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국고대사서 고찰을 통한 수구리의 우리고대사 ]--> https://tnrnfle.tistory.com/68
☞ 고구려 모본왕이 AD 49년에 한나라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한 미스터리 실체는(?)
■ 한나라 태원이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인 근거는 한서지리지다.
1) 한서지리지에 태원은 태원군으로 치소가 진양인데
진양은 요임금의 당국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도사 유적이 있는 임분시 지역이 한나라 태원군이다
☞ 『한서지리지 태원군』
태원군은 진시황의 진나라가 설치했고, 치소는 진양인데, 옛 시경의 당국이다
[원문] 漢書地理志 : 太原郡, 秦置, 在晉陽(縣). 晉陽(縣) 故詩唐國.
2)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臨汾市) 지역이 한나라 태원군이 된 이유는
태악산(太嶽山)이 임분시 북동쪽에 있어서 태악산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태원(太原)이다
3) 고구려 멸망 후에 즉천무후가 태원부를 지금의 산서성 중부 태원시에 설치했고,
명.청 시대에도 태원부가 이어져서,지금의 태원시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이다
☞ 『바이두백과 태원부』
太原府 是古代地区的名称,唐朝武后时期建制,此后建制断断续续,至明清时期才稳定。
明清时期隶属于山西承宣布政使司,山西行省,府治阳曲下辖州为平定州,忻州,代州,
岢岚州,永宁州,保德州等。辖区在历代中有所增减,至废除前所辖1州10县。
■ 하북성 중북부가 고구려 영토였기에
산서성 서남부의 임분시(한나라 태원군)을 고구려가 공격할 수 있었다
1)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북쪽인 하북성 중북부 지역도 고구려 영토였기에,
(1) AD 49년 모본왕이 석가장시 남동쪽의 (우)북평군, ,석가장시 남쪽의 어양군을 공격하고,
(2) 태행팔경의 지금의 정형을 통해 태행산맥으로 통과하여 산서성 양천시의 상곡군을 공격하고.
(3) 산서성 서남부 임분시의 태원군을 공격한 것이다
2) 고구려 모본왕이 AD 49년 한나라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공격한 내용은
삼국사기와 후한서 동이열전으로 교차검증된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모본왕 2년(AD 49년) 봄에 장수를 보내 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원문] 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원문] 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3) 고구려 태조대왕이 AD 55년에
하북성 중부 석가장시 지역인 요서에 10성을 쌓은 내용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AD 49 모본왕 이전에 석가장시 지역인 요서는 고구려 영토였기에,
요서 남동쪽인 우북평군과, 요서 남쪽인 어양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삼국사기에 기록은 없지만...)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3년(AD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
[원문] 太祖大王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 하북성 중부 호타하 남쪽에 한나라 요서, 우북평, 어양이 있었다는
근거는 사마천사기 진섭세가다
1) 하북성 석가장시 남쪽이 어양인 근거는
『사마천사기 진섭세가』에 어양을 지키기 위해 900명의 병사를 대택향에 주둔시켰는데,
대택향의 대택이 한서지리지 거록현 북쪽에 있다는 대륙택이고, 산해경에 나오는 대택이며,
당태종이 고생한 요수(부양하) 부근 요택이기 때문이다
☞ 『사마천사기 진섭세가』
진시황 2세 원년 7월, 빈민을 징발하여 어양에 수자리를 보내니, 900명이 대택향에 주둔하였다.
진승·오광이 모두 수자리 차례가 되어, 출발하는 행렬에 편입되어 둔장을 맡았다.
[원문] 二世元年七月, 發閭左適戍漁陽, 九百人屯大澤鄉. 陳勝, 吳廣皆次當行, 為屯長.
☞ 『한서지리지 거록군』
거록군의 거록현 : 우공의 대륙택이 (거록현)의 북쪽에 있다.
[원문] 『漢書地理志 鉅鹿郡』 鉅鹿 : 禹貢 大陸澤 在北.
2) 춘추시대 황하를 한나라 사람들은 요수라 했고(춘추시대 황하는 전한시대 황하와 흐름이 다름),
춘추시대 황하(하수) 부근인 한나라 시대 요수 부근에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가 있었다.
