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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일람집 제7권
영덕 우바새 진실 편집
장순용 번역
[제6문]
삼계(三界)의 윤회를 초월하려고 하면
3승(乘)을 빌려서 닦아 증명하라.[6품 153칙]
42) 사중품(四衆品) 43) 입도품(入道品)
44) 성문품(聲聞品) 45) 연각품(緣覺品)
46) 보살품(菩薩品) 47) 등각품(等覺品)
42) 사중품(四衆品)
[재가(在家)의 두 대중은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이고, 출가(出家)의 두 대중은 비구승과 비구니이다. 부록으로 8부(部)와 외도(外道)의 58칙을 붙인다.]
번뇌[塵勞]가 핍박함이 마치 감옥과 같고
법문(法門)의 넉넉함이 마치 허공과 같다.
『요집(要集)』에서 『열반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재가의 급박하고 협착함[迫迮]은 마치 감옥과 같아서 일체의 번뇌가 이로 인해 생긴다. 출가의 너그럽고 넓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일체의 착한 법은 이로 인해서 증장한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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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法苑)』에서 『바사론』을 들어서 말하였다.
“이 집안은 부모·형제·처자·권속과 수레나 마차 등의 물건이 오직 늘어나기만을 탐내서 추구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집은 가득 채우기 어려우니 마치 바다가 물을 삼키는 것과 같다. 집은 만족함이 없으니, 마치 불이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다. 집은 쉼이 없으니, 각관(覺觀)이 상속하기 때문이다. 집은 고뇌의 성품이니, 마치 원수가 친족을 속이는 것과 같다. 집은 장애이니, 능히 성도(聖道)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집은 혼란이니, 서로 어긋나서 다투기 때문이다. 집은 성냄이 많으니, 아름답고 추함을 질책하기 때문이다. 집은 무상(無常)이니, 비록 오래되더라도 무너져 상실하기 때문이다. 집은 온갖 고통이니, 치구(馳求)하고 수호하기 때문이다. 집은 전도(顚倒)이니, 거짓 이름을 탐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집은 기인(伎人)이니, 갖가지 망령된 장식 때문이다. 집은 변이(變異)이니, 반드시 흩어지기 때문이다. 집은 임시로 빌리는 것이니, 진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집은 꿈을 보는 것과 같으니, 부귀가 곧 상실되기 때문이다. 집은 아침 이슬과 같으니, 잠깐 사이에 변해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집은 한 방울의 꿀과 같으니, 그 맛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집은 가시덤불과 같으니, 욕망의 가시로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걱정들은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재가의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관(觀)해야 한다.
'집의 허물을 알라. 처자와 권속과 일체의 재물도 능히 구원하질 못하고 귀의처로 삼을 수 없으니, 나의 선우(善友)가 아니다. 마땅히 그걸 버려야 한다.'”[서자함(書字函) 제2권]
하루 아침 동안 잠시 복전(福田)의 옷을 걸쳐보았더니
많은 겁 동안 온갖 고취(苦趣)를 거치지 않았다.
『요집』에서 『대연경(大緣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하루 낮밤 동안이나마 출가했기 때문에 20겁(劫) 동안 3악도에(惡道) 떨어지지 않았다.
출가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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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 가운데 유전(流轉)하면서
은혜와 애착에서 벗어나질 못하니
은애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들어간다면
진실로 은혜를 갚은 것이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서 도법(道法)을 받아들인 뒤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구걸로써 만족할 줄 아니, 하루에 한 번 먹고 나무 아래서 하룻밤을 지낸다.'”[사자함(辭字函) 제7권]
『요람(要覽)』에서 『오덕복전경(五德福田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첫째는 발심(發心)해서 출가하는 것이니 아름다운 도(道)를 품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외형의 아름다운 모습을 망가뜨리니 법복(法服)에 순응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신명(身命)을 맡겨 버리니, 숭고한 도를 준수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영원히 친족의 애착을 단절하니 싫어하고 좋아함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대승(大乘)을 추구하니 남을 제도하기 때문이다.”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이 힘써야 할 일이 있으니, 첫째는 좌선(坐禪)이고, 둘째는 경전을 외우는 것이며, 셋째는 대중을 권유해서 교화하는 일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일을 구족한다면 마땅히 출가한 사람의 법이겠지만, 만약 행하지 못한다면 덧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으니 오직 죄를 받는 원인일 뿐이다.”[영자함(楹字函)제17권]
만약 승려가 되어서 계율까지 받았다면
귀신과 하늘[神天]을 섬기지 않고 친족에게 예배하지 않는다.
『요람』에서 『범망경(梵網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의 법으로는 국왕과 부모와 육친(六親)에게 예배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귀신을 공경하고 섬겨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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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천신의 무리들은 다섯 가지 계를 받은 사람에게 감히 예배받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나라의 군주인 지존(至尊)도 비구가 예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복덕과 수명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장자함(帳字函) 제2권]
『요람(要覽)』에서 말하였다.
“부모가 도리어 예를 갖추는 것은 세속을 떠난 것으로 예를 삼은 것이며, 또한 그 법복(法服)과 계체(戒體)에 절하는 까닭이니, 『본기경(本起經)』에서는 부왕(父王)인 정반(淨飯)이 부처님 발에 예배드렸다고 했고, 또 『마야경(摩耶經)』[마야는 부처님의 어머니이다.]에서는 부처님 앞에 무릎 꿇고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게송을 설했다.
위없는 대법왕(大法王)에게 머리 숙여서 예배드립니다.”
출가를 능히 받아들이고 아울러 남에게 권한다면
그 공덕은 탑을 조성하는 등 그 밖의 공덕보다 뛰어나다.
『출가공덕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스스로 출가하고 다른 사람의 출가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출가를 권유함으로써 얻는 공덕은 보시 등 일체의 공덕보다 뛰어나니, 모든 공덕 가운데 이 공덕이 최상이다.'
또 말씀하셨다.
'만약 남녀와 노비와 인민을 놓아 주어 출가시키면 그 공덕이 한량없을 것이다. 또 칠보탑을 세워 그 높이가 삼십삼천에 닿는다고 하더라도 출가의 공덕만은 못하다.'[심자함(甚字函)]
애도(愛道)의 출가를 처음에는 들어 주지 않다가
아난(阿難)이 재차 청하자 비로소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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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애도(大愛道)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여인도 정진하면 사문의 네 가지 도(道)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부처님의 법과 계율을 받게 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시오. 좋지 않습니다[거성(去聲)]. 모인(母人:여인)으로서 내 법 속에 들어와서 내 법의(法衣)를 입는 자는 반드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청정해야 하며, 정결히 한 후에 범행(梵行)을 창달해야 하고, 삿된 생각이 없어야 하고, 마음의 공적(空寂)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때 대애도가 즉시 다시 애원하였다.
'부처님께 바라노니 득도(得度)하도록 해주십시오.'
이와 같이 세 번을 청했는데도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다.
대애도는 문 밖으로 물러나서 눈물을 비처럼 흘리며 자신의 악한 태도를 참회하였다. 즉, 여든네 가지로 장부를 미혹하고 혼란시켜 도덕을 잃게 해서 천하의 남자로 하여금 여인에게 유혹되지 않은 자가 없도록 한 것을 참회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진실을 깊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득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아난이 즉시 그녀를 위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부처님을 따르면서 여인도 정진하면 사문의 네 가지 도(道)를 얻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대애도는 재가에 있으면서도 믿음이 있고 무상(無常)을 깨우쳐 알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욕망의 모습을 살펴서 그 진실을 이미 깊이 알고 있습니다. 이제 출가를 하려고하니, 부디 부처님께서는 허락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왜냐 하면 반드시 맑고 고상한 자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정성(旌姓)의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 가운데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것과 같나니, 마땅히 알라 그 집안은 미약해져 흥성하지 못하려는 것이니라.
이제 모인(母人)으로 하여금 나의 법과 계율에 들어오게 하면, 반드시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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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佛法)의 청정과 범행(梵行)이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대애도에게는 착한 마음이 많으며, 나에게도 커다란 은혜가 있다. 내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때부터 나를 길러 주었다. 내가 이제 성불하고 보니 그녀의 은혜가 무겁다고 생각한다. 만약 모인(母人)이 사문이 되면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八敬法]을 반드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 한다.
첫째, 비구는 대계(大戒:俱足戒)를 지키고, 모인(母人) 비구니는 반드시 정법(正法)을 따르면서 받아들여야 하니, 가볍게 여기거나 희롱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비구가 대계를 지킨 지 보름 이상이 되면 비구니는 반드시 예로써 비구를 섬기면서 새로 배우는 뜻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셋째, 비구와 비구니는 함께 거처해서도 안 되고 함께 머물러서도 안 된다. 넷째, 스스로의 모습을 검사해서 만약 삿된 말이 있다면 받아들이고서 퍼뜨리지 말아야 하니, 듣고서도 못 들은 듯이 하고 보고도 못 본 듯이 한다. 다섯째, 스스로 허물과 나쁜 점을 살펴야 하니, 큰 소리로 크게 말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섯째, 비구에게 경과 율에 관한 일을 물을 때는 세간의 긴급하지 않은 일을 함께 말해선 안 된다. 일곱째, 만약 법과 계율을 범하게 된다면, 반드시 보름에 대중에게 나아가 참회해야 한다. 여덟째, 비구니가 비록 백 년간 대계를 지켰더라도 반드시 새롭게 대계를 받은 비구의 아랫자리에 처해서 겸손하게 공경하고 예배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 공경하는 법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행하겠다면 사문이 되기를 허락하노라.'
우리 부처님의 정법은 천 년이나 오래 갈 것이지만
여인[尼母]이 문도 되니 절반으로 줄어들리라.
또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 년 동안 흥성하면서 전파되어 일체를 널리 제도할 것이지만, 지금 여인이 사문이 되기 때문에 5백 년이 줄어들어 법이 점점 쇠미해질 것이다. 왜냐 하면 여인은 다섯 곳에서 사문이 되질 못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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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무엇을 다섯 곳이라 하는가?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며, 전륜왕(轉輪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범천왕(梵天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천제석(天帝釋)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마천왕(魔天王)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섯 곳은 장부라야 될 수가 있다.
다시 다음에 여인은 비유하면 독사와 같으니, 사람이 비록 그 뱀을 살해하여 이미 죽었더라도 어떤 사람은 보고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한다. 이처럼 여인이 비록 사문이 되었더라도, 더러운 진액[惡露]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일체의 남자가 그로써 회전하게 되어 도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봉자함(奉字函) 제1권]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여인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 년 동안 머물렀겠지만 지금은 줄어서 5백 년이다.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해탈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정(定)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지계(持戒)를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다문(多聞)을 얻고, 1백 년 동안에는 견고한 보시를 얻는다.[처음 백 년 동안에 해탈의 견고한 법이 있다.]”[유자함(猶字函) 제3권]
여인에게 비록 다섯 가지 장애가 있더라도 본래 공함을 안다면
다생(多生)을 지나 정각(正覺)을 성취하리라 부처님은 수기하다.
『초일명경(超日明經)』 하권에서 말하였다.
“혜시(慧施) 등 5백 명의 여인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희는 지금 여자 몸입니다만, 부디 위없는 도의 뜻을 일으켜 여자 몸을 바꿔 속히 정각을 성취하여 시방의 중생을 제도 해탈시키기를 원합니다.'
그 때 상도(上度) 비구가 혜시에게 말했다.
'여자 몸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여자에겐 세 가지 장애와 다섯 가지 일의 장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어려서는 부모님께 통제를 받고, 시집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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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통제를 받아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자식이 크면 자식에게 어려움을 받으니, 이것이 세 가지입니다.
무엇을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하는가? 첫째는 여인은 천제석(天帝釋)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용맹스럽고 욕심이 적어야 비로소 남자가 될 수 있는데, 악이 섞이고 구태가 많기 때문에 여인이 되어서는 천제석이 되지 못합니다. 둘째는 범천(梵天)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 하면 청정한 행을 받들고, 더러움이 없으며, 네 가지 평등한 마음[四等心]을 닦아서 4선(禪)을 준수한다면 곧 범천에 오르지만, 음욕에 절도가 없는 까닭에 여인이 되어서는 범천이 되지 못합니다. 셋째는 마천(魔天)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열 가지 선(善)을 구족하고, 삼보(三寶)를 존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봉양해야 비로소 마천을 얻게 되는데, 경솔하고 오만해서 순종하지 않고 올바른 가르침을 훼손하기 때문에 여인이 되어서는 마천이 되지 못합니다. 넷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도를 행하고, 온갖 중생에게 자애롭고 불쌍히 여겨야 비로소 전륜왕이 되는데, 청정한 행이 없기 때문에 여인이 되어서는 성제(聖帝)가 되지 못합니다. 다섯째는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보살의 마음을 행하고, 일체를 불쌍히 여기고 무아(無我)를 이해하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성불을 하는데 색(色)의 욕망에 집착한 몸·입·뜻의 업 때문에 여인이 되어서는 부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 때 혜시를 비롯한 여인들이 상도에게 물었다.
'저마다 온갖 뿌리를 심어서 과실을 얻는데, 본래 남녀가 있어서 보응(報應)에 이르는 것입니까? 본래 다섯 곳인 제석천·범천·전륜왕·소도(小道)·대도(大道)가 있는 것입니까?'
상도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오히려 짓는 자가 없으니, 무엇이 성립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내가 부처를 취하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취해도 취하는 바가 없고, 성취해도 성취하는 바가 없고, 깨쳐도 깨친 바가 없어서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어야 비로소 부처라는 명호를 붙이는 것이며, 또한 명호가 없이 임시로 명자(名字)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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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진실로 말한 대로이다. 일체는 처소가 없어서 행을 따라 이루어지니,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흥기하지도 않고 쇠퇴하지도 않으며,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으며, 염(念)도 없고 앎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어야 비로소 정각(正覺)을 성취하노라.'
이 때 혜시와 5백 명의 여인들은 마땅히 서원한 대로 남자 몸으로 바뀌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수기를 내리시기를, '10겁(劫) 후에 부처가 되리니, 그 명호는 혜견(慧見) 여래이고, 세계는 제명(除冥)이며, 겁은 광명(光明)이라 하리라'고 하셨다.”[망자함(罔字函)]
본래 여자의 모습이 없는데 어찌 바꿀 것이며
어찌 여류(女流)이겠는가라고 반드시 이렇게 관해야 한다.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말하였다.
“방 안에 있던 한 천녀(天女)가 법을 설하자, 사리불이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천녀가 말했다.
'나는 12년 이래로 여인의 모습을 구했지만, 끝내 얻을 수 없었는데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비유하면 마치 환술사가 변화로 환녀(幻女)를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어째서 여자 몸을 바꾸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올바른 질문을 한 것입니까?'
사리불이 대답했다.
'올바른 질문이 아닙니다. 환영[幻]은 고정된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천녀가 말했다.
'일체의 법도 이와 같아서 고정된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여자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단 말입니까?'”[죽자함(竹字函)]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아사세왕(阿闍世王)에게 딸이 있었는데 무외덕(無畏德)이라고 이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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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든 대성문들과 변론을 하면 그들이 미치질 못했다.
이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여인은 기이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이미 과거 90억 부처님들께 보리심을 발했노라.'
사리불이 말했다.
'능히 여자 몸을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그 여인을 어찌 여인이라고 보는가? 그대는 이제 마땅히 그와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이는 보살의 발원력 때문에 여자 몸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무외덕은 이렇게 서원했다.
'만약 일체법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면, 지금의 나로 하여금 장부의 몸을 나타내게 하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자 즉시 여자 몸이 소멸되면서 장부의 몸을 나타내었다. 부처님께서 그를 위해 수기하셨다.
'7천 아승기가 지나면 정각을 이룰 것이니, 그 명호를 이구여구(離垢如垢) 여래라 하고, 세계의 명칭은 광명(光明)이라 하리라.'”[제자함(制字函) 제9권]
불성(佛性)을 알지 못하면 남자와 여자를 이루지만
집안의 보배를 알고 나면 여자가 곧 남자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대열반경』을 들으면 항상 여인의 모습을 질책하고서 남자를 구해야 한다. 왜냐 하면 이 대승(大乘) 경전에는 장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니, 이른바 불성(佛性)이다. 만약 사람으로서 불성을 알지 못한다면 남자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남자로서 불성이 있는 것을 능히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무리는 여인이라 이름한다고 설하고, 만약 여인이 자신에게 결정코 불성이 있다는 걸 능히 안다면, 나는 이런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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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곧 남자라고 설하느니라.”[이자함(邇字函) 제9권]
사문(沙門)은 본디 도로써 명호를 삼고
장로(長老)는 진실로 덕을 말미암아서 칭한다.
『요람』에서 『보적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사문이란 것은 적멸이기 때문에, 조복하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몸이 청정하기 때문에, 여실한 뜻이기 때문에, 해탈을 얻기 때문에,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여의기 때문에, 견고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대지와 같기 때문에, 상대와 나의 뜻을 수호하기 때문에, 모든 형상에 대해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 속에서 손을 움직여도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많은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사문이라고 이름한다.
또 바기(婆耆) 존자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능히 본원(本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를 사문이라고 한다.
범어(梵語)의 비구는 진(秦)나라 말로는 걸사(乞士)이니, 이른바 위로는 모든 부처님께 법을 구걸해서 혜명(慧命)에 유익하게 하고, 아래로는 시주에게 음식을 구걸해서 색신(色身)에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능히 번뇌를 깨부수기 때문에 비구라 이름한다. 범어 필추(苾芻)는 바로 서천축의 풀이름인데, 능히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체성(體性)이 유연한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몸과 말의 거칠음을 능히 조복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줄기를 끌어다 옆으로 퍼뜨리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법을 전해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이어져서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향기가 멀리서 맡아지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계율과 덕의 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넷째는 능히 통증을 치료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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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독을 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햇빛을 등지지 않는 것이니, 비유하면 출가인이 항상 불일(佛日)을 향하기 때문이다.
범어에서 갖추어 말하는 승가(僧伽)는 당(唐)나라 말로 중(衆)이다. 지금은 간략히 승(僧)이라고 칭하는데, 화합하기 때문이다. 그 뜻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율[戒]의 화합으로 똑같이 닦는 것이며, 둘째는 견해[見]의 화합으로 똑같이 이해하는 것이며, 셋째는 몸[身]의 화합으로 똑같이 머무는 것이며, 넷째는 이익[利]의 화합으로 똑같이 균등한 것이며, 다섯째는 말[口]의 화합으로 다툼이 없는 것이며, 여섯째는 뜻[意]의 화합으로 똑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이 화합[和]을 제일[上]로 삼기 때문에 또한 화상(和上)이라고도 말한다.
범어의 사리(闍梨)는 당(唐)나라 말로 궤범(軌範)이다.”
『대장엄경』에서 말하였다.
“장로는 머리털이 하얗거나 얼굴 피부가 주름진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복과 덕을 닦아서 온갖 악을 소멸하고 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이를 장로라고 한다.”[군자함(君字函) 제1권]
남의 음식을 쉽게 생각지 말 것이니
자신의 공덕 없음을 생각한다면 어찌 감당하리요.
『요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음식을 받을 때는 먼저 5관(觀)[거성(去聲)]을 외우면서 단정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경책한 뒤에 비로소 음식을 받는다.
첫째는 공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그 음식이 온 곳을 생각한다.[『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이 음식은 개간하여 심어 수확하였다. 찧고 갈며 일고 씻고 밥을 지어 먹게 만든 공이 매우 크다. 한 발우의 음식도 농부가 흘린 땀이다. 음식은 적더라도 흘린 땀은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하승기율』에서 말하기를, “시주하여 그 처자와 함께 복을 구하므로 보시라 한다”고 하였다.]
둘째는 자기의 덕행을 헤아려서 공양 받을 만한지를 생각한다.[『비니모경(毗尼母經)』에서 말하기를, “만약 좌선도 하지 않고 경을 읽지도 않고 삼보(三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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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운영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보시를 받으면 시주에 의해 타락한다. 위의 하나라도 결하여 보시를 받으면 옳지 못하고 전부를 행한다면 받아도 된다”고 하였다.]
셋째는 마음을 방비하고 과오를 여의는 데는 탐욕 등을 핵심으로 삼는다.[『명료론소(明了論疏)』에서 말하기를, “출가하려면 먼저 마음을 방비해야 한다. 세 가지 과오란 제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탐심(貪心)을 일으키는 것이고, 제일 맛없는 음식을 먹을 때 진심(瞋心)을 일으키는 것이요, 중간 음식을 먹을 때 치심(痴心)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면 3악도(惡道)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넷째는 음식을 양약으로 여겨서 몸의 여윔을 치료한다.[몸이 마르는 것은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주병(主病)이고 404가지 병은 객병(客病)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음식을 의약으로 삼아 몸을 부지(扶持)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만약 죽을 먹는다면 바른 양약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도업(道業)을 성취하기 위하여 반드시 이 음식을 받아야 한다.[먹지 않아 병이 나면 도업(道業)이 어떻게 따르겠느냐? 『증일아함경』의 게송에서 말하기를, “너무 많이 먹으면 고통과 병환이 따르고 너무 적게 먹으면 기력이 쇠퇴해진다. 적당히 먹는 사람은 높낮음이 없이 편안하다”라고 하였다. 음식은 때나 때 아닐 때 청(聽)하거나 청하지 않거나 거두어야 한다.]”[제2권 십선품(十善品) 참조]
덕이 있다면 만 냥인들 어찌 말하기에 족할 것인가?
4사(事)를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따른다.
『영가집』에서 말하였다.
부사의한 해탈의 힘이여,
묘용(妙用)이 항하의 모래와 같아서 끝이 없구나.
4사(事)의 공양인들 감히 사양하겠는가.
만 냥의 황금도 역시 소화하리라.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져도 아직 부족하지만
1구(句)는 요연(了然)히 백억을 뛰어넘는다.
[532 / 873] 쪽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만약 대승의 불법을 배우는 자라면, 시주에게 음식을 수미산같이 받을 수 있고, 시주에게 옷을 대지에 깔 만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승을 배우지 못한 자는 만약 승수(僧數)에 떨어지지 않으면 시방에 침 뱉을 곳이 없을 것이다.”[가자함(駕字函) 제4권]
만약 남을 제도하려 하면서도 자신을 제도하지 못하면
남을 침몰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도 침몰한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수행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제도한 후에 남을 제도해야 한다. 만약 스스로를 제도하지 못하고서 남을 제도하려는 자는 마치 물에 떠 있을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가 함께 침몰하는 것과 같다.”
