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다) 돌아온 아들 13,03,10 루카15,1-3.11ㄴ-32
김형수 비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주님, 저희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28세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장에 섰습니다. 다른 두 죄인과 함께 기둥에 묶였습니다. 사제가 십자가를 내밀어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버1,21).」 집행관이 소리쳤습니다. 「사격 준비!」 북소리가 울리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러시아 황제의 조서를 들고 전령이 바람과 같이 달려왔습니다.
「형량을 낮춘다. 사형을 면하고 중노역형으로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중노동을 하면서 4년을 보냈습니다. 그 뒤에 6년이나 유형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10년 형기를 마칠 즈음에 그는 흔들림 없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베리아에 도착하던 날 아내가 보낸 신약성경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신앙고백은 대단히 단순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름답고, 심오하며, 사랑이 넘치고, 정당하고, 용맹스럽고, 완전한 분은 전혀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증거를 들이대며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나는 진리와 함께 있기보다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pp.244-246).」
천재 철학자였던 니체는 신(神)이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신(神) 의식(意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었든 니체는 말년에 미쳐버렸습니다. 그가 발광 직전에 휘갈겨 쓴 낙서 같은 메모입니다. 「오! 하느님, 당신께 대한 의식은 유령처럼 내 영혼을 약탈하고 있소.」 한 기독교 철학자는 니체의 이런 의식의 세계를 가리켜서 말했습니다. 「유치한 십대(十代)의 반항심(反抗心)과 같은 것이었다.」
오늘 복음의 묵상 주제로 돌아가 봅니다.
「둘째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와 담판을 했습니다. 데모를 했습니다. 생떼를 썼습니다. 당시 습관으로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동안에는 유산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훌쩍 떠났습니다.」 둘째 아들의 심리를 생각해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가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를 찾아서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는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독선적으로 간섭하는 윗사람이 없는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편한 나라로 갔습니다. 거짓을 말하고 마음대로 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죄를 지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는 나라로 가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묵상의 주제는 둘째 떠나는 둘째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둘째아들입니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루카15,11). 「그렇게 떠나갔든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온 둘째아들을 보면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둘째아들이 돌아왔을까요?」
흉년을 겪으면서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回心). 흉년이 마음을 바꾸게 했습니다. 흉년이 회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루카는 이렇게 전합니다(15,14 이하).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였습니다. 둘째아들이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습니다. 그 주민은 둘째아들을 들판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둘째아들은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둘째아들은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많은 품팔이꾼들이 음식을 먹고도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습니다. 어느 영어판 성경은 둘째아들이 돌아온 사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He came to himself. 그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버릴 때나, 하느님을 떠날 때에 단순히 생각한답니다. 「나는 하느님만 떠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버리는 순간이나 하느님을 떠나는 순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떠나는 순간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바꾸어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는 순간 자유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을 떠나는 것입니다. 양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치를 잃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순간 사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흉년의 시작입니다. 인생의 흉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탕자가 맞본 큰 흉년의 시작입니다.」
지금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어봅니다.
그리고 내가 체험했던 흉년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혹시 지금도 그런 흉년이 내 가슴을 점령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돌아온 둘째아들처럼 그런 흉년을 turning point로 삼아야합니다. 전환점으로 삼아야합니다. 새로운 인생여정의 새 출발점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래서 경제인들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여봅니다. 「이제 바닥을 쳤다.」
둘째아들이 먼 나라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살았다는 표현을 바꾸어봅니다.
둘째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저버리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아를 잃어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둘째아들은 흉년과 회심을 통해서 실로 오래 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자아를 성찰하고 발견하는 체험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아버지는 간섭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끌어주시는 분이다. 그것은 간섭이 아니라 베푸심이었다.」
문득 Talmud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긴 가뭄으로 산골짜기 웅덩이에 물이 말라가고 있었습니다. 잉어 한 마리가 외롭게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여우가 꾀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물속에서 고생 그만하고 나오너라. 내가 너를 더 큰 세계에 데려다 줄 테다.」 잉어가 대답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던 이 웅덩이에서도 가뭄으로 힘이 드는데, 새로운 세상에 나가면 얼마나 더 힘들겠느냐? 나는 아무리 힘이 들어도 끝까지 이 웅덩이를 지키련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둘째아들이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둘째아들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불순종하던 굴레를 벗었습니다. 반역하는 마음을 털어내고 일어났습니다. 떠났습니다. 내 삶의 뿌리요, 나의 창조자이며, 심판자이고, 구원자인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회심엔 행동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생각만 바꾼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생각을 바꾼 자는 지옥으로 가지만, 행동을 바꾼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됩니다. 히브리서의 증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리11,6).
