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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와 인간성 회복*1)
최 정 식**1)
Ⅰ
대중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인간이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익명적인 인간 일반으로 추상화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소비자, 노동자, 직원, 계급, 집단, 종족 등등의, 이용하고, 다루고, 조작해야 할 대상으로 사물화하며, 그럴 때 삶은 그 모든 고귀함과 가치를 잃고 황폐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을 가장 잘 파악하고 경고한 철학자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이다. 한국에서 그는 단지 “실존철학자” 중의 하나로 그 이름정도만 알려졌을 뿐, 정작 그의 철학 자체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1) 그의 철학이 일정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장도 상당히 어렵다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든 글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논의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매스컴과 유행이라는 대중사회적 장치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중사회가 나름대로 복수를 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는 단지 대중사회의 분석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 전체에 새로운 문제제기 방식을 제시한 큰 철학자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좀더 심각한 연구가 절실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현대 사회의 비인간화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저항으로서 그의 철학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대중 사회의 병폐에 대한 그의 분석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Ⅱ
마르셀에게 세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깨어진 세계”(le monde cassé)이다. 그것은 단지 지구가 전쟁과 분쟁으로 멍들어서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서구 정신사 자체 내에 뿌리 박고 있는 가장 내적인 본질에 있어서 세계가 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내적인 본질이란 다름 아닌 세계를 표상하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물음 방식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였다. 플라톤의 대화편, 그 중에서도 특히 초기 대화편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밥 먹고 하는 일이 유명하거나 뭔가 잘 한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당신이 잘 한다는 “그것이 무엇인가?”하고 묻는 일이다. 서양에서 머리 좋은 사람을 꼽으라면 첫손에 꼽힐 플라톤이 같은 물음을 그처럼 대화편마다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물음이 학문의 물음 중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는 의문 대명사 자체가 다른 의문 대명사나 의문 부사들보다 가장 근본적인 무지의 상태에서 가장 근본적인 답변을 원하는 것일 뿐 아니라(가령 “언제 결혼하니?”라는 물음은 적어도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지만, “결혼이 뭐지?”라는 물음은 근본적으로 결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 자체를 설명해 달라는 물음이다), 특히 “무엇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사물의 현상도, 운동도, 발생도 아닌 존재를 묻는 것으로서, 사물의 존재 전체, 즉 사물에 대한 전면적인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물음 방식은 서양 철학뿐 아니라 서양 정신사 전체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탐구 방식을 대표하는 물음이었다.2) 그러나 마르셀은 바로 그러한 물음 방식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물음이 아무리 근본적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존재자 전체를 사물화, 대상화하여, 그것을 내 앞에 대립된 것(Gegenstand)으로 놓는 태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 태도를 취하는 한 세계는 이미 나에게 대립된 것, 대항해야 할 어떤 것이며, 극복하고 이용해야 할 어떤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서양 정신사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방식 자체가 이미 세계를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시각을 암암리에 함축하고 있고, 세계를 그렇게 바라보는 한, 세계는 이미 나의 보금자리가 아닌, 나와 분리된 세계이며, 그런 세계는 이미 “깨어진 세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는 과연 우리에게 대립적인가? 어떤 점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아니,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투쟁의 역사였다. 인간의 역사는 도전과 시련, 그리고 그것의 극복의 역사였으며, 그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결국 멸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생명 자체가 물질과 반대 방향으로 물질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물질의 결정성에 대항하여 비결정성, 즉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라는 베르크손의 말을 믿는다면 세계는 결국 우리에게 대립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분명 사실이나, 전면적인 진실은 아니다. 만약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조차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있기에 우리가 있으며, 세계가 없으면 우리도 없다. 세계는 바로 우리의 거처이다. 