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틀 전부터 프란체스카 수녀가 미사 때에 통 보이질 않는다. 수녀님들이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한 병세로 거동이 어렵다거나 혹은 휴가 중이라든지, 그렇지
않다면… 남은 한 가지는 인사이동뿐이었다. 지금은 이동기간이 아니었지만 가끔씩 새로운
부임지에서 일손이 모자라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마침 수녀님의 자리에는 낯선 수도자의
모습이 보였고 며칠 전 프란체스카 수녀가 내 곁에서 나란히 앉아 함께 미사를 드린 마지막
기억이 남아있었다. 그 때는 왠지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 수녀님은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 소식은 한참이나 지나서야 들을 수 있었고 때마침 다가오는
주일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이었다. 4시 20분, 플랫폼에서 첫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도착시간은 불과 몇 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도 긴
여행길 때문인지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드디어 적색 경보등이 들어오고 저 멀리로부터 달려
들어오는 기차는 안전선 밖에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날리우며 정지선에 멈추어
선다. 사람들은 서둘러 새벽기차에 올라서고 나 역시 마지막으로 계단을 오른다.
기차 안은 조용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다. 열차 내 좌석들은 고의로 돌려놓지
않는 한 모든 자리가 열차의 진행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난 통로 측으로 자리를 잡았다.
옆 좌석의 사람에게 동의 없이도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었고 창쪽에 앉았다간 길게
뻗어있는 라디에이터 때문에 다리를 뻗기가 불편한데다가 그만큼 공간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창가의 티켓을 구했더라도 대부분의 거의 모든 승객들은 흔쾌히 자리를
바꿔주었다. 텅 빈 옆 자리를 쳐다보며 다시금 앉아 보았지만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다.
몇 번의 안내방송이 흐르고 기차가 서울 역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잠에서 깨어났다. 해는 이미
떠 있었지만 새벽녘이라 그런지 온도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청사로 들어설 때면
약간은 우쭐거려지는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고향을 벗어나면 항상 드는 이 기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몸이 지쳐오면 이내 다시 집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역시 집만한 곳은
없는 듯했다.
역을 빠져나오자 조금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아직까지 햇살은 낮게 비추고 있었다.
아직 수도원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했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신이 났다. 우선 그렇게 가보고
싶던 명동성당에서의 미사 참례, 그리고 곧 수녀원으로 향했다. 도중에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지만 쉽게 그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밑에 요새처럼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이었지만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넓고 중량감이 느껴지는 철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기도 시간이 다 되어 갔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수녀원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위에서는 두 분의 수녀님들이 시트를 널다만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관 입구까지 다가가서 벨을 눌렀다. 잠시 동안의 긴장이 이어졌다. 문이 열리고 젊은 수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네들은 단체생활을 하기 때문에 곧잘 이런 식으로 묻고 답했다. 또한 한 가지 질문에 두 가지
이상은 잘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카 수녀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자 문은 자동으로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사무실 앞의 긴 의자에 앉아
수녀님을 기다렸다. 조금의 대기 시간이 지나자 안내 실에 앉아 있던 수녀가 말했다.
「저…, 저기, 젊은 프란체스카 수녀 말씀하세요?」
「아님 박 프란체스카 수녀님 찾으세요?」
사실 수도원에서 같은 영명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수많은 성인들을 한 분씩만 모
시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잠시만 기다리셔요, 곧 나오실 거예요.」
수련 수녀들은 ‘시어요’의 준말인 ‘셔요’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수녀님은 나를 한 번 더 힐끗 쳐다보고는 띄엄띄엄 말했다.
「형제분이세요?」
「예……?」
가끔 그네들이 주어, 목적어를 빠트리고 말할 경우 난감한 입장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
데 그 말은 내게 수사님이냐고 묻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목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스웨터에
짙은 색깔의 바지 차림하며 그 위에 다시 검은 반코트와 쥐색 머플러를 두른 무채색의 복장이
이곳에선 그런 이미지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뇨, 그냥 신자죠.」
이윽고 프란체스카 수녀가 멀리서부터 말소리와 구두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베드로.」
수녀님은 눈을 크게 하며 나를 분명히 확인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셨어요?」반갑고도 낯설었다.
수녀님은 나를 객실로 안내했고 독특한 향기가 나는 차를 내주었다. 이미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차는 더 이상 맛으로 마시는 음료가 아니었다. 마침 식사시간이 되었다며 객실 옆에
식탁이 마련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나자 밥을 가져다주었고 계속해서 반찬을
이것저것 날라다 주었다. 좀 거들고 싶었지만 수녀원 내에서 난 그리 자유롭지 못했다.
