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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항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고래관광을 할수 있는 고래문화특구가 있는데 이곳의 3대 견학코스는 고래문화마을, 고래생태체험관 그리고 고래박물관입니다^*^
#고래박물관(울산광역시 남구 장생포고래로 244) : 이용요금 2,000원(어른기준)
옛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국내유일의 고래박물관을 건립하여,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보존,전시하고 고래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해양생태계 및 고육연구, 체험공간을 제공, 해양관광자원으로 활용코자 2005년5웧에 지상4층,부지면적6,611m2,연면적2,623m2로개관하였습니다.
(전시실 안내도)
*기획전시실(1층) : 장생포와 고래/울산의 지형변화/반구대 암각화 특별전시실/국보제285호 반구대 암각화/
인간과 고래/반구대 암각화 영상실
*고래탐험실(2층) : 고래는 얼마나 클까요?/고래와 함께 찰칵/고래의 꿈/기념품샵/어린이체험실
*고래연구실(3층) : 고래연구실/귀신고래이야기/고래잡이역사/해체장과 착유장/고래와 산업의 가치/
우리바다 우리고래
(부대시설)
매표소/포경선 제6진양호/야외광장/워터프런트/장생포 모노레일
1.고래박물관 전경 및 입구
2.포경업과 고래가공
1)우리바다, 해양보호생물
2)장생포와 고래(고래와 함깨 한 장생포)
*장생포의 고래잡이역사를 살펴보면, 1891년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2세가 태평양어업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포경업을 독점하여 전국에 있는 포경기지를 정비하면서 장생포
가 포경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습니다.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회사는 한국사람들이 전액 공동출자한 조선포경주식회사 설립으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근대포경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1970년대말 고래잡이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장생포는
20여척의 포경선과 만여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큰마을이었지만 1980년에 이르러 무분별한 포경으로 포획량이
줄고 일부종은 멸종에 이르게 되어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금지를 결정하면서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 그후 인근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포경업에 종사한 주민 대부분이 이주해 마을은 점점 쇠퇴하여
주민수가 3,000여명으로 줄었는데 현재는 전국 유일의 고래관광도시를 지향하며 2008년 지식경제부로부터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받아 운여되어오고 있습니다.
3)근대고래잡이
고래의 포획은, 5월~12월까지는 동해의 강원도 묵호,북평근해를 주어장으로 하였고, 12월~이듬해 4월까지는
서해의 어청도 근해를 주어장으로 하여 포경활동을 하였고 1985년까지 포경선이 잡은 고래의 수는 연평균 900마리였고 주로 밍크고래를 잡았으나 1982년7월 국제포경위원회 제34차총회에서 고래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상업포경을 전면금지하여 장생포에서도 고래잡이를 할수없게 되었습니다.
4)출항의식
장생포의 고래잡이 어민들은 생명을 걸고 고래잡이를 하므로 여러가지 사고를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출항과 입항시에 제사를 지내왔는데,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떠나기전 무탈하게 고래를 많이 잡을수 있게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출항의식인 "당산제"와 고래를 잡은 후 장생포로 돌아왔을 때
입항의식인 "풍경제"를 지냈으며, 당산제는 마을사람들의 연중무병과 평온무사를 비는 제사로 장소는 보통
마을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된 사당에서 지냈고 지금도 매년 실시하고 있답니다.
5)고래해체장
*장생포 바다건너편의 고사동 고래해체장은 1961년2월28일에 설립된 것으로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에서 경제적인 사유 등으로 고래해체 처리시설을 소유하지 다수의 포경업자들을 위하여 설치한 후 IWC에서 포경을 금지한 1985년12월31일까지 사용해오다 현재 고래문화마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체작업은 1미터가 넘는 도경용 칼을 잡고 고래의 목부분을 절단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목은 고기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먼저 절단한 뒤 등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의 위쪽을 자르고 등,갈비,내장순으로 들어서 내는데,
보통 5m정도크기 밍크고래의 해체시간은 2~3시간, 7~9m의 대형 밍크고래는 약6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형
참고래의 경우 15시간정도 매달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6)고래착유장
*고래는 예로부터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동물로 알려져 왔으며 고래고기,고래기름,고래의 심줄 등이 다양하게
쓰여 왔는데 특히 고래기름은 고래의 부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이용되어 포경의 주요인이 되었고 고래종류
에 따라 기름성질이 제각기 달라 쓰이는 용도 또한 다양했습니다.
*고래기름(동물성원료)은 렌더링이라고 해서 용출법을 사용하는데 열을 직접 가하면서 기름을 뽑아내는 방법과 끓는 믈 또는 증기를 접촉시켜 기름을 빼내는 방법이 있는데, 고래기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고래뼈와 지방 등을 큰 가마솥에 넣고 90도정도의 고온에서 4시간정도 삶아야 합니다.
*긴수염고래의 기름은 마가린 등의 식료품과 화장품,비누 등을 제조하는데 사용하였고, 향고래의 기름은 세제, 윤활유,기계유,양초,약품 등을 제조하는 등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였으며 고래수염이나 향고래의 아래턱뼈 등은 공예품재료로 쓰이고 뼈는 고래기름을 채취한 후 비료나 가축사료로 이용되었습니다.
