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延安李氏) |
이무(李茂) |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시조 이무(李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후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식읍 1천호를 받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식읍으로 하사받은 연안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의 계보는 실전되어 정확한 계대(繼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고려시대를 기점으로 10개파로 나뉘었다. 즉, 소부감판사공파(小府監判事公派) 이현려(李賢呂),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이습홍(李襲洪),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이송(李松),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이지(李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이핵(李核), 이부시랑공파(吏府侍郞公派) 이분양(李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이방(李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이득량(李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이백연(李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이계연(李季衍)을 중시조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이들 계파는 중시조가 이무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고, 시조와의 세계는 물론 각 파조들 간의 세대관계도 모른다. |
광주노씨(光州盧氏) |
노해(盧垓) |
시조 노해(盧垓)는 당(唐)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신라로 건너온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첫째 아들로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노해를 시조로 하고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이후 계대(繼代)가 실전되어 후손 중 고려시대에 정승(政丞)을 역임하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노만(盧蔓)을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한 노서(盧恕)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으로 갈라졌다. 노만의 후손은 노승조(盧承肇)를 파조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와 노승관(盧承綰)을 파조로 하는 헌납공파(獻納公派)로 분파되었다. 노서의 후손은 노숭(盧嵩)의 다섯 아들을 파조로 하여 분파되었는데 장남 노상인(盧尙仁)은 양근공파(楊根公派), 차남 노상의(盧尙義)는 참의공파(參議公派), 삼남 노상례(盧尙禮)는 사간공파(司諫公派), 사남 노상지(盧尙智)는 경력공파(經歷公派), 막내 아들 노상신(盧尙信)은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
충주지씨(忠州池氏) |
지경(池鏡) |
시조 지경(池鏡)은 《충주지씨족보(忠州池氏族譜)》에 의하면 중국 송(宋)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960년(광종 11) 태학사(太學士)로 봉사관(奉使官)이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렀다. 그의 6세손 지종해(池宗海)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후 충원백(忠原伯: 충주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지경을 시조로 하고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광녕고씨(廣寧高氏) |
고경(高瓊) |
시조 고유보는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명(明)·청(淸) 교체기에 청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인조 초에 우리나라에 망명, 평안북도(平安北道) 상원(祥原)에 정착하였다. 그는 송(宋)나라 진종 때 위국(衛國)의 충렬무왕인 고경(高瓊)의 후손으로 6대조는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고, 5대조 고한봉(高翰鳳)은 한림원(翰林院)의 태학사(太學士)였다. 본관지 광녕은 중국의 지명이다.
우리나라 고씨는 제주도 ‘삼성혈(三姓穴) 전설’에서 보이는 고(高), 양(梁), 부(夫) 3성 중의 하나다. 그 중 고씨는 단일 씨족으로 인식되어 왔는데, 우연한 기회에 광녕고씨의 고재로(高載老)씨가 《광녕고씨전세가보(廣寧高氏傳世家譜)》라는 소책자를 제시하였다. 이로 인하여 광녕고씨(廣寧高氏)가 알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
창원공씨(昌原孔氏) |
공소(孔紹)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공씨의 시조는 중국의 유학 성인인 공자이고, 우리나라에서의 시조는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이다. 공소의 본명은 소(昭)였는데, 고려 광종의 이름과 같아 이를 피하여 소(紹)로 고친 것이다. 공소는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혼인하여 귀국할 때 배종(陪從)해 와서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창원을 봉지(封地)로 하사받아 창원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공씨는 본관을 창원으로 사용하다가, 1794년(정조 18) 국왕의 명으로 공자의 출생지와 같은 이름인 곡부(曲阜)를 관향(貫鄕)으로 하사 받아서 곡부공씨로 변경하게 되었다.
공소의 아들 공여(孔帤)는 고려 말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평장사(平章事)와 지응양군천우위대장(知鷹揚軍千牛衛大將) 등을 지냈다. 공여의 큰아들 공부(孔俯)는 고려 때 집현전태학사, 평장사 등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뒤 한성판윤(漢城判尹),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공여의 둘째 아들 공은(孔㒚)은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은거하면서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유배지에서 죽었다. |
금성범씨(錦城范氏) |
범승조(范承祖) |
범씨(范氏)는 중국 성씨로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두백(杜伯)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습숙(濕淑)이 진(晉)나라로 도망가서 살던 중 증손인 사회(士會)가 나라에 공을 세워 범(范)이라는 땅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범씨의 연원이 되었다고 한다.
