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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운곡선생 영해 방문 행로 여행기(1,2)
글쓴이: 부사공파 33世 신 경동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字)는 자정(子正), 호(號)는 운곡(耘谷)이다. 종부시령(宗簿寺令) 원윤적(元允迪)의 아들이다. 1330년 태어났으며 몰년에 대한 기록이 없어 추측이 난무하다. <청구영언(靑丘 永言)>에 수록된 ‘회고가(懷古歌)’의 작자(作者)로 유명하다.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운곡선생의 사망을 66세 정도로 보고 있다. 운곡시사에는 31세에 병이 들어 몇 달을 지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시발점으로 병에 대하여 총 20여회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건강한 체질은 아닌 것 같고 특히 59세부터 65세까지 아프다는 기록이 12회 나타난다. 그리고 운곡시사가 65세에 끝나므로 이 설은 상당히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해동악부사(海東樂府詞)」와 「수미기언(眉叟記言)」에서는 태종원년(1401년)에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종이 직접 방문하여 운곡선생을 찾았으나 선생은 숨어버렸다고 한다. 운곡선생이 거주하던 치악산 주변에 구전되어 내려오는 지명인 횡지암, 노구소, 태종대, 배향산, 원통제는 태종의 방문과 관련이 있어 당시 태종이 치악산에서 운곡선생을 찾은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는 다소 허황된 기록인 것처럼 보이는 태종 상왕시(1419~1422) 생존설을 기록하고 있다. 운곡선생이 90여세까지 생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운곡시사에 자주 나타나는 병에 대한 기록과 당시의 수명을 고려할 경우 믿기 어렵다. 그러나 원주원씨세보에서도 구십여세강녕(90餘歲康寧), 노종지년미상(老終之年未詳)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설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어쨌든 졸년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하여도 원주원씨 중시조인 운곡선생에 대하여는 후손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집안의 세보에 기록하고 있는 바를 쫓아야 할 것이다. 공식적은 견해는 졸년미상이다.
운곡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 있고 학문이 해박하였다.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고려 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일찍이 이방원(李芳遠)을 가르친 일이 있어 그가 태종(太宗)으로 즉위하여 기용 하려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직접 집으로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 피하여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길재(吉再)와 같이 높은 지조와 절개를 보였다.
고려 말에 정몽주․ 이색 등 많은 유학자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사적이 소각 당하는 화(禍)를 당하게 되자, 그는 후세에게 전할 중요한 임무를 갖고 「화해사전 (華海師傳)」을 저술하였다. 문학적으로 깊은 소양을 가졌던 원천석은 그가 남긴 「운곡시사(耘谷詩史)」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함께 그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운곡선생이 말년에 작성하였다고 하는 「화해사전 (華海師傳)」이 후대에 전해지는지 여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신현에 대해 역대 평산신씨대종중의 일부 대종중에서는 정사 또는 개인문집 등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 책은 1873년에 영해신씨의 후손에 의해 작성된 위서라고 단정하고 유인물을 만들어 학계 등에 배포한 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영해신씨 집안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책인 「영조갑신보」 「순조갑신보」 그리고 집안 조상의 행장을 기록한「예주세록」 등도 위서로 간주하고 있다.
( *주 -1610년 오희길 쓴 도동연원록에 신현을 성리학의 집대성자라고 기록한 상소문이 있음.)
만약 이 책이 위서라면 여러 타성의 대종중에서는 정사에 나타나지 않은 선조들의 행적을 이 화해사전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어 화해사전의 기록되어 있는 선조의 행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위서를 근거로 한 것이므로 엉터리 기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영해신씨와 운곡선생과의 관련성, 우탁선생과 신현과의 관련성, 신현의 동양철학에 관한 인식 등이 허구가 된다.
