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미나리
질벅질벅한 무논에 마구 심었다. 개울에서 뽑거나 뜯어온 미나리를 긴 것은 뚝 뚝 잘라 뿌리듯 흩어놨다. 살면 살고 죽으면 ‘할 수 없지’ 하는 식이다. 뒷날 그것들이 잘 자라 햇볕에 반짝거린다. 어릴 때 미나리꽝 하는 것을 그렇게 봤다. 약간 향긋한 게 무쳐놓으면 맛났다. 또 부드러운 것을 비벼서 먹기도 했다.
날것을 초장에 찍어 드니 사각사각한 게 좋았다. 언양과 청도에 싱싱한 것이 나와 한 줌 사 왔다. 날 것으로나 데쳐도 다 맛나다. 담은 그릇에 찰거머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게 어디서 왔나 봤더니 줄기에 들앉아 있다가 나온 것 같다. 작고 뭉툭한 게 길게 늘어뜨릴 땐 징그럽다.
고향 갈 때 쉬면서 시냇가에 발을 적셨다. 주위에 미나리가 많아 낫으로 꼴 베듯 쓸어모았다. 불미나리로 한아름 잔뜩 담아 실었다. 이듬해에도 들러 위쪽에서 많이 거뒀다. 어찌 소복소복 가꾼 듯이 무럭무럭 자랐다. 미나리에 맛 들여서 곧잘 먹는다. 갈 때마다 들렀는데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싹싹 베었더니 잡풀에 덮여 시들해졌다.
하나씩 난 것은 못나고 억센데 무리를 이룬 것은 곧고 부드러웠다. 고향 갈 일이 없어지자 미나리 뜯던 도촌도 그만 멀어졌다. 부모님 살아계시던 수십 년 전 일이다. 고속도로가 없던 그때 시골길은 꼬불꼬불하다. 갑령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서 이 마을 저 동네를 수없이 지난다. 덜렁덜렁한 고물차를 몰고 진종일 달려야 해 그름에 이른다.
손이 심심해서 아내 좋아하는 텃밭을 거들며 이것저것 가꿨다. 양달은 배추와 상추, 무, 고추, 쑥갓인데 나무 아래 응달은 뭘 심을까 하다가 돌나물과 달래, 참나물, 미나리를 심기로 했다. 물이 흥건한 무논 꽝을 만들어야 하는데 맨땅에 그냥 심었다.
바닷가이다. 큰 도로가 이곳저곳으로 나자 삼각형으로 갇힌 쓸모없는 땅이다. 봄날 쑥 캐다가 갈대와 쑥대머리를 뽑고 쓰레기, 돌을 들어내 밭을 만들었다. 땀 흘리며 한 발 두 발 늘려 만드는 재미가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보곤 여럿이 달려들어 빈 땅이 모두 텃밭이 됐다. 농기구와 물통 움막까지 치니 흉물스럽다며 그만 구청으로부터 쫓겨나게 됐다.
그곳에다 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만들었다. 처음은 부모 같은 늙은이들의 놀이터라 여기고 허락했다. 얼마 뒤 ‘미세먼지 차단 숲’을 만들면서 모두 나가게 했다. 10여 년 아기자기하게 다독였던 정든 땅이다. 그래도 아내와 자주 들러 저벅저벅 멋진 공원 숲과 자갈길을 밟았다.
끝자락 두 길 아래 도랑이 있고 좁은 터가 보였다. 쇠 동가리와 시멘트 조각, 쓰레기, 돌덩이 등 엉망진창 자투리 구석 땅이다. 나무가 얼기설기 자라 응달진 곳이어서 음침하기 그지없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알 수 없는 곳이다. 뽕나무 아래 엉덩이 짝만큼 다듬었다. 텃밭 만드는 일이 이래서 재밌다.
치우고 뒤집는 일에 이골이 생겨 자꾸 늘어나 동서쪽이 엄청 길쭉하다. 풀 베는 낫 들고 한참을 걸어 다녀야 한다. 강물과 바닷물이 들랑날랑하게 깊은 고랑을 팠다. 이걸 왜 팠을까 했는데 낙동강 하류 장마 넘침을 위해 곳곳에 물 저장 골을 파 둔 것이다. 조금 간간한 기수이다. 말끔히 다듬어놓고 보니 신기도 해라.
