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같은 동양문화권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첨(添)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도루(取)한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이 먹는다고 한다. 이 지구상에는 3000종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하지만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하는 민족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묻는 환자에게 "나이만 먹지 말고 다 먹어라"고 했다는 어느 의사의 이야기는 한국인만이 웃을 수 있는 우스갯소리다.
시간을 상징하는 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버린다. 하지만 한국인은 매년 설이 되면 자식까지 삼켜버린다는 그 무시무시한 크로노스를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마음도 먹는다고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한국인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돈도 떼어먹고 욕도 얻어먹고 때로는 챔피언도 먹는다. 전 세계가 한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 축구경기에서도 우리 '붉은 악마'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모든 층위에서 먹는다는 말은 유효하다. 심리적으로는 겁을 먹고 애를 먹는다. 소통 행위에서는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고 하고 경제 면에서는 경비를 먹거나 먹혔다고 한다. 심지어 성애의 차원에서는 따먹었다는 말까지 등장한다.
어찌 그것이 자랑일 수 있겠는가. 먹는다는 말이 이처럼 다원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네그로폰테처럼 "빙 디지털!" "이제는 디지털이다"라고 외치는 젊은이들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분명히 먹는 걱정을 하던 시대는 갔다. 지금은 대통령도 인터넷 댓글로 정치를 하는 희한한 정보시대가 아닌가.
오늘 아침에도 누리꾼들은 밥상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새해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MP3의 디지털 음악으로 해피 뉴 이어의 노래를 듣고 신데렐라 마차 같은 팬시한 연하장을 e-메일로 받았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화상 채팅으로 얼굴을 맞대고 실시간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가상현실(VR)의 삼차원 공간에서는 센서 글러브를 끼고 보조장치만 갖추면 실제 현실 그대로 보고 듣고 만지기도 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냄새까지 맡는 향기통신의 웹 사이트도 생겼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설날의 떡국 맛이다. 모든 감각을 모두 디지털화해 보낼 수 있지만 컴퓨터가 천 번 만 번 까무러쳐도 안 되는 것이 미각의 씹는 맛이다.
그러기에 애플 컴퓨터의 로고는 입으로 반쯤 저며 먹은 모양을 하고 있고 실리콘 밸리의 마돈나 킴 폴리제는 인터넷 쌍방향 프로그램을 개발하면서 그 이름을 커피 브랜드인 '자바'에서 따다 붙였다. PC방을 인터넷 카페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두가 먹을 수 없는 디지털 미디어에 미각 이미지를 보완하려는 고육지책의 산물이다.
정보사회에서 '미각'은 디지털화할 수 없는 최후의 아날로그적 감각과 그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생물적이나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아왔던 식 문제를 컴퓨터가 할 수 없는 정보 미디어로서 평가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먹는 음식을 예부터 의식동원(醫食同源)으로 생각해 왔던 한국인에게는 선식(仙食)의 경우처럼 신선(神仙)의 종교적 의미까지 지니게 된다. '겨울 연가'의 영상미로 물꼬를 튼 한류에 '대장금'의 음식문화가 결정타를 '먹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의식동원의 전통이 한류 문화를 타고 문식동원(文食同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먹는 것이 문화라는 것은 사과를 놓고 보면 안다. 근대 민주주의는 윌리엄 텔의 사과에서 나왔다고 하고, 근대의 과학은 뉴턴의 사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리고 트로이의 전쟁을 일으킨 아프로디테의 사과가 전쟁사의 시작이라면 스티브 잡스의 애플 컴퓨터의 사과는 PC 역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먹는 미각의 사과는 아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만으로는 사과와 나의 거리를 메울 수 없다. 오직 그것을 입에 넣고 씹는 순간에만 사과는 비로소 미각을 통해 통째로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와 사과는 한 몸이 된다. 미각의 힘, 씹는 그 힘은 밖에 존재하는 타자를 나와 하나가 되게 하는 유일한 융합의 힘이다. 동시에 그 대상을 파괴해야만 먹을 수 있는 공격성과 비극성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 먹은 순간에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인간의 외로운 역사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최후의 만찬은 먹는다는 것이 단순한 배부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수많은 말씀과 이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어째서 마지막 메시지를 '먹는 것'으로 끝마무리했는가. 왜 그 흔한 한 조각의 빵을 자신의 육체라 하고 그 값싼 한 방울의 포도주를 자신의 피라고 했는가. 십자가는 혼자 지고 가도 식사만은 홀로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고 듣고 냄새 맡던 그 메시지(정보)를 어금니로 깨물어 삼키는 법을 깨닫게 된다. 빵이 되고 술이 된 예수는 단절됐던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미디어로서 존재한다.
