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두 눈과 다리
증 언 자 : 신광성(남)
생년월일 : 1960. 3. 26(당시 나이 20세)
직 업 : 무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요
5월 20일 저녁부터 시위에 참여하여 27일 새벽 계림국민학교 전투 때 상무대로 연행.
시체 2구를 보고 분노해
나는 충청북도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1학년 때 광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광주에서 구두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으나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나는 내성적이었으나 정당하다고 인정되면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싸우는 성질의 소유자다. 내가 5·18을 맞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5월 20일 이전까지는 집안 식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집에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전두환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권력을 잡으려고 광주 시민에게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5월 20일 저녁 공수부대의 잔인한 만행을 들으면서 정말로 밖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사실인지 궁금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식구들 몰래 밖으로 나왔다. 임동에서 죽 걸어 광주역 쪽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광주역 광장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광주역 광장 바로 앞 분수대 뒤쪽에 시체 2구가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시체를 보는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말로만 듣던 공수부대의 만행의 결과가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당시 21살의 젊은 나는 시체들을 보는 순간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로 시위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대들은 KBS방송국 부근에서 공수부대가 부산 출신이 많다고 하여 그쪽 지방의 차를 보면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주역 쪽에서는 공수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즈음 서울에서 연고대생들 30∼40명 정도가 고속버스3, 4대로 광주에 내려왔다고 했는데 실제로 광주역 부근에서 만났다. 내 옆에 있던 사람이 나에게 "광주에서 사십니까?'하면서 자기는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함께 시위를 하면서 그들이 타고 온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고속, 유동 삼거리를 거쳐 도청 앞으로 향했다(사실 확인 안됨-조사자주).사람들의 외침은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탱크를 앞세우고 화염방사기 같은 것에 호스를 달고 최루탄을 마구 쏘아댔다. 우리는 돌이나 각목으로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에게 밀려 중앙국민학교 후문부근으로 빠지면서 보니 MBC방송국이 훨휠 불타고 있었다. 우연히 경찰과 공수부대들을 피하면서 문화방송 앞에서 시위대가 타고 다니는 시내버스를 타게 되었다. 시내버스안에서는 전춘심이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가 공수부대의 잔학상에 대해서 가두방송을 하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에서 내려 중앙국민학교 부근을 돌아다니며 시위를 했다. 경찰이나 공수부대들이 밀고 오면 장작 같은 것으로 불을 질러 그들의 진입을 막기도 했다. 그곳 골목골목에는 경찰들이 완전무장한 채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젊은 사람끼리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를 외치며 돌아다녔다 시위가 무르익을 무렵에는 사람들의 입에서 '최규하 물러가라'는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다.
5월 20일 누문동 부근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데 여자 한명이 계엄군에 붙잡혀 옷이 벗겨진 상태로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것을 보았다.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 이었다. 20일 저녁 계엄군 두 명이 국세청 담을 넘었다는 소리를 들은 젊은 사람 30여 명 정도가 국세청 담벽을 밀었으나 국세청 안에서 계엄군은 보이지 않았다. 21일 낮 금남로 관광호텔 앞에 시위대가 있었고, 전일빌딩 쪽에 계엄군이 있었다. 그들과 뭔가 협상을 하려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공수부대들이 최루탄을 무차별로 쏘아댔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도망쳤는데, 그 과정에서 밟혀 죽기도 하였으며 어른 한 분은 최루탄에 맞아 시커멓게 타서 죽기도 하였다(사실 확인 안 됨-조사자주). 