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해방을 꿈꾸며
새로운 개념을 배울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옛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도 당신을 평균의 횡포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 p.37
<평균의 종말> 종말이라...좀 쎈데? 게다가 ’평균‘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도 아닌데? 평균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고?
우리의 일상에서 평균이 사용되는 경우는 무척 많지만, 내가 ‘평균‘이라는 단어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시험점수였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두 아이를 둔 엄마의 입장이라 더 그런 것 같다고 하면 이유가 되려나?
사실 큰애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로 가장 민감해진 부분이 학교 시험과 성적이다. 더불어 나는 숫자에 더 과민해졌다. 점수, 등수, 등급, 공부시간, 수면시간, 통학시간, 교육비 등등
아이는 중학생 시절을 하고 싶은 활동(교내 오케스트라, 음악 밴드, 체력교실, 학생회, 도서관 활동 등)을 거의 다 하며 보냈다. 거기에 성적도 최상위권에 교내 시상도 거의 다 쓸어오는 모범생이었으니 아이는 충분히 만족했고 나도 너그러울 수 있었다.
하지만 비평준화 지역에서 소위 우수하다는 아이들이 모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큰아이 학교 아이들의 학원 수강 과목은 평균 4개, 2년 정도의 선행과 반복, 하루 평균 4~5시간 정도의 수면시간을 고려하면 그에 따른 공부시간이나 사교육비까지도 나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평균적인 수치에 하나도 해당되는 것이 없는 내 아이는 국어와 사회과목은 여전히 탁월한 성적을 보였지만 수학에서는 부족함을, 과학은 어려움과 거부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고등학교의 수업방식과 학습량, 시험의 난이도가 선행학습 여부와 정도에 따라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졌다. 학교의 수행평가, 동아리 활동, 급식, 야간자습에서 얻는 만족과 성취도 있지만 지필고사 성적에 다소 위축되고 자존심에도 상처를 입었다.
일차원적 등급 매기기에 가학적일 정도로 초점을 맞추면서 모든 학생이 평균적 학생과 똑같이 하도록,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모든 학생과 똑같이 하되 더 뛰어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p.242
아이는 세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 자신에 대한 주목과 인정의 횟수가 줄고, 처음 받아보는 점수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동안 아이가 은근히 가졌을지 모를 우월감이 어쩌면 이제는 열등감으로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를 지켜보는 내 마음도 불편하고 안타깝다. 고등학교 성적표의 석차와 평균, 백분위 같은 숫자가 보여주는 위력은 정말 대단해서 아이도 나도 이전과 똑같은 사람인데 불과 몇 달 사이에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다.
평균의 시대를 특징짓는 2가지 가정은 무엇인가?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케틀레의 신념과 한 가지 일에 탁월한 사람은 대다수의 일에서 탁월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골턴의 신념이다. 그러면 이번엔 개개인의 과학이 내세우는 주된 가정은 뭘까? 개개인성이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즉 개개인은 오류가 아니며 개개인을 (재능, 지능, 인성, 성격 같은) 가장 중시되는 인간 자질에 따라 단 하나의 점수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p.107
내 아이의 학교생활과 성적에 관한 이야기가 과거의 자랑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푸념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정한 시기에 일관된 교육방식과 획일적인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고 한 줄로 세워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지금 우리 입시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에 빠졌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평균이란 허상 속에서 더 앞서고 뛰어나려 기를 쓰는 우리의 모습에 분노와 좌절의 감정도 느꼈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신체 조건이 다르고 환경과 성격, 가치관도 모두 다르다. 그런 개개인이 불확실한 미래를 모두 같은 기준과 방식으로 준비하며 서로 경쟁하는 일이 과연 바람직할까? 결국 우리는 각자의 이유와 방식으로 각자의 시기를 살게 될 것이다. 다행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의 기준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고 오히려 생각과 마음이 조금 정리되고 가벼워졌다. 아이도 나도 닥친 현실 앞에 초연할 수만은 없겠지만 나는 아이를 믿고 좀 더 길게 지켜보기로 했다. 언젠가 내 아이도 자신의 방향을 찾아 자신의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거라 믿으니까. 우리 개개인의 삶은 소중하며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