물론 이 책은 평산신씨 상계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고 오류로 볼 수 있는 부분도 많이 나타나고 있어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 후손들도 의아에 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제자가 스승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기록 내용이 사실보다 과장되어 있는지 또 이 책이 먼저 영해신씨 가문에 전달된다는 점에서 내용의 추가, 삭제, 변경은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사항이지 이 책 전체를 위서로 몰아붙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평산신씨 역대 대종중 중에 화해사전 위서 만들기에 주축이 된 대종중은 1972년, 1984년, 1997년의 대종중이다. 그 이유는 1646년에 발행한 평산신씨의 족보책인 병자보의 계대 질서와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운곡시사」는 총 1144편을 싣고 있고 여행을 다니면서 시를 많이 남겼다.
‘시와 함께하는 운곡선생 영해 방문 행로 투어’는 지난달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선생은 1400년 초에 「화해사전 (華海師傳)」을 작성하여 후대에 전하였고 이 책에 의하면 스승인 신현 부자의 종손을 보호하기 위하여 1401년에 치악산에서 영해로 내려와 10살 밖에 되지 않은 고아 쌍둥이 형제 영석과 중석을 데리고 가서 키운다 하고 있다. 평산신씨 판사공파 족보의 기록에는 영석과 중석의 묘는 운곡선생의 생활근거지인 치악산 대왕당(원통제) 주변에 있다하고 영석의 처는 운곡선생의 외손녀 딸로 기록하고 있다.
운곡선생의 시와 함께 여행하기로 한 곳은 1369년 영해를 방문시 쓴 시 37수에 나타나는 지명이다. 원주, 제천, 냉천, 죽령, 순흥, 영주, 안동, 영해, 영덕, 평해, 울진, 삼척, 동해, 강릉 옥계면, 정선군 어량면, 정선읍, 평창군 대화면, 횡성군 강림면, 원주까지 가는 길에 7수, 영해부에서 10수, 오는 길에 19수, 집에 도착하여 1수를 쓴다. 무슨 목적으로 영해를 방문하는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급하게 영해로 가서 돌아오는 길은 동해 절경을 구경하면서 여유있게 귀향함을 알 수 있다.
출발할 때 ‘꽃다운 풀이 무성해 길을 덮으려 하는데’ ‘들에 복사꽃 산에 살구꽃뿐일세.’ 등의 시구로 보아 아직 초봄이며 도착하여서는 ‘작약꽃 활짝 피니 유달리 아름답네.’라고 하고 있어 여행기간은 10일 내외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시사에서는 5일 묵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운곡시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1401년 스승인 신현 신용희 부자의 종손을 구제하기 위해 원주를 출발하여 내려왔다면 아마 이 시에 나타나는 영해 방문 노선을 따라 내려왔다가 되돌아가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369년 운곡선생이 영해 방문시에는 이 길로 내려왔다가 동해안을 따라 강릉 옥계를 경유하여 정선군을 통해 귀향하는 것으로 동해안과 정선의 절경을 감상하고 시을 남겼다.
