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미술책 읽으려 시작한 공부, 인생을 바꿨다
최익현 기사입력 2023-10-20 10:43 제187호
서울 종로구 와룡동 38-2 이묵헌. 1976년 서울 종로구 와룡동 38-2 동피맛골의 이묵헌에서.이당 김은호 선생님 조선조 최후의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 선생의 돈화문 앞 작업실 겸 자택이다. 〈독서신문〉에서 이당 선생님의 특집기사를 보고 그동안 그렸던 그림 몇 점을 말아들고 이묵헌을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충남 공주 고향집에서 신문배달, 연탄배달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에는 갈 수 없다는 다짐을 하고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녔던 터라 내가 시골에서 평생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대답도 쉽게 얻기 어려웠지만, 중·고등학교 때 계속하던 미술활동을 놓기는 정말 싫었다. 연탄배달을 마치고 집에 와서 여섯 식구가 잠든 안방 한 쪽 흙벽에 화판을 기대놓고 이불을 깔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아래). 1975~1976 고객의 집에 연탄배달을 갈 때마다 그 집에서 사육하는 꿩을 스케치했다. 무작정 상경, 이당 문하에서 미술 공부 이당 선생님께 엎드려 절하고 시골에서 그림 공부를 하면서 동양화에 대해 선생님께 자문을 여쭙고자 서울에 올라왔다고 말씀드리고 나서 가지고 간 꿩그림과 몇 점의 그림을 펼쳐 보였다. 내그림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말씀을 한참 듣고 연락처를 남겨두고 가라고 하셔서 주소를 남겨놓고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여전히 그림을 그릴 생각이 변치 않았다면 서울로 올라오라’는 엽서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하며 상경해 그날부터 이묵헌에서 살게 됐고 이후 그림 그리는 행복한 삶이 47년간 이어졌다. 만 원 짜리 지폐에 들어갈 세종대왕 영정을 그리면서 조언을 들으러 자주 찾아오던 운보 김기창 화백을 비롯해서 나중에 군대에 다녀온 후 10년동안 함께 살며 지도를 받게 되는 혜촌 김학수 선생님 등 하루하루 찾아오는 당대의 유명한 선배 화가들과 문인들 문화계 인사들은 시골이나 대학에서는 도저히 만나보기도 힘들거니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어마어마한 분들이었으니 미술대학에 가지 못한 대신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서 만사를 잊은 채 그림공부만 할 수 있었던 시간은 내게 그렇게 행운일 수가 없었다. 경주 옥산서원 1990 (147cm X 74cm)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일들이 화단에서가 아니라 방송대에서 펼쳐졌다. 1990년에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이후 일본과 중국의 미술 서적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한문 공부를 더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엔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라서 중국에 가서 미술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던 때였다. 우연히 대학로에서 방송대 입학 원서를 발견하고 다음날 공주에 내려가 졸업장과 성적증명서를 발급 받아 원서접수 마감시간 빠듯하게 중어중문학과에 입학원서를 낼 수 있었다.
부슬부슬 보슬비가 살짝 오던 날 효제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렸다. 입학식에서 만난 중문과 학생회 선배들은 나를 대학교수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응원하며 이끌어주셨다. 나는 그날 이후로 중문과의 크고 작은 모든 행사를 찾아 선배님들을 따라 다녔고 이것은 신이 내게 다른 세계를 선물하는 기초가 됐다. 효제 초등학교에서 열린 입학식 1991
강남서초스터디와 총장배 어학경시대회 마침 내가 살고 있는 가락동에서 교통편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방배동 강남서초스터디를 추천해줘서 가입했다. 지하철을 타고 스터디에 가면서 책을 보기도 좋아서 스터디에 꼬박꼬박 나가 선배님들로부터 중국어 기초를 배우게 됐다. 동양화를 하면서 공부한 한자와 한문 실력이 바탕이 돼서인지 독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나이가 가장 많았던 덕분에 꾀를 부리거나 게으를 수가 없었던 것도 공부에 집중하게 만드는 약이 되었다.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대학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젊은날 대학생활에서 누리지 못했던 축제라든가 MT, OT, 일일주점 등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습을 본 어린 동기들도 기꺼이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선배 중에 나이가 20세인 분도 계셨지만, 동기 중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방송대에 입학했던 10대 후반인 친구도 있어서 나이 많은 내가 열심히 참여하는 모습은 그들에게도 자극제가 된 것 같다. 2학기 때는 선배님들이 스터디에 시간을 내기 어렵다면서 중국어 한 과목은 내게 수업을 맡기셨다.
