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체험에 대하여
영적인 체험이란 무엇인가? 영적인 체험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 곧 생각하고 공부하고 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들이 다 영적인 체험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하고 기뻐하며 시와 ‘문화’, 과학과 예술을 관조하고 즐길 때에 바로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영적인 체험은 이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 생활을 좀 더 인간적이고 아름답게 하고 의미에 차게 할 때에 바로 그것을 일컬어서 영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위의 체험들을 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영적인 체험을 하지 못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초월적이라고 해서 철학에서나 다루는 일이나 피안의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영적인 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은,
- 부당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을 억누르고 참아 넘긴 적이 있는지?
- 용서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때에도 아무런 대가없이, 용서해 준다는 말도 없이 용서해 준적이 있는지?
- 순명을 하되, 필요하니까 또는 불순명을 싫어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하느님과 그분의 뜻이라고 부르는 신비롭고 형언할 수 없는 실재 때문에 순명을 한 적이 있는지?
- 남에게서 감사나 인정을 받거나 내적인 만족감조차도 느끼지 못한채 어떤 희생을 해본 일이 있는지? 완벽하게 혼자 있어본 일이 있는지?
- 아무에게도 말하거나 해명할 수 없고 철저히 혼자서 결정을 해야할 때, 그리고 이 결정이 그 누구도 개입하여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자신이 평생에 걸쳐 실천하여야 하는 것일 때에 오직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결정을 내려 본 일이 있는지?
- 열정과 감정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에,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라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 자신의 내적 충동과 하느님을 일체라고 느낄 수 없을 때에 하느님을 사랑해 본 일이 있는지? 그리고 이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을 때에, 이 사랑이 죽음처럼 느껴지고 절대적인 극기로 여겨질 때에, 마음속에서는 깊은 허무의 심연으로 뛰어드는 듯한 절규가 들려올 때에도 하느님을 사랑해 본 일이 있는지?
- 모든 것이 어릿광대짓으로 돌변할 것처럼 보일 때에 하느님을 사랑해본 일이 있는지?
-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데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고 죽이는 쓰라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또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을 바보짓을 해야만 할 때에 이 일을 완수해 본 일이 있는지?
- 아무런 고마움이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더욱이 우리가 ‘사심 없이’ 봉사한다는 만족감조차 느낄 수 없는 경우에도 어떤 선행을 해본 일이 있는지?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면 바로 이때에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한 것이다. 그것은 영원을 맛보는 것이고, 영이 단순히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님을 느끼는 것이며, ‘인간’의 의미가 단지 이 세상에서 말해지고 느껴지는 것만이 아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근거가 없이 신뢰를 감행하는 모험 속에서 우리는 영적인 체험을 한다.
이제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과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열정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런 체험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체험들을 불쾌하게 여기는가 하면 고작 인생의 양념으로 여기고 견디는 반면에 영적인 사람들은 순수한 영을 좋아한다. 영을 마시되 칵테일처럼이 아니라 원액으로 마시기를 좋아한다. 이로써 그들의 괴상한 생활과 가난과 겸손에 대한 갈망, 죽음에 대한 열망, 고통받을 태세를 갖추고자 하는 마음, 순교에 대한 숨겨진 열망들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들이 약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 그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일상의 습관으로 계속 돌아와 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일상의 활동에 은총이 함께 하고 그 활동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천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느님과 세상, 시간과 영원 사이에 처한 한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영이 자신들에게 단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증하려고 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을 하였을 때 ‘사실상’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직접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이런 영적인 체험에 내맡길 때에, 모든 구체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에, 모든 것이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임을 침묵 속에서 들을 때, 모든 것에서 죽음과 파괴의 냄새를 맡을 때에, 형언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순백의 행복처럼 모든 것이 사라질 때에 우리는 - 인간의 영, 정신이 아니라 - 하느님의 영,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실상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가 은총의 시간이다. ‘이 때’는 우리 존재를 받치는 든든한 바닥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다름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당신의 무한심연이며, 더 이상 길이 없고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는 당신의 무한이 우리에게 임박했다는 알림이다. 우리 자신을 맡기고 우리가 더 이상 우리에 게 속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대비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포함한 모든 것이 무한 거리에로 멀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자신의 세상, 은총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이 마련하신 세상에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익은 것에로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느낄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의 순포도주 맛에 차츰 익숙해져야 한다. 적어도 그분의 섭리로 우리에게 잔이 건네질 때에 이것을 물리치지 않게는 되어야 한다.
성령의 잔은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잔과 같다. 이 잔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빈 데서 충만을,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낙조에서 아침노을의 서광을, 죽음에서 생명을, 포기에서 습득을 즐기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것을 배운 사람이라야 영적인 체험, 순수한 영의 체험을 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성령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영의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그리고 신앙 안에서만 완전하고 견고하게 이를 수 있다. 그분이 영을 자유롭게 할 때에는 초자연적인 은총을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의 내밀성을 향하여 자유롭게 한다.
우리 생활에서 은총의 체험을 찾아보자. 그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그것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은총은 전쟁의 승자처럼 소유하고 장악하는 어떤 것으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을 잊으면서만 추구될 수 있고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고 하느님을 찾으면서 만나지는 것이고 사심 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만나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에서 성령의 체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지 그 길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재보기 위해서도 이따금씩, 죽음과 생명의 빠스까 체험을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 들여라.” 우리에게는 멀고먼 길이 앞에 놓여 있으니 와서 부드럽게 다듬으시는 주님의 손길을 맛보시오.
<이 글의 다른 번역은 “일상에서의 은혜 체험” 이란 제목으로 「일상」 칼라너/장익 옮김, 1980에 있음>
예수회 홈페이지 글 / 2011년 6월 1일 영성의 향기 강의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