먹는 것의 일체감, 그리고 그 융합의 원리는 오늘날 '회사'를 의미하는 컴퍼니(company)란 말에서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컴'은 '함께'(共), '퍼니'는 '빵'이라는 뜻이다. 어원대로 하자면 컴퍼니는 일터이기에 앞서 함께 빵을 먹는 식탁이다. 운동권에서 잘 쓰는 캠페인이란 말과 혁명가들이 애용하는 컴패니언(동지)이란 말 모두는 같은 뜻을 지닌 파생어다. 그렇다. 우리는 벌써 그런 공동체 의식을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말로 절묘하게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식(食)문화의 공동체가 사이버 문화의 디지털 공동체로 급속히 변해가는 것이 오늘의 정보사회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날로그 인간형과 디지털 인간형으로 분리되고, 그 생활은 비트와 아톰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양극화해 간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 이미 시인 T S 엘리엇은 정보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노래 불렀다.
"생활(living)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삶(life)은 어디에 있는가. 지혜(wisdom)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생활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knowledge)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informaiton)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시 '바위'에 의하면 인간의 문명은 생명의 삶으로부터 끝없는 상실의 단계를 거쳐 오늘의 정보시대로 추락해 온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당연히 오늘의 디지털 세대들은 정보 속에서 생생한 삶과 지혜, 그리고 지식을 씹을 수 있는 어금니를 잃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유가 아니라 디지털 세대들은 실제로 씹는 습관을 잃어가고 있다. 2000년 전 인간의 식사시간은 51분이고 씹는 횟수는 3990회로 추정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 초등학교 급식 조사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씹는 횟수는 700~500회로 7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음식만이 아니다. 정보시대의 아이들은 클릭 하나로 삶의 문제들을 씹지 않고 삼켜버린다.
디지털 혁명의 장밋빛이 조금씩 먹구름과 거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금 양극화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틈새에 다리를 놓아주는 누군가의 힘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새해가 되면 떡국과 함께 나이(시간)도 마음도 새로 먹는다는 한국인들이야말로 디지털의 공허한 가상현실을 갈비처럼 뜯어먹을 수 있는 어금니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이버의 디지털 공동체와 식문화의 아날로그 공동체를 이어주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파워가 2006년 희망의 키워드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디지로그의 뉴 파워가 무엇인지 성급하게 묻지 말고 이번만은 차분히 함께 검증해 보지 않겠는가. 줄기세포처럼 정말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런 원천기술을 보유하고나 있는 것인지 더 이상 기대가 실망이 되고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도록 그야말로 큰 마음 먹고 시작해야 한다.
|
[디지로그시대가온다] 2. 시루떡 돌리기 정 담은 정보 원리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한국인들은 시루떡을 돌리는 방법으로 온 동네에 정보를 알렸다. 디지털 정보는 컴퓨터 칩을 타고 오지만 시루떡 아날로그 정보는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을 타고 온다. 그래서 그것은 화려한 106화음이나 음침한 진동음으로 울리는 휴대전화 소리와는 다른 정취가 있다. 먼 데서 짖던 동네 개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사립문 여는 소리로 바뀌면 시루떡에 실려 온 정보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으레 "이게 웬 떡이냐" 고 외친다. 시루떡 정보 발신은 언제나 이렇게 놀라움과 궁금증을 동반한다. 떡 자체가 벌써 밥의 일상성에서 벗어난 음식이기 때문이다. 돌떡이든 고사떡이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일탈성과 의외성은 정보의 전달력과 호소력을 몇 배나 더 강력하게 한다.
"웬 떡이냐"라는 말은 의문형 감탄사다. 당연히 "돌떡이다" "고사떡이다"라는 대답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서 돌떡을 먹는 사람은 "아니 그 녀석이 벌써 그렇게 컸어!"라고 말하고 고사떡을 먹을 때에는 "누가 편찮으신가"라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이렇게 시루떡 정보는 독자적으로 증식되고 증폭되어 교감의 밀도와 참여도를 높여준다.
또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을 수 있는 시루떡 정보는 디지털 미디어로는 불가능한 촉각과 미각을 이용한 것이다. 먹는 미각소(味覺素)와 말하는 정보소(情報素)가 하나로 결합된 떡 돌림의 둘째 단추는 정보의 참여성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의식이며 셋째 단추는 시청각 중심의 현대 미디어가 할 수 없는 후각.촉각.미각을 통합한 어금니 미디어라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터넷처럼 분산형으로 되어 있다. 동네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방법이 아니라 한 집 한 집 떡을 돌려 각자가 제자리에서 정보를 수용하게 한다. 그리고 돌떡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빈 그릇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으니 정보의 쌍방향성까지 겸하고 있다. 분산성과 상호 의존성이 시루떡 정보의 넷째 단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情)이라는 정보 원리다. 정보란 말 속에는 이미 정이란 말이 들어 있다. 맥루한의 핫 미디어와 쿨 미디어는 또 다른 개념으로서 모든 정보에는 온도가 있다. 가령 같은 정보라도 동네방네 우리 애가 돌이 되었다고 떠들고 다니면 오히려 빈축을 산다.
하지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맛있는 시루떡에 정의 온도를 실어 보내면 동네 전체로 퍼진다. 그것이 정보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지막 단추 '정의 원리'다.