세 번째 질문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어떻게 받아주었을까요?」
첫째로 아버지는 깊은 연민의 정으로 받아주었습니다(루카15,20). 「둘째아들이 저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둘째를 먼저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뛰어갔습니다. 둘째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뛰어간 것은 둘째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둘째아들이 벌려놓은 거리를 아버지는 뛰어가며 좁히셨습니다. 둘째아들과 아버지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떠나가는 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떠나가 버린 둘째아들을 쫒아가는 아버지의 이야깁니다.
둘째로 아버지는 외쳤습니다(루카15,22).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하느님은 우리게도 새 옷을 주고 반지를 끼워주시면서, 과거의 치욕을 덮어주고 용서해주십니다. 새 신발을 신겨서 새로운 품위를 주시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새 신분을 주시고 새롭게 출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새 신분을 알리기 위해서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풍악을 울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기를 막는 장애가 있습니다. 죄의식입니다. 죄책감입니다. 우리가 고해소를 향할 때 유혹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습니다.「내가 이 지경으로 인생을 살아놓고 이제 와서 무슨 얼굴로, 무슨 면목으로, 내가 하느님께 돌아가겠는가?」 우리가 고해소로 찾아가는 순간에 하느님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라도 고해소를 찾아가야 하고, 둘째아들처럼 하느님과 아버지께 지은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돌아가려는 마음뿐만 아니라 실제로 돌아가서 고백해야합니다. 둘째아들처럼 용서를 청하는 겸손을 보여야합니다(루카15,18).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제 오늘 묵상을 마무리 할 할 때입니다.
우리는 집을 나간 탕자처럼 수많은 배신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인생여정을 걷다보면 우리에게 수많은 사건들이, 수많은 환경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좋은 사건이건 나쁜 사건이든, 좋은 환경이든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든,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런 환경과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천국의 시민으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만드십니다. 그게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성장시키는 하느님의 교육방법입니다. 다른 형제자매를 받아줄 뿐 아니라, 고해성사와 성찬의 빵을 나누면서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만을 겸손으로, 반역하는 자녀를 기도하는 자녀로, 반목하는 자녀를 서로 사랑하는 자녀로」
부활판공성사를 마치고 고해 뜰을 나올 때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바라보면 큰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7,59-60). 바오로가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옷을 들고 있으면서 죽어 마땅하다고 바라볼 때에도, 스테파노는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스테파노는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습니다.
이씨 조선 말기의 교우 촌에서 일어난 일(김길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산속에 교우촌이 있었습니다. 교우들 중에 고성대와 고성운이란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먼저 와서 일손을 거들었습니다. 먹을 시간이 되어 먹을 음식이 부족하면 언제나 굶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일은 하지만 누구보다도 많이 굶었습니다. 교우촌 회장님은 그들이 너무나 굶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청년을 불러서 너무 심한 극기를 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형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히려 부탁을 했습니다.
「회장님, 우리는 1801년 박해 때 끌려갔습니다. 매를 견디지 못해서 주님을 배신한 배교자들입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나와서 살려고 하니까 사는 맛이 안 납니다. 살 의미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교우촌을 찾아온 것입니다. 저희가 단식하는 것은 죄를 보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보속의 기회를 막지 말아주십시오.」
저의 막내 고모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탄 미사가 있는 날이었답니다. 전동성당 마당에 맨발로 서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할아버님들을 보았답니다. 고모님이 물었답니다.「할아버지들, 왜 성당에 안 들어가세요. 왜 맨발이세요?」 할아버님들이 대답하셨답니다. 「우리는 박해 때 배교한 사람들이다. 성당에 들어갈 수 없다. 맨발로 성당 밖에서 속죄를 해야 한다.」 신부님이 나와서 성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도 눈물만 흘리더랍니다. 보속할 것이 많다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전하는 저의 막내 고모님 두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