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허리에 아무 문제가 없이 건강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치게 되면 50%는 이미 병을 지니고 있었다는 판정이 나오고 있다. 사고 이전부터 이미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기왕증(사고 이전에 이미 지니고 있던 장해나 병적 증세)이라고 하는데 요즘 대부분의 교통사고 환자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다. 이 때문에 교통사고 환자들은 제대로 된 보상은 물론 수술이나 치료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에서 골프 강사로 일하고 있는 30살 장모 씨는 뒷차가 추돌해 허리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K보험사의 자문의는 사고 기여도 50%, 즉 기왕증 관여도 50%를 판정했다. 장씨의 허리 디스크는 사고와는 절반 정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씨가 사고 이전에 허리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사고가 난 뒤에 허리 디스크가 나왔기 때문에 억울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지정하는 신체감정의사는 기왕증 70%를 판정했다. 근거는 골프 강사라는 직업을 고려하면 허리에 기존 병변이 있을 수 있고, 장씨가 담배를 피고 있다는 점과 나이 등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경북 구미의 한광분(39살, 여)씨도 중앙선을 침범한 상대방차와 정면 충돌해 허리와 목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보험회사 자문의는 목은 기왕증 70%, 허리는 기왕증 100%의 판정을 내렸다. 목 디스크는 사고의 관여도가 30%에 불과하고 허리 디스크는 사고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한씨는 그러나 사고 이전에 목이나 허리에 아무 이상이 없었고 사고가 나기 전까지 산악회 회원으로 한 달에 2번씩 등산을 하는 등 건강은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험회사 자문의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한씨의 진료 기록과 방사선 필름 등을 가지고 다른 의사의 소견을 들어봤다. 목 디스크에 대해 기왕증 70%를 인정한 것은 과도하며, 목 부분에 대해서는 보험회사 자문의가 기왕증의 근거로 말한 척추의 퇴행성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의사마다 다른 판단이 나오는 것일까?
먼저 보험회사 자문의의 자격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보험사들은 유명대학의
성형외과나 정형외과 의사들의 자신들의 자문의로 위촉한다. 그런 뒤 큰 사고가 나거나 보상문제가 걸리는 교통사고 환자들의 진료기록지를 보내 기왕증 판정을 의뢰한다. 한건당 15만에서 20만원 심사료가 건네진다. 어떤 보험사 자문의는 한달에 100건이 넘는 자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만원에 100건을 한다면 한달 수입은 1500만원이다. 엄청난 수입니다. 특히 월급이 많지 않은 대학병원 고용의사들에게는 확실한 부수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까?
현재 의사들이 기왕증 판정을 하면서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는 책은 임00씨가 저술한 '배상의학의 기초'란 책이다. 이 책을 저술한 임모 씨는 현재 00화재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의사이다. 보험사에서 교통사고 환자들의 사고에 대한 자문을 해주고 월급을 받고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판정의 기준을 마련해 주고 있을까?
또 의사들이 기왕증 판단의 근거로 삼는 대부분의 학술적 토대는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이 자료는 일본 손해보험협회가 마련한 것을 우리나라 보험회사들이 그대로 수집해 의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의사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취재 도중에 만난 한 대학병원의 모 교수는 "손보사에서 외국의 의학 문헌이라든가 판례 등을 이런 것들을 가져가 의학적으로 타당하더라, 그래서 그걸 반영하다보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손보사에 치우쳐지지 않았느냐고 자신들을 비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험칙상 다른 연구가 없는 상태에서 한쪽의 논문이나 학설 등만을 보면 다 옳게 보이는 게 상식아닌가? 반대편의 학설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손해보험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는 가져다 주지 않으니 기회가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사들이 척추 디스크에 대해 기왕증 판정을 내리는 가장 큰 이유는 척추의 퇴행성 변화이다. 통상 학설에는 30대부터 척추의 퇴행성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나이가 들면서 디스크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척추의 수분이 18살 때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한다고 해서 어떤 의사들은 20대 초반의 사람도 교통사고로 디스크가 나타나면 기왕증을 과도하게 판정하기도 해 환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척추의 퇴행이 병적 현상이냐, 아니면 병적 현상이냐를 가지고도 학자들간에 아직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 병적 현상으로 본다면 어디서부터 병이라고 볼 것이냐도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라고 의사들은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의사들은 객관적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자시들의 주관적 판단만을 가지고 기왕증 판단을 내리고 있는 상태이다.
