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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YMCA에서 탈출에 성공하다
증 언 자 :윤기권(남)
생년월일 :1962.1.16(당시 나이 18세)
직 업 :고등학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5
개요
고등학교 3년생으로 시위에 참여 18일 동명동 쪽에서 경찰차 부수고 경찰을 인질로 삼음. 30일 MBC방송국, 세무서가 불탈 때 시위대열 속에 있었음. 21일 광주여고 쪽 신흥주유소 앞에서 공수들이 난사한 총알이 팔꿈치를 스침. 26일 밤 YMCA에서 시위대와 함께있다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자 탈출.
민주화의 새봄
나는 전라북도 정읍군 입하면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국민학교 4학년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다 광주로 이사를 했다. 전남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대학생 형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나는 '왜 그럴까?' 이상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히 풀어지게 되었다. 어렴풋이 내 주변을 통해 사회의 모순들을 알게 된것이다. 세계사와 세계정치에 관한 책들을 도서관에 처박혀 혼자 공부했다. 자연과학 쪽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고 사회과학 서적에 골몰하게 된 것이다. 특히 대동고등학교 다닐 때 박석무 선생님을 만나 그선생님 시간인 영어시간에 참다운 애국애족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이 들었고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질문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10·26이 일어났다. 박정희가 죽자 민주화의 새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전두환 일당이 나서서 민주화의 싹을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언론을 장악해 민주운동을 탄압하고 유신독재 체제를 재현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그래서 1980년 5월에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5월 16일 나는 학교수업을 마치고 도청 앞에 나가보았다. 그날은 마침 횃불시위가 있는 날이었다. 2천여 명의 시위대열을 경찰들은 옆에서 고생한다는 생각으로 바라보면서 저 있는 듯했다.
경찰을 인질로
5월 18일 일요일이어서 오후에 시내에 나왔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는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수많은 경찰들과 5백∼1천 명 가량의 시위군중들이 서로 대치해 싸우고 있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페퍼포그차는 시민들을 향해 질주해 오면서 최루가스를 뿜어댔다. 최루탄을 얼마나 많이 쏘아대던지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었다. 시민들은 빠져 나가려고 서로 밀고 넘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사람 죽인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청년이 외쳤다. "좁은 골목으로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다치니까 천천히 갑시다." 최루탄을 보아대면 그렇게 흩어졌다가 조금 후에 다시 대열을 지어 격렬하게 시위하였다. 매운 최루가스와 경찰들에게 밀려 현대극장 쪽으로 쫓겨갔다. 그곳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천변을 통해 동명동에 있는 동산파출소로 쳐들어가 파출소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낸 다음 짓밟아버렸다. 파출소 안에서 근무하던 경찰 둘은 우리들의 기세에 눌려 뒷문으로 도망가버렸다. 4시경 우리는 다시 법원 쪽으로 갔다. 산수동으로 가는 도로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파출소를 깨부순 기세로 우리는 쫓아가 돌멩이와 각목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안에 타고 있던 10∼15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그들은 두꺼운 진압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있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서 우리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봉선화 등을 불렀다. 또 훌라송에 맞추어 '전두환이 물러가라, 좋다 좋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좋다 좋다' 등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갑자기 지프차를 탄 계엄군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곤봉을 휘둘러댔다.대열은 급습을 받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수는 10∼15명 정도로 숫적으로 우리 시위대보다 훨씬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고 난폭하게 굴었다. 나는 도망치는 사람들 틈에 끼여 근처의 아무 집으로나 들어갔다. 나는 그 집 부엌에 숨어 있었다. 땅거미가 밀려오면서 캄캄해질 무렵에 밖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그집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골목에 모여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연행해 갔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이미 공수들도 경찰들도 사라져버린 뒤였다. 나는 동명동에 있는 작은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보니까 비상계엄 확대조치로 통행금지 시간이 8시로 앞당겨졌다고 했다. 집으로 가려면 통행금지에 걸리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9시라고 정정발표를 했다. 걸어서 집으로 오는데 평화스럽던 평상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시내는 어수선했다. 돌멩이들이 나뒹굴고 상가들의 문이 대부분 닫혀 있었다.