운곡시사에 나타나는 영해부 방문 행로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Ⅰ-135) 1369년(기유) 3월. 영해부(寧海府) 가던 도중에 짓다
Ⅰ-136) 제주(堤州) 남쪽 들판에서
Ⅰ-137) 냉천역(冷泉驛)
Ⅰ-138) 죽령(竹嶺)
Ⅰ-139) 순흥부(順興府)에 묵으면서
Ⅰ-140) 영주(榮州)를 지나면서 (영주의 옛 이름은 구산 龜山)
Ⅰ-141) 안동(安東)에 묵으면서 현판 시에 차운하여 동년(同年) 권종의(權從義)에게 지어 주다
Ⅰ-142) 영해(寧海)에 이르러 관사(官舍)의 현판 시에 차운함
Ⅰ-143) 관어대(觀魚臺)
Ⅰ-144) 봉송정(鳳松亭)
Ⅰ-145) 정신동(貞信洞)
Ⅰ-146) 연지계(燕脂溪)
Ⅰ-147) 읍선루(泣仙樓)
Ⅰ-148) 무가정(無價亭)
Ⅰ-149) 영덕(寧德)에 이르러(영덕의 옛 이름은 야성 野城)
Ⅰ-150) 주등역(酒登驛) 가는 길에
Ⅰ-151) 원적암(圓寂菴)
Ⅰ-152) 24일. 단양(丹陽)을 떠나면서 부사(府使) 한공(韓公)의 시에 차운
Ⅰ-153) 평해(平海) 망사정(望槎亭)
Ⅰ-154) 월송정(越松亭)
Ⅰ-156) 울진(蔚珍)에 묵으면서(울진의 옛 이름은 선사 仙槎)
Ⅰ-157) 임의정(臨漪亭) 시에 차운함
Ⅰ-158) 지현(知峴)에 올라 울릉도(蔚陵島)를 바라보다
Ⅰ-159) 용화역(龍化驛) 시에 차운함
Ⅰ-160) 삼척(三陟)에 묵으면서 단양(丹陽)의 옛 친구들에게 부침
Ⅰ-161) 평릉역(平陵驛) 시에 차운함
Ⅰ-162) 우계(羽溪)에 묵으면서 현판의 시에 차운함(우계의 옛 이름은 옥당 玉堂)
Ⅰ-163) 향자(鄕字) 운에 차운함
Ⅰ-164) 광탄(廣灘)을 건너는 배 안에서
Ⅰ-165) 정선(旌善) 지나는 길에
Ⅰ-166)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수혈(水穴)을 구경하고는 의풍정(倚風亭)에 오르다
Ⅰ-167) 벽파령(碧坡嶺)에 올라 (두 수)
Ⅰ-168) 방림역(芳林驛)을 지나는 길에
Ⅰ-169) 안창역(安昌驛)
Ⅰ-170) 작약(芍藥)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원(元) 소경(少卿)에게 부침
우리는 1박 2일 일정으로 5월 28일(토) 09:00 영덕에서 출발 목적지를 운곡선생 묘역으로 정하고 운곡시사에 나타나는 영해 방문 행로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당초에는 무모하게 1박 2일 일정으로 태종대왕이 치악산에서 운곡선생 수색작전(?)을 펼 때 방문한 장소를 다 가보기로 하고 운곡학회 사무국장님께 물어보니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변암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도 반나절은 충분히 걸린다고 하여 태종대왕의 치악산 행로는 다음 기회에 일정을 잡기로 하였다.
혹시 평산신씨판사공파 카페회원 중에서 동참자가 있을까 싶어 게시글을 실어 놓았다.
스무 명 정도 열람을 하였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요즈음 이러한 곳에 신경 쓰고 있는 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지만 시와 함께 풍경을 음미해 보면서 하는 시간여행은 의미가 색달라 호기심이 발동할 것 같기도 한데 허공에 지른 큰소리는 빈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올 뿐 허전함은 그대로이다.
조상님을 잘 모셔야 음덕이 생겨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은 번창하는데 우리 회원님은 이걸 잘 모르는 모양이다.
무관심에 속으로는 자못 섭섭하였지만 어차피 차에 탈 수 있는 인원은 4명 밖에 안된다고 스스로 위안하고 부득이 별종(?)들인 나와 부사공지파 성목 총무님, 카페 운영자인 명종씨와 함께 출발하기로 하였다.
아이가 아파 병원에 입원하고 있고 토요일은 무슨 행사에 참석해야 되고 마누라도 달갑지 않는 눈치이여서 망설여졌지만 이미 약속한 사항이고 이번 여행은 상당히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카메라, 노트북, 여행가방을 챙겨 나의 미세스테라에 짐을 실었다. 부산에서 7시에 출발하면서 포항에 계시는 총무님에게 전화하여 8시 반까지 흥해 삼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타임머신은 타지 않았지만 마음은 공간과 시간을 뛰어 넘어 벌써 700년 전의 세상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할 때면 옛날 사람들은 이 길을 어떻게 다녔을까? 우리는 몇 시간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며칠이 걸렸을 것인데... 짚신을 몇 켤레 준비하였을 것이고 약간의 먹을 것도 지참하였을 것이고 또 다른 짐이 있어서 장거리를 옮겨 다니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들었을 것인데...