3.고래와 기원과 진화
1)고래의 기원
고래는 옛날에 육지를 걸어다녔다고 하는데 화석의 연구에 의해 유추된 고래의 혈통관계를 살펴보면,
고래목은 현생의 2개아목 외에 약 4,500만년전에 나타나 2,500만년전에 멸종된 원시고래아목이 있었으며,
원시고래아목은 현재의 고래보다 머리뼈가 길고 각 머리뼈의 연결방식 등이 육사의 포유류와 같아서 1억2천5백만년전 백악기에 번성한 메소니쿠스와 비슷하다고 하며 이 동물이 모든 포유류의 조상입니다.
2)수염고래아목과 이빨고래아목 모두 원시고래아목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고 다만, 원시고래의 골격으로 보아 현생고래류의 진화를 유추할 수 있을뿐이며, 화석에 의한 뼈의 구조와 형태학적 증거에 덧붙여
폐호흡,수평꼬리,태아발생 및 젖먹이기,고래의 가슴지느러미뼈가 육상 포유류의 앞다리 혹은 사람의 팔뼈와 닮은 점 등이 육상 포유류와 같은 특징으로 이러한 진화의 가정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2)고래의 진화(고래의 형태변화/고래의 피부)
3)고래의 적응(고래의 분기공/꼬리/호흡)
4.포경선 진양5호 내부선상(內部船上)
포경선 진양5호는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실제 포경 조업하던 선박으로 1985년12월31일 상업포경 중지로 방치되었던 선박을 장생포고래박물관내에 복원하여 관람객들이 포경선상 내부를 체험할수 있도록 설치했음.
(미끄럼틀은 해체작업이 끝난 고래부위들을 내려보내는 기구임)
5.고래탐험
1)3층 전시실 전경
2)고래잡는 도구들
3)고래의 산업적 가치(다양한 공산품과 고래요리 소개)
4)고래모형 전시물
(남방큰돌고래)
분류 : 포유강-고래하목-이빨고래소목-참돌고래과
크기 : 약 1.8~2.6m
무게 : 약 175~230Kg
서식지 : 제주도,중국남부,아프리카 동부 등 섬근처 연안이나 대륙붕 인근
특징 : 2018년1월 장생포 고래박물관 재개관에 맞춰 상설전시관 신규전시 및 교육용으로 제작되었으며 남방 큰돌고래의 형태학적 특징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해 고래연구센터의 자문과정을 거쳐 정밀제작함.
(상괭이)
분류 : 포유강-고래하목-이발고래소목-쇠돌고래과
크기 : 약 1.6~1.9m
무게 : 약 40~70kg
서식지 : 한국,일본,중국,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인근해역
(혹등고래)
분류 : 포유강-고래하목-수염고래소목-수염고래과
크기 : 약 12~16m
무게 : 약 25~30톤
서식지 : 전세계 주요대양
(짧은부리 참돌고래)
분류 : 포유강-고래하목-이빨고래소목-참돌고래과
크기 : 약 1.6~2.4m
무게 : 약 150~200Kg
서식지 : 대서양과 태평양의 따뜻한 해역
5)다양한 이빨고래의 골격
6)참고래의 수염
##울산연안생태 시사진전(울산연안 특별관리해역 자료전시회)
7)포경문헌 전시물
6.고래잡이(포경)의 역사
1)한국의 고래잡이
(반구대 암각화에서 본 선사시대의 고래잡이)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 고래잡이역사가 선사시대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며 지금까지 알려진 유물과 유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청동기시대 초기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약 50여점의 고래그림이 나오는데 그 생김새에 따라 여러종류의 고래가 당시 울산만 일대에 회유 서식하여 우리선조들이 이들 고래를 잡았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음.
(불교전래와 살생금조에 의한 고래잡이의 쇠퇴)
신라 법흥왕16년(529), 불교의 신앙심이 강했던 왕이 불교를 공인하는 동시에 왕 스스로 불교를 믿으면서 살생금조의 명을 내려 바다짐승류의 포획과 이용을 제한하고 그 포획도구들을 불태워 버리게 함으로써 고래잡이도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음.
(피폐해진 조선시대의 고래잡이)
어구와 어법이 발달한 조선시대에도 고래잡이는 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는 고래잡이 착수의욕을 상실케 하였고, 19세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연안에 고래가 표류하면고래기름으로 발생한 이익을 관이 독점하고 백성에게는 폐가 되므로 죽은 고래를 타지방의 연안으로 떠내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반상제도가 어업발전에 큰 저해요소였음을 유추해 볼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열강의 고래전쟁)
1847년 : 미국 고래잡이어선이 최초로 동해에 나타나 기록한 항해일지에는 대왕고래,참고래,혹등고래,긴수염
고래가 많았다고 기록함.
1849년 : 프랑스,독일,미국 등의 고래잡이어선들이 한반도 연안에 진출함.