몸이 없다면 우리도 없듯이, 세계가 없다면 우리 몸이 거처할 곳이 없다. 폭풍이 몰아치고 천둥이 칠 때, 자연은 분명 우리에게 두렵고 극복해야 할 존재로 다가오지만, 복사꽃이 피고 논과 밭이 있는 아늑한 고향의 추억과 같은 자연은 그것 없이는 삶 자체가 불가능한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다. 베르크손 자신도 물질이 생명과는 반대의 질서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반대라면 물질과 생명이 만날 이유도 없고 만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다고 할 것인가? 물론 양쪽 다 옳다. 그러나 세계를 다만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표상할 때, 삶은 황폐화한다. 서양의 정신사를 지배한 것은 세계의 대상화였고, 그리하여 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적 풍요도 어느 정도 획득되었지만, 그 결과 인간은 더 행복해지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욕망만 부풀려지는 비인간화의 길로만 내닫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에 와서는 환경의 파괴로 삶의 터전이 상실되고 있으며 대량살상 무기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존재방식이 “자기 집에 거처함”(être-chez-soi)임을 지적한 마르셀의 통찰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이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즉자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다른 인간들과 그리고 다른 사물들과 더불어 존재하며, 그러한 세계, 즉 자기 집에 거처하는 존재자이다.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은 가족과 집을 이용하고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드러내려 하며 그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그곳이 자신의 영원한 뿌리이기 때문이다. 이용하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의 진정한 내적 가치, 진정한 존재 자체를 음미하려면 대상화 작용 자체를 버리고 사물 자체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마르셀은 “이차적 반성”(seconde réflexion)이라 부른다. 사물을 대상화, 객관화하는 사유 일체가 “일차적 반성”(première réflexion)이라면 그러한 반성 이전의 존재 자체로 재차 반성해 들어가는 것이 이차적 반성이다. 그것은 주객의 이원적 구분이 생기기 이전의 직접적인 “느낌”(sentir)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객관 이전의, “객관 아래”(infra-objectif)의 “근원적 느낌”(Urgefühl)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마르셀이 “한계경험”(expérience-limite)이라 부르는 이 느낌은 나의 몸과 세계 사이에 실현되는 연속성의 양식으로서 너무도 직접적이기 때문에 틀릴 수가 없는(infailli-ble) 것이지만, 말할 수도(indicible), 개념화할 수도 없다(inconceptualisable). 그러나 거기서 사물의 진정한 존재가, 진정한 아름다움이 고향의 아늑함처럼 드러난다. 비유컨대, 산 속에 묻힌 돌을 어떻게 하면 파내어서 돈을 벌까 궁리하는 것이 일차적 반성이라면, 돌 자체의 무늬와 결에 따라 잘 다듬어 돌의 내적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조각가의 작업은 이차적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셀이 소유와 존재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물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는 자는 그 소유물에 의해 소유되어 버리고 만다. 크건 작건 소유는 항상 타인에 대한 배타성의 공표라는 특성을 갖게 마련이기 때문에(아무리 은밀한 재산도 등기가 필요한 것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침해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려는 허영의 단계를 거쳐, 혹시 누군가 그것을 침해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심해짐에 따라 의처증 환자처럼 소유물에 집착하게 되어 결국 소유물이 소유자를 소유해 버리는 관계의 역전으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감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거처에 거주하며 자신을 상실하는 법이 없이 행복하다.
그러므로 마르셀은 이제 새로운 질문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문제적”(problématique) 물음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적”이란 어원적으로 “앞으로(pro-) 던진다(blema←ballo),” 즉 내 앞에 대상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제”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해결해야 할 어떤 것으로서 표상화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마르셀은 이제 그러한 모든 태도를 멈추고 존재자 전체에 대해 “그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에, “존재여! 그대는 누구인가?”(L’être! qui est-tu?)”하고 물을 것을 제안한다. 이 한마디의 질문 속에 그의 모든 철학이 함축되어 있다. 이인칭으로 불리어 진 존재는 이미 나와 더불어 상호주관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는 “모든 것이 교우하고 모든 것이 인연을 맺고 있는 세계”(un monde où tout communique, où tout est relié)3)이다. 어떤 존재가 정신적으로 나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존재는 나에 대하여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그리하여 마르셀의 세계는 존재자들이 서로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우하는 “공동존재”(co-esse)의 세계이다. “나는 어떤 방식에서든지 나에게 응답할 수 있는―비록 그 응답이 이해할 수 있는 침묵이라 할지라도―것으로 나에게 간주될 수 있는 것에만 이인칭으로서 말을 건넨다. 어떤 응답이 가능하지 않는 곳에는 삼인칭을 위한 여지만 있다.”4) 대상은 삼인칭이다. 그러나 “공동존재”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존재자들은 우리를 “부르는” 존재자들이며,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한다. 