지방에서 한양에 과거 보러 어떻게 갔는지 몇날 며칠이 걸렸을 것이고 의식주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고려말 조선초기에는 500여개의 역참이 있어 지배계층에서는 이동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산 넘고 물 건너기가 수월하고 구석구석 들어갈 수 있어 질러가기가 용이하여 1970년 전후 완행버스 못지않는 빠르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운곡시사를 보면 운곡선생은 여행을 할 때 역참에 들려 주로 말을 이용하였다.
언양휴게소에서 핫바 하나로 아침을 때우고 미세스테라를 몰고 가면서도 항상 머리에는 이틀만에 이 행로를 여행할 수 있을까? 걱정으로 꽉 차있었다.
어느덧 차는 흥해에 다다랐고 기다리기로한 총무님은 보이지 않는다. 전화해 보니 이곳 주변에서 아침 식사 중이란다. 영덕에 있는 명종씨에게 9시쯤 도착할 것이라고 했는데 조금 늦어진다고 전화로 알렸다.달리는 중에 주변을 둘러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오늘 여행 일정을 잘못 잡은 것은 아닐까? 당시의 지명과 요즈음의 지명과는 일부 차이가 있고 특히 행정구역은 많이 다르다.
또 지명이 없어진 곳도 있어 각종 고서를 살펴 현재의 위치를 짐작하여 찾아야 할 것인데 이런 날씨에 가능할까?
운곡선생이 경치를 보고 시상을 떠올렸다면 분명 경치가 아름다울 것인데 잘 감상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걱정을 하는 사이 벌써 나의 미세스테라는 영덕에 다다랐다.
명종씨가 우리를 반긴다. 나와 띠 동갑이고 내보다 2세대 아래여서 나를 할배라 부른다.
평산신씨판사공파 율리지파로 장절공 35세이다. 싱긋이 웃는 것이 그의 주특기이다.
조상님을 공경하고 진실하며 부지런한 삶의 모습이 매력이다.
나와의 최초 만남은 작년 이맘때 쯤 한 못 땐 종족이 중시조 할아버지를 능멸하는 글을 인터넷 공개하였고 여기에 덧글을 달면서부터이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작전모의(?)를 하였다. 먼저 미곡리의 봉정재를 방문한 후 봉정산에 모셔져 있는 파조 득자청자 할아버지를 먼저 뵙는 것이 순서라고 결론을 모았다.
그리고 찻길이 없는 산에는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고 가는 길에 비포장도로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좀더 편안한 차인 명종씨 차를 이용하기로 하고 영덕에서 영해로 향했다.
영해면이 한 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고개가 송현이다. 송현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와 영해면 벌영리·성내리에 걸쳐 있는 고개이다. 소나무가 무성한 고개라 하여 송현(松峴)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솔팃재·또는 망재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영해부의 부사가 부임할 때 사령들이 깃발을 들고 이 고개에 올라 부사의 행차가 어디쯤 왔다는 것을 부(府)에 알렸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토탄(土炭; 땅속에 묻힌 지 오래되지 않아 완전히 탄화하지 못한 석탄)을 채취하였으며, 현 영덕아신병원, 예주문화예술회관 부근이다. 송현을 넘기 전에 우측에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있다. 차를 멈추어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명종씨가 바로 미곡으로 가자한다. 앞쪽 면소재지 주변으로 큰 들판이 보인다. 부산에서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이렇게 큰 들판을 처음 본다. 농경사회에서는 이곳이 무척 살기 좋은 곳이였다는 것을 한눈에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북서쪽에 보이는 산이 등운산이다.