금성범씨(錦城范氏) 시조 범승조(范承祖)는 중국 낭야(瑯琊) 사람으로 원(元)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다가 고려 1274년(원종 15)에 충렬왕 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행하고 고려로 와서 진해진(鎭海鎭: 지금 나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북송(北宋) 정이천(程伊川)의 《역전(易傳)》,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백가예설(百家禮說)》등 많은 문헌을 가지고 들어와 널리 보급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범유수(范有睢)는 고려 때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으며, 1334년(충숙왕 3)에 지휘사(指揮使)가 되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금성군(錦城君: 나주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범승조를 시조로 삼고 금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나주나씨(羅州羅氏) |
나부(羅富) |
시조 나부(羅富)는 송(宋)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송이 멸망하여 고려에서 정의대부(正議大夫)로서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하고 나주(羅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영동정(令同正)에 오른 나득규(羅得虬)를 일세조로 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
강음단씨(江陰段氏) |
단일하(段一河) |
단씨(段氏)는 중국 성씨로 우리나라 단씨는 중국 강음현(江陰縣) 사람인 단일하(段一河)를 시조로 하고 있다. 중국 명나라 때인 1509년에 장원급제하여 내원직각(內院直閣)에 올랐다. 그의 아들 단재성(段載聖)은 1522년 문과에 합격하여 기주(冀州)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고 한다. 단만리(段萬里)의 아들 단희상(段希詳)이 명나라 참정(參政)에 임명 되어 1597년(선조 30)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건너온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 정착하여 풍앙조씨 딸과 혼인하여 우리나라에 머물러 살게 되어 도래조(동래조)를 받들고 있다. |
경주빙씨(慶州冰氏) |
빙여경(冰如鏡) |
시조(始祖)는 명(明)나라 사람인 빙여경(冰如鏡)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문연학사(文淵學士)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내각한림(內閣翰林)역임하던 중 동래(東來)하여 조선(朝鮮) 정착(定着)했는데 세조(世祖)가 그를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동부승지(同副承旨)의 벼슬을 내린 후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했다. |
광평전씨(廣平田氏) |
전호겸(田好謙) |
시조 전호겸(田好謙)은 중국 명나라 상서(尙書) 전락(田樂)의 후예로 자(字)는 손우(遜宇)이고 중국 광평부(廣平府) 계택현(鷄澤縣) 풍정리(馮鄭里) 사람이다. 만력(萬曆) 38년 1610년생으로 인물이 뛰어났고 독서를 하여 향학생(鄕學生)으로 뽑혔다. 명이 청나라에 망하게 되자 선천(宣川)의 가도(椵島)에 피난 와 있었는데, 인조 14년(1636) 이 섬이 함락되자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인조 22년(1644) 심기원(沈器遠)이 모반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는 훈련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가 이들을 동원하고 궁성을 호위하여 반란이 평정되었다. 이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그런데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전씨의 선조는 중국 조(趙) 나라 사람으로 광평부(廣平府)에서 세거했다고 한다. 숙종 32년(1706)에 중국 광평부(廣平府) 계택현(鷄澤縣)에 사는 전사제(田思齊)가 중국의 광평전씨세계(廣平田氏世系)를 우리나라에 사는 후손 전회일(田會一)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그 계대(系代)의 내용에 따라 시조를 중국 사람인 전언실(田彦實)로 하고, 전호겸(田好謙)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조로 하고 있다. |
광천동씨(廣川董氏) |
동승선(董承宣) |
동씨(董氏)는 전한(前漢) 시대 동중서(董仲舒)를 시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중국 화북성(華北省) 사람으로 유교 기반을 수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동씨는 동중서의 43세손 동승선(董承宣)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말에 명나라 접위사(接慰使)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영천군(榮川君)에 봉해지면서 영천(榮川: 영주)에 정착하였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함경도 북청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영천(영주)를 관향으로 쓰게 되었으나, 함경북도 명천에 살던 후손들이 원주(原州)로 칭관하는 등 관향을 달리하다가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으로 우리나라에 온 동일원(董一元)의 소장문서를 근거로 하여 시조 출생지인 중국 광천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계파는 동승선의 아우인 동인선(董印宣)으로 아버지 친구인 서달(徐達)의 천거로 태조 때 지휘사가 되어 전공을 세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그의 8세손으로 명나라 장군으로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에 온 동일원(董一元)의 차남 동대순(董大順)이 계보를 잇고 있다. 이 두 계파는 1924년 갑자보(甲子譜)를 계기로 결합, 본관을 광천으로 하게 되었고, 광천동씨는 동중서를 시조로 하고 동승선과 동인선을 각각 일세조로 하고 있다. |
광평전씨(廣平田氏) |
전호겸(田好謙) |