이윽고 음식이 모두 차려지자 수녀님은 성호를 그으며 기도를 하자고 했다. 수녀님이 내게
기도를 부탁했지만 막상 기도문이 떠오르지 않자 사실 그대로를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음식을 만드신 분께 감사드리며, 그 이전에 농부께 감사드리고 더욱 그 이전에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호를 그은 후 가볍게 주먹을 쥐고서 입에다 가져다 되었다. 수녀님은 기도가 무슨 수상소감
얘기하는 것 같다며 웃기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멈추질 못했다.
「자, 먹어 봐. 난 요즘 단식하고 있어, 가끔씩은 건강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효과가 있거든. 」
수녀님은 혼자서 식사하는 내게 엷은 미소를 띠며 계속해서 바라보며 이것, 저것 얘기를 끄집
어내었다. 볼에서 음식이 우물거릴 뿐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녀님께 음식을
권해 드릴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맛있게 먹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또 사과를 깎아 주었다. 송구스러울 만큼 푸짐한 대접이었다. 수녀님은 반찬을 남겼다고
말했지만 밥 한 그릇에 여덟 가지 반찬을 다 먹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수도원 정원으로 나와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수녀님은 뒷짐을 지며 사소한
문제들도 골몰히 생각하고는 했는데 그 진지한 모습은 마치 철학자나 예술가를 연상시키고는
했다. 그러니까 진실되고 냉철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으며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절제 있게
조화되어 이성적인 인간으로써도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모퉁이를 돌아가자니 그네들의 작업실이라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각종의 성물들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림 위에는 무엇을 적으려고 했던지 라틴어 책과
여러 권의 사전들이 쌓여 있었다.
「저는 모든 책이 복음화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믿음만 있다면요.」
「가령 예를 들면?」
난 책상 위의 독어사전을 집어 들었다. 외국어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독일어의 매력을 잊을 수
가 없었다.
「수녀님 보세요, ‘성모 마리아’라는 단어가 펼쳐졌는걸요.」
수녀님은 대수롭지 않게 이곳저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교황(Papst)이라는 단어가 보이는걸요.」
「믿어지지 않는 걸. 내가 가더라도 그런 말들이 나타날까?」
수녀님은 여전히 지저분한 곳을 정리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럼요, 제가 어떻게 이런 말들을 알았겠어요.」
그리고 한 번 더 사전을 펼치자 Prälat[주: 고위 성직자; 가톨릭의 주교, 신교의 감독 따
위.]이라는 단어가 보였지만 이 말을 꺼냈다간 정말이지 앞서 꺼낸 말들조차 믿을 것 같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다시 뜰 앞으로 나와 울타리가 처진 철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곧 개들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는 우렁차게 두어 번 짖어대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상한 일이네, 개들이 짖지를 않네.」
그곳에는 진돗개 두어 마리가 턱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몇몇 수녀들만 따르고 먹이를 주는 사람들도 물려고 덤벼드는데 말이야.」
가까이 다가가도 그냥 처다만 볼 뿐이다. 많은 동물들이 지각 변동을 예견하듯 녀석들도 사람
의 마음을 미리 아는 것일까, 내가 동물들에게 얼마나 우호적인지를 말이다. 단지 그렇게 마음
만 먹으면 가끔씩은 이렇게 통할 때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무엇인
가가 어미개의 다리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들이 아장거
리며 걸음마를 떼고 있었고 그런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감이란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성스럽고
존엄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에 햇살이 약해지고 있었다. 초가을인데도 중부지방은 해가 짧았다. 그래서 만남의 시
간도 더 짧게 느껴졌다. 수녀님은 지하철역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차단기가 가로놓인 채 그
앞에서 작별인사를 고했다. 수녀님이 먼저 뒤돌아섰다.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그 모습을 보고
승차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수도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수녀님이
또다시 역까지 따라와 주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길은 잠시나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
을 불러 일으켰다. 수녀님은 절반쯤 되는 거리에서 헤어지자고 제안했지만 그 지점에 이르자
막상 서로가 갈 길을 가지 못했다. 우리들은 길거리에 서서 또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 심정은 주려고 할수록 부족했고 받아도 더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면 부족함만이 남는 법이다.
기차가 대전을 지났다. 문득 ‘대전부르스’라는 노래를 흥얼거려보았다. 인간에게서 정을 떼어버
린다는 것이 힘들고 슬픈 일이었지만 그들은 본당을 옮기면서 모든 것을 가슴에 묻어 버린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삶이 자연스럽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견뎌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계획을 준비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 간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이별이란 것이 사람을 한없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몸이 피곤해진다. 지각할 순 없지만 기차 안에서 우리들의 몸은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고 있다.
이내 지쳐 눈을 감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프란체스카 수녀를 생각한다. 사람이 좋아지게 되면
그 이유가 없는 법이다.
카페 게시글
博識家네 책방
추천도서
소설[나는 포도나무요] -2부/이별 후에 10편
상투스
추천 0
조회 7
04.11.17 07:07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