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州 8大姓
진정한 북벌논자 윤 휴(호 白湖)가 북벌을 계속 주장한다. 그때 오 삼계의 난이 중국에서 일어난다. 남인정권에 북벌주장의 위협을 느낀 15세에 즉위하여 보령 20세가 된 숙종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파트너를 교체한다. 이른바 경신환국이다. 그리고 둬달 후 윤 휴는 1680년 5월15일 사사된다.
정권을 놓치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청남 허 적과 윤 휴는 죽임을 당하고 청남과 탁남으로 갈린 남인들은 서인에 대한 온건파 허 적과 권 대운이 탁남이고, 강경파 허 목과 윤 휴가 청남이다.
남인정권은 6년 만에 남인의 영의정 허 적이 낙마하고, 서인의 세상이 온다. 유배지에서 송 시열이 살아 돌아온다. 화합형의 정치가인 허 적이 사사된다. 아버지의 기로소 가입을 축하하는 잔칫날 충주의 허 적의 서자 허 견이 역모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서인이 만든 꼼수 그물이다.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 있냐면서 윤 휴는 사약을 마신다. 그의 묘소는 대전에 있다.
그토록 싸운 윤 휴,송 시열,허 목,송 준길,윤 증, 윤 선거,김 집, 최 명길 등이 모두 충남북 사람이고 묘소가 우리 향도에 있다.
공작정치시대에 남인의 원한을 어찌 풀 것인가!
서인에서 갈리는 소론, 그리고 남은 것이 노른 이다 .
송 시열은 나를 죽일 자는 반듯이 윤 증일 것이다, 말하며 자신의 출사에 세 가지 조건을 건다.
3대 명분론은
첫째 영욕이나 원한을 산 남인을 위한 공신이 된 서인의 공신 삭 훈이 가능한가.
둘째 “부당한 정치개입과 외척의 제거가 가능 한가“
숙종의 외가인 “청풍김씨 金錫冑家 숙종의 처가인 장인 광산 金萬基家 계비인 인현왕후 여흥 閔鼎重家의 개입차단이 가능 한가“
셋째 “남인 소생의 왕자, 타당소생의 임금 탄생을 목숨 걸고 막아야 한 다.” 이다.
인조반정직후 집권세력의 국정운영수칙은
제 1조는 國婚勿失다. 즉 서인집안에서 왕비 자리를 고수하려면 왕의 생 모는 서인집안이어야 한다는 원칙과,
제 2조는 崇用山林다 즉 산림세력이 입신행도 하고 양명후세를 뜻하는, 지식인을 높이 등용하여 士大夫 층을 더욱 공고히 해야지, 백 성에 조세 감세, 부역의 탕감, 공납을 대신한 대동법의 세액 감액 등 삶의 질의 향상 실용적 학문연구 발전 등은 안중에 없는 것이다.
숙종이 사랑하여 후궁으로 들어와 仁顯王后 민 씨를 밀어내고 정비가 된 장 씨의 견제와, 그 소생 왕자가 생산되면 등극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이다.
송시열의 예측은 적중한다.
경신환국 8년 뒤인 쌍 팔년 1688년 드디어 즉위 15년 만에 숙종은 정비 장 씨에게서 왕자를 본다.
후에 경종으로 등극하는 그 분은 이름이 輝瑞다 戊辰생 이다. 이듬해 이 왕자를 원자는 삼는데 대한 논란이,
양 파당의 목숨을 걸고 일어나며 피바람의 소용돌이가 분다. 1689년 이른바 己巳獄事이다.
송 시열은 29세의 청년 왕 숙종에게 정면도전을 한다. 그러나 청년왕 숙종 임금은 부왕 현종대왕과는 달리 너무 총명하고 그간 부왕의 사인이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임을 잘 아는지, 제왕의 통치전략을 미리 정해 둔 듯 과감한 결단을 내려간다.
이에 숙종은 즉각 분노를 표현한다.
일이 정해지기 전에 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일이 정해진 뒤 말하는 것은 그 뜻에 所在가 있다.
송 시열은 먼 곳에 유배 보내야 하지만 유신이므로 은혜를 베풀어
삭탈관직하고 도성 밖으로 내 쫓아라
그로인해 뒤바뀐 정권 수반과 송 시열 등의 처지가 즉각 바뀐다.
오늘밤 안으로 영의정 金壽恒을 파직시켜라 그리고 춘천에 부처하라!
그리고 그는 며칠 안돼서 사사된다.
송 시열은 제주로 유배를 가는 도중에 서울로 재소환 령이 떨어져 다시 돌아온다.
그가 정읍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던 영의정 金壽恒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 비문을 부탁한다.