총소리도 계속 들려왔다. 21일 저녁 시위 도중 만난 젊은 사람들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목포로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백운국민학교를 바로 지나는데 건물 위에서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쏘아 대 나의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손에 총을 맞았다. 우리는 가던 길을 포기하고 다친 사람을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했다. 그 이후로는 시외로 빠지지 않고 시내에서만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내가 처음으로 총을 갖게 된 것은 22일경이었던 것 같다. 광주천 부근에서 카빈총을 주웠는데 실탄은 없었지만 위험상 그것을 들고 다녔다. 광주교도소나 지원동 부근 등 외곽지역에서 총성이 가끔씩 들려왔다. 식사는 아주 쉽게 아무 데서나 가능했다. 주로 아주머니들이 김밥이나 주먹밥,콩나물국 등을 만들어 가는 곳마다 듬뿍 쌓아놓아 언제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도청이 시민군에게 장악된 후에 시민 절기대회가 열렸다.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시위 도중 마음이 통했던 친구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24일 비가 오는 날이었다. 수습대책위원회와 장례준비위원회 등이 만들어졌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나와 청소를 열심히 하였다. 외국의 기자들도 많이 와 촬영을 한 것 같다. 수습위에서는 총기를 회수한다고 하였다. 나는 총기는 가지지 않았지만(며칠 전에 주운 것은 버렸다) 반대했다. 아직 치유할 문제가 많고 어차피 많은 희생을 남겼는데 총을 버릴 필요가 없이 계속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석방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24일경 광천동 공단 입구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상태에서 대표들간의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옆사람들 얘기로는 시민군측에선 구속자 석방을 계엄군측에서는 무기회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 같다고 하였다.
광주를 지켜야 한다
5월 26일 저녁 무렵에 YMCA안에 있었다. 여대생,여고생들은 주로 식사를 도와주고 있었다. 도청 상황실장인 박남선씨가 권총을 차고 총을 쏠 수 있고 죽음인 두렵지 않으면 전투를 하는 데 지원하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에 군인들의 잔인한 만행을 많이 봐서 스스럼없이 나가 지원했다. 식사 후에 우리는 도청으로 들어가 부지사실에 있었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당시 외괴지역과 무전이 가능했는데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처절한 목소리는 다시 한번 현실을 확인케 해주었다. 나는 '광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목숨을 각오하고 총과 실탄을 지급받았다. 18∼20명으로 구성된 대원들과 함께 계림국민학교로 향했다. 새벽 3시경 우리는 계림국민학교 안에서 도로 쪽으로 총을 들이대고 대응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후 갑자기 누구인가 "계엄군이다" 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Ml6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공포탄을 쏘고 도망을 하려는데 나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당해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쓰러진 나를 계엄군 5, 6명 가량이 다가와 군화발로 얼굴 등을 무자비하게 짓이겨버려 제대로 몸을 추스리지 못한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 광주고등학교 교실 안이었다. 나와 같이 싸웠던 대원 거의가 잡혀온 것 같았다. 당시 투입된 부대는 일반 계엄군이었는데 그들 중 한 명도 죽어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의 신음 소리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살려 달라는 등 여기저기가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끌려온 사람들을 계속 두들겨패고, 심지어는 "사살하라"는 소라까지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정말로 우리들을 죽이는 줄만 알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곧바로 상무대로 끌려갔다. 상무대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군인중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죽이지 뭣 하러 데려왔어"하였다. 너무나 암담하였다. 나는 부상 정도가 심해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통합병원에 근무하는 여군의관이 "폭도 새끼가 왔다"고 하면서 심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4일 동안 있은 후 회복실로 왔다. 병원의 환자들은 화장실만 가더라도 군인들이 총을 들고 따라다녔다. 휠체어를 탄 나까지도 그들은 따라다녔다. 합동수사본부에서 병원으로 여섯 번이나 조사를 나왔다. 나는 사실 두렵고 무서워 내가 했던 행동보다 축소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총상까지 당한 나의 말이 의심이 갔는지 집에 계신 어머님과 대질심문을 했다. 다행히도 상무대의 아는 형이 사전에 어머니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해 줘 내 이야기와 어머님의 이야기가 거의 들어맞았다.