시조 전호겸(田好謙)은 중국 명나라 상서(尙書) 전락(田樂)의 후예로 자(字)는 손우(遜宇)이고 중국 광평부(廣平府) 계택현(鷄澤縣) 풍정리(馮鄭里) 사람이다. 만력(萬曆) 38년 1610년생으로 인물이 뛰어났고 독서를 하여 향학생(鄕學生)으로 뽑혔다. 명이 청나라에 망하게 되자 선천(宣川)의 가도(椵島)에 피난 와 있었는데, 인조 14년(1636) 이 섬이 함락되자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인조 22년(1644) 심기원(沈器遠)이 모반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는 훈련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군사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가 이들을 동원하고 궁성을 호위하여 반란이 평정되었다. 이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그런데 《을축보(乙丑譜)》에 보면 전씨의 선조는 중국 조(趙) 나라 사람으로 광평부(廣平府)에서 세거했다고 한다. 숙종 32년(1706)에 중국 광평부(廣平府) 계택현(鷄澤縣)에 사는 전사제(田思齊)가 중국의 광평전씨세계(廣平田氏世系)를 우리나라에 사는 후손 전회일(田會一)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그 계대(系代)의 내용에 따라 시조를 중국 사람인 전언실(田彦實)로 하고, 전호겸(田好謙)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조로 하고 있다. |
남원승씨(南原昇氏) |
승신(昇信) |
승씨(昇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대하국 황제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워 통일을 하자 고려에 망명하여 승씨의 시원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공민왕은 그를 국빈으로 대우하며 노비와 주택을 하사하였다. 조선 태종 때 화촉군(華蜀君)에 봉해졌고 식읍도 하사받았다. 그의 어머니 옥경화(玉京華)는 우리나라에 신부예복인 원삼과 족두리를 보급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송도에 정착해 명의(明儀)·명현(明俔)·명준(明俊)·명신(明信) 4형제를 두었다. 특히 막내 아들 명신은 망국 황족의 후손됨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세파에 물들기를 거부하여 본성인 명(明)자를 버리고 부친의 이름자인 승(昇)자로 성을 삼았다. 그가 승씨의 창씨 시조라 하겠다. 그 후 명씨와는 같은 혈족이라하여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
등주김씨(登州金氏) |
김장생(金長生)
김식(金軾) |
시조 김장생(金長生)은 중국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등주에 대를 이어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등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신라김씨분종보(新羅金氏分宗譜)》에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조선조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역임한 김식(金軾)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계를 고증할 문헌과 보첩이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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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선씨(寶城宣氏) |
선윤지(宣允祉) |
보성선씨(寶城宣氏)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명나라 때 명전(明殿) 시책(試策)에 장원급제하고 문연각학사(文淵閣學士)로 있다가 고려 1382년(우왕 8)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고려 조정에서는 호남안렴사(湖南按廉使)를 제수하여 우리나라에 영주(永住) 귀화함으로 보성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안렴사(按廉使)를 겸하면서 전라도 해안 지방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여 가문을 열었고 후손들은 보성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소주가씨(蘇州賈氏) |
가유약(賈維鑰) |
가씨(賈氏)는 중국 주(周)나라 문왕의 자손으로 당숙우(唐叔虞)의 아들 공명(公明)이 가백(賈伯: 蘇州)에 봉해진 후 가씨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시조 가유약(賈維鑰)은 명나라 병부상서 계요도찰사(薊遼都察使)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그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인 아들 가상(賈祥)과 병부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 가침(賈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와 소사(素沙), 남원(南原)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600년 부산 포구 전투에서 아들 가상과 함께 전사하였다. 손자 가침이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울산 서생진(西生鎭) 도독동(都督洞)에 묻었다. 이후 가침은 조선에서 안동권씨 권순의 딸과 혼인하여 울산에서 터를 잡고 뿌리를 내렸다. |
수안계씨(遂安桂氏) |
계석손(桂碩遜) |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조선 초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재직하다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명으로 조선에 예학(禮學) 전수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후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져서 수안계씨를 창성(創姓)하였다. 수안계씨는 계석손 대에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에 집거(集居)하다가 그 아들 대에 이르러 전국으로 이거(移居)하게 된다. 계석손의 큰 아들인 계원우(桂元祐)는 선천(宣川)으로, 둘째 아들인 계원조(桂元祚)는 강화(江華)로, 셋째 아들 계원시(桂元禔)는 강동(江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이후 16세손 계덕룡(桂德龍)이 삭주에 터를 잡았고 그 자손은 의주까지 퍼져가서 계씨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수안계씨가 경기도 양주(楊州)에 이거한 때는 20세손 계극수(桂極秀) 때라고 전한다. |