송 시열은 쾌히 승낙하여 600여자의 장문의 글을 지어준다
이튿날의 앞날은 아무도 예측을 못하는 법
송 시열은 이튿날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의 사약사발을 받는다. 그리고 사사 된다.
66년이 지난 후 영조31년 1755년 송시열은 文廟에 배향된다.
그리고 조선말까지 송자로 칭송된다.
그러나 찬사는 공허하게 들린다. 영예 또한 노론에 바친 찬사에 불과했다.
사회의 변화와 실천에 목숨을 걸었다면 진정한 성인으로 백성의 가슴에 있을 뗀데…….
그는 士大夫의 계급이익과 當益에 목숨을 걸었다.
결국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을 배제한 그들 나라에 불과했다.
이것으로 송 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 덕일 지음 독후감을 마친다.
논어 위정편에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
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란 말을 쓰면서 이덕일은 글을 마쳤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국민의 판단의 몫이다 이런 견해로 보는 사람도 있구나. 나도 처음 느꼈다.
청주에 팔대성이란 것이 있다.
청주 청원지역에 사는 여덟 가문의 대성이란 얘기인데 이것은 주민의 숫자가 많은 것으로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 것에는 의문이 있었다.
내용을 보면
술음재 한산 이 씨 목은 이 색의 자손
모갈 밀양 박 씨 강수 박 훈의 자손
강촌 여산 송 씨 송 상헌 자손
말 바위 은진 송씨 우암 송 시열, 동춘당 송 준길의 자손
대머리 청주 한 씨 청주관향의 대표대성
민 마루 여흥 민 씨 조선시대 왕후를 네 명 배출한 명문세도가
비산 황주 변 씨인지 원주 변 씨인지 초계 변씨인지 잘 모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어머니를 배출한 명문
너덜이 남양 홍 씨 고려조선 대표 명문서열 1위 집안
이 성씨는 가구 호수로는 대성이 될 수 없는 성씨가 반이 넘는다.
아마 산동의 高靈 申 씨나( 예를 들어 보면: 신 중호, 신 현호, 신 길호, 신 상호, 신 천수, 신 동수, 신 정수, 신 충수 등), 짐대마루의 順天 朴 씨나( 예를 들어 보면: 박 용순, 박 석순, 박 준순, 박 남순, 박 창순, 박 화순, 박 장순, 박 봉순 등) , 갈미의 寶城 吳 씨(예를 들어 보면: 오 도균, 오 의균, 오 완균 등은 확실하나, 오 재현, 오 천규, 오 병진, 오 용규 등은 보성이 아니고 다른 관향일 수 있어 자신 없다만) 登登里, 가속의 文化 柳씨는 청주에 6개 문중이 世居하지만(예를 들여 보면; 류 인영, 류 성걸,류 지열,류 을열, 류 재학, 류 재훈, 류 재찬, 류 재복, 류 수현, 류 우상 등)은 그 성씨들이 대성임을 우리 동창 명부에 있는 만은 친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이 왜 배제되고 소수의 집안을 대승이라 했을까 나는 궁금했다.
그것은 정답은
인구 숫자나 많고, 벼슬과 명망이 높아도 못 낀 성씨는 “노론이 아니었다.” 이다.
20120531
첫댓글 海東乾坤(송석균)이란 지면까지 황송 알차게 꾸며 볼 까하오 매일 들르다보면 쓰고 싶고 퍼 오고 싶고 자주 만나세
양반 보고 쌍놈이라면 화안내고 상놈보고 상놈이라면 막 화내더라 세상이 다그런거지 건강하자
진작에 멍석을 깔아 줄 것을 늦었네 기대가 큼니다
ㅋㅋㅋ 충청도는 지리적 특성상 삼국시대부터 신라,백제,고구려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여 크고 작은 전쟁 와중에 나라의 주인이 수시로 바뀌어 Color가 분명하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매우 힘들었다고하지 아마...이인좌의 난, 정여립의 난으로 한때는 역적고을로 폄하하기도... 벼슬아치들이 말년에 은퇴하여 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내기에 안성마춤인 곳이기도 하고... 비록 세상이 바뀌었다하나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비아냥이나 무능의 상징으로 들리니 이를 어이할꼬....그나저나 삼강오륜을 최고의 통치덕목으로 세운 조선의 신권이 왕권을 능가하여 균형이 깨졌던 500년 당쟁의 역사가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요새 경북지방이 노른들이고 경남이 소론이야, 전라도는 남인이고 충청도는 남인당에 소론생각이고, 노론이 반일세 그곳에서 대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면서 한 생각일쎄
충무공의 모친은 초계변씨입니다 8대성의 변씨 관향을 수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