스승의 장점과 단점을 구하는 걸 그만두어라.
다만 진흙으로 빚은 용을 취해도 거짓 위에 진실이 있다.
또 말하였다.
“그대는 법사(法師)에 대해 그 단점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외경심을 내어라. 법사의 좋고 나쁨은 나의 일이 아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오직 법을 들어서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하려는 것뿐이니, 마치 진흙으로 빚은 불상과 나무로 만든 불상이 실다운 공덕은 없지만 그로 인해 부처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덕을 얻는 것과 같다.”[입자함(立字函) 제9권]
고덕(古德)이 말하였다.
“진흙으로 빚은 용에게 공양해도 반드시 진짜 용이 비를 내리며, 평범한 승려에게 공양을 해도 반드시 참 승려가 복을 내리게 된다.”
비구여, 양친 부모를 공양하라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라.
걸식[分衛]은 마땅히 다섯 곳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533 / 873] 쪽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능가바차(陵伽婆蹉) 비구는 부모가 빈궁해서 옷과 물건을 공양하려고 하여도 감히 하지를 못했다. 이 일을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사람이 백 년 동안 오른쪽 어깨에다 아버지를 얹고 왼쪽 어깨에다 어머니를 얹고서 그 위에서 대소변을 보게하며 세상에서 가장 진기한 옷으로 극진히 공양하더라도 오히려 잠깐 동안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이제부터는 명심하라. 모든 비구들은 마음이 다하고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부모를 공양하라. 만약 공양하지 못한다면 무거운 죄를 얻으리라.”[상자함(上字函) 제10권]
『요람』에서 『선견율』을 들어서 말하였다.
“분위(分衛)는 이곳 말로는 걸식이라고 한다. 『승기(僧祇)』에서 말하기를 '걸식은 비구와 비구니에게 나누어 베풀고 도업(道業)을 닦도록 호위하므로 분위라고 한다'고 하였다.”
『근본비나야(根本耶)』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비구는 오직 다섯 곳에서는 걸식할 수 없다. 첫째는 노래하는 집이요, 둘째는 음녀의 집이요, 셋째는 술을 파는 집이요, 넷째는 전다라(旃茶羅)의 집이요, 다섯째는 왕의 집이다.'”
많은 일을 고통스럽게 구하는 데 싫어함이 없다면
모든 새들도 그로 인해서 떠나간다.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영사(營事)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다시 방사(房舍)로써 세상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 돈과 재물은 얻기도 어렵고 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과거 세상에 발처(跋處) 비구가 숲 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 때 석군다(釋軍多)라는 새도 이 숲으로 모여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울어서 그 비구를 산란하게 해서 선정에 들지 못하게 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534 / 873] 쪽
[이 새를 오지 않게 하고 싶은가?]
비구가 대답했다.
[그러길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해가 저물어 새들이 돌아올 때 각각에게 깃털 하나씩을 구걸하고, 아침에 나갈 때도 이와 같이 구걸하라.]
비구는 가르침대로 아침저녁으로 각각에게 깃털 하나씩을 구걸했다. 이 때 새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사문은 항상 구걸하는데, 우리들이 오래지 않아 털이 다 없어져서 다시는 날지 못할까 걱정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새들은 즉시 따로 살 곳을 찾아갔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새와 짐승들도 많이 요구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데,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겠는가? 그대들 비구는 일을 수고롭게 해서 많은 일과 많은 욕심으로 저 신심이 있는 거사로 하여금 재물을 괴롭게 버리도록 하지 말라.'”[우자함(優字函) 제6권]
승려는 어리석고 속인은 인색하여 모두 알지 못한 나머지
고뇌를 일으켜 원수를 이루어서 스스로 재앙을 취했다.
『법원』에서 『대집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어떤 장님 용녀(龍女)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인지(因地)에서 일찍이 농부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비구가 와서 저에게 50전(錢)을 구걸했는데, 저는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곡식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시오. 그 때 반드시 당신에게 음식을 주겠습니다.]
비구가 다시 말했습니다.
[부디 10문(文)만 주십시오.]
저는 그 때 그 비구에게 화를 냈고 10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 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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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음에는 오뇌(懊惱)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중에 절로 가다가 숲에서 암라과(菴羅果) 열 개를 도둑질해서 먹었습니다. 그 업의 인연으로 지옥에서 고통을 받았으며, 악업(惡業)이 아직도 끝나지 않아서 굶주린 용의 몸을 받아서 온갖 벌레에게 뜯어 먹혀서 고름과 피가 나오는 고통을 겪습니다. 또 그 비구는 분노의 마음으로 지은 악업의 인연 때문에 작은 독룡(毒龍)이 되어서 저의 겨드랑이 밑에 살며 제 피를 빨아먹습니다.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해탈하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자, 작은 용이 즉시 나오면서 똑같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오랜만에 여길 벗어났습니다.'
부처님께서 용에게 말씀하셨다.
'이 업은 너무나 무거워서 다섯 가지 무간죄(無間罪)에 버금간다. 왜 그러한가? 만약 사방에 항상 머무는 승려의 물건이나 현전(現前)의 승려의 물건이나 독실한 신앙으로 시주한 물건이나 혹은 꽃·열매·숲·동산·음식·탕약·침상[牀]·이부자리·깔개 등 일체 필요한 것을 사사로이 사용하고 친지에게 구걸한다면, 이 죄는 아비(阿鼻)지옥의 과보보다 무겁느니라.'”[칠자함(漆字函) 제6권]
무욕(無欲)의 분수 위에서 성냄의 바람이 불고
맑고 차가운 구름 속에서 벽력의 불이 일어난다.
『유교경(遺敎經)』에서 말하였다.
“욕망을 받는 재가인[白衣]은 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법답게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해서 성을 내더라도 오히려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출가인은 도를 행하여 욕망이 없는 사람인데 성냄을 품는다면, 이는 아주 옳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맑고 차가운 구름 속에서 벽력이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응할 것이 아니다.”[당자함(堂字函)]
계율을 지킨다면 매운 채소를 더욱 싫어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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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닦는다면 사음과 도둑질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모든 중생이 삼마제(三摩提)를 구하려 한다면, 마땅히 다섯 가지 매운 음식[五辛][파·부추·마늘·염교]을 끊어야 한다. 익혀 먹으면 음욕을 일으키고 날 것으로 먹으면 성냄을 증대시킨다. 이 매운 음식을 먹는 사람은 설사 능히 12부(部) 경전을 널리 설하더라도, 시방의 천선(天仙)이 그 냄새의 더러움을 싫어해서 모두 다 멀리 여의기 때문에 복과 덕이 나날이 줄어들어 마귀[魔]의 권속이 된다.'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삼매를 닦는 것은 본래 번뇌[塵勞]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데, 음심(婬心)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선지(禪智)가 있더라도 반드시 마도(魔道)에 떨어지리니, 상품은 마왕이 되고 중품은 마왕의 백성이 되고 하품은 마녀가 된다. 이것은 예전의 부처님께서 첫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음욕을 끊지 않고서 선정(禪定)을 닦는 이는 비유하면 마치 모래와 돌을 끓여서 밥을 지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백천 겁을 지내더라도 끝내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다음에 살생의 마음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선정의 지혜가 있더라도 반드시 신도(神道)에 떨어지니, 상품은 대력귀(大力鬼)가 되고 중품은 비행야차(飛行夜叉)가 되고 하품은 지행나찰(地行羅刹)이 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살생을 끊지 않고서 선정을 닦는 이는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귀를 막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다시 다음에 도둑질하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선정의 지혜가 있더라도 반드시 사도(邪道)에 떨어지니, 상품은 정령(精靈)이 되고 중품은 요매(妖魅)가 되고 하품은 삿된 사람이 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도둑질을 끊지 않고서 선정을 닦는 자는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물이 새는 그릇을 가득 채우려고 해도 끝내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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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아, 이와 같이 중생이 비록 몸과 마음에 살생과 도둑질과 음란함이 없어져 세 가지 행동[三行]이 이미 원만하게 되었더라도, 만약 대망어(大妄語)를 하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하고, 나는 이미 성문과 보살을 얻었다고 하면서 저들이 예참(禮懺)하기를 구하고 공양을 탐하리라. 부처님께선 이런 사람은 영원히 선근이 망가져서 삼계의 고통스런 바다에 빠진다고 기(記)하신다. 그리고 내가 멸도한 후에는 보살 등에게 칙령을 내려서 응신(應身)이 말세에 모든 윤전(輪轉)하는 자들을 제도하도록 하리니, 혹은 사문·재가자·거사·왕·재상·음녀·과부·간사한 자·도둑질하는 자·백정·장사치가 되어서 그 일을 함께 하며 불승(佛乘)을 칭찬함으로써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게 하되, 끝내 스스로 내가 진실한 보살이고 진실한 아라한이라고 하면서 부처의 밀인(密因)을 누설하지 않는다. 오직 목숨을 마칠 때가 되어서야 은밀히 부촉해 남기는 것이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네 번째로 결정하신 분명한 가르침이다. 만약 대망어를 끊지 못한 사람은 마치 사람의 똥을 깎아 전단나무 형태를 만들려는 것과 같아서 향기를 구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염자함(染字函) 제6권]
『금강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고, 실답게 말하는 자이고, 여여하게 말하는 자이고,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이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다.”
『능엄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비구는 살아 있는 풀은 밟지도 않는데, 하물며 손으로 뽑겠는가? 어째서 대비(大悲)의 불자가 모든 중생들의 피와 살을 취해서 배를 채운단 말이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약 길가에 버려진 물건을 본다면, 이것이 누구 것이냐고 외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사실인지 묻고서 돌려준다. 만약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7일 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외친다. 그런데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높은 곳에다 걸어 두고서 사람들이 보게 한다. 만약 남의 물건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묻고서 상응하는 자에게 준다. 끝내 아는 자가 없으면 3개월 동안 그냥 둔 뒤에 가령 탑원(塔園) 속에서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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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면 즉시 탑을 만드는 데 쓰고, 승원(僧園) 속에서 얻은 것이면 사방승가(四方僧伽)를 위해 쓴다.”[영자함(楹字函) 제14권]
『계품경(戒品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마땅히 청정한 법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의 음욕을 일으키겠는가?”[나중의 네 가지는 앞서의 망어·살생·도둑질·음란함을 다스리는 것이다.]
잠자거나 마음이 미쳐 있거나 선정에 들었을 때 음행을 당해
처음이나 중간이나 나중에나 쾌락을 누렸다면 그 죄를 어찌 피하리요.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니가 사람·비인(非人)·축생의 세 종류와 함께 음행을 하거나, 다시 깨어 있거나 잠들거나 죽었을 때의 세 종류와 음행을 하면, 모두 바라이죄(波羅夷罪)이다. 비구니가 만약 잠들거나 마음이 미쳐 있거나 선정[定]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이 위로 가서 음란한 짓을 할 경우, 비구니가 깨어나서 만약 처음이든 중간이든 나중이든 쾌락을 누린다면 바라이죄이다. 만약 잠들거나 마음이 미쳐 있거나 선정[定]에 들어갔는데 음란한 짓을 당할 경우, 깨어난 후에 처음엔 쾌락을 누리지 않다가도 중간이나 나중에 쾌락을 누리거나, 혹은 처음과 중간엔 쾌락을 누리지 않다가 나중에 쾌락을 누리면 모두 바라이죄이다. 만약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모두 쾌락을 누리지 않는다면 죄가 없다.
무엇을 쾌락을 누린다 하고 쾌락을 누리지 않는다 하는가? 비유하면 마치 굶주린 사람이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자 그가 음식으로 쾌락을 삼는 것과 같으니, 욕락(欲樂)을 누리는 자도 이와 마찬가지다. 욕락을 받지 않는 자는 비유하면 마치 청정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갖가지 신주를 그 목에 매다는 것과 같으니, 욕락을 누리지 않는 자도 이와 마찬가지다.”[섭자함(攝字函) 제6권]
미친병으로 인해 욕망을 행했다면 어찌 범한 것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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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란하거나 무심(無心)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다.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어떤 한 비구가 미친병에 걸려서 음행을 했다. 미친병이 낫자 의심이 생겨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미친 자는 범한 것이 아니다. 가령 산란한 마음이나 병들어 마음이 무너진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화자함(和字函) 제8권]
승가의 물건은 눈처럼 호지(護持)해야 하거늘,
사사롭게 문득 취하면 사람 몸을 잃는다.
『요집』에서 말하였다.
“[문] 어째서 승가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사용하면 그 죄가 더 무거운가?
[답] 시주가 본래 터럭 하나나 낱알 하나라도 희사함은 시방에 공양하려는 뜻이니, 북과 종의 한 메아리가 멀리까지 미치면서 똑같이 듣는다. 성인과 범부가 받아써서 모두 도업(道業)을 이루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주를 도와서 끝없는 이익을 얻게 한다. 선함을 초래하는 것이 이미 많거늘 죄를 얻는 것이 어찌 적겠는가?
이제 보건대 어리석은 중생은 구차하게 복물(福物)을 탐해서 자신을 유익케 하는데 쓴다. 혹은 승가의 음식을 먹기도 하고, 혹은 꽃과 과일을 받아쓰기도 하고, 혹은 승가의 가축을 타고 다니고, 혹은 승가의 노비를 거느려서 따라다니게 하고, 혹은 사사로이 승가의 물건을 빌려서 돌려주지 아니하고, 혹은 관청의 세력으로 승가의 허물을 들추어내니, 이와 같은 손실은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허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지금 아끼고 주지 않는 것은 간탐하거나 인색해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들을 불쌍히 여겨 미래에 받을 고통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장차 준다면 속인에게 손실을 끼칠 뿐만 아니라 또한 일을 아는 자에게까지 미쳐서 미래의 태어나는 곳에서 그 재앙을 똑같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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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보인경(寶印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과 법의 두 가지 물건은 서로 교대로 사용할 수 없다. 부처님과 법의 물건은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것은 항상 초제(招提:사찰)에 두고서 서로 물어보고 쓸 수 있는 승려의 물건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승가의 물건을 써서 불탑을 수리하려면 법에 의해 취해야만 하니, 승가가 화합하면 쓸 수 있으며, 화합하지 않는다면 세속 사람에게 수리할 것을 권한다. 만약 불탑에 어떤 물건 내지는 1전(錢) 이상이 있으면, 시주가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천(天)과 사람은 이 물건에 대해선 마땅히 불상(佛想)과 탑상(塔想)을 내야하며, 나아가 바람이 불어서 무너졌더라도 3보에 공양한 물건은 팔아서는 안 되나니, 여래의 탑물(塔物)은 사람이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죄복결의경(罪福決疑經)』에서 말하였다.
“혹은 시주가 본래 석가불상[釋迦]을 만들려고 했는데 아미타불상[彌陀]으로 고쳐서 만들고, 본래 『대품(大品)』을 만들려고 했는데 『열반』으로 고쳐서 만들고, 본래 승가의 방을 지으려고 했는데 승가의 음식으로 고쳐서 공양하고, 본래 이중(二衆)에게 보시하려 했는데 일중(一衆)으로 고쳐서 들여보내고, 본래 시방을 향하려 했는데 현전(現前)에 돌려서 들여보내는 것은 모두 시주를 위반하는 것이니, 돈의 많고 적음을 따져 5전(錢)을 채우면 중죄[重]를 이루고 5전이 못 되면 경죄[蘭]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사분율』에서는 이렇게 말하셨다.
'이곳에 허락했는데 저곳에도 준다면, 모두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경문에 준거하면, 불상을 검교(檢校:자세히 조사하고 살펴봄)하다가 남은 채색(彩色)이 있어도 보살이나 성승(聖僧) 등의 형상을 짓지 못하니, 스승과 제자의 지위가 구별되기 때문에 상호간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다른 장엄구(莊嚴具)를 만들려고 하다가 도로 부처님께 공양하면 범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시주의 뜻[情]이 통해 한 줄로 늘어선 불상을 임의로 장엄하면 통틀어 지어도 전혀 죄가 없다.”
『오백문사율(五百問事律)』에서 말하였다.
“불상에 사용할 채색으로 새나 짐승의 형태를 짓는다면 죄를 얻지만,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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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앞에 있는 걸 제외하면 공양해도 범하지 않는다.
'요즈음 재(齋)를 올릴 때 불전(佛錢)이 있는데, 이 돈은 어떤 용도로 써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시주의 본심이 상(像)을 짓는 것이라면 단지 상을 조성해야만 하고 다른 용도로 써서는 안 된다.'”[영자함(楹字函) 제14권]
『장춘록』에서 말하였다.
“상주(常住:절에 거주하는 대중)의 돈을 한 문[一文錢]을 훔치면, 하루 낮 하루 밤에 3푼(分) 7리(釐)의 이자가 늘어나고, 이튿날 낮·밤이면 위의 이자에 또 이자가 늘어난다.[앞의 3푼 7리를 계산해야 한다.] 내세에 소나 말이 되어서 그것을 갚는다.[소는 날마다 8문(文)을 돌려주고, 말은 날마다 7문을 돌려준다.] 이 때문에 '일생의 편안함을 짓는 것이 만 겁(劫)의 어려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 1문의 돈을 희사하여 상주(常住)에 들어놓으면, 하루 낮 하루 밤의 긴 복도 역시 마찬가지다.”[제9편]
승가의 재물을 속여 취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염라대왕이 반드시 알고 용서하지 않는다.
『법원』에서 『십송률(十誦律)』을 들어서 말하였다.
“관리·공장(工匠)·악한 도적으로 승가에 대해 손해와 이익이 있는 자는 부처님의 지사(知事)를 열고 승가의 물건을 내서 간대(看待)하여도 모두 범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세속인이 소멸에 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사(知事)를 여는 것일 뿐이다. 간대(看待)하지 않는 자는 부처와 승가에 대해 손해가 있다.”[벽자함(壁字函) 제2권]
『승기율』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라면 승가의 물건에서 마땅히 주어야 할 것과 마땅히 주지 않을 것이 있음을 안다. 무엇이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인가? 가령 손해 보는 것이 있거나 이익을 보는 것이 있다. 무엇을 손해 보는 것이라 하는가? 어떤 도적이 절에 와서 갖가지 음식을 찾는데, 만약 주지 않는다면 방화재난[燒劫]을 일으키고, 비록 마땅히 주지 않더라도 손해되는 일을 지을까 두려우니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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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음에 따라서 준다. 무엇을 이익 되는 것이라 하는가? 만약 승려들의 방 등을 고친다면, 목공이나 화공에게 전식(前食)과 후식(後食) 또는 때가 아니라도 음료수 등을 마땅히 주어야 하는 것이며, 가령 세력이 있는 자라도 마땅히 음식을 주어야 하니, 이를 이익 되는 자에게 마땅히 주는 것이라 한다.”[우자함(優字函) 제3권]
[이상의 두 단락은 간략히 간추린 것이니, 본래의 경전에 상세히 갖추어져 있다.]
승려가 갈라섰다가 능히 화합하면 하늘에 태어나 즐길 것이며
승려가 화합하다가 갈라서면 지옥에 떨어져 근심하리라.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조달(調達)이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이미 부처님을 해칠 수 없었으니, 기필코 마땅히 화합승(和合僧)을 파괴하리라.'
부처님께서 조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이미 파계했다가 화합하는 승려라면, 그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 1겁 동안 즐거움을 누리지만 만약 화합했다가 파계하는 승려라면, 지옥 가운데 떨어져 1겁 동안 고통을 받으리라.'”[필자함(畢字函) 제3권]
스님을 보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형벌을 가하면
다스리는 자는 이로써 죄앙(罪殃)을 얻는다.
『요집』에서 『십륜경(十輪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비구들이 불법(佛法)에 의거해서 출가했으면, 일체의 천인과 아수라(阿修羅) 등은 모두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만약 계율을 보호하고 지키면 마땅히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가두거나 묶어두거나 혹은 그 손발이나 나아가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만약 파계한 비구가 온갖 번뇌 결사(結使)에 파괴되었더라도, 오히려 능히 하늘·용·인비인(人非人) 등에게 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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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공덕과 보배의 복장(伏臧)을 열어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를 의지해 출가한 사람은 계율을 지키든 계율을 깨뜨리든, 나는 전륜성왕이나 대신들이 이들을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가두고 묶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나아가 목숨을 끊는 일을 허락할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가볍게 범하는 작은 위의(威儀)이겠는가? 파계한 비구가 비록 금계(禁戒)를 범할지라도, 그 계율의 힘은 오히려 능히 한량없이 천인(天人)을 이롭게 할 수 있다. 비유하면 향을 태우는 것과 같아서 향체(香體)가 비록 파괴되었더라도 냄새는 다른 것을 향기롭게 한다. 파계한 비구도 이와 같아서 스스로 악도(惡道)에 떨어지더라도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시키게 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 일체의 재가자들은 모두 마땅히 수호하고 존중하고 공양해야 하며, 경멸하거나 귀양 보내거나 벌하거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첨복화(蔔華)가 비록 시들었더라도
다른 모든 꽃들보다 뛰어나듯이
파계한 모든 비구들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모든 외도들보다는 뛰어나다.”
또 『살차니건경(薩遮尼經)ㄴ을 들어3서 말하였다.
“만약 탑과 절을 파괴하였거나 만약 부처님의 물건을 취하였거나, 만약 어떤 사문이 계율을 지키다가 계율을 파괴한 경우, 혹은 결박하여 가두고 때리거나, 혹은 세속에 돌려보내거나 그 목숨을 끊는다면, 이것은 근본적인 무거운 죄를 범한 것이니, 결단코 지옥에 떨어져서 쉼 없는 고통을 받을 것이다.
왕으로서 국토에서 이 같은 착하지 못한 짓을 행한다면, 모든 선인(仙人)과 성인들이 나라를 떠날 것이며, 대력(大力)의 모든 신들도 그 나라를 수호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들은 말다툼을 하고, 물은 가물어서 조화롭지 못하고, 겁탈하는 도적이 횡행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질병에 걸려서 무수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은 것일 줄 알지 못하고 하늘만 원망하리라.”[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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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帳字函) 제2권]
승려가 되려면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승낙하고
어머니가 아들의 출가 뜻에 어겼기에 여러 세상에 가난했다.
『오분율』에서 말하였다.
