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고려시대의 새로운 지배 세력-> 지방 호족+ 6두품
6두품의 성장: 성종의 숭유정책(유교를 숭상하는 정책)
성종이후 지배 세력이 점차 고정되고 정착되어 감. 자손들도 대를 이어 고위 관리가 됨.
->자기들끼리 결혼하여 문벌을 형성. 과거나 음서를 통하여 관리가 됨.
★음서제도: 5품 이상의 관리는 그 아들 중 하나를 시험을 치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특권을 줌. --> 고려를 "문벌 귀족 사회"라고 하는 이유가 됨.
☞어느 국가든, 국가가 성립되고 100여년이 지나기 전에 그 국가의 '지배층'이 형성되고, 이러한 계층은 자자손손 고정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려 시대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어느 정도 "능력에 따라"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농민도 원칙적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등) 개방적인 사회 성격을 보여주고 있으나, 곧 귀족-평민, 혹은 양반-평민 의 뚜렷한 신분 구조를 가진 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나중에는 평민들에게 교육의 기회도 주지 않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조차 현실적으로 갖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예를 들면, 서얼 차별)를 마련하기 때문이고, 결국 이러한 신분제도의 고정이 국가적 모순을 초래하여 지배층의 특권 확대가 국가의 뼈대(농민층의 몰락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되는 등)를 흔들게 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2]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
▷12C 문종, 인종대에 이르며 점차 모순을 드러냄.
①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 정치 권력 장악
②관직에 따른 과전 + 공음전 + 사전(賜田:왕이 토지를 내려주는 것)+ 권력을 이용해 불법 적으로 토지를 겸병(겸병: 마음대로 남의 토지를 자기 토지에 합쳐버리는 것)
=> 결과적으로 정치 권력과 경제적 특권의 독점. --> 전통적 문벌 귀족과 지방 출신 신진관료 사이의 대립 초래 -->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발생.
[3] 이자겸의 난
▷12C 대표적인 문벌 귀족: 경원이씨-> 왕실의 외척으로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키움.
▷이자겸: 인종의 외조부로서,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을 가짐. 척준경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인종을 독살하려 함(1126년)'이자겸의 난' 진압-> 인종이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하여 척준경을 이용하여 이자겸을 제거 하고, 후에 정지상의 탄핵으로 척준경도 제거.
★'이자겸의 난'의 의미: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표출된 사건. 문벌 귀족사회 붕괴의 시작.
[4]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1)배경: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가 실추되고 궁궐이 불타버려 민심이 동요되자 지덕이 쇠한 개경대신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남 (결국 풍수지리설이 바탕이 된 것)
2)전개: 묘청, 정지상 등 서경세력이 서경 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칭제 건원(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 사용), 금국 정벌 등을 주장.
<-> 김부식 등의 개경파는 정권의 유지를 위해 이를 반대.
결국, 묘청 등이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연호를 '천개'라 하며 난을 일으킴 (1135년) ->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
3)의미: 김부식의 개경파와 묘청의 서경파의 대립
개경 보수적 정치 세력 (전통 문벌 귀족)과 신진 서경 지역 세력간의 대립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한 자주적 전통 사상의 대립
경주 중심의 신라 계승 이념과 서경 중심의 고구려 계승 이념의 대립
4)영향: 귀족 사회의 폐단과 모순을 드러냄. 김부식등 보수 세력의 승리로 인해 보수적 문벌귀족이 세력을 더욱 강화하여 문신위주의 문벌 귀족 체제를 굳혀 나감으로써 무신정변의 배경이 됨. (서경 무신 세력의 약화로 무신을 더욱 무시하는 풍조가 나타남)
☞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 대한 평가: 한말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주장이 자주적 사상의 표출이라고 생각하여 " 한국사 1천년 이래 제 1대 사건"이라 하여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동아시아 최대 강국인 금국을 정말로 정벌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묘청의 주장
은 당시 국제 정세를 감안할 때 비현실적이었고, 김부식도 단순히 금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취한 비겁자로 취급하기보다는 당시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던 "현실주의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부식이 '김씨' 성을 가진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서 신라 중심의 사고를 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그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사도 신라사와 거의 비슷한 분량을 쓰고 있고,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을 받아서 쓴 정사 이고, 김부식 혼자서 쓴 책도 아니며, 중국에서 왕실의 역사에만 쓰는 '본기'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자주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공통점: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표출된 것. & 무신의 난으로 연결되었다는 점.
(3) 무신정권 시대
[1] 무신 정변
1) 배경
① 숭문 천무 (학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함=다시 말해,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했다는 뜻) 정책으로 인한 문․무반 차별 대우와 그로 인한 두 세력의 대립
② 군인들은 잦은 전투와 노역에 시달린데다가 군인전(군인들에게 지급되는 토지)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생활고에 시달림
③ 의종의 실정(失政: 정치를 제대로 못함)과 문신들의 무신 멸시 (김부식의 아들이 정중부의 수염을 잡아당김..)
2) 전개
의종의 보현원 놀이에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1170) ->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보내고 명종을 새로 보위에 앉힘.
3) 결과 : 무신들이 중방을 중심으로 무단적 정치를 함
*무단정치란? 아무런 법이나 규율이 없이 제멋대로 하는 정치
무신들이 관직 독점, 토지와 노비
를 마음대로 늘리고, 저마다 사병을 길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임. (정중부(중방)-> 경대승(도방)->이의민(중방)->최충헌(도방))
4)의미: 문벌 귀족 사회의 종말 ->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무신"등장
[2] 사회의 동요
1) 의종 복위를 위한 각지의 반란 (=반 무신의 난: 무신의 난을 반대하는 난)
ex)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의 난, 서경 유수 조위총의 난. & 교종계통의 승려들의 난
☞ '서경'과 교종 계통의 사원이 왕실의 보호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경과 교종 계통의 사원은 왕건이 국초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왕실의 위기를 위해 길러둔 세력이다.
2) 농민 반란
▷천민 반란: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개경에서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의 난 -> 천민 반란은 "신분 해방"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 만적이 난을 일으키며 했던 유명한 한마디!->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느냐?" (왕, 제후, 장군, 재상이 되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 이때부터 천민 세력을 달래주기 위해 향, 소 , 부곡등의 천민 행정구역을 없애주기 시작함.
▷농민 반란: 김사미의 난, 효심의 난
[3] 최씨 정권 시대
▷최충헌: 서로 죽고, 죽이는 무신정권을 안정시킨 사람. 4대 60년의 최씨 정권 수립의 기반 마련.
▷최고 기관: 교정도감 ( 최충헌과 그의 후손들은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장악함)
▷무력 기반: 도방(신변 경호 기관), 삼별초 (원래 '야별초'라 하여 수도 방위를 위한 군대였으나, 최충헌이 자신의 사병화시킴)
▷최우: 독자적 인사 행정 기구인 '정방'을 자택에 설치하여 문․무관의 인사권 장악
문인들의 숙위 기관인 '서방'을 설치, 전문적 지식인들에게 고문 역할을 담당시킴.
▷서방: 지식인들을 최우 자신의 집에 일정기간 먹고, 자게 하며 국정에 대해 모르는 것을 물어보기 위한 기구. 서방은 무신 정권 시대에 문신들을 등용하던 유일한 기구였다. 후일 조선의 건국 세력이 되는 신진 사대부 계층이 최초로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기구.
▷경제적 기반: 진주 지방 식읍
*식읍이란? 공적이 뚜렷한 장군이나 귀족에게 주던 토지
☆ 고려에 침입한 이민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