가을의 제2회 중문과 어학경시대회에 나도 나이는 많지만 대학생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에 동기들과 함께 열심히 준비해서 참가했다. 어학경시대회 초기라서 참관인원을 많이 유도하기 위해 바로 옆 건물에서 기초중국어 특강을 진행했다. 특강을 들으러 온 김에 끝나고 어학경시대회를 참관하게 되면 확실히 중국어 학습에 자극도 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좋은 의도였다. 그러나 학생회 선배님에게 물어봤을 때 특강을 듣고 와서 참가해도 된다는 부정확한 안내를 믿은 게 실수였다. 공부를 좋아하는 1학년 본선진출자들이 특강을 듣는 사이에 1학년 본선 필기시험이 진행돼 서울지역 본선진출자들이 모두 실격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뜻하지 않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접하게 되자 모두들 2학년 때는 학과 행사에 등을 돌리게 됐고 나 혼자서 그들의 몫까지 이를 악물고 열심히 준비해서 2학년에게 대상을 수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경시대회 초기였기 때문에 1학년 때의 낭패를 회복하려는 나와는 달리 3, 4학년 선배들은 나보다 실력은 나았지만 가볍게 즐기는 수준으로만 준비를 했을 거라고 회상해본다. 방송대의 자랑, 중문과의 자랑, 총장배 중국어어학경시대회및중문예술제 (사진은 2023년 대회) 그해 8월에 중국과 수교했기 때문에 대상 수상자에게는 중국 어학연수가 특전으로 주어졌다. 고막을 찢는 폭죽소리와 함께 화약 냄새로 가득한 북경외대 기숙사에 들어간 날이 중국의 명절인 1993년 춘절 새벽 0시. 여기서는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학생, 경상대학교 한문 교수 등도 함께 연수를 받았기 때문에 방송대 경시대회 대상 수상자로서의 명예가 어깨를 짓눌렀고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떤 날은 북경외대의 원어민 宋栢年교수님이 수업 도중에 한국외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김성태 동학에게 중국어 발음 교정을 받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권고를 하시는 바람에 방송대 학우들의 어깨를 한껏 들뜨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중국에서 재미있게 연수를 마치고 온 후에는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 주자는 생각으로 스터디 후배들의 중국어 수업을 맡아 일주일에 서너 과목씩을 가르쳤었고, 지금까지 중국어경시대회 참가자들은 거의 전담으로 지도했다. 그중에는 강남서초에서 대상 수상자가 네 명, 최우수상 수상자가 20명이 넘게 나왔고, 타 스터디에도 튜터강사로 특강을 나가서 포기하겠다는 학생을 쫓아다니며 1학년부터 4년 동안 계속 독려해 가며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타도록 도움을 준 학생도 두명이 있으니 대상 수상자를 6명을 길러낸 셈이다.
특히 1995년에는 중문과에서 전국의 방송대지역대학 스터디의 중국어 지도자들을 동숭동 대학본부에 초청하여 1박2일로 숙식을 제공하면서 교수법 특강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재학생으로는 유일하게 교수님들과 나란히 강의를 맡아 중국어발음 강의를 하는 황송한 경험도 하게 되었었다. 후일 가장 잘 나간다는 종로 유명 중국어학원의 운영자 한 사람이 그때 서울지역 스터디재학생으로 참가해서 들었던 내 발음수업에서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고 그 덕에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을 때의 뿌듯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경험들은 일종의 수준 높은 교생실습과 같아서, 내가 졸업 후에 중국어 강의를 하고 교수가 되는 과정에 더할 나위 없이 큰 도움을 준 신의 선물이었다.