“정반왕(淨飯王)은 부처님께서 이미 득도(得度)하셨음을 들었는데, 나후라까지 출가하자 문득 크게 고뇌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예전에 출가하셨을 때는 위로 난타(難)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지금처럼 고뇌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난타가 다시 출가했을 때는 나머지 정을 오직 이 자식에게만 쌓았는데, 이제 다시 출가한다면 집안과 나라의 대계(大計)가 영원히 단절되니,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왕은 또 자신을 미루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자손에 대한 애정은 골수까지 사무치는 것인데, 어찌 모든 비구들을 유혹해서 도를 닦도록 하는 것입니까? 부디 부처님께선 이제 모든 비구들에게 칙령을 내려서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를 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부처님께서 왕을 위해 갖가지 미묘한 법을 설하시어 가르쳐 기쁨과 이익을 보이시고는 비구에게 계율을 내려서 '지금부터는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득도할 수 없다'고 하셨다.”[상자함(上字函) 제7권]
『노여인경(老女人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어떤 빈궁한 늙은 여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인연을 듣고서 이해하였습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 늙은 여인은 어떤 이유로 지혜가 이 정도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은 내가 전생에 뜻을 일으켜서 도(道)를 배울 때의 어머니였다.'
아난이 여쭈었다.
'그 어머니가 어째서 이렇게 가난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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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진불(拘留秦佛) 당시에 나는 사문이 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자애(慈愛)로 인해 내가 떠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는 고민하면서 하루 종일 먹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5백 세 동안 가난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수명이 다하면 반드시 아미타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날 것이며, 나중에 68억 겁이 지나서는 반드시 부처가 되리니, 그 명호를 바건(波吒)이라 하고 불국토의 이름은 화화(化華)라고 하리라.'”[훼자함(毁字函)]
왕비자리를 버리고 비구니가 되니 그로 말미암아 과위를 증득했고
아버지를 가로막아 세속에 있게 하니 그 벌로 새가 되었다.
『잡보장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옛날 우타선왕(優陀羨王)에게 부인 한 명이 있었는데, 유상(有相)이라고 이름하였다. 왕은 그녀를 무척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당시 나라의 법에 왕은 손수 거문고를 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부인은 왕의 총애를 믿고서 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자신은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왕은 평소에 관상을 잘 보았는데, 부인에게 이미 죽을 상(相)이 나타나서 7일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왕은 곧 거문고를 쓰다듬으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부인이 그 이유를 물어도 왕은 대답하기를 꺼렸다. 그러자 간절히 계속해서 물었고, 왕은 사실대로 말했다. 부인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석실(石室) 비구니가 하는 말을 들으니, 만약 믿는 마음으로 단 하루라도 출가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디 왕께서는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사랑의 정이 두터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6일째가 되는 날에 그대가 떠나는 걸 허락하리라.'
6일째가 되자 왕은 부인에게 말했다.
'만약 천상에 태어나게 되면 반드시 나를 보러 오시오. 그래야 나도 곧 떠나는 걸 허락하겠소.'
이같이 맹세한 후 문득 출가하여 8계재(戒齋)를 받았다. 그 날로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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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고서 착한 인연을 타고 천상에 태어난 까닭에 왕을 보러 왔다.
왕이 물었다.
'누구인가?'
천녀가 대답했다.
'왕의 부인입니다.'
왕이 앉으라고 명하자 천녀가 대답했다.
'왕을 살펴보니 냄새나고 더러워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맹세 때문에 한 번 보러 온 것입니다.'
왕은 곧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녀는 본래 나의 부인이었는데, 하루 동안 출가하여 곧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신지(神志)가 높고 원대해서 나를 비천하게 보는구나. 지금 내가 어찌 출가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은 말로는 천상의 손톱 한 개가 염부제의 땅과 맞먹는다고 하였는데, 내가 어찌 한 나라를 탐내겠는가?'
그리고는 지위를 버려 자식에게 물려주고 출가해서 도를 닦아 나한과(羅漢果)를 얻었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부법장경(付法臧經)』에서 말하였다.
“사야다(闍夜多)존자가 제자들과 덕차시라성(德叉尸羅城)에 갔는데 슬퍼하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 한 마리를 보고서야 흔연히 미소를 지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묻자 존자가 대답했다.
내가 처음 성에 이르렀을 때 한 명의 귀자(鬼子)를 보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음식을 구하려고 성으로 들어간 지 5백 세 이상을 지났는데도 아직 스스로 벗어나질 못해서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의 어머니를 본다면, 부디 일찍 돌아오라고 말해 주옵소서.'
과연 그의 어머니를 보게 되어서 곧바로 자식의 뜻을 말해 주었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성에 들어와서 생성과 파괴를 일곱 번이나 반복했는데도 아직까지 사람의 침[唾]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연히 약간의 침을 얻었기에 성을 나가서 자식과 함께 나눠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문에는 힘이 센 귀신(鬼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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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많아서 두려워 감히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즉시 그녀와 함께 나와서 자식과 함께 먹도록 했다. 나는 귀신이 '고통을 받은 지 너무나 오래되었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로 인해 슬퍼한 것이다.
그 때의 새는 과거겁 가운데 나였다. 출가를 하려고 하였는데, 부모님께서 허락하지 않고 억지로 장가를 보내서 자식을 얻었다. 아이의 나이 여섯 살 때 나는 다시 떠나려고 하였으나 부모는 아이로 하여금 나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면서 말하게 했다.
'아버님께서 저를 버린다면 누구를 의지해 살란 말입니까? 먼저 저를 죽이고 난 다음에 떠나십시오.'
이 아이 때문에 결국 출가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91겁 동안 5도(道)를 유전(流轉)하면서 일찍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도안(道眼)으로 살펴보니 그 새가 전생의 내 자식이었다. 그 어리석음으로 오랫동안 생사에 처한 걸 불쌍히 여겨서 미소를 지은 것이다.
만약 사람의 출가를 가로막는다면, 그 죄로 악도(惡道)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으며, 나중에 사람 가운데 태어나도 장님으로 태어나 눈이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사람의 출가를 보면 방편을 성취해야지 만류해서는 안 된다.”[장자함(帳字函) 제4권]
자손이 도리어 우리 집안의 법을 비방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부끄러움이 없으니 진실로 일천제(闡提)로다.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순타(純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천제(一闡提)란 그 뜻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가 거칠고 나쁜 말을 하고 정법(正法)을 비방하면서도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이 같은 사람들을 일천제의 길을 향한다고 하느니라.'”[이자함(邇字函)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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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가 비록 재가 보다 뛰어나지만
재가인이 수행한다면 출가인 보다 뛰어나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재가인이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면 일체 벽지불의 과보보다 뛰어나지만, 출가인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 하면 재가인은 나쁜 인연에 얽히는 바가 많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면 모든 천(天)이 다 크게 놀라고 기뻐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이제 인간과 천상의 스승을 얻었다.'”[극자함(剋字函) 제1권]
몸은 먹물 옷을 입었어도 마음은 오히려 세속에 있고
머리에 검은 두건을 둘렀지만 생각은 승려나 다름없다.
『법온족론(法蘊足論)』에서 말하였다.
“첫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 올바른 믿음으로 출가해서 몸소 승가[法侶]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오히려 애착하여 온갖 욕망을 돌아보면서 연모하고 있으니, 이를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은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비록 아내와 자식을 두고 상품(上品)의 미묘한 옷과 음식과 진귀한 보배를 받아쓰더라도, 온갖 욕망에 대해 탐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이를 몸은 재가에 있어도 마음은 출가하였다고 한다.
셋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올바른 믿음으로 출가해서 몸소 승가에 들어갔으며, 온갖 욕망의 경계에 대해서도 마음이 돌아보지 않으니, 이를 몸과 마음이 모두 능히 출가했다고 한다.
넷째, 한 종류의 보특가라가 있다. 아내와 자식을 두고서 상품의 미묘한 것을 받아쓰면서도 깊이 탐착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이를 몸과 마음이 모두 출가하지 않았다고 한다.”[백자함(白字函) 제6권]
부처님께 아뢰고 출가한들 어찌 과보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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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대가 결박을 끊으면 스스로 공(功)을 이루리.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석마남(釋摩男)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로 우바새의 뜻은 재가자가 장부의 뜻을 갖추고서 3보에 귀명(歸命)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나는 우바새다?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와 나아가 아나함과(阿那含果)까지 얻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신견(身見)과 계도(戒盜)와 의심의 그물 등의 세 가지 결박[三結]을 끊어 없애고 나면 이미 수다원과를 성취한 것이라서 다시는 3도(塗)의 몸을 받지 않고, 위없는 도[無上道]에 대한 결정적인 믿음을 일으켜서 인간과 천상을 일곱 번 왕래 하면서 모든 고제(苦際)를 다하고 열반에 들리라.'
또 여쭈었다.
'어떻게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결박[三結]을 끊으면 이미 음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지는데, 이를 사다함이라 한다.'
또 여쭈었다.
'어떻게 아나함과를 얻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세 가지 결박[三結]과 다섯 가지 하분[五下分]을 끊는다면 아나함을 이룬다.'
그 때 석마남 등의 5백 명은 이 법을 들은 후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모든 재가인들이 이 뛰어난 이익을 얻어서 일체가 다 우바새가 되었습니다.'”[연자함(淵字函) 제6권]
다만 정각(正覺)을 수행할 마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출가한 필추의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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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구칭경(無垢稱經)』에서 말하였다.
“모든 동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를 할 수 없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구칭이 말했다.
'그대들 동자들이 다만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일으켜서 올바른 행을 부지런히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출가이고 이것이 바로 받아 갖추는 것이라서 필추의 성품을 이룬다.'”[백자함(白字函) 제2권]
보리(菩提)를 세속[紅塵]에서 증득하기 쉽다면
여래께서는 설산(雪山)에서 수행하지 않았으리라.
장경(長慶)의 『능엄경(楞嚴經)』 주석에서 말하였다.
“재가 보살은 또한 경전의 취지를 잘못 이해해서, 모든 부처의 계법(戒法)에 힘쓰지 않고 다만 공용(功用)이 없는 도를 깨닫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여래께서 태자였을 때를 살펴보면, 반드시 설산에 들어가서 수행하여 몸과 마음이 적정해지고서야 바야흐로 도를 깨달았다. 만약 재가에 있으면서 부처가 될 수 있었다면, 여래께서는 결코 설산에 가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그대들 중생을 위해 그런 모습을 일으키신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만약 모두 무구칭(無垢稱)과 방거사(龐居士)와 비슷하다면, 출가를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신분을 전환[轉身]해야 비로소 얻는다.”[제4권]
착하고 착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인(因)을 짓기 때문에
천룡팔부[八部]·사람·비인(非人)이 된다.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에서 말하였다.
“'8부(部)의 귀신은 무슨 인연으로 악도(惡道)에 태어나는데도 항상 정법(正法)을 듣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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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업이 있으니, 첫째는 악하기 때문에 악도에 태어나는 것이며, 둘째는 착하기 때문에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또 물었다.
'선과 악은 둘로서 다른 것인데, 함께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수 있다. 천신(天神)은 수레·집·음식으로 3보(寶)·부모·어진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을 우선시하지만, 여전히 간탐심과 질투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허공용신(虛空龍神)은 덕행과 보시[檀]를 닦지만, 정념(正念)에 의하지 않고 성품이 급하고 성내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야차신(夜叉神)은 대보시를 좋아하지만, 먼저 손해를 주고 나중에 이익을 가하는데, 공(功)의 뛰어나고 그렇지 못함을 따르기 때문에 천상·공중·지하에 있는 것이다. 건달바(乾闥婆)는 보시를 좋아하지만, 기악(伎樂)을 성내면서 바치기 때문이다. 아수라신(阿修羅神)은 의지가 강하고 기쁘게 보시하지만 착한 벗을 따르지 않고, 청정한 복을 짓기를 좋아하지만 환상과 거짓을 쫓아서 온갖 그릇된 복을 짓기 때문이다. 가루라신(迦婁羅神)은 먼저 크게 열 가지를 닦지만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남을 능멸하기 때문이다. 긴나라신(緊那羅神)은 과거에 사람에게 보리심을 일으키도록 권유하길 좋아했지만, 그 뜻이 올바르지 않아서 온갖 삿된 행동을 쫓았기 때문이다. 마후라가신(摩羅伽神)은 보시하고 법을 수호하지만, 성품이 성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두가 삿된 스승에 의지하기 때문에 삿됨으로 올바름을 어지럽히면서도, 모두 이 도는 스스로 건립한 것이라고 말한다.'”[수자함(受字函) 제8권]
외도의 망령된 건립이 이로부터 시작되고
조달(調達)이 원수를 갚는 것도 이로부터 단서가 되었다.
『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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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에 외도(外道)가 건립된 인연이다. 지나간 겁(劫)에 부처님께서 계셨는데, 그 명호가 구손타발타라(拘孫陀跋陀羅)였다. 세간에 출현하셨을 때는 외도의 이름이 없었고 오직 하나의 대승법(大乘法)만이 있었다. 멸도하려고 할 때에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불혜(佛慧)였다. 당시 어떤 착한 사람이 그에게 값을 매길 수 없는 옷을 보시했는데, 사냥꾼이 그 옷을 보고는 도둑질할 마음이 생겼다. 밤에 비구를 깊은 산 속에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들고서 손을 나무에 매달았다. 꽃을 따던 어떤 바라문이 그 비구를 보고는 [먼저는 가사를 입었다가 지금은 나체가 되었으니, 반드시 가사를 입는 것이 해탈의 인(因)이 아님을 알겠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스스로 고행(苦行)에 매달리는 것을 진실로 도를 배우는 것이라 여긴 나머지 그 사람은 즉시 옷을 벗고 머리를 뽑으니, 나형(裸形) 사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 때 비구는 스스로 묶인 것을 풀고서 즉시 나무껍질을 벗겨서 붉은 돌로 물들여서 스스로를 가렸고, 풀을 엮어서 털이개를 만들어서 모기 같은 벌레를 쫓았다. 그러자 어떤 바라문이 그 모습을 본 후에 [이 비구는 예전의 좋은 옷을 버리고 이 같은 옷을 입고 이 같은 털이개를 가졌으니, 반드시 이것이 해탈의 길이리라]고 여겼다. 그리고는 즉시 그 법을 배우니, 출가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그 때 그 비구는 날이 저물자 물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다. 머리에 난 종기를 씻고는 곧 물에 젖은 옷을 가져다 종기 위를 덮었으며, 소를 치는 사람이 버린 옷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가렸다. 그 때 어떤 나무꾼이 그 모습을 본 후에 [이 비구는 먼저는 가사를 입었는데 지금은 다 버렸으니, 반드시 가사를 입는 것이 해탈의 인(因)이 아님을 알겠다. 그러니 머리를 풀고 해진 옷을 입으며, 매일 밤 세 번 씩 목욕하면서 고행을 익히고 닦는 것이 마땅히 해탈의 길임을 알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그 법을 배우니, 고행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비구가 목욕한 후에 몸에 종기가 많아서 파리와 벌이 빨아대니, 곧 하얀 재를 곳곳에 난 종기에다 바르고는 물에 젖은 옷으로 몸을 가렸다. 이 때 이 모습을 본 자가 이것이 도(道)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 법을 배우니, 재를 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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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바라문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 때 그 비구는 종기에 불로 뜸을 뜨니, 종기가 더욱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위 위에 몸을 던지면서 스스로 자해하니, 이 때 그 모습을 본 자가 [이 비구는 먼젓번엔 좋은 옷을 입다가 지금은 이와 같으니, 마땅히 불로 뜸을 뜨고 바위에 몸을 던지는 것이 해탈의 길임을 알겠다]고 생각했다. 바위에 몸을 던지고 불을 섬기는 것이 이로부터 일어났다.
이와 같이 아흔여섯 가지가 모두 이 비구의 갖가지 유형으로 인해 갖가지 망상을 일으킴으로써 각기 스스로 견해를 일으킨 것이니, 마치 사슴이 더위에 목말라 하면서 신기루를 쫓아다니다가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다. 정법(正法)이 멸할 때 저 비구의 비법(非法)으로 인한 법의 상념도 이와 마찬가지다.'”[양자함(量字函) 제4권]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외도의 분파가 흘러나오다가 부처님께서 출현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6대 스승이 있었다. 이른바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은 성(姓)인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생각했으며, 말가리구사리자(末伽梨拘賖梨子)는 중생의 고통과 즐거움은 인연이 없으며 자연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사야비라지자(刪闍夜毗羅胝子)는 중생이 때가 성숙해서 도를 얻어도 8만 겁(劫)의 고통을 다해야 스스로 해탈한다고 하였다. 아기다시사흠바라(阿耆多翅舍欽婆羅)는 거친 옷인데, 죄의 과보인 고통은 바위에 몸을 던지거나 머리를 뽑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생각했다. 가라구타가전연(迦羅鳩馱迦旃延)은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하다고 생각했으며, 건타보리자(旃陀菩提子)는 업으로 정해진 것은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독자(犢子)는 '색(色)이 나[我]이다. 색을 여의어서 내가 있다. 색 가운데 내가 있다. 내 속에 색이 있다'고 하면서 합하여 스무 가지 신견(身見)을 생각했다.”[가자함(駕字函) 제6권]
“화엄회상(華嚴會上)의 제21위(位) 선지식인 변행(遍行) 외도가 선재(善財)에게 말하였다.
'염부제(閻浮提) 안의 96개의 무리들이 각기 이견(異見)을 일으켜서 집착을 낳으면, 나는 그에 맞는 방편으로 조복해서 지니고 있는 모든 소견을 버리도록 하고, 나아가 시방세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마쳐 모두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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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라.'”[수자함(首字函) 제7권]
『경률이상(經律異相)』에서 말하였다.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조달(調達)은 어떤 무거운 원한이 있기에 이토록 응어리를 품고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단지 금생(今生)만이 아니라 세세생생 그러했다. 지나간 세상에 범지(梵志)의 딸이 있었는데,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든 범지의 법에는 무릇 딸을 경문에 밝은 자에게 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모든 동학(同學) 5백 명을 초청해서 3개월 동안 공양하며 그 알고 있는 바를 살폈다.
당시 5백 명 가운데 한 사람만이 널리 통달했지만, 나이가 많고 얼굴이 추하고 눈이 파란 색이어서 부모가 근심을 했고 딸도 역시 고민을 했다. 그 때 먼 곳에서 범지 한 사람이 왔는데 젊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그는 딸을 시집보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어려운 질문을 했는데, 5백 명의 범지들이 모두 궁지에 빠져 대답하질 못했다. 부모와 딸은 기뻐하면서 사위로 받아들였다.
나이 많은 범지가 말했다.
[나이 많은 걸 불쌍히 여서 아내 될 사람을 빼앗지 마시오. 그러면 내가 보시로 얻은 물건들을 모두 그대에게 돌려주겠소.]
젊은 범지가 대답했다.
[법도를 어기고 인정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연로한 범지는 독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서 즉시 비난하고 욕했다.
[세세생생 있는 곳마다 그대와는 원수가 되겠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늙은 범지가 지금의 조달이고, 젊은 범지가 바로 나이고, 딸이 바로 구이(瞿夷)이니라.'”
또 말하였다.
“옛날에 비구 조달은 총명하고 널리 배워서 12년 동안 좌선을 하면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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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에 들었지만, 다시 뜻이 도리어 퇴보해서 점차로 악한 생각을 일으키고 세간의 이익[利養]에 탐착하였다. 그가 세존의 처소로 가서 발에 예를 드리고는 여쭈었다.
'부디 신족도(神足道)를 말씀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족은 차치하고, 어째서 네 가지 비상(非常)의 뜻을 배우지 않는가?'
조달은 다음으로 사리불(舍利弗)과 목련(目連)의 처소를 찾아가서 신족도를 구했으나, 역시 둘 다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먼저 네 가지 비상(非常)의 뜻을 배우고 나서 다시 4선(禪)을 닦아야만 비로소 신족도를 얻는 것이오.'
조달은 화를 내면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동생 아난(阿難)에게 물으니, 아난은 그에게 설해 주었다. 조달은 들은 후에 한 가지 뜻에 마음을 전력하였다. 거친 데서 미세한 데로 들어갔다가 다시 미세한 데로부터 일어나 거친 데에 이르고, 마음으로 몸을 들고 몸으로 마음을 들어서 몸과 마음을 한데 합치면서 점점 땅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참깨만 하였으나 자꾸 호두만 해지면서 점점 땅의 경계[地際]를 벗어났다. 그리하여 땅으로부터 상(床)에 이르고, 상으로부터 지붕에 이르고, 지붕으로부터 허공에 이르고, 허공 가운데 있으면서 열여덟 가지 변화를 지으며 솟았다 꺼졌다 자유로웠다. 어린아이로 화현하여 아사세(阿闍世) 태자의 무릎 위에 있으면서 온갖 변화를 지으니, 매일 솥 5백 개분의 식량을 공급받았다.
이 때 모든 비구들이 이 일을 부처님께 여쭙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대들은 조달의 공양을 탐내지 말라. 조달은 스스로도 빠질 뿐만 아니라 남도 빠지게 함으로써 둘 다 죄에 떨어지게 한다. 마치 파초 나무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열매를 구하려고 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사자함(舍字函) 제1권]
조달은 부처님을 해치려다 도리어 다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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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지(暴志)는 부처님께 해를 가하려다 자신이 꺾였다.
”『법구경(法句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조달과 아사세왕은 부처님을 해치기로 함께 의논하고서 즉시 나라의 백성들에게 부처님을 받들지 못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조달이 왕에게 아뢰었다.
'내일 부처님을 성에 들어오시도록 청하십시오. 그리고 5백 마리의 코끼리들을 술 취하게 하여 밟아 죽이도록 하십시오. 그럼 나는 마땅히 부처가 되어 세간을 교화하겠습니다.'
왕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그 모략을 알고서 대답하셨다.
'아주아주 훌륭합니다.'
다음날 식사시간 때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거느리시고 성으로 들어오셨다. 이 때 술 취한 코끼리가 벽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꺾자, 온 성이 두려움에 떨었다. 코끼리는 일제히 부처님께 달려들었다. 부처님께서 다섯 손가락을 들자, 다섯 마리 사자가 되어서 똑같은 소리로 함께 포효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술 취한 코끼리가 땅에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참회하니, 왕과 신하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놀라고 숙연해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성품이 밝지 못해서 조달의 참언을 믿고서 악한 역죄(逆罪)를 지었습니다. 부디 대자비를 내려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왕과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여덟 가지 일이 있어서 비방을 조장하니, 모두 명예로 말미암아 커다란 죄를 짓는다. 무엇을 여덟 가지라 하는가? 이익·쇠망·훼손·명예·꾸지람·칭찬·고통·즐거움이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미혹되지 않는 이가 적으니라.'”[위의 권과 같음]
『출생경(出生經)』을 들어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유행하시자, 바사닉왕(波斯匿王)이 부처님과 승려들을 청하였다. 당시 비구니가 있었는데, 이름이 폭지(暴志)였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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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막을 배에 매달아서 마치 임신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서 부처님의 옷을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남편입니다. 따라다니다가 임신하게 되었는데,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지도 않는군요.'