그 경우 존재는 “그대”(toi)로서 나타난다. “그대와 기원의 관계는 대상과 판단의 관계와 같다”(le toi est à l’invocation ce que l’objet est au jugement)5)는 그의 유명한 말은 “그대”에게는 부름에 응답하고 기원하지만 대상에 대해서는 판단을 내릴 뿐이라는 것을 뜻한다. 사물조차 “그대”로 느껴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나와 더불어 사는 나의 이웃, 즉 우리(l’usness)이며, 특히 가족들은 내 존재의 영원한 뿌리로 드러난다. 마르셀에게 가족은 “언제나”(le toujours)라는 양태를 띠며, 고향처럼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있어야 할 삶의 근거이다. 대중사회에서 인간은 한 무리로서 집단화하며, 집단화는 필연적으로 원자화를 가져온다. 인간이 원자화된 사회에서는 가족의 가치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마르셀에게 가족은 단지 생물학적인 근친들의 모임이 아니라, 삶의 안식처이며 뿌리이기 때문에 해체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야 할 무엇이다. 서양 철학사상 이처럼 가족과 이웃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는 유래를 찾을 수 없다. “형이상학은 이웃”(la métaphysique, c’est le prochain)이라는 그의 말은 그러므로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Ⅲ
이러한 철학을 가진 사람에게 현대의 대중사회가 어떻게 비쳤으리라는 것은 능히 짐작이 간다. 대중사회에 관한 그의 여러 논의들 중 가장 핵심적이며 강력한 분석의 틀은 “추상적 사고”(esprit d’abstraction)이라는 개념이다. 인간적인 것을 거역하는 인간들(Les hommes contre l’humain)이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이 통찰력 있는 개념은 모든 기만적이고도 게으른 사유 방식의 위험을 통렬히 경고한다. 그의 분석을 차분히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성 회복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추상적 사고”는 우선 추상작용(abstraction)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추상작용은 엄밀한 진리나 지식을 추구하기 위하여 필요한 우리 정신의 고유한 작업방식이다. 모든 과학은 인간 오성의 추상작용의 조작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나 “추상적 사고”는 과학적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그런 학문 수단이 아니라, 그러한 수단에 포로가 된 사유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정신적 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감나무,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 등에 대해서 사람들은 “나무”라는 추상개념을 하나의 공통적 요소로 파악하는 것은 추상작용이다. 그런데 어떤 사상이 인간에 대해 어떤 종족이나 이데올로기나 또는 어떤 특정 계급만을 유일한 보편적, 공통적 요소로서 추상화하여,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일체의 다른 면을 배제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시키며, 그렇게 추상된 하나의 면만을 유일한 절대적 진리로 여기려는 태도를 취한다면, 그것이 바로 “추상적 사고”이다. 즉 추상작용이 과학적 진리의 발견도구라는 한계를 넘어, 인간정신의 유일한 진리로 일반화할 때, 바로 “추상적 사고”가 발생한다.
이 추상적 사고방식은 대단히 위험한 병리학적 요인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추상과 폭력 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 결과적으로 “추상적 사고”로 흐르게 되면, 그 사상은 결국 현실적으로 끔찍한 폭력을 반드시 낳게 된다. 종족주의 사상은 타 종족을 살상하고,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노예가 된 정신은 다른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증오하여 진리의 이름 아래 종교전쟁이나 이데올로기 전쟁을 일으킨다. 계급주의의 신화에 젖은 사람은 다른 계급의 사람을 죽여도 살인의 자의식을 갖지 않는다. 다른 적대계급이나 종족에 속한 사람들은 얼굴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잘못 쓰여진 오답과 같기 때문이다. 오답은 지우고 정답을 써야 한다. 마르크시스트가 말하는 “계급투쟁”도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래서 마르셀은 “추상적 사고는 격정적 본질을 지니고 있고, 반대로 격정은 추상을 제조한다”고 지적한다. “추상적 사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얼굴이나 실재가 아니라 어떤 개인이 공산주의자냐, 파시스트냐 하는 따위의 분류일 뿐이다. 마르셀은 마치 “독침”(dard)6)처럼 사람들을 상하게 하거나 죽이는 “추상적 사고”의 대표격으로 공산주의와 나치즘을 들고 있다.
추상은 격정을, 격정은 추상을 낳는다고 했지만, “추상적 사고”는 결국 열광주의(fanatisme)의 지배를 받는다. 열광주의는 “열광적 의식”(conscience fanatisé)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열광적 의식”이라는 현상은 무엇인가? 마르셀의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7)
1) 열광분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결코 열광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열광분자가 아닌 사람의 눈에게만 그렇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들에 의해서 오해를 받고 있거나 중상을 입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모든 형태의 열광주의는 종교적 성격을 띤다. 이 말은 참다운 종교가 열광적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열광주의가 신봉하는 이념이 절대적이라고 여길 때, 흔히 그 열광주의는 맹신도와 같은 심리를 나타낸다. 그래서 어떤 종교가 특히 현세적 이념을 짙게 지니고, 역사적 세속적 문제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그 종교는 정치적 열광주의나 열광의식을 성스러운 옷으로 장식한 다음 대중에게 나타나 대중과 스스로를 타락시킨다.
3) 열광주의, 즉 열광적 의식은 의식의 속성상 타인지향성을 지니고 있어서 아교풀처럼 서로 엉기는 것을 좋아한다. 나 홀로 열광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뜻도 없다. 그래서 열광적 의식은 서로 많이 엉길수록 더욱 열광적으로 폭발하기 때문에, 가급적 많은 수의 군중을 동원하려고 애쓴다. 군중 수가 많을수록 깨어 있는 개인의식은 증발하고, 오직 열광 그 자체가 하나의 집단적 우상으로 군중을 지배한다. “열광적 의식”과 “격정”은 늘 함께 간다.