☞ 『한비자 유도』
연나라 소(양)왕이 하수(춘추시대 황하)를 경계로 계를 도성으로 삼았다.
※ 주) 국(國)을 나라로 번역하면 계가 연나라 전체가 되기에 오역이며,
국(國)은 도성이며. 『계를 도성으로 삼았다』로 번역해야 함(하수가 연나라 도성 계의 경계)
[원문] 『韓非子 有度』 燕(昭)襄王以河(水)爲境, 以薊爲國.
☞ 『염철론 험고』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 계)는 갈석산에 의해 막히고, 사곡에 의해 끊겼으며,
요수에 의해 둘러싸였다.
[원문] 『鹽鐵論 險固』 燕 塞碣石, 絶邪谷, 繞援遼(水).
■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북쪽인 하북성 중북부 지역도 고구려 영토였다.
1) 하북성 석가장시 지역의 호타하 남쪽에 전국시대 연나라 요서, 어양, 우북평이 있었으니,
한나라 영토(전한시대 연나라 영토)는 하북성 중부 호타하를 남지 못했다.
2) 사마천사기 화식열전과 한서지리지에
연나라 북쪽에 사방 2천리의 부여가 북부여다. 북부여를 졸본부여가 이어 받았고,
졸본부여를 고구려가 이어 받았으니, 호타하 북쪽의 하북성 중북부는 고구려 영토였다
☞ 『사마천사기 화식열전』
연나라 북쪽에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 북부여--> 졸본부여)가 이웃해 있고,
연나라 동쪽에 예맥조선이 있고, 동북쪽으로 호(동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주) 전국시대 연나라 북쪽에 호(북부여) 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호가 이동했으니,
연나라 동북쪽의 호는 동부여다.
[원문] 夫燕, 北鄰烏桓 夫餘, 東綰穢貉朝鮮, 東北邊胡.
☞ 『한서지리지 연나라』
연나라 북쪽에는 오환(烏丸)과 부여(夫餘)가 이웃해 있고,
연나라 동쪽에는 진번과 교역으로 이익이 있다
[원문] 『 漢書地理志 燕地 』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
☞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방 2천 리다.
[원문] 夫餘在長城之北, 方可二千里.
@수구리 사료 원문은 엿장수 마음대로 없앨 수 없습니다. 궤변 그만 두시죠
사기> 원문 ‘攻大澤鄉 收’가 사족으로 저는 본다고(없어야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사기의 二世元年七月,發閭左適戍漁陽,九百人屯大澤鄉.
초기 문장이 중요합니다(전체적으로 가장 주요한 부분이겠지요)
전채적인 상황설명...
진시황 2세 원년 7월, 빈민을 징발하여 어양에 수자리를 보내니, 900명이 대택향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진승 오광이 수자리를 가는 처음이면...
사마천이 次(차례/순서)를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교대한다는 의미가 있지요)
그런데 한서의 반고는 次(교대 의미가 있는 차례/순서) 자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런데 ‘대택향을 공격하여 대택향을 거두었다’는 표현은 공격의 대상이 거둠의 대상이 되어 어색합니다. 반고는 이를 ‘대택향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병사를 거두어들이다’ ‘攻大澤鄉拔之 收兵’라고 문장을 순조롭게 다듬었습니다. 전혀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대택향은 현에 속한 마을이기에 대택향에서 거병했으니 대택향을 공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문장은 비문입니다.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입니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 문장을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대택향이 현에 속한 마을이기 때문에 곧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대택향에서 거병했다.
2) 대택향에서 거병했으니 (자신들이 거병한) 대택향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먼저 작은 마을 鄕에서는 거병할 수 없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원래 거병은 마을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시작하여 몸집을 불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마을(진나라 군대가 없는 마을)에서 거병했으니
향에 군대가 없으니 거병 자체자체가 마을을 접수한 것인데..