썰렁하고 살벌한 인터넷 게시판의 댓글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종이에 쓴 편지 글과 액정 모니터에 찍힌 e-메일은 커다란 온도 차를 보인다. 음악도 그래픽도 디지털 정보는 차갑다는 데 그 장벽이 있다. 개 짖는 소리도 잠잠해지면 시루떡에 실려 온 작고 반짝이는 정보들은 초가지붕에 내리는 눈처럼 온 동네를 하얗게 덮는다.
이 아날로그 공동체의 행복했던 기억을 어떻게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미디어의 액정판에 싣느냐 하는 것이 디지로그 시대의 중요 과제다. 시루떡 돌리기의 다섯째 단추! 그것을 오늘의 정보 미디어에 담는 전략에 성공하면 정치.경제.사회와 그 공동체 문화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3. 젓가락 기술의 바탕은 RT
문자 그대로 읽으면 정(情)을 알리는 것이 정보(情報)다. 하지만 영어의 인포메이션이나 중국어의 신식(信息)에는 정이라는 뜻이 없다. 정보기술(IT) 역시 정과는 먼 전쟁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컴퓨터 애니악은 탄도(彈道) 계산을 하려고 미군 발주로 만든 것이고, 초기의 인터넷 아파넷(Arpanet)은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컴퓨터 시스템을 분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한 미국의 군사용 네트워크였다.
'정보'란 말도 실은 적정보고(敵情報告)를 줄인 말이다. 개화기의 일본인들이 프랑스의 보병훈련교본을 번역할 때 만든 말로 젓가락 기술의 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또 그 젓가락 기술이냐고 진저리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은 젓가락 기술을 콩을 집어 먹는 손재주로 안 것부터가 잘못된 생각이다. 젓가락이 IT.BT(생명공학)시대에서 평가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서 생긴 정(情)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백 가지 천 가지 이유에 앞서 젓가락은 모든 음식을 한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리를 만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비프스테이크처럼 덩어리째 음식을 놓았다면 우린들 별수 있었겠는가. 양식의 경우처럼 부엌에 있는 도마와 식칼이 각자의 테이블 위로 나앉아야 할 것이다. 한입에 들어가도록 음식물을 잘게 저며 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정이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은 기계나 물질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느끼고 헤아리는 '관계기술'(Relation Technology)을 낳는다.
"한국인은 한 손으로 먹고 양인(洋人)은 양손으로 먹는다"는 농담이 있듯이 서양 사람들은 포크.나이프로 식사를 한다. 음식을 만든 사람과 먹는 사람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창이요, 칼이다. 실제로 9.11테러 사건 이후 포크.나이프는 항공여객의 휴대품 금지목록에 올랐다. 하지만 술좌석의 젓가락 장단에서 보듯이 젓가락은 신나는 악기가 된다.
활에서 하프가 생겨난 것처럼 나폴레옹이 현상금까지 내걸고 개발한 통조림은 오늘날 수퍼마켓의 일상 식품이 되었고, 군사용으로 닦은 길은 자동차 경주용 트랙으로 변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사람을 즐겁게 하는 악기로 반전시키는 것. 그것이 기술문명의 방향이요, 희망이다. 빌 게이츠가 나폴레옹과 닮은꼴이라는 BBC방송의 분석처럼 전쟁기술이 낳은 IT는 아직도 비정하고 공격적인 피비린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정(無情)을 유정(有情)으로, IT(정보기술)를 RT(관계기술)로, 디지털을 디지로그로 문명의 그 큰 흐름을 바꿔놓는 새 물결이 지금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4. 인터넷 속 세 왕자와의 동거
디지로그 시대의 새 물결이라고 하면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제4의 물결쯤으로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물처럼 연속적으로 흐르는 문명을 제1이니 제2니 하는 순서로 분절하는 방법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인 디지털적 발상이다. 앞으로 우리가 맞게 될 디지로그 시대란 스핑크스의 난문(難問)보다도 어려운 문제를 풀 때만이 도달할 수 있다. 그 수수께끼는 먼 나라의 공주에게 청혼하러 가던 세 왕자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 보물 자랑을 하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중 왕자 한명이 천리안의 거울을 보여주다가 독사에게 물려 죽어가는 공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천리마를 자랑하던 왕자는 천리 밖 공주의 성으로 단숨에 달려가게 되고 불사약을 비장했던 왕자는 그 약초를 먹여 극적으로 공주를 살려낸다.