통주양씨(通州楊氏) |
양복길(楊福吉) |
시조 양복길(楊福吉)은 원래 통주(通州) 사람으로 자(字)는 상보(祥甫)이다. 명나라 9의사(義士)의 한 명으로 나라가 망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와서 북벌(北伐)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귀화해서 정착해 살았다. 후손들이 고향인 통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통주(通州)는 중국 북경 부근 지명으로 주요 성씨는 양(楊)·김(金)씨 등이 있었다. |
청주사씨(靑州史氏) |
사요(史繇) |
사씨(史氏)는 중국 성씨이다. 우리나라 사씨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사람인 사요(史繇)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그는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는데, 명옥진(明玉珍)의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참소를 받고 장남 사중(史重)과 함께 1372년(공민왕 21) 고려에 망명하여 임천(林泉)에 숨어 살다가 누명을 벗은 뒤 파주에 세거(世居)하였다고 한다. 그 뒤 후손들이 출신지명인 청주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청주궉씨(淸州鴌氏) |
궉시영(鴌時永) |
궉씨(鴌氏)는 본이 청주(淸州) 하나 뿐으로 시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조선에 왔던 궉시영(鴌時永)이다. 부장(副長)으로서 무공을 세우고 후에 충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주가 본관이 된 연원은 알 수 없다. 궉씨에 대한 문헌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성씨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수광(李晬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순창(淳昌)에 궉씨가 있는데 내력은 알 수 없고, 혹 호성(胡姓)이라고도 한다.”라고 적고 있으며 또한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盎葉記)》에는, “선산(善山)에 궉씨마을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고 궉씨의 존재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다. |
태원김씨(太原金氏) |
김학증(金學曾) |
시조(始祖) 김학증(金學曾)은 중국 명(明)나라 때 복건성(福建省) 도어사(都御史)로 나라에 공(功)이 있어 태원백(太原伯)에 봉해졌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그의 아들 김평(金坪)이 조선에 도래(渡來)하여 대대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파릉초씨(巴陵楚氏) |
초해창(楚海昌) |
초씨(楚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우리나라 초씨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초해창(楚海昌)이 청나라가 개국하자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정착해 시작되었다. 초해창은 충의장군(忠義將軍)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경상북도(慶尙北道) 울주군(蔚州郡) 농소면(農所面) 약수리에 묘소가 있다. 그 후 아들 초수명(楚壽命)이 청나라의 자객을 피해 함경북도(咸鏡北道) 명천(明川)에 은거하면서 초해창(楚海昌)을 시조로 삼고 선조의 옛 고향인 파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
해주석씨(海州石氏) |
석성(石星) |
중국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인 시조 석성(石星)은 명나라 세종 때 진사(進士)로 이과(吏科)에 급제하고 급사중(給事中)에 뽑혔으나, 목종에게 직간을 하다가 장형(杖刑)을 받고 파직되었다. 신종 때 재등용되어 호부(戶部)와 공부상서(工部尙書),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병을 파견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막대한 군비 조달로 국운이 쇠한 책임을 져 옥사하였다. 석성의 옥중 유언에 따라 장남 석담(石潭)은 어머니 류씨(柳氏)와 함께 해주(海州)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고, 수양군(首陽君)에 봉해져 수양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고 해주에서 살게 되었다. 차남 석천은 1597년(선조 30) 배를 타고 요동을 거쳐 내려와 가야산 남쪽 군성산(君聖山) 성주(星州) 대명동(大明洞)에 정착하여 성주석씨(星州石氏)가 되었다. 그 후 석담의 아들 석귀당(石貴棠)과 손자 석난(石亂)이 산음현(山陰縣) 모호리(毛好里: 지금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평촌리)로 이거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거창신씨(居昌愼氏) |
신수(愼脩) |
신씨(愼氏)는 중국 천수(감숙성 위천도)에서 시작된 성씨이다. 우리나라 신씨는 송나라 개봉부 사람인 신수(愼脩)가 고려 문종 때 사신으로 와서 정착한 것이 시초라 한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도(守司徒)와 좌복야(左僕射)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7세손 신집평(愼執平)이 강화도 천도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몽골에 대항하다 전사하였다. 그의 아들 신성(愼成)은 군기감사(軍器監司)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가 사망하자 경상남도 거창에 내려가 살면서 거창신씨의 시원이 되었다. |
능성구씨(綾城具氏) |
