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예배 모습 |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김포제일교회는 새문안교회, 서교동교회에 이은 세 번째 교회이자 김포지역 최초의 교회다. 김포는 삼면이 바다와 강이다. 북쪽은 북한과 맞닿아 있다. 김포공항, 인천국제공항과도 인접하다. 김포제일교회가 북한선교와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를 꿈꾸는 까닭이다. 5천 년 전, 볍씨가 싹을 틔워 민족의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기름진 평야가 된 김포에 복음의 볍씨가 뿌려진 지 114년. 복음이 싹트고 자라 황금들녘을 이룰 날도 머지않았다.
김포(金浦)의 옛 이름은 ‘검개’로 검=금(金)=금(黔)이 모두 ‘큰 개펄’을 뜻한다. 3면이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김포의 지형을 나타내는 말이다.
김포는 북쪽과 동쪽으로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북한 개풍군과 파주·고양시, 염하를 사이에 둔 서쪽으로 인천광역시, 남동쪽으로 서울특별시에 접한다.
한강의 토사가 운반·퇴적되어 이루어진 김포평야는 농경에 적합해 농경문화의 근원지가 되었다. 5천년 역사를 가진 한국 최초의 벼 재배지이기도 하다. 김포 지역에 맨 처음 복음을 뿌린 이는 언더우드 선교사다.
|
◇ 초창기 교회성도들 모습 |
언더우드 선교사와 김포읍교회 창립
1887년 9월, 14명의 한국인들이 정동의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 사택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두 명의 장로를 장립한 것이 최초의 조직교회,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지방순회 전도에 전력하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건강이 나빠지자 1890년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간다. 1892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다시 한국을 찾았다. 1894년 이후부터 고양군, 김포군, 시흥군 등 서울 근교와 경기도 일원으로 전도구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당시 서울의 외곽이고 피서지인 절두산 부근의 한강변 언덕을 왕래하던 언더우드는 이원순 내외와 김치근 내외를 알게 됐다. 새문안교회로 인도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언더우드는 교인들을 위해 한강변 언덕 잔다리라 불리던 곳에 잔다리교회를 세우고 1895년 8월 15일 여덟 가족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지금의 서교동교회다. 당시 잔다리교회 성도였던 고군보를 비롯해 박사라, 천덕현, 이춘봉, 유공선, 박성삼, 황춘근, 유중근 등이 김포 걸포리 304번지 유공선 씨 집에서 회집하고 있었다. 이들이 1894년 3월 3일 북변리 16칸 초가를 매입하여 예배처를 마련한다. 당시 김포읍교회로 불렀던 김포제일교회의 시작이다.
|
◇ 제1대 당회장 언더우드 목사 |
언더우드 선교사의 대지 기증과 분립의 아픔
교회 창립 3년 후에는 유창익 씨의 사가로, 1900년 4월에는 김포 서변리 오순기 씨의 사가로 예배 처소를 이전한다.
이후 1905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의 인쇄기를 팔아 북변동 대지 3,500평을 구입 기증한다. 성도들이 700원을 헌금해 예배당 33평, 목사관 15평, 교육관 12평을 건축했다. 1912년 1월에는 당회장 언더우드 목사의 집례로 이춘경 씨가 초대 장로로 장립됐다. 한국인 목사로는 1932년 김사필 목사에 이어 1943년 제2대 차재명 목사가 시무한다.
시련도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혹독한 박해를 견뎌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쏟아지는 전쟁 환우들을 위해 교회를 수용시설로 제공하는 등 고난의 한국사를 함께 보듬었다. 1961년 12월 3일 총회의 합동, 통합 분립으로 인해 김포제일교회는 합동측으로 일부 교인이 현 김포중앙교회를 세워 통합측으로 나가 교회가 분리 되는 아픔도 있었다.
1980년에는 대성전을 다시 짓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1982년, 1944년부터 4년간 운영했던 유치원의 맥을 이어 동산유치원을 설립 개원했다. 1991년에는 성전을 280평 규모로 증축했다. 1994년 4월에는 남서울노회에서 김포제일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
◇ 1912년 언더우드 목사가 당회장으로 재직시의 당회록 |
김동청 목사와 교회성장
2000년 7월, 김동청 목사가 제7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김동청 목사는 교회 동쪽 48번 국도 길가 땅 매입을 추진했다. 원래 막혀 있던 동쪽에 주차장을 만들고 기존 도로와 연결해 출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차량 6백여 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역사회에 개방해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김포제일교회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교회조직도 대대적으로 재편성했다. 행정, 교육, 전도, 새신자, 찬양으로 구분하고 6대 교구 54구역으로 나누었다. 매주 수요전도를 실시하고, 교사 단기대학을 열었다. 문화사역도 시작했다. 2001년 3월 문을 연 목요 아카데미, 문화센터에서는 현악기, 플롯 등의 악기레슨과 카리스남성합창단, 워십찬양단 등의 레슨을 통해 음악 사역에 앞장서고 있다. 누구든 마음껏 드나들며 정담을 나누는 ‘우물가 찻집’은 단돈 몇 백 원으로 이웃과 조촐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주중에 테니스코트, 탁구장과 헬스기구 등을 개방해 교인과 비교인 구분하지 않고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열린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2002년에는 외국인을 위한 영어예배, 영유아를 위한 아기학교를 개설했다. 또 주일 경로대학을 열었다. 2003년 개원한 우리병원에 조도철 목사를 원목으로 파송했다. 중국과 태국, 필리핀, 북한 등지에 단기선교를 실시하고 있다.
