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바위순교성지
공주 들머리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져 있고
황새가 서식했다 해서 '황새바위'로 불린다.
달리 '항쇄바위' 또는 '황쇄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의 바위가 마치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인
'항쇄'의 모양과 흡사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칼을 쓴 죄인들이 이 언덕 바위 앞으로 끌려 나와 처형당했기에
'항쇄바위'라 했다는 설이 있다.
또 '황쇄'에서 '쇄'가 옛말로서 '새'와 같다고 풀이해
'황쇄 바위'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55년에 발행된 공주 천주교회 연혁에 보면
분명히 '황새바위'라고 명시하고 있어
지금은 '황새바위'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 황새바위 성지 약사
공주 황새바위는 한국 천주교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증언지 중 하나로 그 의미가 크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남북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감영이 있었다.
이곳 공주 감영에서는 각 지방에서 잡혀
숱한 심문과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기를 거절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명에 의해 황새바위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충청도 각 지방뿐 아니라 타 지역으로부터 끌려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교우들도 많았다.
충남의 홍주, 예산, 해미, 덕산, 신창, 홍산, 연산, 청양, 공주, 이인, 탄천과
충북의 청주, 진천, 연풍, 옥천, 전라도 전주, 광주, 경기도 죽산, 포천,
그리고 한양의 교우들이 공주에 와서 순교 하였다.
이곳 황새바위에서 천주학 죄인들을 공개 처형할 때에는 맞은편 산 위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고 한다.
처단한 죄인들의 머리는 나무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놓아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경계하게 하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강도, 절도범들의 시체와 섞여
어느 것이 순교자의 것인지 구별하기조차 어려웠다.
황새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은
지금처럼 둑이 쌓여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는데,
홍수로 범람할 때에는 순교자들의 피로 빨갛게 물들어
금강으로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은 참수, 교수, 돌로 맞아 죽음, 옥사, 아사, 매질 등으로 죽어 갔는데,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는 공주 감영에서 있었던 교수형에 대해
"옥의 벽에는 위에서부터 한 자 높이 되는 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매듭으로 된 밧줄 고리를 죄수 목에 씌우고 밧줄 끝을 벽의 구멍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옥 안에서 신호를 하면 밖에서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힘껏 잡아당긴다.
희생자가 죽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내어
장례도 지내지 않고 밭에 내버려둔다."고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구멍이 있는 형구돌이 사용되었는데
구멍에 줄을 넣고 죄수의 목에 얽어맨 다음
형구돌의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공주에서도 병인박해 당시에 가장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
조정의 박해령이 멎은 뒤에도 지방에서는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피 흘림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공주는 순교 역사의 시초부터 기록상 마지막으로 순교자를 낸 1879년까지
100여년 동안 줄곧 피를 흘리며 신앙을 고백했던 참으로 거룩한 땅이다.
달레는 "공주 옥에서 순교한 이들의 이름과 숫자를 다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공주 감영록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까지는 우리 순교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공주에서의 순교자들은 당시 '사학의 괴수'로 알려져 있던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과
10여명의 회장들을 비롯해 연령, 성별, 신분에 관계없이 무수히 많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교우들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들만 해도 무려 248명에 이른다.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공주 감영에서 문초를 받으면서
관장이 살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하라고 명하자 주저 없이 제 살을 물어뜯음으로써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한 손자선 토마스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는 김춘겸의 딸로 당시 불과 10살 밖에 안 되었고,
최연장자는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로 당시 84세였다.
20세 미만의 순교자도 20명이나 되었으며,
양반, 중인, 농민, 노비 등 그 신분계층도 다양했다.
특히 어린이와 부녀자들까지도 온갖 고문과 회유, 공포속에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로써 신앙을 굳게 지켰다.
황새바위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곳 가까이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목에 큰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 언덕바위 앞으로 끌려나와
죽어갔기 때문에 항쇄바위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돼 있는 순교성지 공주 황새바위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본당에서 세운
높이 13.8미터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져 있는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경당 앞 잔디밭에는 돌기둥 12개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이름 없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한다.
2002년 11월에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한 대경당을 지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 22일에는 '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이란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다.
2009년부터는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 황새바위 순교성지 홈페이지]
전 공주 교도소 부근 황새바위순교성지 가까운 곳에서
죄수들이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하여 가져온 십자가이다.
서봉세 갈베르토 신부가 1984년 기증하였다.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십자가로 추정한다.
십자가 하단에 해골이 부착되어 있다.
해골의 의미는 '메멘토 모리'로 죽음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