천인(天人)과 사부대중은 놀라서 당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삼계(三界)의 존귀하신 이는 모든 삿됨을 항복받으시고 밝음이 일월을 초월하여 오염시킬 수 없었다.
그 때 제석천이 한 마리 쥐로 화현해서 그 나무토막을 묶은 줄을 갉아 땅에 떨어뜨렸다. 모인 대중들이 그 광경을 보고서는 분노와 기쁨이 교차하면서도 그 까닭을 괴이하게 여겼다. 왕은 이 비구니가 대성인을 비방한 것에 분노해서 땅을 파서 매장하려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훈계하여 제지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숙세의 죄이다. 과거 세상에서 어떤 손님이 구슬을 팔았는데, 차명(且明)이라는 한 여인이 막 사려고 했다. 그 때 한 남자가 값을 배로 주면서 구슬을 다투었다. 여인은 다시 사려고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마음에 분노와 한을 품고서 말했다.
[바라건대 내가 태어나는 곳마다 반드시 너에게 원수를 갚겠다.]
그 때의 남자가 바로 나이고, 그 여인은 폭지이니, 이런 일은 예전부터 있어 왔으며 비단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니라.'”[위와 같은 함(函). 제3권]
조달은 비록 역죄로 니리(泥犁:지옥)에 빠졌지만
여래께서 다시 선지식이라 찬양했네.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제바달다(提婆達多)[조달의 다른 이름]는 갖가지 변화된 자태로 왕자의 마음을 움직여서 대정사(大精舍)를 세우고 큰 공양을 얻었으나 대중들이 적었다. 제바달다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게 30상(相)이 있는데도 부처님께 아직도 뒤처지는 것은 진실로 제자가 아직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대중들이 나를 둘러싼다면, 부처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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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와 같이 생각하고는 마음을 내서 승가를 파괴하여 5백 명의 제자들을 얻었다. 나중에 사리불(舍利弗)이 법을 설해서 교화를 하자, 승가는 다시 화합하였다. 제바달다는 문득 악한 마음을 내서 산을 밀어서 부처님을 압사시키려고 했는데,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금강저로 멀리 던져 버렸다. 다시 부서진 돌이 쏟아져 부처님 발가락에 상처를 냈는데, 화색(華色) 비구니가 이를 꾸짖자 다시 비구니를 주먹으로 때리니, 비구니는 즉시 눈알이 튀어나오면서 죽었다. 이처럼 세 가지 역죄(逆罪)를 짓고는 다시 삿된 스승인 부란나(富蘭那) 외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온갖 선근(善根)을 끊었다. 다시 나쁜 독을 손톱 밑에 숨겨 두었다가 예배를 하는 척하면서 부처님을 해치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가 왕사성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땅이 자연스럽게 갈라지면서 불 수레가 그를 맞이하니, 산 채로 지옥으로 들어갔다.”[덕자함(德字函) 제4권]
『대승십법경(大乘十法經)』에서 말하였다.
“정무구묘정보월왕광(淨無垢妙淨寶月王光)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제바달다를 취해서 선지식(善知識)이라 할 수 있으며, 다시 여래께서 오래도록 친근한 이를 원수라 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만약 제바달다라는 선지식이 없었다면, 여래인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복자함(服字函)]
파순(波旬)은 여러 곳에서 위엄을 짓지만
기량(伎倆)이 다할 때는 돌아간다.
『인과경(因果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도(道)를 이루려고 할 때 마왕은 모든 중생들이 다 귀의하여 자신의 경계가 텅 빌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화살을 갖고 와서 쏘았으나, 보살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화살이 꽃으로 변했다. 다시 세 여인으로 하여금 확고한 의지[定意]를 흐트러뜨리려고 했으나 보살은 용납하지 않았으며, 세 여인은 홀연히 누추한 모습으로 변화해서 스스로 회복하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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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앞에 나아가서 보살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인간이 누리는 쾌락을 즐기지 않는다면, 나는 천상의 지위를 버리고 나아가 5욕(欲)을 다 갖추어서 모두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보살이 대답했다.
'그대는 전생에 약간의 보시를 닦았기 때문에 지금 자재천왕(自在天王)이 된 것이다. 이 복은 기한이 정해진 것이니, 요컨대 다시 하계에 태어나서 3도(塗)에 빠지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옛날에 머리·눈·뇌수·나라·성·아내·자식으로 보시한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이는 위없는 도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대는 이제 마땅히 나를 혼란시키려 하지 말라.'
마왕은 부끄럽고 두려워서 궁으로 돌아갔다.”[사자함(辭字函) 제3권]
『월장경(月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대집(大集)의 회상에서 법을 설하셨다. 마왕인 파순도 역시 신변(神變)을 지었지만, 다시 어찌 할 수가 없자 곧, 게송을 설했다.
저는 이제 불·세존께 귀의하오니
이제부터는 결코 악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구담(瞿曇)의 마음은 결정코 저를 용서하리니
저는 반드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겠습니다.”[도자함(陶字函) 제2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어째서 마(魔)라고 이름하는가?
[답] 혜명(慧命)을 끊기 때문에 마(魔)라고 이름하고, 또 항상 방일을 행해서 자신을 해치기 때문에 마(魔)라고 한다.[마는 진(秦)나라 말로 살(殺)이다.]
[문] 어째서 파순이라고 이름하는가?
[답] 항상 나쁜 의도가 있어서 악법(惡法)을 성취하기 때문에 파순이라고 이름한다.[파순은 진(秦)나라 말로 악(惡)이다.]”[규자함(規字函)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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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입도품(入道品)[10칙]
선근(善根)을 분별하면 세 가지 등급으로 나뉘니
진실로 종자(種子)를 말미암아서 이렇게 차이가 났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선근(善根)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복분(福分)의 선근이고, 둘째는 해탈분(解脫分)의 선근이고, 셋째는 달분(達分)의 선근이다.
복분이란 능히 인천(人天)의 종자를 짓는 것이니, 만약 사람 가운데 있다면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서 윤왕(輪王) 등이 되고, 만약 천상 가운데 있다면 제석천·마왕(魔王)·범왕(梵王) 등이 된다.
해탈분이란 능히 해탈의 종자를 지을 수 있어서 결정코 퇴전하지 않고 반드시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달분이란 이른바 난법(煖法)으로부터 세제일법(世第一法)까지이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애초에 해탈의 씨앗[因]을 한 번 심을 수 있다면
지극히 빨리 세 번의 생(生) 만에 바야흐로 도에 들어간다.
『순정리론(順正理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존재[有]가 애초에 해탈분(解脫分)에 수순하는 것을 심는다면, 지극히 빨리 세 번의 생(生) 만에 바야흐로 해탈을 얻는다. 말하자면 처음의 생(生)에선 해탈분에 수순하는 것을 심고, 다음 생에선 성숙하고, 세 번째 생에선 결택분(決擇分)에 수순함을 일으키는 것이니, 곧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것이다.”[아자함(雅字函) 제1권]
믿음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은 들음으로부터 들어가고
법에 따라서 행하는 사람은 바로 지혜를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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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남의 말을 믿어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신(堅信:견고한 믿음)이라 하고, 만약 스스로 사유해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법(堅法:견고한 법)이라 하고, 선정[定]으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신이라 하고, 지혜로 성스러운 도에 들어가는 자라면 견법이라 한다.”[규자함(規字函) 제2권]
『비담심론(毗曇心論)』에서 말하였다.
“믿음을 따라서 행하면 예리한 근기가 아니니, 이는 다른 이의 법을 믿어서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은 예리한 근기이니, 이는 지혜가 다른 이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직 욕계(欲界)를 여의지 않고서 초과(初果)로 취향하고자 하는 것을 수다원과(須陀洹果)를 향한다고 한다.”[도자함(都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믿음을 따르거나[隨信] 법을 따르는[隨法] 수행인은 이생지(異生地)를 초월해야 하니, 아직 예류과(預流果)를 얻지 못한 것이다.
[문] 어째서 이생지라고 이름하는가?
[답] 일체의 성자는 모두 동생(同生)이라 일컫지만, 이승[此]과 저승[彼]이 다르기 때문에 이생(異生)이라고 한다.”[이자함(離字函) 제5권]
사소한 선행으로 어찌 해탈할 수 있겠는가?
일심으로 회향해야 보리(菩提)를 증득한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 그릇의 음식을 보시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解脫分)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반차우슬(般遮于瑟)[이것은 5년에 한 번 열리는 큰 모임이다.]을 능히 베풀 수 있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사람은 하루 동안의 재계(齋戒)를 지니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종신토록 계율을 지니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경우엔 한 구절의 게송을 외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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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것만으로도 능히 해탈분의 선근을 심을 수 있지만, 설사 삼장(三臧)의 뜻을 훌륭히 통달했더라도 해탈분의 선근을 심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 하면 만약 이러한 일들을 해탈과 열반으로 회향하면 영원히 생사를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용맹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능히 해탈의 선근을 심을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회향하지 못한다면, 비록 보시를 많이 하고 종신토록 계율을 지니고 널리 배우고 많이 듣더라도 해탈의 선근을 심지 못한다.
가까운 것과 먼 것이 있는데 가까운 것은 전생의 몸속에 심어서 지금의 몸에서 성숙하고 미래의 몸에서 해탈하는 것이며, 먼 것은 일찍이 나유타(那由他) 동안 심어서 세상의 몸을 받아도 달분(達分)의 선근을 낳지 못하는 것이다. 성문이 얻은 해탈분의 선근은 벽지불로 회향해 나아갈 수 있고, 벽지불이 얻은 해탈분의 선근도 부처로 회향해 나아갈 수 있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계율·선정[定]·지혜는 처음의 결박을 여의는 것이며
듣고 생각하고 수행하는 것은 나중의 관문(觀門)을 여는 것이다.
『해탈도론(解脫道論)』에서 말하였다.
“계율·선정·지혜는 이른바 해탈의 길이다. 계율이란 것은 위의(威儀)의 뜻이며, 선정이란 것은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혜라는 것은 지각(知覺)의 뜻이며, 해탈이란 것은 속박을 여읜다는 뜻이다.
다시 계율이란 악업(惡業)의 때를 없애는 것이며, 선정이란 얽힘[纏]의 때를 없애는 것이며, 지혜란 사(使)의 때를 없애는 것이다.
또 세 종류의 훌륭히 조복하는 도가 있으니, 이른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은 것이다. 계율이 처음이 되고, 선정이 중간이 되고, 지혜가 나중이 되는 것이다.
어째서 계율이 처음의 착함이 되는 것인가? 정진하는 사람은 퇴전하지 않음을 성취하고, 퇴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쁘고, 기쁘기 때문에 뛸듯하고, 뛸듯하기 때문에 몸이 유연하고, 몸이 유연하기 때문에 즐겁고, 즐겁기 때문에 마음이 선정[定]에 드니, 이것을 이른바 처음의 착함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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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이 중간의 착함이 된다는 것은 선정으로 여실하게 알고 보기[知見] 때문이다.
지혜가 나중의 착함이 된다는 것은 이미 여실하게 알고 보기 때문에 싫어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욕망을 여의고, 욕망을 여의기 때문에 해탈하기 때문이다.
또 계율로써 악취(惡趣)를 없애고, 선정으로 욕계(欲界)를 없애고, 지혜로 일체의 존재[有]를 없앤다.”[배자함(背字函) 제1권]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에서 말하였다.
“선관(禪觀)을 닦아 익히는 것은 세 가지 법을 말미암아서 생기니, 이른바 지혜를 들음과 지혜를 생각함과 지혜를 닦음이다.
무엇을 지혜를 들음[聞慧]이라 하는가? 가령 들은 법을 마음으로 항상 사랑하고 즐기면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지혜를 생각함[思慧]이라 하는가? 사념(思念)으로 일체 유위법(有爲法)의 여실한 상(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른바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하고 무아(無我)이고 부정(不淨)이기 때문에 찰나찰나마다 생하고 멸하면서 오래지 않아 무너지는 것이 곧 염리(厭離)를 낳아서 부처의 지혜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을 지혜를 닦음[修慧]이라 하는가? 이른바 욕망과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서 점차로 닦아 들어가는 것이다.”[명자함(命字函)]
『현종론(顯宗論)』의 전장(全章)을 일관하고 수행 과정에 순서가 있음을 갖추어 본다.[수(修)에 들어가는 데에는 부정(不淨)·식념(息念)의 두 가지 관(觀)이 있고 점차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는 네 종류의 가행(加行)의 공(功)이 일어난다.]
『현종론』에서 말하였다.
“이미 청정한 시라(尸羅)에 먼저 안주하고, 곧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으로 나아가서 제(諦)를 본다. 어떤 문(門)을 말미암아서 들어가는가? 곧 게송을 설해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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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에 들어가는 요체에 두 문이 있으니
부정관(不淨觀)과 식념(息念)이다.
탐욕과 심(尋)이 증상(增上)하는 자는
반드시 차례대로 닦아야 한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수행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두 가지 문에 의해 들어가니, 첫째는 부정관이고, 둘째는 지식념(持息念)이다. 또 부정관은 탐욕을 다스리고, 식념은 심(尋)을 다스린다. 먼저 부정관의 모습을 변별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네 가지 탐욕을 통틀어 대치하기 위해서는
골쇄(骨鎖)를 변별해서 관한다.
널리 바다에 이르렀다가 다시 간략해지니
이를 초습업(初習業)의 지위라 이름한다.
발을 제외하고 머리의 반쪽에 이르는 것은
이숙수(已熟修)라 이름하고
마음을 묶어서 미간에 두는 것은
초작의(超作意)의 지위라 이름한다.”
논에서 말하였다.
“부정관을 닦는 것은 탐욕을 올바로 대치하기 위한 것인데, 대략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현색(顯色)의 탐욕이고, 둘째는 형색(形色)의 탐욕이고, 셋째는 묘촉(妙觸)의 탐욕이고,1) 넷째는 공봉(供奉)의 탐욕이다.
네 가지 탐욕을 대치하는 데는 두 가지 사택(思擇)에 의거하니, 첫째는 내시(內尸)를 관하는 것이고, 둘째는 외시(外尸)를 관하는 것이다. 근기가 예리한 자는 먼저 안의 몸에 대해 피부를 경계로 삼아서 발에서 위로 정수리에
주)-----------------------------------------------
1) 고려대장경에는 수(獸)자가 없으나 신수대장경을 참조하여 보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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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아래로 두루 관찰함으로써 마음으로 하여금 환란을 싫어하게 한다. 만약 근기가 둔한 자라면 번뇌가 맹렬하고 날카로워 굴복시키기 어려우며 외부 인연의 힘을 빌려야만 바야흐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외시(外尸)를 명료하게 관찰하여 점차로 자기 마음의 번뇌를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처음으로 외시를 관찰할 때는 먼저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 시체가 버려진 곳을 찾아가 외시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안의 모습이겠는가? 저쪽의 모습이 이미 그러하였으니 이쪽도 마땅히 그러할 것이므로 마땅히 여덟 가지 상념을 닦아서 네 가지 탐욕을 다스려야 한다.
현색(顯色)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푸른 어혈의 상념[靑想]과 검붉은 상념[黑赤想]을 닦아야 한다. 형색(形色)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먹혀지는 상념[被食想]과 분리되는 상념[分離想]을 닦아야 한다. 묘촉(妙觸)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파괴의 상념[破壞想]과 해골의 상념[骸骨想]을 닦아야 한다. 공봉(供奉)의 탐욕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배가 부풀어 오르는 상념[脹想]과 문드러지는 상념[膿爛想]을 닦아야 한다. 오직 골쇄(骨鎖)를 반연해서 부정관을 닦아야만 이 같은 네 가지 탐욕을 통틀어 다스릴 수 있다.
수행하는 바에 근거하여 세 가지 지위가 있다고 설한다. 첫째는 초습업(初習業)이고, 둘째는 이숙수(已熟修)이고, 셋째는 초작의(超作意)이다.
또 부정관을 닦을 때는 마땅히 먼저 자기 몸의 한 부분에 마음을 먼저 묶어 두어야 한다. 혹은 발가락에다, 혹은 미간에다, 혹은 콧등과 같이 좋아하는 곳에다 한결같이 집중해서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최초로 마음을 묶어 자기 몸의 발가락 등의 처소를 가상(假想)하다가 아래로 능히 동전 크기만 한 백골을 볼 수 있는 데까지 이르며, 뛰어난 이해력을 말미암아서 점차 넓히고 점차 증대시켜 온몸의 골쇄를 갖추어 보는 데까지 이른다.
관행(觀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단지 상념의 힘[想力]만 따르고, 관행이 이루어졌다면 문득 지혜의 힘을 따른다. 이 지위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상념을 말미암아서 전변하는 것이다. 온몸을 이미 보았다면 다시 바야흐로 방편으로 외부의 백골을 연(緣)으로 하는 부정관문(不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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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門)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점차적으로 뛰어난 이해를 증대시키도록 하기 때문에 외부의 골쇄가 자기의 신변에 존재한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점차적으로 하나의 평상, 하나의 방, 하나의 절, 하나의 동산, 하나의 지역, 하나의 마을, 하나의 나라에 두루하고, 나아가 대지를 두루하고 바다에서 해변까지 그 사이에 골쇄가 충만하다고 여긴다. 광활한 범위를 점차 간략하게 관찰하여 안으로 오직 자신의 골쇄만을 관하는데 이른다. 이렇게 점차로 간략하게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초습업위(初習業位)라 한다. 또 약관(略觀)으로 하여금 뛰어난 이해로 점차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골쇄 가운데 다시 발의 뼈를 제외하고 점차로 머리의 반쪽 뼈를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고, 나머지 반쪽의 뼈를 사유하여 마음을 묶어서 머물게 한다. 이렇게 전략(轉略)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이숙수위(已熟修位)라고 한다. 또 약관으로 하여금 뛰어난 이해를 자재롭게 하기 위해 절반의 머리뼈마저 제외하고 마음을 미간에 묶어 오로지 하나의 연(緣)에 집중하여 담연하게 머물게 한다. 이렇게 극략(極略) 부정관을 이루는 것을 초작의위(超作意位)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러야 부정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탐욕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음으로써 모든 감응하는 바가 다 구경(究竟)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식념(息念)을 지니는 것을 변별하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식념(息念)은 혜(慧)로 5지(地)이고
바람을 연으로 하고 욕망의 몸에 의지한다.
두 가지로 얻음은 실로 외도에게는 없으며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數) 등이다.”
논에서 말하였다.
“아나(阿那)란 이른바 숨을 지녀 들이쉰다는 말로서 외부의 바람을 끌어들여서 몸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뜻이다. 아파나(阿波那)란 이른바 지닌 숨을 내쉰다는 말로서 내부의 바람을 끌어내서 몸 밖으로 내보낸다는 뜻이다. 또 설하기를, 아나란 것은 능히 지니고 온다는 것[持來]이며, 아파나란 것은 능히 지니고 나간다는 것[持去]이니, 들고 나가는 식념이 능히 신풍(身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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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는 것이다.
이른바 태란위(胎卵位)에서는 먼저 배꼽에서 업에 의해 생긴 바람이 일어나 몸을 뚫어 구멍을 이루니, 마치 연뿌리의 줄기와 같다. 최초에 어떤 바람이 몸 안으로 들어오고, 이 입과 코를 타고서 나머지 바람이 계속 들어오는데, 이 처음과 나중을 입식(入息)의 바람이라 한다. 또 안에서 바람이 계속 나가는 것을 출식(出息)의 바람이라 한다. 마치 연금술사가 풍로의 공기 자루를 열면 저절로 바람이 들어오고, 들어온 뒤에 그것을 주무르면 바람이 다시 나가는 것과 같다. 이는 바람의 성질이 법대로인 것이지 실제로는 들고 나감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람의 뜻을 드러냄으로써 두 가지 식(息)을 올바로 밝힌 것이다. 식념을 지녔으므로 선정과 지혜가 이루어진다. 이 염(念)의 소의(所依)는 오직 5지(地)에 통할 뿐으로 이른바 욕계와 정려(靜慮) 중간과 초선·2선·3선의 정려에 의거해서 비근하게 나눈다. 이것은 다만 사근(捨根)과 상응할 뿐이니 심(尋)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이 염(念)을 닦아야 하고 여섯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수(數)이고, 둘째는 수(隨)이고, 셋째는 지(止)이고, 넷째는 관(觀)이고, 다섯째는 전(轉)이고, 여섯째는 정(淨)이다.
수(數)는 이를테면 마음을 묶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하나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헤아리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계에 너무 매이거나 흩어지기 때문에 그 가운데 세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는 수를 덜 헤아리는 잘못이며, 둘째는 수를 더 헤아리는 잘못이며, 셋째는 헤아리는 것이 뒤섞이는 잘못이다. 다시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첫째는 너무 느슨한 잘못이며, 둘째는 너무 급한 잘못이며, 셋째는 산란의 잘못이다. 만약 열을 세는 중간에 마음이 산란해진다면 다시 하나부터 순서대로 헤아리고 마친 뒤에 다시 시작해야 선정[定]을 얻게 된다. 무릇 숨을 헤아릴 때는 반드시 들숨을 먼저 세어야 하니 처음 태어나는 지위[初生位]에선 들숨이 앞서 있고, 죽을 때 이르러서는 날숨이 가장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태어나고 죽는 지위를 각찰(覺察)하기 때문에 비상(非常)의 상념으로 점차 닦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수(隨)는 이를테면 마음을 묶어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쫓되, 들어오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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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숨이 짧은지 긴지 멀리 이르는지를 염(念)하고, 다시 반대로 되돌아와 어디에 미치는지를 염하는 것이다. 그 숨이 들어가는 것을 따라가 목구멍·심장·배꼽·넓적다리·무릎·발목·발꿈치·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염(念)이 항상 쫓는 것이다.
지(止)는 이를테면 염(念)을 묶어 오로지 코끝에 두거나 혹은 미간에 두거나 발가락에 이르기까지 좋아하는 곳에 두고 그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 채 숨이 몸에 머무는 것이 마치 구슬 속의 실과 같음을 관하는 것이다.