문제는 이 공주가 누구와 결혼을 해야 되느냐 하는 수수께끼다. 정보 마인드를 지닌 네티즌들은 당연히 천리안의 왕자를 내세울 것이고 폭주족처럼 질주하는 산업주의자들은 천리마의 왕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 웰빙족들은 농자천하지대본의 정신으로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 편을 들 것이다. 하지만 세 보물의 수퍼 파워는 서로 연동해 작용했기 때문에 어느 왕자 하나만을 골라서는 절대로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 어차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강박관념 밑에서 살아온 서양 쪽에서는 해답을 구하기 힘들므로 동양 쪽 고전을 찾아보면 어떨까. 뜻밖에도 '천평어람(天平御覽)'의 고사에서 충격적인 해답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제(齊)나라에 사는 한 처녀가 두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게 되었는데 동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돈은 많으나 얼굴이 밉고, 서쪽 마을에 사는 청혼자는 얼굴은 잘났지만 가난해 먹을 것이 없다고 했다. 이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부모의 말에 그 소저는 선뜻 두 곳으로 다 가겠다고 대답을 한다. 밥은 부잣집 동쪽 남자에게로 가서 먹고, 잠은 잘생긴 서쪽 남자와 자면 된다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황당했으면 뒤에 떠돌이를 뜻하는 말로 와전돼 내려왔겠는가. 이 동서 병합의 모순논리를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해 보면 틀림없이 에러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동가식서가숙'의 모순논리는 인터넷 사이버 세상에선 보통 일어나는 일이고 오프라인의 현실에서도 곧잘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아니다. 그것은 제3의 물결 다음에 오는 현대문명의 출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아날로그적인 것은 악이고 구식이고, 디지털적인 것은 선이고 첨단이라는 양자택일의 틀이 무너지고 있다. 비트와 아톰, 클릭 산업과 브릭(brick) 산업, 온라인과 오프라인, 가상현실과 실현실, 정보네트워크와 물류, 이 모든 대립은 깨끗하게 금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혼류(混流)하고 융합되고 충돌하면서 병존해간다. 이종 결합의 하이브리드나 원 소스 멀티 유스와 같은 말이 그 단편적인 징후를 보여준다.
해답과 선택은 오직 하나라는 종래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비로소 공주는 세 왕자와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불사의 약초가 지닌 생명력, 천리마의 산업적 동력, 그리고 천리안의 정보의 힘은 프랑스의 3색기와 같은 평행선이 아니라 서울 올림픽 로고였던 3태극마크처럼 둥글게 둥글게 얽혀서 돌아가야 한다. 시루떡 정보가 '탠지블 미디어'로 부상하고 젓가락 정신과 기술이 관계기술(RT)의 원천으로 각광받는 세상이다.
어려운 이야기 할 것 없다. 이 지구상에서 농경-산업-정보 세 문명의 왕자를 동시에 데리고 사는 유일한 공주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한국인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엊그제까지 나물 캐던 채집시대에서 초고속 정보시대의 선두에 서 있는 나라, 망신스럽기도 하고 한없이 자랑스럽기도 한 이상한 나라, 붉은 악마가 외치던 대~한민국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5. 청룡열차를 탄 한국인들
외국의 어느 비평가는 한국의 정치를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우리가 청룡열차라고 부르는 유원지의 그 오락용 활주차와 같다는 것이다. 맹렬한 스피드로 곡예를 하듯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다가 정상에 이르면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것이 청룡열차의 원리다. 그 비평가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하나하나의 예를 들어가면서 그들 모두가 청룡열차와 같은 이미지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올라갈 때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내려올 때의 초라한 모습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라고 놀라워하기도 한다. 청룡열차의 정치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서 90% 가까운 지지율의 정상으로부터 20%대로 급락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도 거론하고 있다.
기분 나쁜 비평이지만 할 말이 없다. 정치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경제.사회,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분명 청룡열차와 다름이 없다. 벤처기업도 아닌 글로벌 대기업의 총수가 박수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죄인의 얼굴로 돌변하는 것은 다반사이다. 난치병 환자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던 줄기세포의 영웅도 순식간에 정상에서 나락으로 추락하는 세상이 아닌가.
아시아의 용이라고 칭찬받던 한국의 나라 전체가 금융 환란으로 청룡열차처럼 급하강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죽했으면 한국인들은 IMF를 "아이고, 미치고 환장하겠다"고 불렀겠는가.
그러나 그 비평가에게 우리는 물어봐야 할 말이 있다. "그래 당신의 말이 맞는다고 하자. 하지만 당신 말대로 최고 권력자들이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 여섯 번씩이나 추락했는데도 아직도 한국이 멀쩡하게 살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어째서 당신네보다도 청룡열차를 타고 지내는 한국인이 더 낫게 살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래도 모르겠으면 권력의 정상에서 반세기 넘게 내려앉은 적이 없는 김 부자의 세습 정권밑에서 살고 있는 북한보다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국민들이 더 기 펴고 편안하게 잘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본 적이 있는가.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남들 같으면 한 번의 추락으로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갔을 터인데 청룡열차를 타고 있던 사람들이나 밖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사람들이나 그 얼굴에 아직 절망의 빛이 없으니 이게 웬 까닭인가.
그래 정말 좋은 비유다. 청룡열차의 구조를 모르면 한국인도 모른다. 인간이 타는 승용물 가운데 롤러코스터만큼 불가사의한 것도 없다. 일본에서는 그것을 제트 코스타라고 부르지만 그 차체 안에는 제트는 물론 어떤 동력장치도 달려있지 않다. 핸들도 없고 엄격하게 말해 브레이크 장치도 없다. 순전히 위치 에너지를 동력 에너지로 바꾸어 원심력과 구심력의 밸런스를 통해 애크로배틱하게 움직이고 스피드를 낸다.
