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단편적으로 가림토(加臨土)문자가 단군(檀君) 시대와 관련성이 있다는 여러 주장들이 있었으나, 가림토(加臨土)문자가 단군(檀君) 시대와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가림토(加臨土)문자가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라는 가설과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에 있어 그 모태라는 가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002년 재야사학자 구길수씨는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이란 저서를 통해서 “천부경(天符經)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이라는 16자로 된 하늘의 교훈이며, 글자마다 고유의 뜻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 글자들은 한자(漢字)가 아니라 고조선 시대 문자인 신지녹도전자(神誌鹿圖篆字)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그는 “한글의 원형인 가림다(加臨多)와 한자(漢字)의 시초인 금문(金文)이 신지문자(神誌文字)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로 내세운 것이 앞서 기술하였던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史官鄕)의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 평양 법수교(法首橋) 아래 기자고천문(祈子告天文), 영변군지(寧邊郡志) 등을 꼽았다.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본격적으로 다룬 사람은 고조선 문자 연구가 허대동 선생이다.
허대동 선생은 1968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영어교육학을 부전공하여 대학 졸업 후 1992년 양산여자중학교 영어교사로 근무 하였다. 허대동씨가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교육과학기술부 성삼제씨의 2005년도 저서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명도전(明刀錢)의 국적이 의심된다는 내용의 문제 제기를 읽고 부터였다. 여기서 잠깐 성삼제씨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간다. 성삼제씨는 2001년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역사교과서 왜곡대책반 실무반장으로 활약하면서, 일본에게 왜곡의 빌미를 주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한국고대사 역사연구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성삼제씨의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서 “명도전(明刀錢) 출토 지역의 분포를 보면 고조선(古朝鮮)의 영역과 거의 일치한다. 만주사의 기초를 닦았다는 중국 길림대 역사학과의 장보촨(張博泉) 교수가 명도전(明刀錢)이 고조선(古朝鮮)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문을 왜 발표했을까.” 라는 의문점을 제기 하였다.
이에따라 2011년 허대동씨는 2년여에 걸쳐 연구, 분석한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에 대한 역서 <고조선 문자>를 발간한다. 그동안 춘추 전국시대 연(燕)나라 청동화폐로 알려졌던 명도전(明刀錢)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들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가 된 고조선(古朝鮮)의 문자(文字)였고, 명도전(明刀錢) 또한 고조선(古朝鮮)의 화폐였음을 밝혔다. 특징적인 것으로는 <훈민정음해례본>의 예시글자를 거의 찾았다는 점과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를 표음문자와 표의문자 양쪽의 시각으로 해석했다는 점, 그리고 한글 외에 갑골문, 제(齊)ㆍ연(燕)ㆍ진(晋)ㆍ초(楚)ㆍ진(秦)나라 한자, 티베트어, 범자(梵字 : 브라흐미 문자)를 비교 분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언어학자인 허대동씨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러한 연구실적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허대동씨의 사촌 손위 처남으로 추정되는 조흥근 법무사의 말에 따르면 “단군조선에서 주조 발행되어 유통된 명도전에 새겨진 글자는,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원래 상형문자에서 나온 소리글자임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한글의 원형임을 알려주고, 단군조선 시대의 문자 체계와 언어, 문화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너무나 중요한 역사자료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허대동씨 자신이 조흥근씨의 검증을 받았다고 술회한 사실로 보아도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조선(古朝鮮)에 문자(文字)가 존재하며, 나아가서 한자(漢字)의 기원이라는 가설이 더욱더 발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를 모방하여 탄생 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였다. 이에대해 조철수(曺哲秀) 교수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를 매개로 히브리문자를 모방해 창제됐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조철수(曺哲秀) 교수는 1995년 소설 <토정비결>의 저자(著者)에게서 가림토(加臨土)문자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가림토(加臨土)문자와 히브리문자의 연관성에 대해 파고들었다고 한다. 조철수(曺哲秀)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근수(李覲洙) 교수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15세기에는 주변국에서 이미 문자(文字)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학문적·사회적 배경으로 보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다른 문자와 음운이론 등을 원용했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점에서 중국유대인이 사용한 히브리문자의 자형이 훈민정음의 자형과 몇 개 유사한 것이 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훈민정음이 히브리어문자를 모방했다고 하는 것은 속단이다. 표음·표의문자의 유형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 서로 비슷한 것이 다수 발견된다. 실제로 중국 갑골문자와 몽골 파스파문자에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글자와 비슷한 것이 보인다.”라고 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다른 문자(文字)를 원용(援用) 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히브리어문자를 모방 하였다는 것에는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 하였다.