화해사전에 의하면 현 할아버지는 1362년 3월 元나라가 흉흉해짐에 따라 귀국하여 영해부 인양리로 오셨다. 公의 선대부인 휘 중명의 묘는 공이 살아갈 고향으로 선택한 영해부 인양리의 등운산 서록 동봉삼폄에 모셨고(나중에 요동성 문회산으로 이장함) 고향에 살 때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친히 성묘를 하고 묘역을 깨끗이 청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옹왕사 시비와 사당》
우리는 동해대로를 따라 송현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창수영해로를 타고 가다가 창수면소재지에 도착하니 영양창수로와 오서로로 갈라진다. 오서로를 들어서는 길목에서 나옹왕사 시비를 찾아 내었다. 이곳이 나옹왕사가 태어난 곳이다. 운곡시사에도 나옹왕사에 대해 서너번 언급하고 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이 시를 감상하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많이 보아온 시인데 나옹왕사의 시 인줄은 방금 여기서 알았다. 나옹왕사의 제자가 무학대사인데 무학대사가 운곡선생의 산소를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이곳 창수면 신기리(新基里)에 오래된 반송(盤松)이 한 그루 있었는데, 이는 나옹화상이 출가할 때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아 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거금 7백여년 동안 전설의 거목(巨木)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반송은 1965년경에 고사(枯死)했으며 1970년경에 이곳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선사(禪師)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다. 지금 신기리를 반송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근에 중수한 봉정재》
《봉정재 뒤뜰 재실》
다시 차를 타고 송천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굽이굽이 흐르는 송천강의 계곡을 따라
미실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마을은 산과 산사이 정남향이 보이는 자락에 위치하여 있어 아늑하고 평온해 보였다.
앞쪽에는 훤히 트인 들판이 있어 자연부락이 형성될 수 있는 좋은 위치인 것을 풍수는 볼 줄 모르지만 느낌으로 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마을 안에는 오래된 와가들이 제법 많다. 봉정재의 현판은 이색 선생이 써 주었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의 현판은 그 당시 현판이 아닌 것 같다. 봉정재 뒤뜰에 제실이 있는데 고태가 흘러 줄잡아 몇 백년은 된 것 같다.
앞쪽에 보니 한 스무평은 되어 보이는 누각이 있다. 서른호 남짓한 조그만 마을에 누각이 왜 있을까? 앞쪽에 훤히 터여 마음의 근심을 날려 보낼 수 있는 경치를 마주보고 있었다. 양반이 기생을 희롱하는 장소는 아닌 것 같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장소는 더더욱 아닌 것 같고 이 용도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답을 내지 못했다.
파시조 할아버지는 이 마을 뒷산에 모셔져 있다. 차가 산소 밑에 까지 갈 수 있다고 하여 차를 몰았다. 마을에서 2리 정도 되어 보이는데 올라가는 길이 좁고 군데군데 파여 있어 운전하기가 힘이 들었다. 토목이 주특기인 명종씨가 주변에서 삽자루를 구해와 도로를 복구하면서 겨우 올라갔다.
《평산신씨판사공파 파조 산소 입구》
산소의 규모가 엄청 컸다. 600여년 전 고려 말기에 매립된 산소인데 느낌으로도 그 연도를 추측할 수 있었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끼고 흐르는 송천강이 눈 아래 보이고 저 멀리 아련히 영해가 보인다. 뭉게뭉게 흘러가는 구름이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저 구름은 바람 따라 자유롭게 또 여기 저기 흘러가리라 흐르는 저 구름처럼 흘러가면 될 것인데 할아버지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으셨다.
그 피는 이어져 내려 장자 또한 자식을 돌보지 못하셨고 손자는 고향을 버리고 멀리 원주까지 가셨다. 얼마나 남쪽이 그리웠으면 호를 연남재라고 하였을까? 파종중에서는 몇 년전에 치악산 원통제에서 원주 원씨와 헤어짐을 섭섭하게 생각하면서 영석 할아버지를 모셔왔다고 한다.
첫댓글 늘 좋은 글 올려주시고 귀감이 되시는 오무등님의 노고에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잘지내시죠? 이 글 다음편이 기다려 집니다. 부사공파 경동할배님과 함께 여행한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나중에 다함께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