그렇다. 한국 정치가 그냥 직선 궤도를 달리는 보통 열차였다면 단 한 번의 충돌과 추락으로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정말 기적 같은 균형감각과 활강의 순발력으로 천 번 만 번 추락해도 새로운 청룡 하나가 내일 다시 그 떨어진 바닥으로부터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 좌로 쏠리고 우로 부딪쳐도 불안과 공포의 절규는 들려와도 당신네 마음같이 한쪽으로 쏠려 풍비박산하는 법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보수 청룡이라고 부르든 386 청룡이라고 하든 우리가 그 위기와 추락의 격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훌륭한 정치가나 영민한 경제학자와 과학자가 있어서가 아니다. 한 번도 정상에 올라 본 적 없는 평범한 한국인의 피 속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놀라운 균형감각과 그 순환 의식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의 균형 인자! 두고 보라, 그것이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두 세계를 극적으로 통합해 이끌어가게 될 한국인의 디지로그 파워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6. 자전거의 균형이 비행기 '원천기술'
사람은 절대로 자기 몸무게보다 무거운 엔진을 달고 하늘을 날 수 없다고 미국의 뉴컴 교수가 선언한 것은 1900년의 일이다. 우주물리학의 권위자 스미스소니언연구소의 총재 랑그레가 정부의 지원 아래 제작한 그레이트 에어드롬기가 포토맥 강물 속으로 추락해버린 것은 1903년 12월 10일의 일이다.
그러나 바로 7일 뒤 오하이오주 디튼에 사는 자전거 제조업자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고 말았다. 키티호크의 모래사장에서 프라이어 호는 12초 동안 17m를 분명히 활공 아닌 비행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은 최고의 수리학이나 우주물리학으로도 못 해낸 것을 무명의 시골 자전거 점포의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누구나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느끼는 것은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자전거의 기본기술이라는 점이다. 자전거가 두 바퀴로 굴러가려면 그 밸런스를 컨트롤할 수 있는 핸들과 페달 장치가 있어야 한다. 네 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와는 다른 점이다. 그런데 비행기 발명가들은 자동차에 날개를 달면 비행기가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자전거 제조업자인 라이트 형제만이 비행기를 자동차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자전거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스필버그의 영화 'E.T.'에서 아이들이 보름달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몸체도 작고 자전거와 같은 핸들과 페달이 달린 프라이어 호를 만들어 이륙과 비행 시의 좌우 균형을 잡아주는 데 성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라이트 형제는 지상 실험을 할 때에도 자전거로 시뮬레이션 장치를 만들어 각종 데이터를 얻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라이트 형제의 이름과 연대를 외우는 교육만 받아 왔던 우리는 최첨단에 속하는 비행기의 발명이 약 150년 전 자전거의 로테크(low-tech)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사실을 모르고 지내온 셈이다. 디지로그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가르쳐야 할 것은 모든 사물이나 생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전거 타기와 같은 균형 컨트롤 기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라이트 형제의 프라이어 호가 랑그레의 에어드롬기를 이긴 그 충격적인 의미를 밝혀주는 일이다. 랑그레는 정부의 요청에 따라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지만(당시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한 미 육군은 비행기와 같은 신무기가 필요했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의 꿈을 위해 그것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조인(鳥人) 릴리엔탈이 비행 실험을 하다 추락사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그들은 비행연구에 열을 올렸다. 또한 랑그레가 비행 실험을 남에게 맡긴 데 반해 라이트 형제는 목숨을 걸고 직접 자신들이 시험 비행에 나섰던 것도 다른 점이다. 무엇보다도 라이트 형제가 랑그레를 이겼다는 것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가족의 작은 조직이 워싱턴 정부의 그 거대한 관료조직을 이겼다는 것이며, 대당 180달러로 판 자전거의 이익금에서 떼낸 개발비용이 국가의 그 거액 투자액을 눌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트가 몸으로 익힌 노하우가 뉴컴 교수나 스미스소니언연구소의 탁상 지식을 앞섰다는 점이다.
당대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뒤집으면 21세기의 시대적 특성은 그와 반대로 균형의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라이트 형제가 미래의 비행기에 자전거 핸들과 페달을 단 것처럼 우리는 현대의 디지털 기술에 주역의 중정(中正), 유교의 중용(中庸), 그리고 도교의 귀유(貴柔)와 같은 사상을 달아야 한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키워드인 사이버라는 말이 바로 뱃길의 밸런스를 컨트롤하는 그리스어의 키잡이[操舵手]란 말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7. 사이버 항해의 키워드 '좌우지간'
육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은 아무래도 감성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보다. 사이버의 비물질 공간을 두고도 사람들은 그것을 바다나 푸른 초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정보 검색을 하는 것을 서핑(파도타기)한다고 하고 원하는 웹페이지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것을 내비게이션(항해)이라고 한다. 이미 말한 대로 사이버(cyber)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어의 키잡이(keybernetes.操舵手)에서 나온 말이다.
