 것이다.
믿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만 여기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를 받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입장을 굳게 견지하면서 낮이나 밤이나 매 시간의 어떤 행동도 여기서 배제되지 않게 해야 한다.
개인 기도 시간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원한다고 계속 말씀드리자. 그리고 일상의 일들을 해 나가면서 수많은 '생각 기도'로 그 시간들을 보충하자. 모든 일을 거룩한 예배로 만드는 섬세한 기술을 연습하자.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모든 단순한 행위에 임하신다고 믿고 그 안에서 그분을 발견하는 법을 배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