시위대와 함께
19일에 학교에 갔더니 휴교령이 내렸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젠 자유스럽게 시위대열에 참여할 수 있겠다 싶어 기뻤다. 가방을 던져놓고 도청 앞으로 갔다. 골목에서 깃발을 세우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힘차게 나왔다. 나는 비록 고등학생이었지만 대학생들의 민주화를 위한 애국적 투쟁이 강력해지기를 바라면서 시위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았는지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여 강제로 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후로는 감시를 당해 밖에 나가지 못했다. 30일 저녁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MBC방송이 나오지 않더니 조금 있으니까 KBS방송도 나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보니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시민들이 계엄군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시내로 향했다.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시내로 나오니까 각목을 든 몇몇의 청년들이 있어 도청 앞에서 합류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제봉로로 갔을 때 이미 MBC방송국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MBC방송국이 불타는 것을 지켜보다가 대열과 함께 세무서를 향해 갔다. 시민들이 떼지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세무서 직원들은 미리 피해 버렸는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국민의 세금을 받아 독재정부를 지원하는 세무서가 불타버리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20명 정도 트럭에 타고 차체를 각목으로 두들기면서 외곽도로를 달렸다. 우리는 화정동 로터리에서 내렸는데, 저쪽 편에서 계엄군들이 계속 지키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번은 시외버스 한대가 지나가자 시위대측에서 붙잡아 "시위하는 데 쓰자"고 했다. 운전수가 잔뜩 겁에 질려 "좀 봐달라"고 애걸복걸하여 그 차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오전에 우리는 다시 금남로로 와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시민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고 전옥주라는 여자가 계속 마이크로 방송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학생들이 처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힘을 합쳐서 계엄군들을 몰아냅시다. "
부상
그때 총소리가 났다. 나는 광주여고 쪽에 있는 신흥주유소 앞으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내 오른쪽의 팔꿈치를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픈 줄도 모르고 엉겁결에 피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한 청년이 부축하여 동명동 쪽에 있는 제일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 아주머니가 응급처치를 하여 팔 위쪽을 노란 고무줄로 동여매주었다. 그 청년을 따라 어느 체육관에서 조금머물다 진정이 되자 작은집으로 가겠다고 나왔다. 작은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다. 우리 집에는 전화가 없어서 연락하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오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시위군중들에 의해 공수들이 쫓겨 가버리고 난 후여서 광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았다. 그날부터 적십자병원으로 치료를 하러 다녔다. 부상자들은 병원 복도까지 쌓일 정도로 많았다. 병원에서는 피와 의약품이 맡이 모자라는 모양이었다. 나는 마취도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다섯 바늘을 꿰맸다. 간호원은 아플 텐데 잘 참는다고 하였다. 치료가 끝나면 반드시 도청 앞의 집회에 참여하여 시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손을 흔들어 성원해 주었다. 시민들과 얼싸절싸 어울린 기억만 날 뿐 집회내용은 기억에 없다. 상무관에는 태극기로 덮여진 관이 마룻바닥에 40여구 정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붙들고 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도로에서도 시민들이 가마니로 덮은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다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5일경에는 대열 속에서 '김대중 씨 석방하라'는 피켓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 나는 김대중 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도 진보적인 정치인이 아닌 보수적인 정치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이덕준이라는 친구가 그것을 들고 다니라고 해서 든 것뿐이었다. 도청 앞에서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탈출
26일 시위대를 따라다니다가 그날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도청 앞에 있는 YMCA에서 잠을 잤다. 항상 덕준이와 1년 후배인 유석이와 함께였는데 2백 ∼3백 명 정도였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청년이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총이 모자라 각자 총을 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설명만 들었다. 밥은 도청에서 직접 여대생들과 아줌마들이 해가지고 왔다. 우리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모두 앉아서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직접 일어나서 질문도 하였다. "사람들은 보통 우리나라를 말할 때 남한만을 말하는데 실질적으로 삼천리 강토 전체의 사람들이 전부 우리나라가 아닙니까?" "오랫동안 분단이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남한만으로 생각하게 된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청년이 대답해 주었다. 우리들은 체계적으로 토론을 벌인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모여앉아 중구난방으로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지자 마룻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나는검정교복을 입고 있어서 매우 추워 웅크리고 잤다. 새벽 3시경 누군가가 "계엄군들이 밀고 들어온다"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모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부상때문에 YMCA 밖으로 나가지 않고 헬스 클럽으로 들어가 엎드려 있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가까이서 들리니까 무서웠다. 잠깐 밖을 내다보니 바로 문 앞에서 총 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그 청년이 총을 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헬스 클럽에 엎드려 있다가 위험할 것 같아 그 안에 있는 샤워 장으로 들어갔다. 문이 녹슬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곳인 듯했지만 문을 밀어보니까 열렸다. 안으로 문을 잠가버린 다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는지 날개 소리가 굉장히 시끄럽게 들리면서 숨어 있는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계속해서 방송을 했다. 나는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긴장과 공포 속에서 자수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자수하여 끌려가면 고문도 받고 신세도 망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오지 않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조금 후 계엄군들이 와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아무런 기척도 없자 그냥 돌아가는 것 같았다. 샤워장 안을 살펴보니 녹이 슨 창문 하나가 보였다. 나는 그것을 뜯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식당이 있는 골목이었다. 나는 그식당 장독이 놓여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 숨었다. 계엄군이 오면 마치 그 집 식구인 것처럼 행세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계엄군은 오지 않았다. 11시쯤 되어 나는 학생회관 앞 골목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학생회관 골목, 광주천 골목, 사직공원 옆에서 세 차례나 검문을 당했다. 무장을 한 2명의 군인들이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신분증은 없고 지금 작은집에서 우리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때마다 무사히 통과되었다. 그 후 학교에 등교했는데 YMCA에서 같이 지냈던 덕준이와 유석이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27일 계엄군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그들은 얼마 후에 풀려나 학교에 왔다. 나는 덕준이에게 물어보았다."어디에서 잡혀갔냐?""YWCA앞에서 석이랑 잡혀갔어." "잡혀가서 별일없었냐?" "신나게 두들겨맞고 잠도 마룻바닥에서 잤다. " 나 혼자만 탈출에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뒤 5·18에 참여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아도 계엄군의 손아귀에서 탈출했다는 사람은 없었다. 5·18에 대한 진상규명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등이 나와 반민족적 범죄행위를 시인하고 죄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민중항쟁이 통일로 이어지면 자신의 이익이 없게 된다는 것 때문에 민중항쟁을 탄압하는데 동조한 미 제국주의자들도 뉘우치고 물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순순히 그렇게 하기란 만무하다. 지금 그들이 그대로 집권하고 있는 이상 5·18의 진상규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방법은 온 민중이 반독재투쟁에 적극 동참하는 길뿐이다. (조샤·정리 장옥근)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휴일저녁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