아무 말에나 그 상투 끝에 올라앉아 우리를 겁주고 주눅들게 하던 사이버라는 접두어도 이렇게 키잡이라고 생각하면 바닷바람의 감성으로 가까워진다. 배를 그대로 놔두면 똑바로 가지 않고 좌우 어느 쪽으로 진로를 이탈한다. 조타수는 오른쪽으로 벗어난다 싶으면 배의 키를 왼쪽으로 움직여 원래의 가운데 위치로 돌아오게 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이번에는 배가 왼편 쪽으로 이탈해 간다. 키잡이는 다시 키를 오른쪽으로 돌려 원위치로 돌아오게 한다. 이렇게 좌우 양극을 향해 끝없이 요동치는 배를 감지해 수시로 그 방향을 똑바로 제어하고 그 움직임을 매끄럽게 하는 조타수의 예를 모델로 한 것이 다름 아닌 사이버란 말을 낳은 '사이버네틱스'의 이론이다. 위너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배가 요동치는 것을 옥시레이션이라고 하고, 배의 이탈을 수시로 평가해 키의 방향을 바꿔가는 것을 '피드백'이라고 한다. 그래서 배가 항상 똑바른 가운데의 방향을 유지하는 것을 평형성(equilibrium)이라고 부른다.
이 이상 사이버네틱스 이야기를 하다가는 욕이 나올 것 같다. 겨우 좀 사이버라는 말이 편해진다 싶었는데 그보다 더 생소한 사이버네틱스란 말이 튀어나오게 되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렇다면 서양 과학자들이 만든 말을 쓸 것 없이 옛날부터 우리가 남과 따지거나 다툴 때 곧잘 써오던 육두문자로 하자. 서로 의견이 좌우로 갈려 양극화로 치닫고 감정이 격화돼 '요동'을 칠 때 우리는 '좌우지간(左右之間)'에라고 뜸을 들이고 침을 가했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조타수들이 보여줬던 좌우지간이요, 사이버네틱스에서 말하는 '피드백'과 '평형' 이론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물론이고 크거나 작거나 생명이건 무생물이건, 자연물이든 기계든 이 세상 모든 것엔 조타수처럼 키를 움직여 평형을 유지하려는 '좌우지간'의 공통언어가 있다. 그것을 과학적인 수리로 밝혀보려고 한 것이 위너와 같은 사이버네티스트의 꿈이었다.
사이버 공간을 초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를 동작시키는 것을 장화를 신는다는 뜻으로 부팅이라고 하고 인터넷 세대들을 뉴 노마드(신 유목민)라고 부르는 것도 사이버 공간을 몽골의 초원쯤으로 생각하고 하는 소리다. 그래서 단지 뱃사공의 키를 양치기의 지팡이로 바꾸고 그 배를 초원의 양떼로 생각하면 좌우지간의 소리는 똑같다. 무리로부터 좌우로 이탈해 요동치는 양떼를 한가운데로 모아 똑바로 몰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또 바다도 초원도 아닌 사이버 도시라면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자전거를 타보면 된다. 세발자전거를 타던 아이들이 두발자전거로 바꿔타려고 할 때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는 앞바퀴의 핸들을 '좌우지간'으로 평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무릎을 깨뜨리게 될 것이다.
조타수처럼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고 양치기의 노마드처럼 정보의 초원을 횡단한다. 혹은 자전거를 타듯이 최초로 하늘을 난 라이트 형제처럼 정보의 아스팔트, 정보의 하늘을 비행하는 거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8. 소 잃은 외양간 SHELL로 고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와 문명은 거의 모두가 소 잃고 난 뒤에 고친 외양간들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는 같은 뜻의 속담을 두고 생각해보면 금세 납득이 갈 것이다. 페니실린은 플레밍 박사가 군의관으로 있을 때 수많은 병사가 총상의 염증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연구해 낸 대표적인 사후약방문이었다. 지금도 항생제란 날로 내성이 강해지는 균으로 계속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는 중이다.