4) 열광주의는 열광적 의식으로 변한 많은 군중들에게 내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한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는 열광의식을 식게 만들고, 인간을 반동으로 만들게 한다. 그래서 늘 다중을 열나고 미치게 만들어야 하기에 끊임없는 학습에 의한 세뇌교육과 생각을 마비시키는 자극적 구호를 개발한다. 자극적 음식에 의하여 혓바닥이 얼얼해지면, 다른 음식의 맛은 지각하지 못한다.
5) 열광적 의식은 가급적이면 인간들을 극도로 단순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사고나 다양한 상상력을 배제한다. 그래서 열광적 의식은 인간의 판단이 가장 단순해질 수 있도록 인간이 지닌 분노(ressentiment)의 감정에 호소한다. 그래서 역사를 판단하는 것도 극도로 단순한 흑백논리로 요약하고, 인간을 심판하는 것도 계급적, 종족적 이분법으로 단순화시킨다. 그래서 현재의 불행이 오직 이런 역사적 사실, 저런 인간들 때문에 생긴 것으로만 쉽게 낙착시켜 격정과 원한에 의한 폭발적, 전투적 행동이 나오게끔 한다.
Ⅳ
공산주의와 나치즘이 사라진 지금 이러한 분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장 우리 눈앞의 북한 사회가 마르셀의 분석에 한자도 틀리지 않은 행태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대중사회, 기술문명의 사회도 우중화 현상, 열광적 대중문화, 흑백논리, 편가르기, 지역주의, 문화 제국주의적 세뇌교육, 무한 경쟁주의,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대학의 자기 상실과 직업훈련소화, 교회의 맹신주의와 상업주의 등등의 옷을 입고 수많은 “추상적 사고”들이 활개치고 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추상적 사고”에 기반한 우중화와 열광주의에 대한 해독제는 짐작하겠지만 바로 그것과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마르셀은 그것을 삶 속에서 “명상”(contemplation)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이라 정리한다. 이때 “명상”이란 단지 멍하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또 찾아내려는 활동이며, “음악과 조화와 평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자, 과학자가 찾는 단순한 “진리”가 아닌 인간을 참으로 인간이게 하는 “삶의 진리”(vérité de la vie)를 파악하는 지혜를 가진 “진리의 정신”(esprit de vérité)이다. 그리하여 마르셀의 철학은 체험과 경험을 “약속의 땅”으로 삼는 “구체철학”(philosophie con-crète)의 길로 나아간다. 구체철학이란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것을 되찾는 것” (retrouver l’immédiat)이며, “추상적 사유의 분해되고 고리가 풀린 결정들을 넘어서 구체를 회복하는 것”(restaurer le concret par-delà les déterminations disjointes et déarticulées de la pensée abstraite)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직접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회복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회귀하게 되며, 그렇게 회귀한 우리 자신은 오직 나 하나만의 독존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공동존재”이기 때문에, 나에게로 돌아옴이 곧 “내 밖으로 나가는 것”(sortie de soi)이며, 존재의 충만함과 “존재의 기쁨”(gaudium essendi)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한 느낌은 바로 존재의 신비와 신성(divinité)의 느낌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의 느낌이다. 마르셀에게 신앙이란 신성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믿음의 느낌은 자체가 바로 정신적 신앙이 된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신성을 느끼게 하고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면 구체철학의 존재론 자체가 이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르셀은 그것을 “존재론적 신앙”(la foi ontologique)라 부른다. 평정한 “명상” 속에서 존재의 충만과 삶의 기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신앙이라는 마르셀의 관점에서 볼 때, 열광적 광신도들로 가득 차있는 오늘날 한국의 교회는 가장 반신앙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다.
“명상”에서 신앙으로 나아가는 이 길이 왠지 고답적이거나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가령 우중주의와 열광주의에 대한 비판도, 평화를 위한 노력도 그 자체가 모두 “명상”이다. “명상의 문제와 평화의 문제는 연대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이며 동일한 문제이다. 명상은 추상에 만족하는 경향에 대한 대항이기 때문”8)이라고 그는 갈파한다. 한 사회에서 그런 “명상”의 역할을 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대학이며, 대학이 그 역할을 포기할 때, 그 사회는 열광주의와 격정에 사로잡혀 방향감각을 잃은 이리떼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대학이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은 그러므로 인간성을 지킨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르셀이 추구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자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신으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자”(homo viator)로서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