잃어버린 두 눈
병원 안의 상황은 군인들이 어찌나 심하게 감시를 하는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부상자들의 신음 소리도 쉴 새없이 들려와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나의 옆에 있던 당시 고등학생이던 신묘섭 군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이 되어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전두환 물러가라'는 등 여러 가지 구호를 외쳐댔다. 그는 군인들이 다가가 야단을 치면 그때야 수그러졌다. 또한 전남대 심리학과에 다니던 김윤희라는 학생도 가슴인지 등인지 모르겠으나 부상당해 들어와 있었다. 병원에서 다리 총상 부분은 수술 후 치료를 하였으나 얼마 후부터 갑자기 눈에 통증이 왔다. 계림국민학교에서 잡힐 당시 군인들이 얼굴 부분을 짓이기면서 나의 눈까지 짓밟았는데 그때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찌나 병원상황이 무섭던지 말을 못 하고 주저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측에 눈이 아프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내가 계속 눈이 아프다고 하니까 진통제 정도만 주었다. 눈이 점차 희미해져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한 달여 만에 관통당한 다리만 치료하고 여전히 눈은 희미해진 채 병원에서 퇴원하여 다시 상무대로 끌려갔다. 상무대에 끌려가서 군장성들에게 정신교육을 받았다. 일명 '순화교육'이었다. 순화교육을 4일 동안 받고 이후에 데모를 하게 되면 처벌을 받게 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상무대에서 시청으로 가 시청 직원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0일 이후 처음으로 집에 오게 된 것이다. 집으로 온 지 이틀 후부터 눈의 통증은 날로 심해졌다.
그러나 당시 집안의 형편으로 보아 병원에 가보자는 이야기가 선뜻 나오지 않았다. 집안형편도 곤란하였지만 나의 엄마가 새 엄마였기 때문에 말을 못 하고 임시방편으로 진통제만 복용하고 지냈다. 고통받고 사는 가운데 경찰서에서는 나를 계속 감시하고, 내가 없을 때는 집에 들어와 온방을 뒤지기도 하고, 가끔씩 경찰관들이 나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눈은 계속 나빠져 양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눈의 통증을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너무 늦었다고 하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의사는 "충격으로 인한 실명입니다"라고 하였다. 다리는 총에 맞아 병신이 되고 이제 또 나의 두 눈까지 잃게 되다니‥‥ 두 눈을 잃은 나는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교도소 생활도 하게 되었다. 교도소에 있을 때 5·18 광주민중항쟁부상자동지회 회장인 이지현씨를 만나 부상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계속 나빠져갔다. 병원에 다녀야 하는데 환경이 어려워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박옥재씨가 회장인 부상자회에 가입하여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부상자회가 두 개로 분리된 것이다. 분리원인은 박옥재회장이 '민화위'에 참가한 데 있다고 하는데 하루바삐 문제해결을 해 하나로 뭉쳤으면 한다. 부상자회에 참여하여 활동을 많이 하고 싶어도 두 눈이 보이지 않는 나는 역부족이다. 겨우 불빛 정도만 가늠할수 있는 나의 처지로선 부상자회도 누군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겨우 월례회 정도만 참석할 뿐이다. 지금에 와서 5·18을 생각해 보면 당시 군부가 억압적으로 잔인하게 진압만 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처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주 시민들은 군인들의 잔학상에 분노심으로 들고일어났던 것이다. 5·18을 민중항쟁이라고 일컫는데 맞는 것 같다. 당시 도청 뒤의 부자 동네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을 한상태였고 고아나 서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5·18 이후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일은 행방불명자인것 같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현재까지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다. 5·18 이후 우리 집의 가세는 더욱 기울어졌다. 새엄마가 데려온 형이 1980년도에 나전칠기 공으로 일했는데 느닷없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아직도 나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아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인생을 포기하고 살지는 않는다. 2년 전에 전도사님을 만나 종교에 귀의를 해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있다. 부상 후 별다른 보상은 없었고 1988년 후반에 생활위로금조로 3백만 원을 받았다. (조사·정리 김정기) [5.18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