떡붕어와 굵은 숭어가 스멀스멀 다니고 큰 뽕나무와 소사나무가 그늘을 만들었다. 거기다 둑에 산딸기나무를 심어 오뉴월엔 붉고 검은 딸기와 오디가 오롱조롱 널린 꿈같은 낙원이다. 불모산 아래 개울에서 줄기 대가 붉은 잔잔한 미나리를 한 바구니 캐왔다. 첫해는 실실 기어 다니며 사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듬해 쑥쑥 자랐다.
개울가 축축한 땅이어서 잘 컸다. 부추 베듯 밑둥치를 잘랐다. 또 올라오겠지 했는데 아니 이게 어쩐 일인가. 싹틀 생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도촌의 그 부드러운 미나리가 벤 자리엔 나지 않았다. 기척이 없다. 잘 커라 비료를 한 줌 줬는데 그래선가. 구석으로 난 것을 모아 또 심었다.
올해는 풀썩 자라 무성하다. 이걸 어찌 베어야 하나 조심스럽다. 벌레도 안 먹고 반들거리는 게 귀엽고 예쁘다. 연하고 맛나게 생겨서 정말 날 것을 막 씹어 뜯어먹을까 보다. 이번엔 밑둥치를 남겨두고 윗부분을 조금씩 잘라냈다. 데쳐서 반찬으로 만드니 좋다. 몇 해 만에 겨우 이룬 일이다. 농사는 마구 심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무논이 아닌데도 잘 자랐다. 모두 물속에서 키우는데 난 마른 맨땅에 심었으니 얼토당토아니한 일이다. 어쩔 수 없어서 그리했는데 이게 어딘가. 그늘엔 아무것도 안 되는데 쑥쑥 자라는 게 대견해라. 거기다 거머리 빌붙는 게 없어 보이니 괜찮다. 배추벌레와 고추 노린재, 뜨물, 민달팽이도 보이는데 살충제를 흩뿌리지 않고 같이 산다.
채소는 다 조금씩 독성이 있고 벌레와 알이 남을 수 있다. 삶고 데우면 약해지거나 없어질 수 있다. 지난날 채독에 걸려 농사철에 일 못하고 아파 골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생채와 쌈을 좋아해서 기생충이 몸 안에 들어와 이곳저곳 다니며 해치고 막기 때문이다. 산토닌 약을 먹으면 새벽에 창문이 노랗게 보인다.
꼬물꼬물 작은 요충과 꾸물꾸물 징그러운 큰 회충이 구불텅구불텅 밖으로 나온다. 창자 벽을 뚫고 여기저기 다닐 때 찢어지는 아픔으로 횟배앓이를 했다. 긴 창자 안에 활개 치고 다니며 오장인 폐장과 간장에도 희뜩희뜩 붙어 지낸다. 낚시나 도랑 치다 잡은 붕어를 그냥 먹거나 초장에 찍어 술 한잔과 곁들이기를 즐겼다. 다 오래 못 살 짓거리다.
못 먹는 풀이 없다. 들판이나 시냇가, 산기슭의 나뭇잎도 거의 다 날것으로 먹어 치운다. 그러다 독성이 심하게 쌓이면 위아래로 토하고 설사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배를 채웠던 때였지만 지금은 일삼아 아니 놀기 삼아 텃밭을 가꾼다. 아직도 상추쌈과 배추, 무 겉절이를 그냥 먹는다.
잎에 알과 벌레가 붙었다. 들깻잎은 벌레가 즐겨 먹는다. 대파도 속에 들앉아 파먹는다. 미나리는 대 속에 숨어들어서 날것을 먹을 때 입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달래나 돌나물도 양념에 버무려 먹게 된다. 아직도 들나물을 그냥 먹는 버릇이 남았다. 그래도 풋풋한 냄새의 미나리는 자꾸만 그대로 먹고 싶어라.
쌉쌀한 조선 상추에 상큼한 미나리와 맵싸한 풋고추를 얹어 토장을 넣고 씹어보라. 안 먹고 배길 건가.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넓은 문장력 늘 감탄합니다
올해는 한재 미나리 한 번 오시지 못했지요
옛애기면서 현실입니다
감사합니다
상동 역 앞 다슬기탕 맛날 것 같습니다.
어디 좋은 데 있으면 갑사다.
미나리...ㅠ
저만아는 비밀이 있어서, 절대 안먹습니다.ㅠ
아무리 좋은향이 있어도.....맛있게 드신다니 자세히는 말씀 못드리겠습니다.ㅋㅋ
장마철이라 하늘이 우중충합니다.즐겁게 보내세요!!
맛 나는 미나리에 무슨 큰 비밀이---
그럼 삶아서 먹을 게요.
거머리 그게 걸렸는디ㅣ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