사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다. 이렇게 설이 구구했던 것은 1940년 전까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자방고전(字倣古篆: 글자는 고전을 본떴다)이라는 한 구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전(古篆)을 글자 그대로 옛날 한자(漢字: 전서체)로 보는 고전(古篆) 기원설이 등장 하였다. 이는 정인지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과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에서 언급되어 있는 고전(古篆)을 근거로 하고 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고전(古篆)기원설이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 이 설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그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범자(梵字) 기원설이다. 여기서 범자(梵字)는 산스크리트 문자(文字)를 가리킨다. 조선 성종 때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초종성 8자, 초성 8자, 중성 12자의 글자 모양은 범 자(梵字)에 기대어 만들었다.“라며 범자(梵字) 기원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 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도 ”우리나라 언문글자의 모양은 모두 범자(梵字)를 본받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다음은 파스파문자 기원설이다. 파스파문자는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때 제정된 문자로 훈민정음(訓民正音)보다 약 1백70년 앞섰다. 미국의 역사학자 레드야드는 고전(古篆)을 몽고전자(蒙古篆字)의 약자로 보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파스파문자를 본뜬 것으로 간주하였고,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파스파문자 기원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서장(西藏, 티벳)문자 기원설, 창호상형(窓戶象形)기원설, 태극사상 기원설, 거란·여진문자 기원설, 일본 신대문자 기원설, 팔리문자 기원설 등 갖가지 훈민정음(訓民正音) 기원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1940년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된 이후에는 각종 기원설이 세력을 잃고, 세종의 친제(親制)설이 득세 하게 되었다. 하지만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발견 이후에도 각종 기원설이 간간이 나왔다. 그중 일반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라는 가림토(加臨土)문자 설이다. 과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을 토대로 탄생하였다는 가설은 사실일까?
1940년까지 경상북도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그의 선조 이천(李蕆)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의 발견으로 그동안 제기 되어왔던 여러 가지 가설들은 모두 일소 되었고 발음기관 상형설(象形說)이 제자원리(制字原理)였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을 토대로 탄생하였다는 가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 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기록들이 있다. 세종실록,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의 정인지 서문,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최만리 상소문이다.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언문(諺文)이 옛 글자인 전(篆)의 모양을 본떳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이를 가림토(加臨土)문자를 토대로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
<세종실록 1443년 12/30>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世宗)께서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렀다. 세종(世宗)께서 새로운 문자(文字)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된 시기는 아래와 같이 1426년에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를 내린 것으로 보아서 알수가 있다.
1443년 7/22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번에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밀봉(密封)하여 아뢰게 하라.’ 한 것은, 유사(有司)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친히 보겠다는 말이다. 전날에 김충(金忠)에게 명하여 본원(本院)으로 하여금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의 구례(舊例)를 상고하여 보고하게 하니, 본원(本院)에서 아뢰기를, ‘지난 병오년에 말을 구하신 교지 외에는 다른 때에 말을 구하신 교지에 밀봉하라는 말씀이 없었사온데, 지금 교서(敎書)에는 밀봉하라는 교지가 있사옵니다.’ 하였으니, 알지 못하겠다.”
따라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종(世宗)께서 10여년을 연구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음운체계를 갖추고, 문자(文字)로서 확립된 것은 이로부터 3년후인 1446년에 이루어졌다. 일설에는 세종(世宗)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친제(親制) 하였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세종(世宗)께서는 직접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어서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호칭한 것이므로, 친제(親制)라는 말은 맞는 것이다. 다만 실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이 가림토(加臨土)문자를 토대로 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종실록의 자방고전(字倣古篆)이란 문구를 가지고 세종(世宗)께서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었다고 한다.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 라는 문구중 고전(古篆)이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라고 한다. 전자(篆字)는 진(秦)나라 때의 소전(小篆)이 발전하여 송(宋) 시기에 접어들어 각 지방과 인근 국가들에서 여러 가지로 변형 되어 쓰여지고 있었다. 세종(世宗)께서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였다면, 고전(古篆)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고문(古文)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 아래 최만리(崔萬理)의 상소문을 보자.
“언문(諺文)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고 하시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최만리(崔萬理)의 말은 세종(世宗)께서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모방 하였다고 하였으나, 음(音)과 글자의 조합이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근거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하여 중화(中華)의 것을 빌어다가 음(音)을 변형시켜 사용해온 이두(吏讀)도 그러한데, 내가 창제한 언문(諺文)이 음(音)이 다르다고 하여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서(韻書)를 아느냐고 하였다.
