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억새꽃
강현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세상 밖이 바이러스로 시끄러울수록 마음은 점점 바닥으로 침잠한다. 블랙홀을 거슬러 빠져나오듯 자전거를 타고 미호천으로 나갔다. 온몸으로 맞는 바람이 삽상하다. 답답함으로 달구어진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낸다.
자전거길 양옆으로 억새가 수굿하다. 지난봄 묵은 줄기를 밀어내고 밑동부터 차츰 초록으로 차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꽃을 피우고 있다. 네모난 집 네모난 방안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는 동안 세상 밖은 저 갈 길을 분주히 가고 있었다.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난 결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제 곧 미호천변은 온통 은색 물결로 넘실거리겠지. 벌써부터 설렌다. 가을볕을 담은 촘촘한 이삭이 수줍은 듯 모두 붉은빛을 띠고 있다. 보랏빛이 감도는 연한 자줏빛이라고 할까? 한쪽에서 무더기로 피어나는 갈대는 아예 진한 자줏빛이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난동을 부릴 때쯤 봄볕은 나의 시선을 슬그머니 창밖으로 불러내곤 했다. 잔가지마다 자그마한 음표가 달려 있었다. 아파트 정원 단풍나무에서 톡톡 음표가 터지기 시작했다. 온 대지의 숨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단풍나무는 온통 자줏빛이었다. 봄에 단풍이라니 이상하다 싶었다. 며칠을 눈여겨보니 새잎이 오므렸던 손을 펴면서 점점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사람도 갓 태어난 아기 때는 피부가 온통 붉더니 처음 세상 빛을 보는 생명은 붉은빛을 띠는구나. 자연은 붉은빛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나 보다. 붉은색이 갖는 신비로움이 놀라웠다. 우주 만물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인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성경에 하느님이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할 때 일 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게 하여 이집트인과 구별하게 하였다. 붉은 피의 표식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양에서 붉은 피가 구원을 상징한다면 우리에게는 붉은 팥죽이 있다. 동짓날 먹는 팥죽은 축귀祝鬼, 축사逐邪를 의미한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절기이기도 하다. 옛날 사람들은 동짓날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한다고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 이때 귀신이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귀신이 꺼리는 붉은색 팥죽을 쑤었다. 나의 어머니도 이사를 했을 때 대문과 집 둘레에 팥죽을 한 숟가락씩 떠서 뿌리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붉은 팥죽으로 액막이를 하는 것이다.
팥죽으로 잡귀를 막는 동짓날을 ‘작은 설’이라고 했으니 이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도 붉은 피의 표식으로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했다. 갓난아기의 피부가 붉은 것처럼 미호천변의 억새도 아파트 정원의 단풍나무도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자줏빛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붉은빛의 이전은 고통이요 이후는 희망이라는 변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아내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춘 장자처럼 이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TV에서 가수 나훈아의 ‘대한민국 어게인’이라는 타이틀로 언택트 공연이 있었다. 객석은 관객 대신 세계 각 가정에서 보내온 천 개의 영상이 무대를 가득 메웠다. 이런 언택트 공연이 처음이라는 가수는 흐르는 세월에 끌려가지 말고 우리가 세월을 끌고 가자며 열창을 한다. 공연 시간이 지날수록 영상 속의 관객들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모두가 불안에 떨며 안으로 안으로 숨으려 할 때 언택트 공연은 만리타향 사람들을 오히려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그는 코로나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21세기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불의 발견이 인간을 진화시켰고 금속활자의 발명이 세계의 문명을 바꾸었듯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디지털 혁명을 훨씬 가파르게 뛰어넘고 있다. 코로나 사태는 세상을 다시 이전으로 돌려놓지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흔들어 놓고 있다. 이러다 말겠지 했던 작은 우려가 두려움으로 부풀면서 사람들은 빠른 변화의 물결을 타야 했다. 비대면, 언택트, 사회적 거리 두기……. 낯선 말들이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공포와 불안에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공포와 불안 이후에는 분명 새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물은 거슬러 흐르는 법이 없듯이 변화의 물결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 공간에 멈춤은 없다. 순환의 연속이다.
이번 재앙은 첨단, 최첨단을 향해 치닫던 사람들에게 숨을 돌리고 되돌아보라는 신호가 아닐까. 거리에 자동차가 줄고 집집마다 씀씀이가 간소해졌다. 모임을 줄이고 외출을 줄이니 공기는 더 깨끗해지고 하늘은 맑아졌다. 죽어가던 지구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려 안달했던 사람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있다. 단순해진 일상 때문에 오히려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덜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 집안에만 있으니 우울하다고 투덜댈 때가 아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혹독한 추위와 진통을 거쳐 붉은 생명이 태어나듯이 우주 만물은 순환 속에서 변화하고 또 존재한다. 오늘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붉은 태양이 내일을 준비하려 산을 넘는다. 미호천 붉은 억새에서 나는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첫댓글 최고유
고마워유~~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이방주선생님께서 왜 명작이라고 말씀하신지 알겠습니다.
수업에 선생님께서 누차 말씀하신 원형성을 찾으셨군요.
물질적 상상, 역동적 상상, 인식과 형상에 일반화까지
수필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을 분석하시는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평소 선생님의 철저한 이론과 다독의 결과이겠지요.
명작이라기보다 더 용기를 내라고 선생님께서 과찬을 하신 것입니다.
울림으로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무언가 ~ 가슴이 탁 트입니다. 해답을 찾은 듯이 ~~
시작의 봄이 오네요
가슴이 탁 트이셨다니 의도가 잘 전달된 것 같아 기쁩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붉은빛의 이전은 고통이요 이후는 희망이라는 변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멋집니다.
<어느새 붉은 태양이 내일을 준비하려 산을 넘는다. 미호천 붉은 억새에서 나는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희망적인 메시지에 덩달아 감동입니다.
코로나로 지친 우리들이지만 이대로 당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잖아요.
아영샘의 뿜뿜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주실 거죠? ㅎㅎ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다요!!
<자줏빛 억새꽃>은 원형상징성을 상상의 실마리로 삼아 부활의 의미와 생태계의 순환 원리에 따른 현실 고통 극복 의지를 갖게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필 문학사에 남을 겁니다.
원형문학을 이해하는 수필가들은 알겁니다.
무심회원이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심회원이라 더 상세한 가치 분석을 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