장애 평가 기준자체도 외국에서 쓰다가 폐기한 낡은 기준을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장애평가 기준은 일본에서 1927년도에 사용하던 낡은 것과 미국에서 1963년도에 마지막 판이 나온 맥브라이드의 학설 기준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이에대해 순천향대학병원의 이경석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장애평가 기준은 만들었던 사람들이 스스로 버린 기준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데다 측정할 수 있는 자 자체도 고무줄 자여서 쭉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고 우리나라 장애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 장애 평가의 기준은 30년 이상 지났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훌륭한 학설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눈으로 봤을 때는 의학적으로 틀린 부분이 많다"고 밝혔다.
최근 교통사고 환자들이 가장 많은 부상을 입는 척추 디스크에 대한 기왕증 판정 비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많아야 20-30% 정도에 머물던 기왕증 판정 수치가 1-2년 전부터 보통이 50%에서 요즘은 70%짜리, 100%짜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대부분 교통사고 이전에 허리에 문제를 겪지 않던 건강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장애 판정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보니까 기왕증 판정을 내리는 의사들의 근거는 희박한 경우가 많다. 과거에 디스크 증상이 없었다고 환자가 말하지만 뚜렷한 치료기록이 없어 이를 믿을 수 없다며 기왕증 50%, 퇴행성 변화가 미미하고 과거 기왕증에 해당하는 증상을 발견할 수 없다면서도 기왕증 50%, 통상 30대부터 척추 퇴행이 시작되는 것이 정설이지만 20대 초반의 경우도 기왕증은 비슷하게 인정되고 있다.
결국 교통사고 환자들은 보험사 자문의의 소견을 믿을 수 없다며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법원에서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까?
법원은 교통사고 환자 장해평가와 관련해 유명 대학병원에 의뢰해 신체감정의를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지법의 경우 서울시내 7개 대학병원에 250여명의 의사들을 자문의로 위촉해 두고 있다. 보험사와 환자간의 소송이 진행되면 진료기록지와 필름 등을 이 의사에게 보내고 정밀 진찰을 실시하게 해 기왕증 판단을 내리게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법원의 신체감정의가 보험사의 자문의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취재 결과 드러났다. 손해사정인회가 서울과 인천, 부산 등 6개 주요 지방법원의 신체감정의를 조사한 결과 35명에 이르는 의사들이 보험사 자문의를 겸하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보험사로부터 돈을 받고 자문을 해주고 있는 의사들이 과연 법원의 신체 감정에 객관적인 답을 해줄 수 있을까하는 것이 관계자들의 의문이다. 결국 교통사고 환자들은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기왕증 판정과 관련해 대법원 판례는 의사가 교통사고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방사선 필름과 진료 기록만을 가지고 장해 판정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것뿐만 아니라 교통사고의 원인과 나이, 경과 등을 종합해 기왕증을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92다 13356 소해배상(자)) 그런데 현재 1심과 2심의 판결 추세는 이런 대법원 판례를 반영하지 않은지 아니면 무시하는지 신체감정의의 기왕증 판정을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더 교통사고 환자들에게 불리하게 기왕증 판정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보험사들이 위촉하는 자문의들의 소견서가 법원의 신체감정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보험사들은 대학병원의 원로 교수들을이나 과장 등을 자문의로 위촉한다. 누구 하면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다 알고 있는 좁은 의료계에서 저명하고 원로 선배 의사의 뜻을 거스르는 의사는 거의 없다는 게 의사들의 말이다. 또 앞에서 말했듯이 한 대학병원 한 과에서 1-2명이 보험사 자문의를 하고 있는데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보험사 자문의들이 교통사고 환자에 대해 기왕증 소견서를 발행하는 것 자체도 사실은 위법이다. 현행 의료법은 의사가 환자를 직접 진찰하지 않고 진단서 등을 발행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보험사 자문의들은 보험사가 가져다 주는 진료기록과 방사선 필름 등만을 보고서 기왕증 소견서를 써주고 있다.
보험사들은 이런 소견서를 받기 위해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기록을 유출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한 보험회사가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진료기록을 빼냈다가 환자에게 형사 고소를 당해 처벌을 받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환자들에게 보상 업무 등을 위해 필요하다며 환자에게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진료기록을 빼내 자기들에게 유리한 기왕증 판단을 받아내는 보험사들이 대부분이다.
이제까지 교통사고 환자와 관련해 대부분 나이롱 환자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되곤 했었다. 이런 나이롱 환자도 있는 것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정당하게 보상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보상을 받지 못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지난해 보험사들은 이자율이 하락하면서 역마진으로 엄청나게 손해를 본다며 죽는 소리를 하면서 보험료율을 올렸다. 그런데 올해 3월 결산을 해 본 결과 엄청나게 흑자를 봐서 직원들에게 돈 잔치를 해줬다는 후문이다.
돈이 남아도 보험가입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데 사용하는 보험사가 교통사고 환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결국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닌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