수백, 수천 번 전복하고 충돌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다음에 만들어진 것이 자동차의 안전띠이고 에어백이다. 볼보는 아예 사고현장에 달려가 원인과 결함을 캐내어 외양간 고치는 일을 제도화한 회사로 유명해진 자동차 회사다.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란 것도 사기꾼이나 도둑에게 소 잃고, 강도에게 목숨을 잃고 난 뒤에 고친 외양간이며 처방한 약방문이다. 정보시대를 만든 IT 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이 칼럼을 통해 지적한 '시루떡 나누기'(2회), 정보 미디어 '젓가락질의 RT 문화'(3회), '좌우지간'의 자전거 타기(6회) 같은 문화들이야말로 정보시대에 잃은 우리의 힘센 황소 뿔이 아니겠는가. 새 외양간을 만들어 다시 황소의 생명력을 들이지 않으면 희망의 디지털은 조류 인플루엔자(AI)와 같은 변종 바이러스가 되고 행복의 인터넷은 암세포로 돌변할 수도 있다. IT의 고황(膏)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있으니 그런 걱정은 기우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꼭 나침반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폭풍까지도 막아주는 줄로 과신하고 항해하다가 목숨을 잃은 수부들 생각과 같은 소리다. 시뮬레이션 기술이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어떤 상황이나 시스템 동작을 그와 비슷한 모델로 대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의학용어로는 꾀병, 물건의 경우에는 모조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안전제일과 초 단위의 정확한 운행으로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JR이 어떻게 해서 지난해 4월 25일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아마가사키(尼崎) 열차 탈선사고와 같은 대형 참사를 일으켰는가. 가장 큰 사고원인으로 운전미숙을 든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자동 열차정지 장치(ATS) 같은 기술에 의존한 현장 감각, 체감 제로의 피부 감각 없는 기관사 양성이 그러한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다. 운전대를 꽉 잡고 죽은 나이 23세의 다카미(高見) 기관사는 쇠망치로 열차바퀴를 두드리고 다니던 옛날 노 철도원이 아니라 정보시대의 쌩쌩한 첨단을 달리는 노매딕 키드였던 것이다.
남의 나라의 열차사고 이야기가 아니다. 정보시대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징적 사고다. 혹시 지금 우리는 컴퓨터의 가상현실 속에서 운전을 배운 젊은이들이 모는 열차에 타고 있는 승객이 아닐까. 뒤창에 병아리 그림을 붙이고 운전하는 초보운전자들은 신중성도 있고 애교도 있다. 그러나 현장감각 체감 제로의 기관사가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한 채 과신 속에서 천방지축 달리다가는 궤도를 잃은 청룡열차(5회)처럼 추락할지도 모른다. 키를 잃은 배, 지팡이를 잃은 양치기처럼 좌우 균형을 잃고 표류할 때(6회) 우리는 다행히도 "SHELL"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JR 서일본의 아마가사키 열차탈선 때도 그랬다.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외양간을 고치기 위해, 그 약방문을 쓰기 위해 "SHELL"이라고 외친다. 우는 애를 멈추게 하는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곶감처럼 컴퓨터도 도망가는 '조개'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9. SHELL은 정보시대 약방문
SHELL은 조개도 석유회사 이름도 아니다. 소프트웨어의 S, 하드웨어의 H, 그리고 환경(environment)의 E와 인간을 의미하는 라이브웨어(Liveware)의 L자의 머리글자를 짜맞춰서 만든 항공관계의 휴먼팩터의 모델이다. 원래 버밍엄대 교수였던 앨빈 에드워즈가 만든 당시(1972)에는 라이브웨어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을 뒤에 프랭크 호킨스가 L 하나를 더 집어넣어 개선한 것이다. 본인 자신이 KLM의 기장 출신이어서 자신의 현장경험을 토대로 라이브웨어를 더 세분한 모델을 만든 것이다.
비행기를 보면 누구나 처음에는 그 기계에 정신이 쏠린다. 조종실에 들어가도 조종사는 보이지 않고 빡빡하게 들어찬 수백 개의 계기와 조종 스위치가 눈에 띈다. 그러나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러한 기계들을 움직이는 매뉴얼이나 항법지도와 같은 소프트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조종석에 조종사가 앉기 전에는 최신형 비행기도 달구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닌 말로 라이브웨어(조종사)가 파업을 하게 되면 비행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헌신짝이다.
그렇다고 조종사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다. 부조종사와 기관사가 있고, 객실에는 스튜어디스와 승객도 있다(그래 가끔 손님 중에는 하이재커나 테러리스트가 있다). 그리고 하늘만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정비사와 회사 임원들의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자연히 라이브웨어는 하늘과 땅의 두 영역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드, 소프트, 라이브의 세 웨어는 콕피트(cockpit)라 불리는 조종실의 공간과 기상과 기류 조건의 하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만약 그중 한 글자라도 이가 빠지거나 궁합이 안 맞으면 비행기는 그 자리에서 추락하고 말 것이다. SHELL이 HELL(지옥)이 되고 비행기는 고철로 SELL된다. 말장난을 할 때가 아니다. 실제로 1977년 3월 카나리아 군도의 활주로에서 네덜란드의 KLM과 팬암의 두 보잉-747기가 충돌해 583명이 죽었다. 항공사상 유례없는 이 대참사 이후 총제적 시점으로 비행기를 바라보는 SHELL 모델은 급속히 부상하게 된다.
사고의 원인은 농무(濃霧-E), 관제탑과의 교신 때 일어난 오해와 혼신(混信-노이즈 H-S)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기장과 기관사의 인간관계(L, L)라는 라이브웨어였다. 이륙하려던 기장에게 기관사는 아직 팬암기가 활주로에 있을지 모른다고 귀띔을 했다. 만약 기장이 기관사의 말을 존중해 그 말을 좀 더 귀담아 들었더라면, 혹은 그 기관사가 기장의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했었더라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 중시의 사회에서 라이브웨어(인간)의 중요성을 알리는 대목이다.