구존유(具存裕) |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낸 구존유(具存裕)이다. 구존유는 1224년(고종 11)에 송나라가 몽골에 패망하자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인 청계(淸溪) 주잠(朱潛) 등과 함께 금성(錦城: 나주의 옛 이름)으로 망명해 왔다. 그 뒤 원나라가 이들 망명객들을 추적하자, 그는 구적덕(具積德)으로 이름을 고쳐 능주(綾州: 綾城)에 숨어 지내다가, 함께 은거하던 주잠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능성을 구씨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 이래로 그 후손이 고려 조정에 계속 진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2세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구민첨(具民瞻), 3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 4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5세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영검(具榮儉), 6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위(具禕)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구흥(具興)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구의(具義)가 유명하다. 그리고 7세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은 조선의 개국에 협력하지 않고 은둔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
담양국씨(潭陽鞠氏) |
국주(鞠周) |
담양국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시조는 국주(鞠周)이다. 국주는 본래 중국 송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였는데, 금나라가 송나라의 황제였던 흠종(欽宗)을 납치해간 정란(政亂)이 발생하자 이 난을 피해 1128년(인종 6) 고려에 입국하여 귀화하였다. 국주는 고려에 입국하자마자 인종을 배알하고 군신의 예를 취하였는데, 인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국주에게 감정관(監正官)을 제수(除授)하여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시켰다. 그리고 당시 중원(中原)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던 금나라에서 송나라를 제압하고 고려에게 군신의 관계로 대할 것과 많은 공물(貢物)을 요구하였는데, 인종은 국주를 금국봉사(金國奉使)로 임명하여 금나라의 요구에 외교적으로 대처하게 하였다. 국주는 왕명을 받고 여러 번 금나라에 왕래하면서 군신관계의 부당성을 주장하여 외교적으로 평등관계를 맺고 귀국하였다. 이에 인종은 국주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추성군(秋城君: 추성은 담양의 옛 이름)에 봉하고 담양(潭陽)을 본관으로 정해주었다. 이러한 연유로 중국에서 귀화한 국씨는 담양을 관향(貫鄕)으로 세거(世居)하게 된 것이다. |
서산정씨(瑞山鄭氏) |
정응충(鄭應冲) |
서산정씨(瑞山鄭氏)는 중국 절강(浙江) 사람인 정응충(鄭應冲)으로 송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냈다. 증손 정신보(鄭臣保)가 송나라에서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에 올랐다가 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건너와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하였다. 중시조 정인경(鄭仁卿)은 정신보의 아들로 1254년(고종 41)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9년(충렬왕 25)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후 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定策安社功臣) 벽상삼중대광광정대부(壁上三重大匡匡靖大夫) 도검의중찬(都僉議中贊) 상장군(上將軍) 판전이사사(判典理司事)가 되었고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졌다. 또한 원나라 황제로부터 무덕장군정동성이문관(武德將軍征東省理問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고 정착지인 서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아산장씨(牙山蔣氏) |
장서(蔣壻) |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중국 송나라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신경위대장군(神慶衛大將軍)을 지냈다. 고려 예종 때 금나라가 송을 침입하자 그는 상서(尙書) 이강(李綱)과 함께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를 타고 망명하여 우라나라의 아산(牙山)에 표착하였다. 《기미보(己未譜)》에 의하면, “장서가 아산에 표착한 사실을 좌복야(左僕射) 박인량(朴寅亮)과 재보(宰輔) 위계정(魏繼廷)으로부터 전해 들은 고려 예종이 그에게 아산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를 아산군(牙山君)에 봉하였다.”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아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안동손씨(安東孫氏) |
손응(孫凝) |
시조 손응(孫凝)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본래 이름은 순응(荀凝)이었으나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 손씨를 하사하였다고도 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서는 고려 현종의 이름이 순(詢)이어서 손씨 성을 하사하였다고도 한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순씨가 고려시대 손씨가 된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손응 이후의 계대(繼代)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을 지낸 손세향(孫世鄕)을 1세조로 하고 있으며, 장군을 지낸 손간(孫幹)을 중시조로 하여 복주(福州: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동)에 자리잡아 살면서 본관을 일직(一直)으로 삼게 되었다. |
안성이씨(安城李氏) |
이중선(李仲宣) |
안성이씨(安城李氏)의 시조 이중선(李仲宣)은 고려 때에 경군호장(京軍戶長)으로 백성을 잘 다스린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고, 이자의(李資義)의 모반을 평정하는 데 기여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가 되었으며 백하군(白夏君)에 봉해졌다. 백하는 안성의 옛 이름이다. 그 이전의 계보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중선 이후 본관을 안성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갑자보(甲子譜)》 세보 연혁편에 보면, 이중선은 중국 농서이씨(隴西李氏) 청륜계(靑倫系)의 이맹선(李孟宣)·이중선·이계선(李季宣) 3형제의 둘째로, 송나라 경력(慶曆) 연간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정착하여 안성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