접수한 마을을 또다시 공격해서 마을을 접수할 이유가 없다는 표현입니다
다음으로 자신들이 거병한 대택향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했는데, 만일 대택향이 진승과 오광의 본거지라면 자신들의 본거지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겠으나, 대택향은 진승과 오광이 장으로 9백 명을 이끌고 목적지 어양으로 가는 도중에 잠시 진을 친 곳으로 그들의 본거지가 아닙니다. 이들이 대택향을 공격하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결론을 짓습니다.
<사기>의 어양에 대해
索隠 ... 地理志 漁陽県名 在漁陽郡也
正義 括地志云 漁陽故城在檀州密雲県南十八里 在漁水之陽也
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대택향에 대해서
集解 徐広曰 在沛郡蘄県
라는 주석이 있습니다.
“대택향은 안휘성의 기현 부근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위에 대택향이 패군 기현에 있다고 합니다.
“설사 대택향이 안휘성 기현 부근에 있었다면, 안휘성 기현 부근의 대택향은 어양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주둔한 대택향과 다른 또다른 대택향으로 봐야 합니다.”
위에 패군 기현에 있는 대택향에 진을 차렸다고 했습니다.
궤변 그만두고 이제는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기 바랍니다.
어양은 어양군, 대택향은 패군으로 이 둘은 서로 다른 곳입니다.
역사지리 탐구를 처음부터 다시 하기 바랍니다.
이미 설명했는데 댓글을 읽지 않은 것처럼 또다시 댓글을 달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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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지리지 어디에도 패군에 대택향이 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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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시대에 패군 기현에 대택향이 있었다면,
한서를 편찬한 반고가 한서지리지 패군 기현에 대택향이 있다고 기록했겠지요)
따라서
후대학자들이 반고의 변경된(잘못 해석한) 한서 진승열전을 읽고
한서를 보니 패군 기현에 대택향이 있구나 하고 주석을 달았을 뿐입니다
내가 진승이 회수 지방인 안휘성에서 봉기한 것을 부정한 것이 아니지요
진승은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 지역에서 봉기했지만..
대택향은 대택(대륙택) 부근이니...대택향은 안휘성의 패군 기현 부근에 있지 않았습니다
(설사 대택향이 안휘성 패군 기현 부근에 있었다면,,,
안휘성 패군 기현 부근의 대택향은
어양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주둔한 대택향과 다른 또다른 대택향으로 봐야 합니다)
@수구리
“한서 지리지 어디에도 패군에 대택향이 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예 맞습니다. 지리지에는 그런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료를 조금만 유의해서 읽어보면 ‘패군에 대택향이 있다’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한서 진승 열전> 원문에
秦二世元年秋七月 發閭左戍漁陽九百人 勝廣皆為屯長 行至鄿大澤鄉
라 하여 “鄿大澤鄉”이라 나옵니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鄿는 沛郡의 속현입니다.
하급인 기현에 대택향이 있으면, 상급인 패군에 대택향이 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미 <한서> 자체가 패군 기현에 대택향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님이 말하는 “후대학자들이 패군 기현에 대택향이 있다고 주석을 달았을 뿐”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수구리
大澤鄉과 같은 자연 지형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후한서 군국지> 沛國 기록입니다.
豐 西有大澤
蘄 有大澤鄉 陳涉起此
서한의 패군이 후한의 패국과 같은 자리입니다. 여기 대택도 있고, 기현에는 대택향이란 마을도 있습니다. 나아가 대택향에 대해 진섭이 이곳에서 기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사 대택향이 안휘성 패현 기현 부근에 있었다면, 안휘성 패현 기현 부근의 대택향은
어양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주둔한 대택향과 다른 또다른 대택향으로 봐야 합니다.”
님이 한 말입니다. ‘패현’은 ‘패군’의 오기이겠죠. 그런데 왜 “어양을 지키기 위해 군사가 주둔한 대택향”이라고 원문 내용을 변조합니까? “어양으로 가는 도중에 주둔한 대택향”이라고 올바로 표현하기 바랍니다.