관(觀)은 이를테면 이 숨의 바람을 관찰하고서 숨과 함께 작용하는 대종(大種:四大)으로 이루어진 색(色)과 색에 의거해서 머무는 마음과 심소(心所)를 아울러 관찰하는 것으로 다 같이 5온을 경계로 삼아 관찰하는 것이다.
전(轉)은 이를테면 이전(移轉)하는 것이다. 숨의 바람을 소연으로 한 감각을 나중의 나중인 뛰어난 선근 속에 안치하는 것이니, 즉 염주(念住)로부터 시작하여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는 것이다.
정(淨)은 이를테면 8견도(見道) 등으로 단계를 높여 나아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전(轉)과 진지(盡智) 등을 바야흐로 정식상(淨息相)이라 하였다.”[자자함(自字函) 제9권]
두 문을 닦아 들어감으로써 마음이 정(定)을 얻으니, 다시 무엇을 닦겠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이미 닦은 걸 의거해서 지(止)를 이루었고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 염주(念住)를 닦아야 하니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의 감각[受]과 심법(心法)을 관찰하는 것이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이미 닦아 성취한 지(止)를 소의(所依)로 삼아 관(觀)을 조속히 성취하기 위해 네 가지 염주(念住)를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을 관하는 것이니, 이른바 관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1취(趣)에만 쓰는 것이다. 이 법과 나머지 다른 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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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을 분별하여 차별된 뜻이 있는 것을 자상을 관하는 것이라 하고, 이 법과 나머지 다른 법을 분별하여 차별된 뜻이 없는 것을 공상을 관하는 것이라 한다. 다시 자상을 관하는 것은 이른바 몸의 모든 곳의 차별상을 관찰하는 것이며, 공상을 관하는 것은 이른바 모든 곳이 똑같이 몸이 모습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을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관하면 청정하지 못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린다. 느낌[受]이 고통임을 관하면 능히 고통스러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마음이 항상하지 않음을 관하면 능히 항상하지 않음을 항상한 것[常]이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법이 내[我]가 아님을 관하면 능히 나 아닌 것[非我]을 나라고 하는 뒤바뀐 생각을 다스릴 수 있다. 마치 사람이 이미 똥 자체가 청정하지 못함을 관찰하고 나면 그 똥으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미 신체가 청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관하였으면 5취온(取蘊)에 대해서도 모두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으니, 나중의 세 가지 염주(念住)도 능히 총체적으로 조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히 결택(決擇)에 수순하며 사소성(思所成)에 섭수되는 선근을 이미 설하였다. 곧 수소성(修所成)에서는 어떤 선근을 낳는가? 게송을 설해서 말하였다.
이로 부터 난법(煖法)이 생겨
4성제(聖諦)를 모두 관찰하고
16행상(行相)을 닦으니
제일의 정법(頂法)도 역시 그러하다.”
논(論)에서 말하였다.
“닦아서 이루어진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처음 선근(善根)이 일어나니, 이름하여 난법(煖法)이라고 한다. 이는 총연공상(總緣共相)의 법념주(法念住)의 차별로, 번뇌를 능히 태울 수 있는 성도(聖道)의 불이 있기 전의 모습[前相]이다. 불을 일으킬 때 처음에는 따뜻함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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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제(聖諦)의 경계[境]를 모두 관찰하며, 이로 인하여 16행상(行相)을 모두 닦게 된다.
즉, 고성제(苦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四行相]을 닦으니, 첫째는 비상(非常)[유(有)가 다시 무(無)가 되기 때문에 비상이라고 한다.]이요, 둘째는 고(苦)[수축(隨逐:번뇌)이 서로 괴롭히므로 고라고 한다.]이며, 셋째는 공(空)[본래 없음을 관찰하므로 공이라 한다.]이며, 넷째는 비아(非我)[자재(自在)하지 않으므로 비아라 한다.]이다.
그리고 집성제(集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인(因)[상사과(相似果)를 낳으므로 인이라 한다.]이요, 둘째는 집(集)[능히 유전(流轉)하게 하므로 집이라 한다.]이요, 셋째는 생(生)[능히 생사(生死)를 이끄므로 생이라 한다.]이요, 넷째는 연(緣)[능히 서로 화합하게 하므로 연이라고 한다.]이다.
그리고 멸성제(滅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멸(滅)[생사가 서로 어긋나게 되므로 멸이라고 한다.]이요, 둘째는 정(靜)[번뇌의 불에서 벗어나므로 정이라 한다.]이며, 셋째는 묘(妙)[일체 법에서 뛰어나므로 묘라고 한다.]이며, 넷째는 리(離)[능히 생사를 버릴 수 있으므로 리라고 한다.]이다.
그리고 도성제(道聖諦)를 관찰하여 네 가지 행상을 닦으니, 첫째는 도(道)[능히 비품(非品)에 이르므로 도라고 한다.]이고, 둘째는 여(如)[뒤바뀌지 않으므로 여라고 한다.]이며, 셋째는 행(行)[성스럽게 실천된 것이므로 행이라고 한다.]이며, 넷째는 출(出)[생사를 뛰어넘어 구하므로 출이라고 한다.]이다.[이 주(注)의 내용은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참고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이 난법(煖法)을 닦고 나면 그 다음으로 정법(頂法)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산 정상의 사람이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여러 어려움이 없다면 반드시 이 산에서 저 산에 다다를 수 있지만, 만약 여러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면 물러나 돌아와야 한다. 만약 여러 어려움이 없으면 필히 인(忍)에 다다를 수 있지만, 이미 인의 위치[忍位]에 들어가면 4제(諦)의 경계의 극(極)에서 감인(堪忍)해야 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세제일법(世第一法)이 일어나는데, 세계에서 뛰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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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4제의 경계를 관찰하여 16행상을 모두 닦게 되면, 점차 견제(見諦)에 접근하게 되어 욕계(欲界)의 고제(苦諦)를 연(緣)으로 하여 하나의 행상을 한 찰나에 닦는 것이다. 즉, 무간(無間)의 이생위(離生位)에 들어간다고 하였으므로 이러한 지위에서는 결코 더 이상 상속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이 다음[後邊]부터는 어떻게 다시 도(道)가 생기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세제일법(世第一法)과 무간(無間)에
욕계(欲界)의 고제(苦諦)를 연(緣)으로 하여
무루(無漏)의 법인(法忍)을 낳으며,
법인 다음에 법지(法智)를 낳는다.
다음으로 그 밖의 계(界)의 고제를 연으로 하여
유인(類忍)과 유지(類智)를 낳으며,
집제(集諦)와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를 연으로 하여
제각기 넷을 낳는 것도 그러하다.
이와 같은 16찰나의 마음을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 이름하였다.”
논에서 말하였다.
“세제일(世第一)의 선근(善根)으로부터 무간(無間)에 욕계의 고성제를 소연(所緣)의 경계를 삼아 무루(無漏)의 법인(法忍)이 생기니, 이러한 인(忍)을 이름하여 법지인(法智忍)이라고 한다.[즉, 고법(苦法)에 무시(無始) 이래로 신견(身見)으로써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미혹하게 집착하였던 것을 이른 것이다. 지금 처음으로 저것을 보고 인가(忍可)하고 현전(現前)한 것이므로 고법인(苦法忍)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것은 능히 후에 고법지(苦法智)의 생(生)을 이끈다.]
욕계의 고성제(苦聖諦)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고법인과 고법지가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법지와 무간에 그 밖의 다른 모든 계(界)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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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를 소연의 경계로 삼아 유지인(類智忍)이 생기는데, 이를 유지(類智)라고 이름한다.[즉, 최초로 모든 법의 참된 이치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법지(法智)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후의 경계의 지혜는 앞의 것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유지(類智)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으로, 이 뒤의 것은 앞의 것을 따라 경계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욕계와 다른 계의 고제(苦諦)를 연으로 하여 법인(法忍)·유인(類忍)·법지(法智)·유지(類智)의 네 가지가 생기듯이 그 밖의 다른 3제(諦)를 연으로 하여 제각기 네 가지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이는 하나하나의 제(諦)를 연으로 하여 네 찰나의 마음[四心]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16찰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 모두 성제현관(聖諦現觀)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삼계의 4성제의 경계를 차례로 현전시켜 참되게 관찰하기 때문에 이를 현관(現觀)이라고 이름한다.”[동자함(同字函) 제10권]
44) 성문품(聲聞品)[42칙]
자기 이익을 위한 수행은 마음가짐이 협소하고 열등하며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달음을 여는 자는 성문승(聲聞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上品)의 열 가지 선(善)은 지혜로 닦아 익히는 것이다. 마음이 협소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삼계(三界)가 두렵기 때문에, 대자비를 빠뜨렸기 때문에, 다른 이로부터 소리를 듣고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성문승(聲聞乘)이다.”
4향(向)·4과(果)는 해탈승이고
유학(有學)·무학(無學)은 현성(賢聖)의 무리이다.
『달마론(達磨論)』 하권에서 말하였다.
“4과(果)의 중간에 있는 모든 도(道)와 이전의 견도(見道)를 4향(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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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저 과(果) 이전을 수순해 있는 것을 저 과향(果向)이라 한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으니[보특가라는 이곳 말로는 삭취취(數取趣)라고 하니, 이른바 자주자주 생사를 왕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4향을 행하는 것과 4과에 머무는 것이다.”[동자함(東字函)]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3결(結)을 끊는 것을 예류과(預流果)[3결은 첫째는 신견(身見)이니 이른바 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계금취(戒禁取)이니 이른바 구우(狗牛) 등의 계율에 집착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인(因)으로 삼는 것이며, 셋째는 의심이니, 이른바 제(諦)를 요달하지 못한 것이다.]라 하고,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엷어지는 것을 일래과(一來果)[보시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을 탐욕의 엷어짐이라 하고, 구걸하는 자에게 자비를 일으키는 것을 성냄의 엷어짐이라 하고, 보시를 보리에 회향하는 것을 어리석음의 엷어짐이라 한다]라 하고, 하분(下分)의 5결(結)을 끊어 수순함으로 영원히 다하는 것을 불환과(不還果)[5결이란 첫째는 신견이고, 둘째는 계금취이고,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탐욕이고, 다섯째는 성냄이다]라 하고, 상분(上分)의 5결을 끊어 수순함으로 영원히 다하는 것을 아라한과(阿羅漢果)[상(上)의 5결이란 첫 번째는 색애(色愛)로 이른바 색계(色界)의 애착이고, 두 번째는 무색애(無色愛)로 이른바 무색계의 애착이고, 세 번째는 무명(無明)으로 이른바 마음을 요달하지 못한 것이고, 네 번째는 도거[掉]로 이른바 마음이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만(慢)으로 이른바 마음이 스스로 오만한 것이다]라 한다.2)
모든 집법(集法)으로 하여금 모두 멸법(滅法)을 이루게 하는 것을 독각(獨覺)의 보리(菩提)라 하고, 일체 습기(習氣)의 상속을 영원히 끊는 것을 위없는 보리라 한다.”[위자함(爲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배울 것이 남아 있는 자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이고, 배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자는 아라한·벽지불이다.”[인자함(仁字函) 제8권]
『현종론』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하여 유학(有學)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뜻을 배움이 아직
주)------------------------------------------------
2) 고려대장경에는 셋째가 빠져 있으므로 신수대장경에 의거하여 보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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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하지 않으므로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이름하여 무학(無學)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아라한은 온갖 자리행(自利行)을 닦고 배워서 이미 이루었지만, 오로지 반드시 타인에게 이익 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
다시 진지(盡智)가 아직 생기지 않은 이전의 일곱 성인을 모두 유학이라고 하고, 진지(盡智)가 이미 생겨서 무학을 이룬 것이 아라한이다.”[미자함(悵字函) 제2권]
처음의 2결(結)·3결은 비록 풀기가 어렵지만
98사(使)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하분(下分)을 수순하는 결하(結下)에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계하(界下)와 유정하(有情下)이다. 처음 2결의 허물이 무겁기 때문에 욕계(欲界)를 초월하지 못하고, 나중 3결의 허물이 무겁기 때문에 이생(異生)을 넘어서지 못한다. 나아가 이 다섯 가지를 세우는 것이 하분결(下分結)이 된다. 처음의 2결은 마치 옥졸과 같고, 나중의 3결은 마치 순라꾼과 같다. 가령 어떤 죄인이 감옥에 갇혔는데, 두 명의 옥졸이 항상 그를 지키면서 내보내지 않게 하고 다시 세 사람이 항상 순찰하는 것과 같다. 그 죄인이 설사 친한 벗의 재력(財力)으로 옥졸을 해치고 도주하더라도 세 명의 순라꾼이 다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감옥은 곧 욕계를 비유한 것이고, 죄인은 곧 이생(異生)을 비유한 것이고, 두 명의 옥졸은 처음의 2결을 비유한 것이고, 세 명의 순라꾼은 나중의 3결을 비유한 것이다.
만약 어떤 이생(異生)이 부정관(不淨觀)으로써 탐욕을 무찌르고 다시 자비관(慈悲觀)으로 성냄을 무찌른다면, 욕망을 여의어서 무소유처(無所有處)에까지 이르러 최초의 정려(靜慮)가 생기고 나아가 유정천(有頂天)까지 이르지만, 그에게 있는 신견(身見)·계금취(戒禁取)·의심[疑]이 다시 잡아다가 욕계에 둔다.
다시 예류(預流)와 일래(一來)가 일으킨 온갖 결(結)은 생하(生下)를 수순하므로 오히려 다시 현기(現起)하는 것이 마치 이생(異生)의 업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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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갖가지 비단을 두르고 향기로운 꽃으로 장식하고 금은과 진귀한 완구와 보물을 축재하고 또한 남녀가 함께 한 침상에 거처하고 범행(梵行)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 이생(異生)의 업과 흡사하다고 한다.
다시 다섯 가지 상분(上分)을 수순하는 결(結)은 이른바 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도거(掉擧)·오만·무명(無明)이니, 불환자(不還者)가 일으킨 온갖 결(結)은 상분(上分)을 수순하기 때문이다.”[이자함(離字函) 제9권]
『법수(法數)』에서 말하였다.
“10사(使)란 첫째는 탐욕이고, 둘째는 성냄이고, 셋째는 어리석음이고, 넷째는 오만이고, 다섯째는 의심이고, 여섯째는 신견(身見)이고, 일곱째는 변견(邊見)이고, 여덟째는 견취(見取)이고, 아홉째는 금계취(禁戒取)이고, 열째는 사견(邪見)이다. 이와 같은 10사(使)는 능히 삼계(三界)의 속을 두루하는데, 4제(諦) 이하에서 나누면 98사(使)가 되어서 견제(見諦)와 사유(思惟)의 두 문에 섭수해 들어간다.
견제의 미혹은 88사(使)[욕계의 고제(苦諦) 이하는 10사(使)를 갖추고 있고, 집제(集諦) 이하와 멸제(滅諦) 이하는 각각 7사(使)인데 신견(身見)·변견(邊見)·계취(戒取)가 빠져 있고, 도제(道諦) 이하는 8사(使)인데 신견과 변견이 빠져서 합하면 32사(使)이다. 색계의 고제 이하는 9사(使)가 있는데 성냄이 빠져 있고, 집제와 멸제 이하는 각각 8사(使)가 있는데 성냄과 신견·변견·계취가 빠져 있고, 도제 이하는 7사(使)가 있는데 성냄과 신견과 변견이 빠져서 합하면 28사(使)이다. 무색계의 4제 이하도 모두 색계와 같아서 28사(使)이니, 전체를 합치면 88사(使)이다]이다.
사유의 미혹은 10사(使)[욕계의 4사(使)는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오만이다. 이 사(使)는 사다함과 아나함으로부터 도를 닦아서 끊는데, 아나함과의 9품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다한다. 색계의 3사(使)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이다. 이 3사(使)는 역시 아라한을 향하는 수도의 지혜로써 끊는다. 무색계의 3사(使)는 탐욕·어리석음·오만이다. 이 사유의 삼계는 합하면 10사(使)가 되며, 견제와 합치면 도합 98사(使)가 된다. 다만 이 98사(使)는 아라한을 향하는 단과(斷果)에서 바야흐로 다한다]이다.”
6욕천(欲天)은 또한 정해진 수행의 땅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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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가지 지혜라야 번뇌의 뿌리를 없앨 수 있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욕계(欲界)는 부정계(不定界)로서 수행의 땅[修地]도 아니고 욕망을 여읜 땅[離欲地]도 아니다. 색(色)·무색계(無色界)는 정지(定地)로서 수행의 땅이고 욕망을 여읜 땅이니 반연할 수 없다. 정해지지 않은 계(界)는 지혜로 끊고, 정해진 계는 결박이다.”
또 물었다.
“무엇을 여덟 가지 지혜[八智]라고 하는가? 이른바 법지(法智)·비지(比智)·타심지(他心智)·등지(等智)·고지(苦智)·집지(集智)·멸지(滅智)·도지(道智)이다.
다시 법지란 맹렬하고 예리해서 공용이 많지 않지만, 능히 착하지 않은 번뇌와 무기(無記)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비유하면 마치 예리한 칼이 쇠를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풀이나 나무이겠는가? 법지도 이와 마찬가지다.
비지란 예리하지는 않지만 공용의 힘이 많아서 능히 무기(無記)의 번뇌를 끊을 수 있다. 어째서 착하지 못한 번뇌는 끊을 수 없는가? 비유하면 마치 무딘 칼이 비록 공용이 많아서 풀과 나무를 끊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찌 쇠를 끊을 수 있겠는가?”[은자함(隱字函) 제10권]
『대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무엇을 지혜[智]라 하는가?
[답] 5식(識)이 상응하는 슬기[慧]이니,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착함이고, 둘째는 오염이고, 셋째는 무부무기(無覆無記)이다.
착함이란 이를테면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것이며, 오염이란 이를테면 수행으로 탐냄·성냄·어리석음의 모습을 끊는 것이며, 무부무기란 이를테면 이숙(異熟)으로 의식의 상응을 낳는 것이다.
착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유루(有漏)이고, 둘째는 무루(無漏)이다. 유루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가행(加行)으로 얻는 것이고, 둘째는 오염을 여의어서 얻는 것이고, 셋째는 태어나면서 얻는 것이다. 가행으로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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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란 이른바 듣고[聞] 생각하고[思] 닦는 것[修]이다. 들음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문장의 뜻을 이치대로 결택(決擇)하는 것이며, 생각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부정관(不淨觀)·지식념(持息念) 및 염주(念住) 등이며, 닦음으로 이루어진 슬기는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이니, 변사[邊]를 관하는 세속지(世俗智)를 나타내는[세속지로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무량해탈(無量解脫)의 승처(勝處) 등이다.
오염을 여의어서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정려(淨慮)이니, 무량무색(無量無色)의 해탈의 승처 등이다. 태어나면서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저 땅에 태어나는 것이니, 법이 그러해서 얻어지는 착함이다.
무루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배움이고, 둘째는 배움이 없는 것이다. 배움은 이를테면 여덟 가지 지혜를 배우는 것이고, 배움 없음은 이를테면 진지(盡智)[모든 번뇌를 다하기 때문에 진지라고 한다]·무생지(無生智)[나는 이미 고통을 알았기에 다시 알 필요가 없고, 나아가 나는 이미 도를 닦았기에 다시 닦을 필요가 없으니, 이를 무생지라고 한다]이다.”[전자함(顚字函) 제5권]
초과(初果)에서 일곱 번 태어나야 나한(羅漢)이고
다시 8만 겁을 지나야 보리에 들어간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수다원(須陀)은 처음으로 성인의 흐름에 들어가므로 예류(預流)[오로지 일곱 번 유(有)를 받고, 일곱 번 천상에 태어나고 인간 가운데서 고제(苦祭)를 다한다.]이고, 수다함(須陀含)은 일래(一來)[비록 욕계에서 6품(品)을 닦아 끊었으나, 나머지 3품(品)을 아직 끓지 못해서 다시 한 번 욕계 가운데 와서 태어난다.]이고, 아나함(阿那含)은 불환(不還)[비록 욕계를 끊어서 9품의 감응을 다했더라도, 이로부터 위로 색계에 태어나서 다시는 돌아와서 욕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이고, 아라한[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응공(應供)이고, 둘째는 번뇌의 도적을 죽이는 것이고, 셋째는 악을 멀리하는 것이고, 넷째는 불생(不生)이니 이른바 삼계의 미혹이 다해야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이다.”[정문(正文)은 잠자함(箴字函) 제6권, 주문(注文)은 변자함(弁字函)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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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심론(毘曇心論)』에서 말하였다.
“2승(乘)의 성인이 끊는 번뇌는 아홉 종류로 분별한다. 하품(下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하하(下下), 하중(下中), 하상(下上)이고, 중품(中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중하(中下), 중중(中中), 중상(中上)이며, 상품(上品)에 세 종류가 있으니 상하(上下), 상중(上中), 상상(上上)이다.”[도자함(都字函) 제3권]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수다원과는 8만 겁을 지나야 아뇩보리(阿耨菩提)의 마음을 얻으며, 수다함과는 6만 겁을 지나고 아나함과는 4만 겁을 지나고 아라한과는 2만 겁을 지나고 벽지불의 도(道)는 10천 겁을 지나야 아뇩보리의 마음을 얻는다.”[체자함(體字函) 제2권]
진실로 중생의 근기가 다르니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자세하게도 간략하게도 설하신다.
『비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어째서 비담(毘曇)에서는 88사(使)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설하고, 무엇 때문에 3결(結)을 끊으면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했는가?
[답] 교화 받는 자의 지혜에 깊음과 얕음이 있어서 대치법(對治法)을 설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의사가 병을 살피고서 약을 주는데, 적게 투여한다고 그 병이 낫지 않는 게 아닌데 많이 투여한다면 그 공이 크게 손상되는 것과 같다. 부처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근기가 예리한 자에겐 3결을 끊으라고 설하시고, 근기가 둔한 자에겐 88사(使)를 끊어야 수다원이라 한다고 설하신다.
가령 발기자(跋耆子)는 불법(佛法)에 출가해서 250계를 지키게 되자, 우려하는 마음을 내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저는 이제 모든 계율을 수호하는 걸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세 가지 계(戒)는 잘 배울 수 있겠는가? 이른바 계율[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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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心]·지혜[慧]이다.'
그 사람이 환희하면서 대답했다.
