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무한 탐색의 시대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능한 한 넓은 선택지를 가지고 사는 삶이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이 흐름을 거스르는 별종들이 있습니다. [전념]의 저자 피트 데이비스는 이들을 전념하기의 영웅이라고 부르며 이런 삶의 양태를 전념하기 반문화라고 부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민, 애국자, 건축가, 관리인, 장인 그리고 동료가 전념하기 반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피터 데이비스는 말합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노예해방운동에 헌신한 이들, 시민권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 등등이 모두 저자가 말하는 전념하기의 영웅입니다. 거창하게 시민운동에 투신한 이들만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각종 기능인, 장인 등 한 가지 기술에 전념하는 분들도 전념하기의 영웅들이고, 일상에서 피상적인 관계에 머물지 않고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전념하기 반문화의 일환입니다.
기행을 통해 들었던 생각들, 깨달은 것들, 얻은 영감들은 모두 소중합니다. 다만, 그것을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로 둔다면 지난 시간은 나에게 좋은 추억으로만 남을 뿐입니다. 케이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그 정신을 나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명백하게 전념하기를 요청합니다. 여러 갈래의 선택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그 길로 걸을 것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러 문으로 통하는 복도 위에 서있습니다. 피터 데이비스의 책을 읽으며, 기행을 통해서, 전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품습니다. 이제는 복도를 박차고 일어나 나의 방을 찾아서 무거운 짐을 풀어 놓고 싶은데, 문제는 삶이 녹록치 않다는 것입니다. 기행 떠나기 전과 후에 야근을 했는데도 오늘도 밀린 일에 치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일에 전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어서 한 달에 십수 건을 처리하는 와중에 큰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념하기의 궁극적인 대상은 예수의 도, 즉 진리일 것입니다. 케이는 그 모습으로 출애굽과 희년의 정신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동학과 518의 모습이겠죠. 압제 받는 이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고요. 이를 위해서는 분명히 포기해야 할 것과 끊어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모습과 방법은 고민해봐야 하겠고요.
고 채 상병 사망 사고에 대한 수사 외압 사태를 보면 과거 총과 몽둥이를 들고 설치던 권력이 요즘엔 법과 질서를 이용해 군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의 법과 질서는 아전인수겠죠.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약자도 법과 질서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박 전 단장이 굳건하게 싸우고 있듯이. 박 전 단장의 동기들이 팔각모 사나이를 부르며 군검찰에 출석하는 박 전 단장과 연대하는 모습 그리고 군 사망 사고의 유가족들이 박정훈 대령을 응원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동학혁명과 전라민중무장봉기의 모습이 그 모습이라면 너무 비약일까요.
전념하기의 영웅으로서 박정훈 대령을 기억하며 나도 그처럼 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