패군 기현의 대택향이 진섭이 주둔하고 거병한 곳이 아닌 ‘또 다른 대택향’ 제2의 대택향인가요? <후한서 군국지>에서 기현 대택향이 진섭이 거병한 곳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료를 제대로 읽기만 해도 님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수구리 다음으로, 님이 말하는 대륙택은 거록군 거록현에 있는 택이지요. “대택향은 대택(대륙택) 부근” 이 말도 님이 한 말입니다. 대택향이 대륙택 부근이라는 주장입니다. 정말일까요?
<후한서 군국지>의 기록입니다.
鉅鹿郡 ... 雒陽北千一百里
沛國 ... 雒陽東南千二百里
대택향이 있는 패국(군)은 낙양 동남 1,200리 거리에 있습니다. 반면에 대륙택이 있는 거록군은 낙양 북 1,100리 거리에 있습니다. 무려 2,300리 떨어져 있습니다. 대택향이 대륙택 부근이라는 님의 주장은 완전 헛소리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디 미망에서 벗어나 역사지리연구를 제대로 하기 바랍니다.
@모량 .
1) 후한서 군국지에만 나오는 패국 풍현 서쪽에 있는 대택!!!
2) 그리고 후한서 군국지 원문에 없는 낙양으로부터 해당 군까지의 군국지 거리!!!
(이걸 정확한 거리로 믿어야 하는지!!! --> 참고정도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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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군국지는 AD 440년 경에 펀찬된 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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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D 90년의 한서 지리지 편찬시기 보다 대략 350년 이후에 편찬된 사서이고요
2) BC 90년의 사마천 사기 편찬 시기보다 550년 이후에 편찬된 사서입니다
AD 90년 경에 편찬된 한서지리지에 나오지 않는 패군 풍현 서쪽의 대택이
AD 440년 경의 후한서 내의, 패군 풍현 서쪽에 대택에 있다는 군국지 내용인데
--> 사마천 사기 진섭세가에 나오는 BC 210년 경에 패군 서쪽에 대택이 있다고 주장해도 되는지!!!.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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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토론하는 대택, 대택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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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진섭세가에 기록된 BC 210년 경의 대택, 대택향이지,
후한서가 편찬된 AD 440년 경의 대택,대택향이 아님..
@모량 .
★★★★★★★★★★★★★★★★★★★★★★★★★★★★★★★★★★★★★★★
★■ "사료를 제대로 읽기만 해도 님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헛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
★■ "대택향이 대륙택 부근이라는 님의 주장은 완전 헛소리입니다." ★■
★■ "거듭 말하지만 부디 미망에서 벗어나 역사지리연구를 제대로 하기 바랍니다." ★■
★★★★★★★★★★★★★★★★★★★★★★★★★★★★★★★★★★★★★★★
이런 말투부터 고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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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저런 님의 말투에 의해
앞으로 님의 댓글에 더 이상의 답변은 없습니다
(이 댓글이 마자막 댓글임)
@모량 西有大澤이 나오고, 낙양으로 부터 거리가 없는 후한서 군국지 원문은
https://blog.naver.com/1517plan/222927423667
에서 확인 가능.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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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군국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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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택이 있다는 풍현은
태핵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기현에서 북쪽으로 200km(500리) 거리에 있으니
기현의 대택향과 관련이 있을 수 없겠지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허세를 부리고 있네요.
풍현과 기현의 거리는 모르지만(님이 아는 듯 하니 증거를 제시하기 바랍니다), 그것은 제외하더라도
이미 패군(국) 기현 대택향이 진섭이 거병한 곳임은 명백합니다.
님이 말하는 거록군 대륙택이 패군 대택향과 같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호타하 이북 하북성 중북부가 고구려 영토라는 주장이 <실속이 없고 미덥지 아니한 말>=헛소리가 아니란 말인가요?
망상입니다.
요동군에 의무려산이 있는데 고구려 영토가 의무려산에서 서쪽으로 수천리 거리의 하북성 중북부라니 기막힌 말입니다
(그동안 논란을 주고받다가 자신의 논리가 무너지니까 도망친 적이 도대체 몇 번이었는지 기억하나요? 오역을 지적해도 막무가내로 우기고, 오독을 지적해도 궤변을 늘어놓고... 그런 말투요. 님이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