'저는 이 세 가지 계를 능히 배울 수 있으며, 차례대로 일체의 계율을 능히 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여래께서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바를 설하시면서 88사(使)를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 한다면, 교화를 받는 자가 우려하는 마음을 일으키면서 '어떻게 이 88번뇌의 나무를 뽑을 수 있고, 어떻게 88번뇌의 큰 강을 건널 수 있으며, 어떻게 88번뇌의 큰 바다를 고갈시킬 것이며, 어떻게 88번뇌의 산을 꺾어서 이 88가지의 대치하는 도를 닦을 수 있겠는가?' 할 경우, 만약 3결을 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설하신다면, 이 교화를 받는 자가 쉽다고 여기면서 기뻐한다. 만약 3결을 끊는다면, 견도(見道)의 모든 사(使)를 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3결은 이른바 신견(身見)·계취(戒取)·의심이다. 신견은 62견(見)으로 온갖 번뇌의 근본이고, 계취는 갖가지 삿되고 고통스러운 행동이며, 의심은 주저하면서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잠자함(箴字函) 제6권]
네 가지 정려(靜慮)와 네 가지 무량심이 있으며
여덟 가지 해탈과 여덟 가지 승처(勝處)가 있다.
『대승상론(大乘相論)』 하권에서 말하였다.
“네 가지 정려는 다음과 같다. 이생(離生)의 기쁨과 즐거움을 최초의 정려라 하고, 정생(定生)의 기쁨과 즐거움을 두 번째 정려라 하고, 기쁨을 여읜 묘한 즐거움을 세 번째 정려라 하고, 염(念)을 버린 청정함을 네 번째 정려라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모두 적지(寂止)의 모습이니, 욕계 등의 탐심이 유동하지 않으므로 정려라 한다.”[숙자함(孰字函)]
『선법요해경(禪法要解經)』에서 말하였다.
“불법(佛法)은 미묘해서 선정[定]을 닦지 않는다면, 지혜가 어떻게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헤아리겠는가? 그러므로 욕망의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고 5개(蓋)를 없애고 모든 착한 법을 모아서 깊이 일심으로 들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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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니, 각(覺)과 관(觀)이 있고 이생(離生)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선(初禪)에 들어간다.
[문] 초선을 얻은 모습은 어떠한가?
[답] 먼저 정념(正念)으로 다섯 가지 욕망을 꾸짖어 가라앉히고,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경지[地]를 얻어서 몸과 마음이 쾌락하면 초선의 모습을 증득한 것이다. 다시 더욱 증승(增勝)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안정되어 성낼 곳에서 성내지 않고 기뻐할 곳에서도 기뻐하지 않으니, 세간의 여덟 가지 법에도 능히 흔들리지 않는다. 의복이나 음식 등에 대해서도 마음이 탐착하지 않고, 다만 모든 착한 공덕을 귀하게 여겨서 초선을 얻은 후에는 나아가 2선(禪)을 구한다.
만약 유루(有漏)의 도가 2선의 경지 주변에서 각관(覺觀)을 싫어한다면, 마치 욕계의 다섯 가지 욕망과 다섯 가지 번뇌가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초선의 각관이 선정의 마음을 혼란시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무루(無漏)의 도가 초선의 욕망을 여읜다면, 즉시 무루의 초선으로써 각관을 질책한다.
[문] 만약 초선의 결사(結使)도 마음을 혼란시킬 수 있다면, 어째서 각관만을 설하는가?
[답] 각관이 멸하면 결사(結使)도 또한 멸한다.
다음에 근본과 지말(支末)에서 일찍이 각관을 얻으면 크게 기뻐하고, 크게 기뻐하기 때문에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고, 선정을 파괴하기 때문에 마땅히 없애야 한다.
안으로 청정을 얻어서 각(覺)도 없고 관(觀)도 없는 정생(定生)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2선에 들어간다.
[문] 2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답] 경전 속에선 착하든 무기(無記)이든 온갖 각관을 소멸시키라고 설했다. 각관의 움직임이 없으므로 내심(內心)이 청정해지니, 마치 물이 맑고 청정하며 풍파가 없으면 별과 달의 온갖 상(像)이 모두 비치는 것과 같다.
정생(定生)의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보다 미묘하고 수승하다. 초선의 기쁨과 즐거움은 욕망을 여의는 데서부터 생기고, 이 속의 기쁨과 즐거움은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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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선정으로부터 생기니, 이와 같이 2선의 선정은 번뇌가 마음을 덮는다. 이른바 애착·오만·삿된 견해·의심 등이 선정의 마음을 파괴하니, 반드시 단멸(斷滅)을 구해서 3선(禪)에 나아가야 한다.
[문] 만약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기쁨을 여의고 사(捨)를 행해야 3선에 들어간다고 설하셨는가?
[답] 2선의 큰 기쁨을 얻었어도 기쁜 마음이 지나치면, 마음이 변하여 기쁨에 집착함으로써 온갖 결사(結使)를 낳으니, 이 기쁨 때문에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문] 다섯 가지 욕망이 청정하지 않으면 마땅히 버려야 하지만, 이 기쁨의 청정하고 미묘함은 중생이 즐기는 바인데 어째서 버리라고 말하는가?
[답] 앞에서 이미 대답한 적이 있었으니, 집착을 낳는 인연이라면 이는 죄의 문이어서 기쁨이 거친 즐거움이 된다. 이제 거친 걸 버리고서 미세한 즐거움을 구하려고 하므로 기쁨을 여의고서 다시 깊은 선정에 들어가 미묘한 즐거움을 구하라고 말한 것이다.
무엇을 제3선의 즐거움이라 하는가? 세간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서 이를 능가하는 것이 없다. 이 3선 가운데는 세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마음이 더욱 세몰(細沒)해지는 것이며, 둘째는 마음이 크게 발동하는 것이며, 셋째는 마음이 미혹과 번민을 낳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일심에 상응해서 이 세 가지 허물을 염(念)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몰각[沒]할 때는 정진과 지혜의 힘으로써 다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고, 만약 크게 발동하면 마땅히 마음을 섭수해야 하고, 만약 마음이 미혹하고 번민하면 마땅히 불법(佛法)의 미묘함을 염(念)해서 다시 마음을 기쁘게 하여 항상 수호해야 한다. 이 세 가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교념혜행락(巧念慧行樂)으로 제3선에 들어간다고 한다. 거친 것은 기쁨의 뿌리가 되고, 미세한 것은 즐거움의 뿌리가 된다. 비유하면 매우 뜨거울 때 맑고 차가운 물을 얻어서 손과 얼굴을 씻으면 이를 기쁨이라 하고, 청량한 연못에 들어가서 온몸을 목욕하면 이를 즐거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3선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일심으로 수호하면서 항상 퇴실(退失)할까 걱정하는데 이것이 번뇌가 된다. 그러므로 즐거움이 다시 근심이 되니, 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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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즐거움을 여의길 구해야 한다. 비유하면 사람이 부귀의 즐거움을 구하는데, 구할 때 이미 고통스럽고, 얻고서 싫증나지 않으면 다시 고통이 되고, 얻은 후에 수호하는 것도 역시 고통이 되는 것과 같으니, 수행자가 즐거움을 근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초선의 즐거움을 구했을 때는 각관(覺觀)이 혼란시키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며, 2선은 큰 기쁨이 요동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며, 3선은 즐거움이 무상(無常)해서 지키기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반드시 이 즐거움을 버리고서 4선의 안온한 경지를 구해야 한다.
[문] 선정의 즐거움에 의거해서 욕망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데, 이제 무엇에 의지해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는 것인가? 만약 선정의 즐거움을 버린다면 어떤 이익을 얻는가?
[답] 열반의 즐거움에 의거해서 능히 선정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는데 여기서 세 가지 이익을 얻으니, 이른바 나한·벽지불·불도(佛道)이다. 그러므로 3선의 선정을 버리고서 4선의 안온한 쾌락을 행하는 것이니, 3승(乘)의 도로써 뜻에 수순하여 청정한 열반에 들어간다.
[문] 제4선의 모습은 어떠한가?
[답] 부처님께서 설하신 4선의 모습과 같다. 만약 즐거움을 끊고 고통을 끊어서 걱정도 없고 기쁨도 없고 고통스럽지 않고 즐겁지도 않으면서 염(念)의 청정을 수호한다면 제4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걱정·고통·기쁨·즐거움의 네 가지 일을 소멸했으므로 염(念)이 청정한 것이다.
[문] 앞서의 3선 중에선 청정을 설하지 않다가, 여기서만 설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답] 초선은 각관(覺觀)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2선은 기쁨이 크게 발동하고, 3선은 즐기는 마음이 다분히 산란해져서 모두가 염(念)이 청정하지 않다. 다음에 하지(下地)에서는 비록 선정의 마음이 있더라도 들어오고 나가는 숨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4선은 염(念)이 청정하기 때문에 들어오고 나가는 숨이 없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쉽다.
다음에 4선을 진선(眞禪)이라 하고, 나머지 세 가지 선은 방편의 단계이다. 4선의 모습은 비유하면 마치 좋은 말을 잘 다루는 이가 뜻대로 이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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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으니,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 등을 행하려고 하면 뜻대로 모두 얻고, 6신통[洞]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을 구하기가 쉬운 것이다.”[도자함(圖字函)]
『현종론』에서 말하였다.
“9지(地)는 4정려(淨慮)·미지(未至)·중간(中間)·3무색(無色)을 일컫는다.”[미자함(悵字函) 제2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정려지(淨慮地)에 아직 이르지 못한 것과 정려의 중간 이 두 가지는 모두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함[未至地]'이라고 한다.
[문] 이 경지를 어째서 '아직 이르지 못함'이라고 하는가?
[답] 아직은 근본에 들어가서 능히 현전한 온갖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이르지 못함'이라고 한다.”[절자함(節字函) 제10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초선(初禪)에 들어가는 것을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다고 한다. 초선과 2선의 중간을 각은 없으나 관은 있다고 하며, 2선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정(非有想非無想定)에 이르기까지는 각도 없고 관도 없다고 한다.”[입자함(立字函) 제8권]
“[문] 각과 관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거친 마음의 모습을 각(覺)이라 하고, 미세한 마음의 모습을 관(觀)이라 한다. 처음 반연한 마음 가운데 일으킨 모습을 각이라 하고, 나중에 분별해서 좋고 나쁨을 헤아리는 것을 관이라 한다.”[건자함(建字函) 제3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욕계에서 '처음의 정려에 아직 이르지 못한 정(定)' 가운데 이르면 심(尋)도 있고 사(伺)도 있으며, 정려의 중간에는 심(尋)은 없고 오직 사(伺)뿐이며, 제2정려에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는 심(尋)도 없고 사(伺)도 없다.”[퇴자함(退字函) 제10권]
『법온족론(法蘊足論)』에서 말하였다.
“심(尋)은 이른바 욕망의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기를 찾아서 구하는 것[尋求]이며, 사(伺)는 이른바 욕망의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을 여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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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엿보고 살피는 것[伺察]이다.
[문] 심과 사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 마음의 거칠음이 심이고, 마음의 세밀함이 사이다. 이것은 다시 어떠한가? 가령 종을 칠 때 거칠게 울리는 소리는 심에 비유하고,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는 사에 비유한다.”[제자함(弟字函) 제7권][심사(尋伺)와 각관(覺觀), 선정과 정려는 모두 명칭은 다르나 뜻은 같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4무량(無量)은 모든 정려에 의거해서 다시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능히 인발(引發)할 수 있는 것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상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만약 어떤 필추가 자비심을 일으켜 시방 일체 세계의 일체 종류에게 두루하면서 광대하게 자비를 행하는 것이 가없다면, 이를 자무량(慈無量)이라 하니, 비(悲)·희(喜)·사(捨)의 세 가지도 역시 마찬가지다.'”[단자함(旦字函)]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대자(大慈)는 일체 중생들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며, 대비(大悲)는 일체 중생들의 고통을 뿌리 뽑는 것이다.
[문] 무엇을 소자(小慈)와 소비(小悲)라고 합니까?
[답] 4무량심 가운데 자비를 소(小)라 하고, 18불공법(不共法)의 순서로 설한 대자비를 대(大)라 한다. 다시 모든 부처님 마음 속의 자비를 대(大)라 하고, 나머지 사람 마음 속의 자비를 소(小)라 한다.
[문] 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는 어떠합니까?
[답] 보살의 대자(大慈)는 부처님보다는 작으나 2승(乘)보다는 크다. 이것을 가명(假名)으로 크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소자(小慈)는 단지 마음에서 중생을 즐겁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즐겁게 해주는 일이 없고 마음에서는 그 고통을 연민하되 해탈시킬 수 없다. 대자란 즐거움을 생각하고 즐거움을 주며 대비란 고통을 연민하고 고통에서 해탈시킨다.”[건자함(建字函)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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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경』에서 말하였다.
“여덟 가지 해탈이란 것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색(色)이 있어서 온갖 색을 관하는 것이 제1해탈이고, 안으로는 색의 상념[色想]이 없으나 밖으로는 모든 색을 관하는 것이 제2해탈이고, 청정하고 수승한 이해로 몸소 증명을 짓는 것이 제3해탈이고, 일체의 색상(色想)을 초월해서 대(對)가 있는 상념을 소멸하고 갖가지 상념을 사유하지 않음으로써 무변공처정(無邊空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4해탈이고, 일체의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초월해서 무변식처정(無邊識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5해탈이고, 일체의 식무변처(識無邊處)를 초월해서 무소소유처정(無少所有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6해탈이고, 일체의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초월해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7해탈이고, 일체의 비상비비상처를 초월해서 멸상수정(滅想受定)에 들어가 구족하게 머무는 것이 제8해탈이다.”[출자함(出字函) 제9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해탈은 무슨 뜻입니까?
[답] 등지고 버린다는 뜻이다.
[문] 만약 등지고 버리는 것이 해탈의 뜻이라면 어느 곳에서 해탈하고 어느 곳의 마음을 등집니까?
[답] 처음의 해탈과 제2해탈은 색(色)에 애착하는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제3해탈은 청정하지 않은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공처(空處)의 해탈은 하지법(下地法)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며, 나아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해탈은 하지법을 등지고 버리지 않는 것이며, 멸수상(滅受想)의 해탈은 일체의 반연하는 마음을 등지고 버리는 것이다.”[자자함(慈字函) 제6권]
『법집경(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여덟 가지 승처(勝處)는 다음과 같다. 색이 있어서 색을 보는데,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自在見)을 얻음을 아는 것을 최초의 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의 좋고 나쁨을 보는데,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2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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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량없음을 보는데, 좋든 나쁘든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3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적음을 보는데, 좋든 나쁘든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4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의 푸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우마가화(優摩歌華)의 푸른색과 푸른빛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5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황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가니가라화(伽尼歌羅華)가 황색이고 황색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6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붉은 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승두시바화(勝頭視婆華)가 붉은 색이고 붉은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7승처라 하고, 안의 몸에 색의 모습이 있고 바깥 색이 하얀 색임을 보는데 비유하면 마치 우사사다라화(優沙私多羅華)가 하얀 색이고 하얀 빛인 것과 같으니, 저 색 가운데서 자재견을 얻음을 아는 것을 제8승처라 한다.”[욕자함(欲字函) 제2권]
제9의 차제는 비상정(非想定)이니
멸진정(滅盡)과 무상정(無想)으로부터 닦는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구차제정(九次第定)은 이른바 네 가지 정려·네 가지 무색정(無色定)·멸상수정(滅想受定)이다.”[출자함(出字函) 제9권]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문] 멸정(滅定)에 머무는 자는 8식(識) 가운데 어떤 식이 멸하는가?
[답] 6식이 멸하고 제8식이 신(身)을 유지한다. 경전에 설하기를 '멸정에 머물면 신어(身語)와 심행(心行)이 모두 멸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수(壽)도 멸하지 않고 역시 따뜻함[煖]도 여의지 않는다. 근(根)도 변하거나 파괴됨이 없고 식이 신(身)을 여의지 않는다. 만약 식이 완전히 없다면 마땅히 기와나 자갈과 같은데, 어찌 멸정에 머문다고 설하겠느냐?' 하였다.”[가자함(駕字函)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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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 말하였다.
“무기심(無記心)은 성품이 미약하고 열등하여 부패하기 쉽고 간헐적이라서 반드시 강하고 견고하고 뛰어난 마음에 머물러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에 머무는 자에 있어서도 저 무심(無心)이 반드시 심(心)이 있어야 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상정을 일으킨 자에 대해 어떤 이는 '저 곳[無想天]에 태어난 자는 모든 때에 선심(善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일으키기는 하나 닦음에 의지할 곳이 없다. 왜냐 하면 미래법은 닦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동자함(動字函) 제9권]
왜 하나의 선이 네 종류로 나뉘었는가
일으키는 이견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선(禪)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계(異計)를 짓는 것이다. 상계를 기뻐하고 하계를 싫어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외도선(外道禪)이다. 둘째는 바른 인과를 믿는 것이다. 또한 기뻐하거나 싫어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범부선(凡夫禪)이다. 셋째는 남(生)이 공(空)한 이치를 요달하되 치우친 도리를 증득하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소승선(小乘禪)이다. 넷째는 사람과 법이 둘 다 공함을 요달해서 닦는 것이니, 이것은 대승선(大乘禪)이다.”[부자함(富字函) 제9권]
좌선할 때 생각이 일어나면 마(魔)가 틈타나니
기둥을 쪼갰는데 살펴보니 자신을 상처 냈다.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심령(心靈)은 만 가지로 변한다. 혹 좌선을 하거나 혹 선정[定]에 들어 있을 때 마(魔)의 경계는 천차만별인데도 망연히 알지 못한다.
옛날에 어떤 선사가 산간에서 좌선을 하다가 한 효자를 보았는데, 죽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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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한 구를 선사 앞에 끌고 와서 통곡하며 말했다.
'어째서 나의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선사는 마(魔)의 경계임을 알고서 문득 도끼를 가져다가 기둥 위를 쪼개자 효자가 달아났다. 나중에 허벅지 위가 축축한 걸 깨닫고서 살펴보니 피가 있었다. 자기 자신을 쪼갠 걸 예기치 못한 것이다.
또 어떤 선사가 좌선할 때 돼지 한 마리가 오는 걸 보고는 즉시 돼지 코를 잡아서 한 번 끌어당기고는 불을 가지고 오라 해서 바라보니 자기 콧구멍을 잡고 있었다. 이는 바로 올바로 좌선할 때 마음속에서 견해가 일어나자 외마(外魔)가 감응해 들어온 것이다. 다만 정정(正定)을 닦는다면 어찌 마사(魔事)가 있겠는가?”[부자함(富字函) 제9권]
나한은 생함이 없는데도 오히려 물러남이 있고
혜가(醯迦)는 일곱 번 반복하자 스스로를 자해했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아라한에 여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퇴법(退法)이고, 둘째는 억법(憶法)이고, 셋째는 호법(護法)이고, 넷째는 등주(等住)이고, 다섯째는 능진(能進)이고, 여섯째는 부동(不動)이다.
퇴법이란 물러나는 것이고, 억법이란 마음에 싫어하는 기억을 떠올려서 칼을 잡고 자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호법이란 자신의 해탈에 대해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이 생겨서 능히 훌륭히 수호할 수 있는 것이며, 등주란 물러나지도 않고 나아가지도 않는 것이며, 능진이란 나아가 이르러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부동이란 근본의 부동에 머물기 때문이다.”[규자함(規字函) 제7권]
“[문] 아라한에 아홉 종류가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함인가?
[답] 퇴법 아라한은 두 종류의 근기를 성취하니 하하(下下)와 하중(下中)이고, 억법은 하상(下上)의 근기를 성취하고, 호법은 중하(中下)의 근기를 성취하고, 등주는 중중(中中)의 근기를 성취하고, 능진은 중상(中上)의 근기를 성취하고, 부동은 상하(上下)의 근기를 성취하고, 벽지불은 상중(上中)의 근기를 성취하고, 부처는 상상(上上)의 근기를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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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구혜가(瞿醯迦) 아라한은 여섯 번을 퇴보하고서는 더 이상 퇴보하는 것이 싫었으므로 칼로 자해해서 죽었다.'”[제8권]
범부가 죄를 지으면 형벌이 오히려 무겁고
성인의 부류[聖種]는 똑같은 잘못에도 책임이 가볍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가령 두 사람이 왕법(王法)을 범했는데, 한 사람은 범부로서 문득 무거운 형벌을 받았고, 또 한 사람은 왕자로서 단지 가벼운 꾸지람만 받았다. 이와 같이 이생(異生)과 예류(預流)는 함께 악업(惡業)을 지었어도, 모든 이생은 성인의 부류가 아니기 때문에 지은 악업으로 악취(惡趣)의 고통을 초래하고, 일체의 예류는 성인의 종자이기 때문에 악업이 다만 인천(人天)의 가벼운 고통을 초래한다.”[역자함(易字函) 제5권]
지관(止觀)은 생멸의 모습을 밝히고
삼마지[三摩]는 원래 등지(等持)의 마음이다.
『기신론』에서 말하였다.
“지(止)와 관(觀)의 두 문에서 지(止)란 일체 경계의 모습을 그쳐서 사마타관(奢摩他觀)[심일경성(心一境性)]에 수순하는 것이며, 관(觀)이란 이른바 인연의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해서 비파사나관(毘婆舍那觀)[모든 법의 자성(自性)을 여실하게 관찰한다.]에 수순하는 것이다.”[진자함(盡字函) 제9권]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문] 어떻게 지관을 행해야 참다운 수행에 계합할 수 있는가?
[답] 단지 능관(能觀)의 마음과 소관(所觀)의 경계를 요달해서 각각의 성품을 여의면 곧 망령된 마음이 저절로 쉬게 되니, 이를 지(止)라 하고, 항상 이 관을 지어서 그 비춤을 잃지 않기 때문에 관(觀)이라 한다.
그렇다면 지(止)에 즉하는 것이 관(觀)에 즉하는 것이고, 관(觀)에 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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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지(止)에 즉하는 것이니, 능소(能所)의 관이 없는 것을 지관이라 한다. 가령 예전의 고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의 성품이 적연(寂然)한 것을 지(止)라 하고, 적연하면서도 항상 비추는 것을 관(觀)이라 하니, 능관과 소관이라는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치자함(侈字函) 제10권]
『반야음석(般若音釋)』에서 말하였다.
