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광릉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조선 7대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능으로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다.광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선왕릉 중 최초로 조성된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세조,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희왕후의 능이다.광릉은 1468년(예종 즉위)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 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 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1483년(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능의 이름을 동광릉(東光陵)으로 정하려고 하였으나 광릉과 같은 능역에 있다고 하여 광릉으로 합쳤고, 정자각은 두 능 사이로 옮겨지었다.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향로와 어로는 조선시대에는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고,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 있다.
왼쪽이 세조릉, 오른쪽이 정희왕후릉. 하나의 정자각을 사이에 두고 완벽한 V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릉의 형식 중에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효시이다. 즉, 하나의 정자각을 가운데에 두고, 정자각 뒤편의 2개의 언덕에 각각 능을 구성하는 형식으로서 보통 정자각에서 바라보기에 좌측이 왕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의 무덤이다.
하마비.
하마비는 조선 시대에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입구와 궐문 앞에 세워놓았는데 하마비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하마비'라고 쓰여 있다.이는 신성한 장소에 출입할 때에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조선왕릉 유네스코등재 기념비.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500여 년간 이어진 왕조의 능이 단 한 곳도 훼손되지 않고 모두 남아있다는 점과 조선왕릉의 높은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다산 기념관
다산 기념관은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입니다. 기념관에는 다산 선생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수원 화성 축조 때 사용돤 거중기
수레
다산 정약용 생가 여유당
남양주 다산유적지에 위치한 여유당은 조선 후기 대실학자 정약용 선생의 생가입니다. 1762년에 지어진 이 집은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그의 어린 시절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여유당은 툇마루와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배치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다산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손님을 접견했던 곳이며, 안채는 그의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다.
여유당각자
다산의 후손인 정일권 국회의장의 휘호를 자연석에 각자하였다.
다산 정약용 묘
다산유적지 내에 위치한 정약용 선생의 묘입니다. 묘는 정약용 선생이 생전에 직접 정한 곳이며, 그의 아내 풍산 홍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사진:이석염,이재실,박성환
편집:박성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