의령여씨(宜寧余氏) |
여선재(余善才) |
의령여씨(宜寧余氏)는 중국의 성씨로 중국 송나라 사람인 여선재(余善才)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있으면서 천자에게 직언을 하다 미움을 사 우리나라로 건너오게 되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 그를 의춘군(宜春君)에 봉하였는데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이름이다. 그러므로 후손들이 의령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역임한 여현경(余玄景)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
임천조씨(林川趙氏) |
조천혁(趙天赫) |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송 태종 4)에 위왕(魏王)이 화를 입자 숙부 조유고(趙惟固)와 함께 우리나라에 피란하고 이름을 천혁(天赫)으로 고쳐 임천(부여)에 정착하게 되었다.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고려 현종 때 강감찬(姜邯贊) 장군과 함께 거란군(契丹軍)을 격파한 공으로 가림백(嘉林伯,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임천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
장흥임씨(長興任氏) |
임호(任灝) |
장흥임씨(長興林氏)는 중국 소흥부(紹興府) 출신의 임호(任灝)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송나라 때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고려로 귀화해 당시 정안(定安)이라 불리던 장흥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장흥임씨의 시작으로 그 시기는 대체로 정종연간(1034~1046)으로 추정된다.
임호의 아들 임의(任懿)는 문종 대 과거에 급제한 후 우승선(右承宣)을 시작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좌리공신(佐理功臣)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그의 손자 임원후(任元厚)는 문하시중에 이르고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의 칭호를 받았는데, 관향을 장흥으로 삼은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
정선이씨(旌善李氏) |
이양혼(李陽焜) |
정선이씨(旌善李氏)의 시조 이양혼(李陽焜)은 자(字)가 원명(元明)으로 본래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북송 휘종 때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주(慶州)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정선을 관향으로 삼게 된 이유는 6세손 이의민(李義旼)과 아들 이성순(李性純)이 1196년(명종 26) 최충헌(崔忠獻)에게 화를 입고, 손자 이우원(李遇元)이 국자생원(國子生員)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봉되어, 정선(旌善)으로 낙향하여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
신안주씨(新安朱氏) |
주잠(朱潛) |
신안주씨는 중국 송나라 신안현 사람인 주잠(朱潛)이 고려 고종 때 우리나라에 와서 나주(羅州)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시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주잠은 주자(朱子)의 증손으로 송나라 사직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주여경(朱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나주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후에 원나라에서 송의 유민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이라 고치고 능성(綾城) 고정리(考亭里)에 은거하였다가 여러 곳으로 이거하여 지명에 따라 따로 본관을 사용해 온 관계로 신안(新安)·나주(羅州)·능성(綾城) 등 45개 파로 갈리었다. |
해주오씨(海州吳氏) |
오인유(吳仁裕) |
해주오씨는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이름이 높았던 오인유(吳仁裕)로 고려 성종 때 건너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내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 오연총(吳延寵)은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이 밖에도 오한경(吳漢卿)이 찬성사(贊成事)에, 오광정(吳光廷)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며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
나주정씨(羅州丁氏)
압해정씨(押海丁氏) |
정윤종(丁允宗) |
나주정씨(羅州丁氏)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의 아들 정응도(丁應道)가 신라 헌안왕 때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을 시조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금성(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
의령남씨(宜寧南氏) |
남군보(南君甫) |
서기 755년(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다녀오다 풍랑을 만나 신라(新羅)에 표착(漂着)했던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정착하면서 경덕왕(景德王)으로부터 남씨(南氏)를 사성(賜姓)받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받은 후 민(敏)으로 개명(改名)하였다. 남민의 7대손 진용(鎭勇)의 세 아들 중 남군보(南君甫)는 남민(南敏)의 둘째 아들로서 의령(宜寧)에 관적(貫籍)하여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