“삼마지문(三摩地門)은 또한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한역하면 등지(等持)이다. 말하자면 평등하고 올바르게 유지하는 마음이니, 또한 정정(正定)이라고도 한다.”[수자함(收字函)]
성인에 들어가면 이미 다섯 가지 공포를 여읜 것이고
마음을 닦으면 능히 네 가지 마원(魔怨)을 굴복시킨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4과(果)의 성인은 이미 다섯 가지 공포를 여의었다. 첫째는 불활(不活)의 공포[몸도 애착하지 않는데 하물며 재물이겠는가?]이고, 둘째는 악명(惡名)의 공포[남에게 공양을 희구하지 않고 오로지 일체 중생들에게 베풀 뿐이다]이고, 셋째는 대중의 공포[일체 세간에서 더불어 동등한 자가 없는데, 하물며 수승한 이가 있겠는가?]이고, 넷째는 죽음의 공포[아견(我見)을 멀리 여의어서 아상(我相)이 없다]이고, 다섯째는 악도(惡道)의 공포[스스로 죽음이 이미 결정된 걸 알고서 모든 불보살을 여의지 않는 것이다]이다.”[정문(正文)은 인자함(仁字函) 제8권, 주(注)는 『화엄경』 제34권에 나옴]
『정인법문경(淨印法門經)』에서 말하였다.
“하는 바가 없는 마음이 곧 모든 마를 능히 항복시키니,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라. 첫째는 온마(蘊魔)이고, 둘째는 번뇌마이고, 셋째는 사마(死魔)이고, 넷째는 천마(天魔)이다.
만약 무생(無生)과 무기(無起)의 법을 살핀다면 능히 사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동시에 일체의 의법(意法)을 의지(依止)하여 멸도(滅道)에 취향하면 능히 천마를 항복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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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苦)를 알면 능히 온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집(集)을 끊으면 능히 번뇌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멸(滅)을 증득하면 사마를 항복시킬 수 있고, 도(道)를 닦으면 능히 천마를 항복시킬 수 있다.”[밀자함(密字函) 제5권]
가령 입류(入流)임을 알아도 들어가는 바가 없고
문득 일래(一來)를 옮겨도 오는 바가 없다.
『금강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다원(須陀)이 ?나는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수다원의 명칭은 흐름에 들어간 것이지만 들어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니, 빛깔·소리·냄새·맛·촉감·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수다원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다함(斯陀含)이 ?나는 사다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사다함의 명칭은 한 번 왕래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왕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사다함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나함(阿那含)이 ?나는 아나함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아나함의 명칭은 오지 않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오지 않음도 없기 때문에 아나함이라 합니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라한(阿羅漢)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실로 아라한이라고 이름할 법이 없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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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짓는다면, 즉시 아(我)·인(人)·중생(衆生)·수자(壽者)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45) 연각품(緣覺品)[5칙]
깊고 깊은 법을 곧바로 능히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서
남을 추종하지 않는 것이 독각승(獨覺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의 10선(善)은 청정을 닦고 다스리지 남의 가르침을 추종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닫기 때문에, 대비(大悲)의 방편을 구족하지 않기 때문에, 깊고 깊은 인연법을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독각승을 이루는 것이다.”[애자함(愛字函) 제5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벽지불은 다시 무엇을 말합니까?
[답] 벽지불은 홀로 세간에 출현한 자이니, 반드시 부처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마치 갈가수(渴伽獸)에게 홀로 외뿔이 나는 것과 같으니, 벽지불도 역시 마찬가지다.”[벽지불은 곧 독각의 다른 명칭이다.][분자함(分字函) 제5권]
무명(無明)이 생하므로 모든 연(緣)이 생하고
무명이 멸하므로 모든 연(緣)이 멸한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12연기(緣起)이니,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연하여 6입(入)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觸)이 있고,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를 연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고,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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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얻는 바가 없음으로 방편의 사유를 삼는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이 멸하고,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처(處)가 멸하고, 6처가 멸하기 때문에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가 멸하고,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가 멸한다.”[위자함(爲字函) 제4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시분(時分)의 연기는 이른바 12위(位)로서 12지(支)를 세운 것이다. 하나하나의 지(支) 속에 각각 5온(蘊)을 갖추고 있는데, 애착의 경계가 무지(無知)를 말미암기 때문에 탐착하는 때가 일어난다.
이 가운데 무지는 곧 무명(無明)이고, 탐착이 있는 것은 행(行)이고, 경계를 요별(了別)하는 것은 식(識)이고, 식이 함께 하는 모든 온(蘊)이 명색(名色)이고, 명색이 의지하는 모든 감관[根]이 6처(處)이고, 6처가 화합하는 것이 촉(觸)이고, 능히 촉을 거느리는 것이 수(受)이고, 받아들임을 기뻐하고 기뻐하는 것이 애(愛)이고, 애가 늘어나는 것이 취(取)이고, 후세의 존재의 업(業)을 이끄는 것이 유(有)이고, 모든 온(蘊)이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모든 온이 성숙해서 변하는 것이 노(老)이고, 모든 온이 파괴되어 소멸하는 것이 사(死)이고, 내열(內熱)은 수(愁)이고, 슬퍼서 우는 것은 비(悲)이고, 5식의 상응을 불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고(苦)이고, 의식의 상응을 불평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우(憂)이고, 마음이 달아오르는 것이 뇌(惱)이다.”[차자함(次字函) 제3권]
저 풀과 나무가 번성했다가 다시 쇠락하는 것을 관하듯이
자기의 형해(形骸)를 깨닫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생멸을 관하는 자는 무엇을 방편으로 삼는가?
[답] 그 수행자는 봄철에 풀과 나무의 푸른색을 마치 감색의 유리처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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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의 빠른 흐름과 떠 있던 물거품이 언덕에 닿는 걸 보면 이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외부의 법은 이제 이미 다시 생겼다. 만약 취락에 들어가 모든 남녀가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노는 걸 보고서 무엇 하느냐고 묻는데, 이 속에서 남자가 태어나고 여자가 태어난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내법(內法)이 이미 다시 생겼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가을철에 다시 풀과 나무가 바람과 서리에 시들어 떨어지고 강물이 고갈되는 것을 보면 그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이와 같은 외부의 법은 이제 이미 멸했다. 만약 취락에 들어가서 모든 남녀가 사망하고 통곡하는 걸 보면, 내부의 법도 역시 소멸한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관한다.
'기력이 왕성하다 늙는 것은 무상(無常)하니, 누가 이를 면할 수 있겠는가?'”[분자함(分字函) 제5권]
46) 보살품(菩薩品)[26칙]
자신과 다른 이를 함께 이익 되게 하니 비심(悲心)이 무겁고
복과 지혜를 함께 닦는 것이 바로 보살승(菩薩乘)이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상품(上品)의 10선(善)3)은 청정을 닦고 다스린다. 마음이 넓고 한량없기 때문에, 자비와 연민을 구족하기 때문에, 방편을 섭수하는 바이기 때문에, 대원(大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대지혜를 희구하기 때문에, 보살의 모든 경지를 청정히 다스리기 때문에, 일체의 바라밀[度]을 청정히 닦기 때문에 보살의 광대한 행을 성취한다.”[애자함(愛字函) 제5권]
보리(菩提)4) 일체(一體)는 세 종류를 이루고
주)------------------------------------------------
3) 고려대장경 제45권 551쪽 하(下)와 552쪽 상(上)이 서로 바뀌어야 맞다.
4) 고려대장경에는 10(品) 상선(上善)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에 의거하여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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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초발심은 2승(乘)보다 뛰어나다.
『파제마경(破諸魔經)』상권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보리(菩提)에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성문(聲聞)보리·연각(緣覺)보리·무상(無上)보리이다.
만약 사람이 비록 보리심을 일으켰더라도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즐김으로써 해탈을 구하기 때문에 성문보리라고 한다.
또다시 어떤 사람이 비록 보리심을 일으켰더라도 대승법(大乘法)에 대해 닦고 익히길 즐기지 않고, 다만 심념(心念)을 일으켜서 모든 반연하는 법을 관하고 그 관찰하는 바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연각보리라 한다.
또다시 어떤 사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提)의 마음을 이미 일으켰더라도 다시 남에게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도록 권유하고, 윤회의 몸에 대해 싫증이나 권태를 일으키지 않고 낙욕(樂欲)의 이익과 즐거움으로 일체 중생들을 다 해탈시킴으로써 훌륭한 이익을 일체에게 널리 베풀기 때문에 무상보리라 한다.'”[미자함(微字函)]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문] 나한과 벽지불은 욕망을 여읜 사람입니다. 혹 어떤 범부는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했는데, 다만 발심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수승함을 얻습니까?
[답] 발심한 보살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바라밀을 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다만 은밀히 발심해서 보살도를 행하는 자이니, 비록 조그만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어도 2승(乘)보다 수승하다. 왜 그런가? 비유하면 마치 태자가 비록 아직 즉위하지 않았더라도 모든 대신과 지위가 있는 부귀한 자보다 수승한 것과 같다.
가령 여섯 가지의 신통[洞]이 있는 나한이 한 명의 사미를 데리고서 옷과 발우를 짊어지게 하자, 사미가 이렇게 생각했다.
'반드시 불승(佛乘)으로 열반에 들어야겠다.'
스승이 그 생각을 알고서 즉시 옷과 발우를 취해서 자기가 짊어지고 그보다 앞서 나갔다. 사미가 뒤에서 다시 생각했다.
[596 / 873] 쪽
'불도(佛道)는 너무나 어렵다. 생사에 오래 머물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니, 소승(小乘)으로써 일찍 열반에 들어야겠다.'
스승이 다시 옷과 발우를 사미에게 돌려줘서 짊어지게 한 후 뒤를 따라오도록 했다. 사미가 스승에게 여쭈었다.
'스승님께선 나이가 연로하신데도 어린애처럼 장난을 하십니다.'
스승이 즉시 대답했다.
'너의 초발심(初發心)이 부처를 지으니, 그 마음이 귀중하고 그 위(位)가 나의 스승이다. 이 때문에 너를 밀어서 앞서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네 마음이 다시 후회하면서 소승(小乘)을 취해 나를 버리고 멀리 떨어지려 했으므로 뒤에 있도록 한 것이다.'
사미가 깜짝 놀라 깨달으면서 대승법(大乘法)에 머물렀다.”[표자함(表字函) 제8권]
대승과 소승은 다섯 종류의 차이가 있고
넓은 길과 좁은 길 속에 늦고 빠름이 있다.
『대승장엄론석(大乘莊嚴論釋)』에서 말하였다.
“성문승과 대승에 다섯 종류의 차이가 있다. 첫째는 발심(發心)의 차이이고, 둘째는 교수(敎授)의 차이이고, 셋째는 방편의 차이이고, 넷째는 주지(住持)의 차이이고, 다섯째는 시절의 차이이다.
성문승은 발심하는 것이나 가르쳐 주는 것이나 부지런히 방편을 쓰는 것이 모두 스스로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지(住持)도 적고 복과 지혜가 작게 모이고 시절도 작으니, 3생(生)에 이르러야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대승은 이와 같지 않아서 발심과 가르쳐 주는 것과 부지런히 방편을 쓰는 것이 모두 남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주지(住持)도 많고 복과 지혜가 크게 모이고 시절도 많으니, 3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이가 있어서 마땅히 소승의 행으로써 대승의 과(果)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사자함(事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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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도(道)에 의거해서 해탈을 얻는 것을 시(時)해탈이라 한다. 가령 매우 빨라서 첫 번째 생에 선근(善根)을 심고, 두 번째 생에 성숙하게 하고, 세 번째 생에 해탈을 얻는다.
광대한 도(道)에 의거해서 해탈을 얻는 것을 불시(不時)해탈이라 한다. 가령 매우 늦어서 성문승은 60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고, 가령 사리자(舍利子)나 독각승은 백 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고, 불승(佛乘)은 3아승기겁을 거쳐야 해탈을 얻는다.”[패자함(沛字函) 제1권]
보살이 갖추어 성취하는 것은 태양이 비추는 것과 같고
성문이 짓는 것은 반딧불 빛과 같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만자자(滿慈子)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무슨 뜻을 관찰하시기에 모든 보살들이 소유한 공덕을 찬양하고 성문은 찬양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만자자에게 말씀하셨다.
'태양[日輪]이 섬부주(贍部州) 사람에게 비추는 광명을 반딧불이 비출 수 있겠는가?'
만자자가 말했다.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했듯이, 보살의 성취는 마치 태양의 광명이 섬부주의 모든 유정(有情)들을 널리 비추는 것과 같으며, 성문이 지은 바는 마치 반딧불의 광명이 오직 자신만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이에 보살은 자신의 번뇌를 조복할 뿐만 아니라 유정(有情)을 제도하여 번뇌를 여의게 함으로써 보리(菩提)를 증득해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성문승의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조복할 뿐이니, 모든 유정들을 조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내자함(字函) 제2권]
불승(佛乘)은 구경에는 오직 하나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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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께서는 방편으로 세 가지를 설하신다.
『법화경』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시방의 불국토 속에는
부처님의 방편설을 제외하면
오직 1승법(乘法)만 있고
2승도 없고 3승도 없다.
다만 거짓 명자(名字)로써
중생을 인도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려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신다.
오직 이 하나의 사실만 있을 뿐
나머지 둘은 진실이 아니다.[죽자함(竹字函) 제1권]
불국토를 장엄하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으니
비유하면 큰 성으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닌 것과 같네.
『원각경』에서 말하였다.
“비유하면 큰 성의 외부에 네 개의 문이 있어서 방향에 따라 들어오는 것과 같으니, 한 길만이 아니다. 일체 보살들의 불국토를 장엄하고 보리를 이루는 것도 하나의 방편만이 아니다.”
같은 무리가 되어 같은 일을 함으로써 서로 친해지니
물에도 들어가고 진흙에도 들어가서 깨닫게 한다.
또 말하였다.
“보살이 변화를 세간에 나타내 보이는 것은 애착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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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단지 자비로써 저들로 하여금 애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온갖 탐욕을 빌려서 생사에 들어간다.
다시 보살은 오직 대자비의 방편으로 온갖 세간에 들어가서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개발하고 나아가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 보이니, 역순(逆順)의 경계에서 그 일을 함께 함으로써 성불하도록 교화한다.”
4념주처(念住處)와 4정단(正斷)이 있고
4여의족(如意足)과 5종근(種根)이 있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서 말하였다.
“무엇을 4념처(念處)를 관하는 것이라 하는가? 몸의 청정하지 못함을 관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 하고, 쾌락이 모두 고통임을 관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 하고, 마음의 생멸을 관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 하고, 화합의 모습을 파괴하고 단지 법상(法相)만을 얻음을 관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 한다.”[상자함(常字函)]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4정근(正勤)[또한 정단(正斷)이라고도 한다.]은 얻는 바가 없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다. 아직 생기지 않은 온갖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생기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며, 이미 생긴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은 영원히 끊게 하기 때문이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도록 하기 때문이며, 이미 생긴 착한 법에는 안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생자함(生字函) 제4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4여의족(如意足)이란 이른바 욕(欲)삼마지·근(勤)삼마지·심(心)삼마지·관(觀)삼마지이다. 하나하나의 삼마지 가운데서 행을 끊어서 성취하고, 신족(神足)을 닦아 익히고[욕삼마지란 곧 욕정(欲定)이다. 행을 끊어서 성취한다는 것은 신견(身見) 등의 행을 끊고, 색(色)·수(受) 등의 행을 끊어서 성취하기 때문이다.] 지(止)에 의거해서 싫어하고[대치해서 악법(惡法)을 취하지 않는다.] 지(止)에 의거해서 여의고[성품에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지(止)에 의거해서 멸하고[모든 악법(惡法)을 멸하는 것이다.] 버림으로써 회향하는 것이다.[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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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이 없는 곳에 이른다.]”[정문(正文)은 강자함(崗字函) 제6권, 주문(注文)은 합론(合論) 59권]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4여의분(如意分)은 자(慈)·비(悲)·희(喜)·사(捨)로서 근본을 삼는다. 마음이 조화롭고 부드럽기 때문에 초선(初禪)에 들어가게 되고, 나아가 4선까지 이르면 몸이 가벼워짐을 얻는다. 이와 같이 몸이 가볍고 마음이 부드러워짐을 성취하면 여의분(如意分)에 들어가고, 여의분에 들어간 후에는 곧 신통을 낳고 마음이 자재로워져서 뜻에 따라서 간다. 마치 바람이 허공을 다니는 데 걸리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5근(根)이란 것은 이른바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왜 신근(信根)이라 하는가? 세간의 정견(正見)을 행하고 업보를 믿고 의심의 그물을 없애기 때문이다. 무엇을 진근(進根)이라 하는가? 이 법을 섭수해서 닦기 때문이다. 왜 염근(念根)이라 하는가? 닦는 바를 잊지 않기 때문이다. 왜 정근(定根)이라 하는가? 닦는 마음이 산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혜근(慧根)이라 하는가? 지혜로써 환히 비추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5력(力)·7각(覺)·8도지(道支)가 있으니
모두 합쳐서 37보리분(菩提分)이다.[4념처(念處)로부터 여기까지 이다.]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5력(力)은 신력(信力)·정진력(精進力)·염력(念力)·정력(定力)·혜력(慧力)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왜 신력(信力)이라 하는가? 이와 같이 믿고 향해서 마(魔)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진력(進力)은 정진이 견고해서 천인(天人)이 무너뜨릴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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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때문이다. 염력(念力)은 온갖 착한 법에 머물러서 번뇌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력(定力)은 시끄러움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비록 설한 바가 있더라도 온갖 선(禪)을 장애하지 않으니, 정(定)을 버리지도 않고 정(定)을 따르지도 않는데도 능히 자재롭다. 혜력(慧力)은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아는 것이니, 한 법도 능히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지혜[智]이다. 세간 외도의 고행(苦行)과 난행(難行)은 보살이 교화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모두 수용함을 나타내서 그 행하는 바를 함께 하니, 이것이 출세법(出世法)으로서 세간을 능히 넘어서는 것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이 다섯 가지는 무엇을 반연해서 근(根)이라 이름하고, 력(力)이라 이름하는가?
[답] 능히 착한 법을 생기게 할 수 있으므로 근(根)이라 하고, 능히 악법(惡法)을 타파할 수 있으므로 력(力)이라 한다. 설함이 있어도 기울거나 흔들릴 수 없는 것을 근이라 하고, 능히 남을 꺾어서 굴복시키는 것을 력이라 한다.”[정자함(靜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7각지(覺支)란 이른바 염각지(念覺支)·택법각지(擇法覺支)·정진각지(精進覺支)·희각지(喜覺支)·경안각지(輕安覺支)·정각지(定覺支)·사각지(捨覺支)이니, 이(離)에 의지하고 무염(無染)에 의지하고 멸(滅)에 의지하고 사(捨)로 회향하는 것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염각분(念覺分)은 일체법의 자성이 모두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다. 택법각분(擇法覺分)은 능히 요의(了義)와 불료의(不了義)를 분별하는 것이다. 진각분(進覺分)은 부지런히 닦아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희각분(喜覺分)은 닦는 바의 법이 기쁘기 때문이다. 제각분(除覺分)은 모든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다. 정각분(定覺分)은 정(定)에 들어간 듯이 온갖 법을 각료(覺了)하는 것이다. 사각분(捨覺分)은 세간 법에 끄달리지 않아서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반야경』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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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도지(聖道支)란 이른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강자함(崗字函) 제6권]
『무진의경』에서 말하였다.
“정견(正見)은 단멸[斷]과 항상함[常]의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정사유(正思惟)는 가령 생각으로 탐욕 등을 일으키면 이를 올바르지 못한 사유라 하고, 계율·선정·지혜·해탈·해탈지견(解脫知見)을 생각하면 이를 올바른 사유라 한다. 정어(正語)는 무릇 말하는 것이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정업(正業)은 이치에 따르는 업을 닦기 때문이다. 정명(正命)은 위의(威儀)가 흔들리지 않아서 온갖 아첨이나 간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정진(正進)은 올바른 진리[諦]의 성스런 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념(正念)은 열반으로 나아가면서 마음을 묶어 놓음[繫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정정(正定)은 결정코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다.”[주자함(周字函) 제1권]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문] 어째서 이 일곱 가지를 각지(覺支)라 하는가?
[답] 각(覺)은 구경각(究竟覺)이어서 곧 진무생지(盡無生智)이고, 혹은 여실각(如實覺)이어서 곧 무루혜(無漏慧)이다. 일곱은 그것을 나눈 것이기 때문에 지(支)라 이름한다. 택법(擇法)은 각(覺)이기도 하고 지(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여섯은 지(支)일 뿐 각이 아니다.
[문] 어째서 이 여덟 가지를 도지(道支)라 하는가?
[답] 밟는 바를 통달하기 때문에 도(道)라 한다. 여덟은 그것을 나눈 것이기 때문에 지(支)라 한다. 정견은 도(道)이기도 하고 지(支)이기도 하지만, 나머지 일곱은 지(支)이지 도(道)가 아니다.”[정자함(靜字函) 제1권]
차제(次第)의 5위(位)로써 원만히 닦으니
이로 말미암아 3아승기의 수(數)를 거쳤다.
『능엄경』에서 말하였다.
“선남자여, 욕망과 애착이 말라 버리고 감관[根]과 경계가 짝하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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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지혜만 있는데, 그 지혜가 마른 것을 건혜지(乾慧地)라고 이름한다. 욕망의 습기가 처음으로 말라서 여래의 법류수(法流水)와는 접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면 원만하고 오묘해져 망상(妄想)이 멸진하고 중도(中道)가 순수하고 참된 것을 신심주(信心住)라고 한다.
10신(信)은, 첫째는 신심(信心)이니 참된 마음이 명료한 것이며, 둘째는 염심(念心)이니 처음의 염(念)을 잊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정진심(精進心)이니 정명(精明)하게 나아가는 것이며, 넷째는 혜심(慧心)이니 지혜가 현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정심(定心)이니 적멸과 오묘함이 항상 응결해 있는 것이며, 여섯째는 불퇴심(不退心)이니 밝은 성품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며, 일곱째는 호법심(護法心)이니 보지(保持)하여 잃지 않는 것이며, 여덟째는 회향심(回向心)이니 빛을 돌려서 부처를 향하는 것이며, 아홉째는 계심(戒心)이니 무위(無爲)에 안주하는 것이며, 열째는 원심(願心)이니 가는 바가 원(願)에 따르는 것이다.