“교회가 성도들과 지역주민들의 영적 쉼터와 누구나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정겨운 공간이 되어야 한다. 따뜻함과 정겨움이 넘쳐서 오고 싶고, 머무르고 싶고, 다시 오고 싶은 교회로 만드는 데 전심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지역을 섬기는 데 앞장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교역자와 성도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김동청 목사는 지역사회를 선도하고 조화를 이루는 목회를 추구한다.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회와 성도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다.
“아버지 같은 연세의 장로님들은 동반자로 함께 목회를 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한 분이라도 반대를 할 경우 일을 진행시키지 않는다. 목회를 빨리 하기보다 주님께 헌신된 장로님들을 존중하며 그분들께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설득하며 뜻을 기다린다. ”
|
◇현 성전 건물의 머릿돌 |
지역의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열방으로
최근 김포는 신도시로 개발이 가속화 되어 수도 서울은 물론 인천신공항, 김포공항, 인천항과도 30분 이내에 연결이 가능한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일부에서는‘서부 수도권의 중심도시’로 일컫고 있다. 인구 20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10% 내외의 낮은 복음화율을 보이고 있다. 김포제일교회가 김포에서는 처음으로 교인 수 1천 명을 넘었다는 예만 봐도 김포의 복음화가 얼마나 더딘지 잘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 비해 김동청 목사가 시무한 9년간의 성장은 놀랍다. 김동청 목사가 처음 부임할 당시만 해도 김포제일교회의 출석교인은 350여 명에 불과했다. 지금은 출석교인만 2,000여 명으로 몇 배의 성장을 이루었다. 구호와 프로그램뿐인 성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성장을 이룬 것.
김포제일교회는 앞으로도 지역을 잘 섬기면서 지리적 특성상 군선교, 북한선교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통일시대를 준비해 나간다.
|
◇교회역사관에서 권영민 장로, 김동청 담임목사, 송희만 수석장로(좌로부터) |
“통일 시대에는 김포, 강화 지역의 위상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남북통일이 됐을 때 북한과 맞닿아 있는 김포지역이 북한 주민들에게 기독교 정신을 배양하는 최적의 선교 요충지가 됨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전국으로, 세계로 향하는 김포공항과 인천국제공항에 근접해 세계 선교의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창립 107주년을 기념해서는 김포지역에서의 한국교회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교회 역사자료관을 만들었다. 자료관에는 교회의 각종 자료들과 특히, 언더우드 목사의 친필 사인이 기록된 당회록과 <마태전>을 보관하고 있다. 2009년에는 김포의 기독교역사와 김포제일교회의 역사를 담은 115년사를 발간할 계획이다. 한국교회사를 오롯이 품고 지역과 함께 발전해온 김포제일교회는 지역의 첫 교회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찬양과 기쁨이 넘치는 교회, 오고 싶은 교회 만들 터
제7대 담임 김동청 목사
김동청 목사의 증조모는 대구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분으로 5대째 믿음을 이어오고 있다. 이력도 독특하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가였다 뒤늦게 총신대에 들어가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됐다. 이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동청 목사는 21세기찬송가 편찬위원으로, 찬송가 344장 ‘믿음으로 가리라’ 작시자이기도 하다. 김 목사는 전 교인들을 대상으로 발성 연습을 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찬양 훈련을 시켰다.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예장 합동 측 교회에서 이 또한 이례적인 일이다.
김포제일교회는 전 성도들이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기쁨으로 예배에 몰입하도록 하기 위해서 매년 약 50명의 찬양 전문 사역자를 초청해 찬양집회를 연다. 또한 교회 내에 공식적으로 5개의 찬양팀과 5개의 중창단팀 그리고 40여 명으로 구성된 남성합창단 등이 각종 예배와 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교회 분위기가 바뀌는 것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나.
주변에서 염려를 많이 했다. 예장 합동 측 교단이고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다 보니 매우 보수적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교회의 영적 흐름에 순종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땀이 나도록 박수치며 찬양하며 그 은혜로 눈물을 흘리는데 성도들이 따라하지 않겠는가. 물론 처음에는 성도들이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찬양의 은혜에 푹 빠져들게 됐다. 큰 거부 반응 없이 따라 주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목사님은 찬양을 중심으로 한 영성목회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찬양에 중점을 두는 까닭은 찬양을 하면 기쁨과 감사가 회복된다는 데 있다.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찬송의 옷을 입자’고 말씀했는데 찬송을 할 때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쳐 교회가 즐거워진다. 찬양을 드리는 교인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교회는 늘 무겁고 엄숙한 곳만이 아닌 영적인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찬양은 말씀과 기도를 풍성하게 해주는 빼놓을 수 없는 영적 무기다.
요즘 찬양은 꼭 찬송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데 CCM은 어떤가.
90년대 초반에 대구에서 하덕규 씨와 함께 활동했었고, 찬양신학원을 세운 적이 있다. 비록 학교에서는 전통음악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교회음악과 CCM을 다 수용한다. 성경은 구약 시대 미리암이 찬양할 때 춤추고 소고치며 노래했다고 전한다. 찬양이 시대마다 제한을 두고 다른 모습으로 드려져 왔음을 보여준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과 마음으로 찬양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
김포제일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떤 교회로 남았으면 좋겠나.
김포제일교회는 천국에 계시는 언더우드 목사님도 주목하는 교회다. 한국 선교에 기초를 놓은 분의 뿌리 위에 세워진 교회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잘 남겨서 널리 알려야 한다. 내년에 115년사 편찬을 계획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거리감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더 가까운 교회로 남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