1889년 : 러시아가 본격적인 극동어장으로의 진출을 위해 근대적인 노르웨이식 고래잡이어선을 도입함.
1905년 :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한반도연해의 고래자원은 일본의 독점적 포획대상이 됨.
(광복후 민족자본에 의한 우리의 고래잡이)
1946년 : 조선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일본서 수입한 중고 고래잡이어선 2척으로 근대 고래잡이 시작함.
1947년 : 대동포경주식회사, 동양포경주식회사, 대양포경주식회사 등 몇개의 고래잡이회사가 추가로 설립
되어 1950년대초에는 고래잡이어선이 약 20척에 달함.
1961년 : 고래잡이의 발달을 촉진시키기위한 한국포경어업수산조합(그후 근해포경수산업협동조합으로
개칭)의 설립과 고래처리장 준공함.
1965년 : 한일어업협정 발효로 고래자원의 새로운 활로 개척함.
1966년 : 100톤의 중형급 디젤기관을 장착한 고래잡이어선의 출현으로 고래잡이 전성기를 맞이함.
(모라토리엄으로 강제폐쇄된 울산 고래잡이기지)
1978년 : 12월29일 국제포경규제조약에 가입하여 IWC회원국이 됨.
1981년 : IWC가 설정한 블록쿼터로 포획량 감소함.
1986년 : IWC의 결정으로 고래잡이가 전면중지됨에 따라 100년 이어져 온 장생포 고래잡이도 일시중지됨.
2)세계의 고래잡이
(원시시대의 고래잡이와 형태)
석기시대에 우연히 고래와 만난느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해변에 좌초한 고래로 원시적 석기로 이를 해체
하여 살코기는 식량으로, 뼈는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사용하였으며 그들은 고래의 이용가치가 크다는 것
을 알고 작은 배를 타고 연안에 접근한 작은 고래를 포위한 후 해변으로 몰아 좌초시키거나 얕은 곳으로 몰아
창으로 찌르거나 활을 쏘는 몰이고래잡이를 시작하였음.
(중세 바스크인에 의한 사업적인 고래잡이의 대두)
11~12세기경 상업적 고래잡이의 시작은 프랑스 비스테만에서 내유하던 북방 긴수염고래를 잡은, 고래잡이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스크인으로써 이들이 잡은 조명용 고래기름과 플라스틱이 생산되기 전 생활용품에 필요한
재료였던 고래수염은 중요한 생산품이었습니다.
1596년 네덜란드의 바렌츠가 북반구부근의 섬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그 해역에 고래가 매우 많다는 것이 알려
지면서 17세기에는 북극어장이 개장되었는데 가장 흔한 고래는 북극고래로 질이 우수한 수염을 지니고 있으며
유영속도가 느리고 죽은 뒤에 물에 뜨기 때문에 비교적 잡기도 쉬워 남획이 자행되었고 그로 인해 북극어장이
황폐화되었음.
(서양의 고래잡이 전성기)
1712년 : 북방 긴수염고래의 자원고갈로 향고래가 새로운 포획대상으로 부각되면서 지방층이 두텁고 등유,
향초,비누의 제조원료로서 그을음이 적게 나고 냄새도 덜한 향고래기름으로 인해 미국은 향고래잡이
전성기를 맞이함.
1790년 : 태평양, 칠레연안, 뉴질랜드, 인도양어장을 개척하여 조업함.
1820년 : 일본 및 북극해의 북극고래어장 진출로 세계 고래잡이어선의 약 70%를 차지하는 미국 고래잡이의 황금기를 맞이함.
1858년 : 석유의 발견은 고래기름의 수요를 대체했으며 1861년 미국 남북전쟁으로 구식 고래잡이는 몰락함.
1864년 : 스벤드 포인에 의해 발명된 노르웨이식 작살포는 결과적으로 고래자원 감소에 큰 영향을 줌.
(남극의 고래잡이)
1904년 노르웨이포경선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고래의 보고 남극해에 진출했으며 1930년대초부터는 서구
열강의 본격적인 남극고래잡이가 시작되었고, 1930년초중반에 자행된 5~6년간의 집중적인 남획으로 대형
고래류는 거의 멸종위기에 처하게 됨.
(고래자원의 멸종과 국제조약)
20세기 고래기름은 조명,비누,양초,식용유,마가린 등의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주원료로 사용되어 대량포획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세계주요 고래어장의 황폐화로 이어졌으며 이에 IWC는 1982년 영국에서 개최된 제34차
정기연차회의에서 고래잡이를 전면금지하였고 우리나라도 1986년부터 고래잡이를 중단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일부 원주민의 생존과 과학적 조사를 위한 고래잡이만 이루어지고 있음.
7.고래표본
1)고래뼈 전시품
2)고래액침표본(液浸標本 : 생물체를 약액에 담궈 보존한 표본)
8.수염고래와 이빨고래의 비교
9.우리바다의 고래종류
10.고래기념품점(2층) : 모두 관람후 나가는출구족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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