그래서 SHELL 모델은 비행사고의 규명이나 조종사와 정비사의 훈련에만 유효한 모델이 아니다. 열차, 선박 등 모든 승용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바퀴를 보면 돌리고 싶다는 시인의 말대로 승용물들은 인간의 욕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몸, 가족 그리고 회사와 나라 역시 하나의 배나 비행기로 생각한다. 인류 전체가 분당 약 27㎞의 스피드로 회전하는 지구호를 타고 하루를 운항한다. 왜 우리는 침몰한 지 100년이 넘는 타이타닉호에 그리도 집착하는가. 왜 아이들은 은하철도와 비행접시의 환상에 빠져 있는가.
항공의 SHELL 모델을 응용하면 정보사회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그리고 디지털 환경, 라이브웨어의 내.외 다섯 요소를 총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당연히 디지로그 시대의 현상을 읽을 수도 있고 창조할 수도 있는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디지로그 시대가 온다 10. 컴퓨터는 셈틀이 아니다
한국에는 1500만 대의 자동차, 2600만 대로 추산되는 텔레비전이 있다.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는 1600만 대를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숫자는 집집에 자동차와 TV, 그리고 PC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문제는 그런 기계들과 매일 함께 살다 보면 그것을 대하는 우리 의식에도 굳은살이 박이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삶의 자동화'라고 불렀고,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 사물을 다시 새롭게 보려는 방법을 '낯설게 하기'(오스트라네니)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당연시하던 하드웨어와 라이브웨어(인간)의 관계를 낯선 외계인이나 옛 조상의 눈으로 보면 전연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우상시하는 것들이 바보상자로 보일 수도 있다. TV는 몰라도 자동차와 컴퓨터까지 바보상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옛 조상님의 낯선 시선을 빌리면 다음과 같은 진솔한 담론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것이 자동차라는 게냐. 백 근도 안 나가는 사람 몸뚱이 하나 옮기자고 이천 근이 넘는 쇳덩어리를 움직여야 하는 이 달구지가 바보상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리고 무릇 이 세상 물건은 쥘부채처럼 사람이 부칠 때에는 펴져 있다가도 다 부치고 나면 접히는 법인데 어찌하여 자동차는 사람이 탈 때나 내릴 때나 밤낮 그 모양 그대로인가. 그래서 사람이 마시고 나온 찻값보다도 주차장 찻값(주차료)이 더 비싸게 나오니 어찌 이것이 성한 사람들 짓이라 하겠는가." 그리고 컴퓨터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이어질 것이다.
"본시 컴퓨터는 컴퓨트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계산한다는 뜻이라고 들었다. 우리는 계산을 셈이라고 하니 셈틀이 되는 셈이다. 디지털이란 말도 손가락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하니 컴퓨터가 계산하는 것도 그 근본은 손가락으로 셈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터. 그러나 우리가 셈이라고 할 때에는 손가락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속셈도 있다(암산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따금 '그런 셈'이라고 할 때에는 겉계산과 속계산이 다를 경우를 나타내는 말이다.'먹은 셈이다'라고 하면 먹었다는 말인지 먹지 않았다는 말인지 너희 계산으로는 셈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셈에 '치다'라는 동사를 붙이면 실제 일어나지 않은 가상적인 숫자까지를 셈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속은 셈'치고 아니면 '바보가 된 셈'치고 불편해도 그냥 컴퓨터를 쓰고 있는 줄이나 알아라. 그건 다 덮어두고라도 무어의 법칙대로 반도체 칩은 2년마다 성능이 두 배로 늘어나고, XT니 386이니 하던 인텔의 마이크로 프로세서는 이제 전투기 이름처럼 펜티엄 1이다 2다 하며 하늘 높이 날고 있는데 어째서 자판만은 100년 전 타이프 라이터 그대로인가. 생쥐(마우스) 한 마리 붙여놓은 것밖에 변한 것이라곤 없다. 듣거라. 인간과 컴퓨터 사이를 인터페이스라고 부른다던데 옛말로는 그게 궁합이라는 게 아니더냐. 그런데 컴퓨터는 토끼요, 사람은 거북이니 어찌 이런 궁합으로 백년가약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할 말은 많지만 한마디 하고 간다. 이 세상 만물지간에 귀한 것은 사람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을 컴퓨터에 맞추려 하지 말고 컴퓨터를 사람에 맞추어라. 이 똑똑한 바보들아."
그렇다. 옛날에는 인간을 훈련시켜 기계에 맞추려고 했지만 이제는 기계를 인간에게 맞추는 기술로 변해간다. 유럽의 에르고느믹스, 미국에서 휴먼 팩터라고 부르는 인간공학의 발전이다. 인지과학의 권위자 '보이지 않은 컴퓨터'를 쓴 D A 노먼의 컴퓨터 비판을 들어보면 옛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는 소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