10주(住)는, 첫째는 발심주(發心住)이니 마음의 정(精)이 발휘되는 것이며, 둘째는 치지주(治地住)이니 실천하는 마음이 마치 땅과 같은 것이며, 셋째는 수행주(修行住)이니 유리(遊履)함에 걸림 없는 것이며, 넷째는 생귀주(生貴住)이니 여래의 종자에 들어가는 것이며, 다섯째는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이니 깨달음에 결함이 없는 것이며, 여섯째는 정심주(正心住)이니 마음의 모습이 마치 부처와 같은 것이며, 일곱째는 불퇴주(不退住)이니 몸과 마음이 증장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동진주(童眞住)이니 신령한 모습이 구족한 것이며, 아홉째는 법왕자주(法王子住)이니 출생해서 불자(佛子)가 되는 것이며, 열째는 관정주(灌頂住)이니 관정으로 직위를 받는 것이다.
10행(行)은, 첫째는 환희행(歡喜行)이니 부처의 오묘한 덕을 갖추는 것이며, 둘째는 요익행(饒益行)이니 중생에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무진한행(無瞋恨行)이니 사물을 이롭게 하는 데 거부가 없는 것이며, 넷째는 무진행(無盡行)이니 시방을 통달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이치란행(離癡亂行)이니 차별이나 과오가 없음을 얻는 것이며, 여섯째는 선현행(善現行)이니 다름[異] 가운데서 같음[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곱째는 무착행(無着行)이니 진찰(塵刹)에 걸림이 없는 것이며, 여덟째는 존중행(尊重行)이니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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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1의(第一義)이며, 아홉째는 선법행(善法行)이니 원만한 부처의 궤칙이며, 열째는 진실행(眞實行)이니 하나의 참이 함이 없는 것[一眞無爲]이다.
10회향(回向)은, 첫째는 일체 중생을 구호해서 중생의 모습을 여의는 회향이니 제도하는 바 없이 제도하는 것이며, 둘째는 파괴되지 않는 회향이니 파괴할 만한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셋째는 일체의 부처님과 동등한 회향이니 깨달음이 부처의 깨달음과 가지런한 것이며, 넷째는 일체 처소에 이르는 회향이니 밝음을 땅처럼 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다함없는 공덕장(功德臧)의 회향이니 신(身)과 토(土)가 섭입(涉入)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평등한 선근(善根)의 회향이니 부처의 인(因)과 동일한 것이며, 일곱째는 일체 중생을 동등히 관찰하는 회향이니 성품이 중생과 동일한 것이며, 여덟째는 진여상(眞如相)의 회향이니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속박 없는 해탈의 회향이니 시방이 걸림 없는 것이며, 열째는 동등한 법계의 한량없는 회향이니 성품이 원만한 성취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흔 가지가 하나의 마음이다. 다음은 네 가지 묘행(妙行)을 덧붙이는데, 이른바 난지(煖地)·정지(頂地)·인지(忍地)·세제일지(世第一地)이다.
10지(地)는,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니 부처의 경계를 요달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구지(離垢地)이니 같고 다른 성품이 멸하는 것이며, 셋째는 발광지(發光地)이니 청정함이 지극해서 밝음이 생기는 것이며, 넷째는 염혜지(慧地)이니 밝음이 지극해서 각(覺)이 원만한 것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니 같음[同]과 다름[異]이 이르지 못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니 성품이 청정해서 밝음이 드러나는 것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니 진여제(眞如際)를 다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니 하나의 진여심(眞如心)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니 진여의 용(用)을 발하는 것이며,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니 자음(慈陰)의 오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어서 여래가 역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순행(順行)해서 각제(覺際)에 이르러 교입(交入)하는 것을 등각(等覺)이라 한다. 처음 건혜(乾慧)의 마음으로부터 등각까지는 각(覺)으로서 금강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건혜지를 획득한다. 이처럼 단(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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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복(複)을 중중(重重)하면서 열둘이 바야흐로 다하면, 묘각(妙覺)이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한다.”[염자함(染字函) 제8권][장경(長慶)의 주석에서는, “5위 속에 각기 열을 갖추고, 다시 등각과 묘각이 둘이 된다. 혹은 단편적으로 1위(位)를 드는 것을 열둘이라 하고, 혹은 큰 수(數)를 드는 것을 중중(重重)이라 하는데 이는 다함없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유식론(唯識論)』에서 말하였다.
“5위(位)라는 것은 첫째는 자량위(資量位)이니 이른바 대승의 해탈에 수순하는 분(分)을 닦는 것이며, 둘째는 가행위(加行位)이니 이른바 대승의 결택(決擇)을 수순하는 분(分)을 닦는 것이며, 셋째는 통달위(洞達位)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머무는 견도(見道)이며, 넷째는 수습위(修習位)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이 머무는 수도(修道)이며, 다섯째는 구경위(究竟位)이니 이른바 무상보리(無上菩提)에 머무는 것이다.”[즉자함(則字函) 제9권]
『대승석론(大乘釋論)』에서 말하였다.
“3아승기라는 것은 그 중에서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 최초의 승기(僧祇)가 원만해지고 나면 정심지(淨心地)에서 진여를 통달하고, 6지(地)에선 이미 돌아와서 유상(有相)의 행을 증득하고, 7지에서는 무상(無相)의 공용(功用)이 있는 행을 얻는다. 제2승기가 원만해져서 8지에 들어가면 무공용(無功用)의 행을 얻지만, 그러나 아직 무공용행을 성취하지는 못한다. 9지와 10지에서 무공용행이 원만해지니, 이것이 제3승기겁이다.”[경자함(敬字函) 제7권]
다른 승(乘)은 부처에 이르는 데 3아승기가 정해졌지만
원교(圓敎)는 초발심에 정각(正覺)을 이룬다.
장자(長者)가 논하였다.
“가령 3승(乘) 가운데 10주(住) 보살은 생공관(生空觀)을 배워서 천제(闡提)의 믿지 않는 장애를 다스리고, 10행(行) 보살은 법공관(法空觀)을 지어 자리이타행을 닦음으로써 성문의 자리(自利)의 장애를 다스리고, 10회향(廻向) 보살은 법공관을 지어서 자비의 원력을 일으켜 형태를 6도(道)에 드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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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교화함으로써 독각의 자도(自度)의 장애를 다스린다.
이 서른 가지 마음의 보살을 이른바 3현(賢)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자량위와 가행위로 지(地) 이전의 세 가지 장애를 다스린다. 다만 정사(正使)는 제거했지만, 습기(習氣)는 아직 제거하지 못했다. 10지(地) 보살은 그 나머지 습기도 끊는다.
초지(初地) 보살이 자신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보는 것을 견도위(見道位)라 하며, 2지부터 7지까지는 수도위(修道位)로서 공용이 있는데도 그 행을 닦으며, 8지(地)부터 10지(地)까지는 구경위(究竟位)라고 한다.[32권]
11지의 등각주(等覺住) 안에선 보현행이 바야흐로 끝나고, 12지는 묘각(妙覺)의 불과(佛果)이다.[40권]
이와 같이 권교(權敎)는 먼저 보살행을 행해서 가진여(假眞如)를 배우고 지(地) 이전의 복인(伏忍)을 동등히 관하니, 10지 이래로 오히려 10진여(眞如)의 장애가 있기 때문에 관해야 한다. 진여위에 당해서 행해야 할 바의 행이 장애를 이루고 아울러 유위(有爲)로 보살심을 일으키고 생멸을 여의지 않은 채로 능히 분별과 무명(無明)을 끊어야 하고 이 관을 말미암아 절복해야 한다. 10지의 위(位)에서 바야흐로 견성할 수 있고 3기겁을 지나야 바야흐로 비로소 성불한다.”[제2권]
『승만경』을 들어서 말하였다.
“보살의 성불은 결정코 3아승기를 채운다.[35권]
가령 원교(圓敎)의 10주(住)는 첫 머리에서 문득 견성(見性)하여 정등각(正等覺)을 이루고, 온갖 행상(行相)을 행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각행(覺行)이 원만한 부처가 된다. 1위(位)가 곧 일체위(一切位)이며, 일체위가 곧 1위이기 때문에 10신(信)의 원만한 마음이 곧 6위(位)를 섭수해서 정등각을 이루고, 보현의 법계에 의거해서 제석천의 그물이 중중(重重)하고 주(主)와 반(伴)이 구족하기 때문에 원교라 한다.”[제3권]
『법화경』을 들어서 용녀(龍女)가 찰나(刹那)에 성불한다고 말했다. 또 『화엄경』에서는 말하였다.
“선재(善財) 동자가 일생에 과(果)를 취하니, 처음 문수(文殊)로부터 보리심을 일으키고 단계적으로 덕운(德雲) 등 53선지식을 뵈었는데 한 분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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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미 먼저 아뇩보리심(阿耨菩提心)을 일으켰는데, 무엇이 나로 하여금 보살도를 배우게 하고 보살행을 행하게 하는가?'”[제2권]
비록 초발심에 정각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마치 부처와 흡사해서 처음부터 상응한다.
또 논하였다.
“아라한·벽지불·정토(淨土) 보살·공관(空觀) 보살은 다만 출세간을 기뻐하고 6바라밀을 행하여 모두 현행(現行)의 무명(無明)을 굴복시켜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므로 영원히 번뇌를 끊어서 불도(佛道)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다. 그러나 1승(乘)의 불과(佛果)는 초발심 때에 문득 근본 무명이 근본지(根本智)임을 요달해서 차별지의 대용법문(大用法門)을 이루니, 초심(初心) 위에 모든 불법이 함께 타고 있는 문을 원만케 한다. 만약 지혜와 자비와 서원과 행이 터럭만큼이라도 부처와 비슷하지 않다면 신심(信心)도 역시 이루어지지 못할 텐데, 하물며 부처에 머무는 바에 머물러서 부처의 참된 자식이 되겠는가? 만약 지혜가 다르지 않고, 원행(願行)이 평등하고, 대비(大悲)가 다르지 않고, 경계가 다르지 않고, 과거·미래의 겁이 일념과 더불어 다르지 않고, 선정과 지혜가 비추어서 볼 수 있다면, 이를 불보살의 올바른 선지식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하며, 근본지의 발심(發心)에 의거하는 것이라 한다.”[34권]
47) 등각품(等覺品)[10정위(定位), 11지(地)][12칙]
10정(定)은 10지(地)의 자리를 초월하고
등각(等覺)은 묘각존(妙覺尊)에 이웃한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보현(普賢)에게 말씀하셔서 보안(普眼) 등을 위하여 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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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삼(三)은 올바름이고, 매(昧)는 선정(定)이다.]를 설하도록 해서 원만한 보현행에 잘 들어가도록 했다.
첫째는 보광명(普光明) 삼매이다. 이 보살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하나의 연화좌로 삼으며, 이 연꽃 위에서 몸 가운데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나타내고, 그 가운데 백억의 사천하(四天下)가 있는데 하나하나의 사천하에 백억의 몸을 나타내고, 하나하나의 몸에 백억의 삼천대천세계가 들어가서 보살의 수행과 나아가 근기의 성품[根性]까지 원만해짐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타낸 몸은 하나도 아니고 많지도 않으며 선정[定]에 들어가든 선정에서 나오든 착란(錯亂)하는 바가 없다.[장자(長者)는 이것이 신토(身土)가 중중해서 서로 들어감이 두루 작용하고 광대하여 한계가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째는 묘광명(妙光明)삼매이다. 이 보살은 능히 삼천대천세계에 들어가는데, 미진수의 삼천대천세계 하나하나 세계 속에 다시 삼천대천세계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고, 나아가 삼천대천세계 미진수 중생들의 갖가지 더러움과 청정함의 동일하지 않음을 보살이 다 알고 다 들어가는데, 이 모든 세계 역시 보살의 몸에 다 들어오면서도 섞이거나 혼란스럽지 않고 또한 소멸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이것은 자기와 타자의 경계에서 몸과 마음이 걸림 없는 것이다.]
셋째는 차제편왕제불국토신통(次第遍往諸佛國土神洞)삼매이다. 이 보살은 동방의 무수(無數) 세계를 지나고 다시 그러한 세계를 미진수 세계 지나서 그 세계 속에서 이 삼매에 들어가는데, 어떤 경우엔 찰나(刹那)에 들어가고 어떤 경우엔 하루에 들어가고 나아가 불가설(不可說)의 겁(劫)까지 이른다. 삼매로부터 일체법을 일으키는데, 잊지도 않고 잃지도 않아서 구경(究竟)에 이른다.[이것은 여환지(如幻智)로써 사물에 상응하여 움직이거나 고요하고, 근본지(根本智)에 의거해서 항상 왕래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시 이것의 늦고 빠름은 이하의 다른 삼매의 경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어서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
넷째는 청정심심행(淸淨深心行)삼매이다. 이 보살은 아승기(阿僧祇) 세계의 모든 여래 처소를 지나면서 한 분 한 분께 갖가지 뛰어나고 오묘한 향기로운 꽃으로 온갖 장엄을 갖추어 공양함으로써 부지런히 묘법을 구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과 열반에 드심에 대해선 끝내 분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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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는 지과거장엄장(知過去莊嚴臧)삼매이다. 이 보살은 과거 모든 부처님의 출현과 겁찰(劫刹)의 차제를 알고, 나아가 중생 수명의 차제를 조복한다.
여섯째는 지광명장(智光明臧)삼매이다. 이 보살은 미래의 일체겁 속에 있는 모든 부처님을 능히 알 수 있어서 이미 설한 법과 아직 설하지 않은 법을 모두 다 알 수 있다.
일곱째는 요지일체세계불장엄(了知一切世界佛莊嚴)삼매이다. 이 보살은 시방세계를 능히 두루 들어가서 일체의 부처님을 볼 수 있으며, 교화의 장엄까지 모두 다 진견(盡見)한다.
여덟째는 일체중생차별신(一切衆生差別身)삼매이다. 이 보살은 사람 몸으로 들어가서 야차(夜叉)의 몸으로 일어나고, 야차의 몸으로 들어가서 용의 몸으로 일어나고, 나아가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부처의 몸으로 일어나고, 찰나에 들어가서 3세로 일어난다.
아홉째는 법계자재(法界自在)삼매이다. 이 보살은 자기 몸의 하나하나의 털구멍 속에서 이 삼매에 들어감으로써 자연히 모든 세간과 모든 세간법을 능히 알아 불사(佛事)를 지으니, 법계의 자재로움을 얻기 때문이다.
열째는 무애륜(無碍輪)삼매이다. 이 보살은 무애한 몸·말·뜻의 업에 머물고, 무애의 불국토에 머문다. 무애의 중생을 성취하는 지혜를 얻고 무애의 청정한 법륜(法輪)을 굴려서 부처가 지은 바를 지어 모든 부처의 종자를 잇는다.”[애자함(愛字函) 40권에서 육자함(育字函) 43권까지]
어째서 보현을 찾으면서도 몸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진실로 보안(普眼)을 말미암지만 그 지위는 차이가 있네.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안(普眼)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보현(普賢) 보살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현은 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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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보안 보살이 찾아보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현은 지금 이 대중의 회상에 나타나서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니,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 이와 같이 보현을 보게 되거나 이름을 듣게 되거나 사유하거나 억념(憶念)한다면, 모두 다 이익을 얻으리라.'
이 때 보안과 보살 대중들이 간절히 세 번 청하자 보현이 즉시 응신(應身)해서 보살 대중들로 하여금 모두 보게 했다. 보현이 여래 근처에 앉자, 대중들이 모두 환희하면서 머리 숙여 절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애자함(愛字函) 제10권]
장자가 논하였다.
“어째서 보안은 보현을 보지 못했는가? 보안 등 10지 보살이 모두 세간의 지혜와 자비보다 출중하지만 보현은 11지의 행문(行門)으로서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출세간의 마음이 없다. 적(寂)의 작용이 자재하여 출세간의 삼매로써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현을 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대중의 회상에 나타나서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니,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총(總)·별(別), 동(同)·이(異)의 보광명지(普光明智)와 시방 부처의 대용(大用)과 체동(體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니, 이를 대중의 회상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차별지(差別智)가 근본지(根本智)의 체(體)에서 옮기지 않는 것이니, 이를 '내가 머무는 곳 가까이 있으면서 처음부터 옮긴 적이 없다'고 한 것이다. '보안이 간절히 세 번 청하자, 보현이 감응해서 몸을 나타냈다'는 것은 지체(智體)가 머무는 바가 없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만약 상념이 있으면 즉각 응신을 나타내니,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가 다만 사물에 응한 소리일 뿐 그 처소를 구하고자 한다면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합론(合論)』 67권]
오히려 미혹된 모습의 수(數)가 두 가지 어리석음이니
무명(無明)의 1푼(分) 장애를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다.
장자가 논하였다.
[611 / 873] 쪽
“1불상(佛相)의 수호(隨好)가 다함이 없는 것과 2승기 수량의 광대함은 부처님께서 곧 스스로 보살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바라고 설하시니, 이른바 두 가지 어리석음이다.”[76권]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등각(等覺)은 아직 1푼(分)의 무명(無明)을 다하지 못했으니, 마치 미미한 연기와 같고, 혹은 격라곡(隔羅)과 같다고 말한다.”[22권]
이전에 비록 미미한 장애가 여전히 가로막더라도
이것은 금강으로 타파해서 없앨 수 있다.
『장엄론(莊嚴論)』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지위를 닦은 지 2승기이면
최후로 직(職)을 받게 되니
저 금강정(金剛定)에 들어가면
모든 분별을 타파해서 다한다.
해석에서 말하였다.
“'지위를 닦은 지 2승기이면, 최후로 직(職)을 받게 된다'는 것에서 2승기는 이른바 제2, 제3 승기를 말하고, 최후는 이른바 구경(究竟)이니, 이 지위를 닦는 데서 바야흐로 직(職)을 얻게 된다.
[문] 직(職)을 받은 후에 다시 무엇을 짓는가?
[답] 저 금강정(金剛定)에 들어가서 모든 분별을 타파하여 다한다.
[문]어떤 뜻으로 인해 금강정이라 이름하는가?
[답] 분별의 수면(隨眠)을 이것이 타파할 수 있기 때문에 금강으로써 비유한다.”[사자함(事字函) 제7권]
보현은 어째서 부처라 이름붙이지 못하는가?
노파는 어찌하여 문득 마음을 쉬었는가?[마하살(摩訶薩)을 붙인다.]
[612 / 873] 쪽
『화엄경』에서 말하였다.
“보안이 보현에게 여쭈었다.
'이 마하살(摩訶薩)은 이 같은 법을 얻어서 모든 여래와 동등할 것인데, 어째서 부처라 이름붙이지 못하며, 10력(力)이라 이름붙이지 못하며, 일체지(一切智)라 이름붙이지 못합니까? 나아가 어째서 보현행을 닦는데도 여전히 휴식하지 못합니까?'
보현이 대답했다.
'이 마하살이 이미 능히 과거·미래·현재의 일체 보살들의 갖가지 행원(行願)을 닦아 익혀서 지혜의 경계에 들어갔다면 부처라 이름한다. 그러나 여래의 처소에서 보살행을 닦아 쉼 없이 설한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여래의 모든 능력에 이미 다 들어갔다면 이를 10력(力)이라 이름하지만, 비록 10력을 성취해서 보현행을 행하더라도 쉼 없이 설한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일체법을 알아서 능히 연설할 수 있으면 일체지라고 이름하지만, 비록 모든 법을 능히 연설할 수 있더라도 하나하나의 법에서 선교(善巧)의 사유로 지식(止息)하지 못했다면 이를 보살이라 이름한다. 나아가 이 같은 분별들을 모두 영원히 쉰다면 이를 휴식이라 하지만, 광대하게 닦아 익혀서 퇴보함 없이 원만하기를 바란다면 이를 보현의 원(願)을 쉬지 못했다고 한다.'”[육자함(育字函) 제3권]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어째서 마하살이라 이름하는가? 필정(必定)의 대중 가운데서도 상수(上首)가 되므로 마하살이라고 이름한다.
무엇을 필정(必定)의 대중이라고 하는가? 성지(性地)의 사람으로 여덟 명이니,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초발심 보살, 나아가 아비발치지(阿卑跋致地) 보살에 이르기까지를 필정(必定)의 대중이라 한다.
또 마하살은 진(秦)나라 말로 대(大)이다.”[입자함(立字函) 제5권]
“또 살타(薩)는 진(秦)나라 말로 중생인데, 이 중생이 위없는 도[無上道]를 위해서 발심하여 수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대심(大心)이라 하고, 보리를 구하지만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름하여 보리살타라 한다.”[형자함(形字函) 제3권][이곳에서는 간략히 보살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613 / 873] 쪽
일곱 부처의 스승이신 문수에게 머리 숙여 예배드리오니
우리 중생을 위해 도를 취하지 않으셨도다.[관음(觀音)과 세지(勢至)를 붙인다.]
『보초삼매경(普超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부처를 이룬 것은 모두 문수(文殊)의 은혜이다. 본래 나의 스승이었으며, 과거의 무앙수(無央數) 부처님들도 모두 그의 제자이며, 미래에 올 자도 역시 은혜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문수는 바로 불도(佛道) 가운데의 부모이다.'
이 때 대중들이 생각했다.
'문수는 이미 부처님 앞까지 갔는데, 어째서 성불하지 못했을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는 훌륭한 방편[權]에 깊이 들어가서 중생을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아직 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유자함(惟字函) 제4권]
『보적경』에서 말하였다.
“문수는 내가 성불할 때는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부처 세계를 하나의 불찰(佛刹)로 삼아서 그 이름을 보견(普見)이라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모든 보살들이 말했다.
'문수가 얻은 불찰과 미타(彌)의 불찰이 동등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터럭 하나를 백분의 1로 쪼개는 것과 같다. 큰 바다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을 취하는 것은 미타 불찰의 장엄을 비유한 것이며, 큰 바다의 물은 보견 불찰의 장엄이 이를 능가함을 비유한 것이다.'”[관자함(官字函) 제10권]
『보살수기경(菩薩受記經)』에서 말하였다.
“덕장(德臧)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관세음(觀世音)과 득대세(得大勢) 두 분 대사(大士)는 어느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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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미타부처님의 정법(正法)이 멸한 뒤에 관세음이 등정각을 이루었는데, 그 명호를 보광공덕산왕여래(普光功德山王如來)라고 하고, 그 불국토의 명호를 중보선집장엄(衆寶善集莊嚴)이라고 한다. 반열반(般涅槃) 뒤에는 득대세가 곧 그 국토에서 등정각을 이루었는데, 그 명호를 선주공덕보왕여래(善住功德寶王如來)라고 하였다.'”[개자함(改字函) 제1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