'라오스'와 튜터 그리고 대학교수로 대학 졸업 후 우리나라에 유일한 유명 중국어전문학원의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면서 한국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장이셨던 학과장님으로부터 “방송대 졸업했으면 중국어는 잘하겠네”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첫 인사를 나누고는 방송대 선배들이 쌓아 놓은 명예로운 전통에 누가 되지 않기를 다짐하며 대학원 생활을 마쳤다. 2005년 5월 방송대 중문과 학생회(학생회장 김경미)에서 처음으로 1박2일의 중문어학캠프를 충남 도고온천에서 개최했는데 나는 전국의 학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광스럽게도 10년 전과 똑같이 교수님들과 강의를 맡게 되어 중국어발음을 강의했다. 제1회 중문어학캠프 입소식(오문의 김성곤 김성태2005.05.07) 대학원을 마치게 되니 학원이 아닌 몇몇 대학과 모교인 방송대 중문과에서도 3년간 튜터로 강의를 했고 후에 의정부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임명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학원 강사도 마찬가지였지만 대학교수 직책도 이력서 한 번 써본 적 없이 스스로 먼저 나를 불러 강의를 부탁하던 정황이었기에 나는 당당하게 방송대 튜터와 교수 일을 동시에 하겠다고 대학 이사장님께 허락을 받았고 총장과 이사장을 설득해 방송대 총장배 어학경시대회와 똑같은 시스템으로 중국어경시대회를 개최하면서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중국어를 지도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인데도 중국정부에서 후원한 전국고등학교 중국어말하기대회에서 외고 학생들도 달성하기 어려운 전국 최다 본선진출자를 배출한 학교라는 특이한 기록을 남기게 되어 교장 교감선생님과 총장 이사장님을 기쁘게 했다.
2016년부터는 중국 안휘성의 합비대학에 2주 일정으로 중국어 어학연수 시스템을 체결하고 여름방학에 학생들을 데리고 내가 개설하고 운영하는 다음 '중국어발음클리닉 카페' 정모를 겸해 연수를 가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은 방송대에서 체득한 중요한 학습시스템이다. 중국의 한국어과 학생들은 '중국어 공부하는 한국어원어민'과, 그리고 한국의 중국어 학습자들은 '한국어 공부하는 중국어원어민'과 2주동안 동행하는 이 시스템은 1993년에 중국은행 서울지점의 중국인 직원들과 방송대중문과 학생들이 현충일 휴일에 1:1 강화도 전등사 여행을 시작으로 6년간 진행했던 방송대중문과 한중교류의 경험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 행사는 외환은행에 다니던 한 선배가 기획했던 행사이고 나는 3학년 재학생으로 통역만 담당한 것이었는데 그 선배가 졸업한 후에는 내가 계속 기획하고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에도 20명:20명이었고, 지금도 20:20의 구성으로 연수를 진행하지만 합비대에서는 오전강의 오후여행 + 황산여행으로 달라졌다. 포청천과 황산을 만나는 2주 연수는 수도권 일일소풍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만약 내가 방송대 중문과에서 공부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며 중국어 공부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 있었을까? 방송대는 여러가지로 내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20년 중국어발음클리닉 카페 여름방학 합비대 어학연수 수료식을 마치고(앞줄 오른쪽 许港, 胡荟,김성태) 인생을 바꿔준 방송대 공부 요즘은 이미 여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방송대학에 입학해서 은퇴 후에도 자신이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는 재교육, 평생교육의 마당이지만, 예전에는 젊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공부할 시기를 놓친 분들에게 방송대가 기회의 장소였고 희망의 등불이었다. 나처럼 경제적 이유로 대학을 포기하고 세월을 기다리던 경우에 질 좋은 강의를 언제 어디서나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는 방송대 시스템은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활짝 열려있는 Open University 방송통신교육의 요람이고 구원의 선물이다. 은퇴 후가 됐든 취직을 앞둔 절박한 취준생이든 나이에 상관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본인이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한다면 그 성과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미래를 제공할 수도 있다. 어려운 것은 본인이 입학원서를 접수할 때 다짐한 대로 공부할 수 있게 시간을 내려면 스스로의 생활 패턴을 재정리하고 모든 학습을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거의 40세에 방송대에 입학한 것은 그저 인사동에서 사온 중국 미술책 한 권이나마 제대로 읽고 중국미술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 언감생심 그 위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었을까? 그런데 방송대 공부는 내 인생의 중후반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방송대 공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즐거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김성태 ( 91 중문) 한국미술협회서초지부 이사 한국화분과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