운서(韻書)는 한자(漢字)를 그 운(韻)으로 분류 주석한 것이다. 운서(韻書)의 효시는 양(梁)나라 심약(沈約)이 사성보(四聲譜)를 지음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나, 운서(韻書)다운 체제를 갖춘 것은 위(魏)나라 이등(李登)이 찬한 성운(聲韻)인듯 하고, 그 뒤에 진(晉)나라 여정(呂靜)이 찬한 집운(集韻) 등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운서(韻書)들을 종합 정리해서 언어정책상 가장 유용하게 활용된 것은 수(隋)의 육법언(陸法言)이 지은 광운(廣韻), 송(宋)의 정도(丁度)가 지은 집운(集韻), 송(宋)의 황공소(黃公紹)가 지은 운회(韻會) 1202년 편찬, 명(明) 나라 태조(太祖)의 명에 따라 편찬한 홍무정운(洪武正韻) 1375년 편찬 등이 있다. 따라서 세종(世宗)께서 말하는 운서(韻書)는 1375년에 편찬된 홍무정운(洪武正韻)이다.
신숙주(申叔舟)의 홍무정운(洪武正韻) 서문(序文)에 “우리 세종 장헌대왕께서 운학(韻學)에 유의하시어 끝까지 궁구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몇 십 글자를 만들어 놓으시니, 사방에 있는 만물의 소리를 전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우리 동방 선비가 비로소 사성(四聲)ㆍ칠음(七音)을 알게 되어 저절로 갖추지 못할 것이 없으며, 특히 자운(字韻)에만 한정될 뿐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세종(世宗)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하실 때 중화(中華)의 운서(韻書)를 참고 하였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다.
세종(世宗)께서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불렀다. 라고 하였는데, 언문(諺文)은 무엇인가? 최만리(崔萬理)가 말하길 “신라(新羅)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다. 이두(吏讀)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簿書)나 기회(期會) 등의 일에 방애(防礙)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라고 하였다. 이두(吏讀)는 야비한 이언(俚言)이라 하였는데, 이어(俚語)란 사투리 또는 야비하고 속된 말을 지칭한다. 우리말을 훈민정음(訓民正音) 본문에서는 ‘국지어음(國之語音)’이라 하였고, 해례(解例) 종성해(終聲解)에서는 ‘언어(諺語)’ 또는 ‘언(諺)’이라 하였으며, 합자해(合字解) 결(訣)과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서는 ‘방언이어(方言俚語)’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두(吏讀), 이언(俚言), 방언(方言)은 모두 같은 뜻이다.
언문(諺文)에 대해 살펴보면, 언(諺)자는 일찍부터 교훈(敎訓)이나 풍자(諷刺)등이 들어 있는 격언(格言) 혹은 예부터 내려오는 지혜가 담긴 멋진 속담(俗談) 등의 뜻으로 써온 글자로, 고언(古諺)이나 귀언(貴諺)으로 쓰여왔다. 그런데 이 언(諺)자가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의 경전들이 생겨난 이후, 중국(中國)에서는 리언(里諺: 촌스러운 말), 야언(野諺: 거친 말)이라는 말에도 쓰이게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언문(諺文)은 향찰, 토씨 글자, 이두문(吏讀文)을 이르는 말이다. 세종(世宗)께서 예부터 쓰여왔던 언문(諺文)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혀 쓰도록 새롭게 언(諺)을 위한 문(文)인 소리글 28자(字)를 지었던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은 세종(世宗)께서 예부터 쓰여왔고, 존재하던 언문(諺文)인 향찰, 토씨 글자, 이두문(吏讀文) 등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익혀 쓰도록 하기 위해서 새롭게 중화(中華)의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음(音)을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조합하여 소리글 28자(字)를 지었던 것이다. 또한 언문(諺文)을 정음(正音)이라고도 했던 이유는 곧 ‘한글’이 뛰어난 언문(諺文)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말 한자(漢字)’를 위한 정음(正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탄생이 이러할진데, 이를두고 고조선(古朝鮮) 문자(文字)라는 가림토(加臨土) 글자체(字體)를 모방하였다는 주장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고대 문자(文字) 가림토(加臨土)가 존재 하였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분석한 결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수 없었다. 다만 내몽고 및 동만주(東滿洲)에 거주하던 우리 민족계열 종족들이 의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부호문자(符號文字) 및 갑골문(甲骨文)까지 사용 하였음을 유적으로 입증 되었음을 알았지만, 그 이후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는 어떠한 문자(文字)를 사용 하였는지를 알수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이점이 아쉽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종(世宗)께서 우리글인 한글을 창제 하셨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리민족의 최대 선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