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앨범
박 가 경
엄마가 오랜 시간 동안 방 한구석에 있던 낡은 3단 책장을 정리하고 계셨다. 그 책장에는 한 층을 꽉 채운 앨범들이 있었다. 하나씩 꺼내 보니 지금은 중·고등학생이 된 조카들의 어린 시절, 언니의 결혼식, 언니와 나의 어린 시절과 부모님의 젊은 시절 등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 속에 희미하게 사라지는 추억이 한 앨범씩 묶어서 정리되어 있었다.
내 초등학생 때 찍힌 사진을 모은 앨범에 등장하는 엄마는 내 기억 속에 있는 가장 젊은 모습이다. 단발 생머리에 진한 화장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은 사진을 보고
“너 기억나나? 이때 엄마가 나이 많다고 학교 오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 나는 엄마가 학교 찾아온 날 친구들이 엄마 이쁘다고 한 건만 기억나는데?”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엄마보다 10살이나 어린 다른 또래 친구 엄마를 보고 부러워했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노는 데 멀리서 나를 향해 다가오시는 엄마를 보고 놀랐었다. 평소 집에서 보던 모습과 다르게 단정한 단발 생머리에 곱게 화장하고 투피스 검정 정장을 입고 낮은 검정 구두를 신은 엄마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엄마가 학교 들어가시고 같이 있던 친구들이 누구냐며 엄청 예쁘다고 얘기할 때 내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었던 기억이 있다.
다음으로 펼쳐 본 앨범은 초등학생인 언니와 아장아장 걷는 어린 ‘나’가 등장했다. 이곳에 등장하는 엄마는 더 젊었다. 이때부터는 내 기억에는 없는 우리 가족이 담겨 있었다. 엄마는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하나씩 꺼내 놓으셨다. 어떤 사진은 기억이 너무 바래서 엄마조차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도 있었다.
그러다 유독 낡고 촌스러운 무늬 표지를 가진 앨범을 보았다. 이건 무슨 앨범이냐고 물으니 엄마도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표지를 조심히 넘기니 떨어지기 싫은 연인처럼 첫 장이 붙어 올라왔다. 조심히 둘 사이를 가르니 쩍쩍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흑백사진이 보였다.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사진을 고정하는 필름이 오부라이트 롤 먹는 소리처럼 바스락거리면서 부서질 것 같았다.
첫 장에는 흑백사진 3장과 1970년에 발행된 우표가 2장이 붙어 있었다. 흑백사진 3장 모두 같은 여인이 있었는데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고 나와 닮은 듯 보였다.
“이거 엄마지?”
그 여인을 가리키며 묻자 엄마가 맞다고 하셨다. 꽃다운 십 대 모습이라고 하셨다. 엄마의 십 대 사진을 보고 왜 내가 날씬한 몸을 가질 수 없는지 깨달았다.
다음 장을 넘기니 마르고 키가 큰 남자 사진이 있었다. 군복을 입은 모습과 반바지만 입고 튜브에 엉덩이를 낀 채 물에 떠 있는 모습이었다. 익숙한 남자였다.
“둘째 외삼촌이네. 군대 나왔어?”
“남자 형제 중에는 장터 오빠만 군대를 나왔지. 이 오빠가 나 뚱뚱해서 맨날 나 때어 놓고 놀러 갔는데.”
명절날에 큰아버지댁이랑 같은 동네인 외삼촌댁에 가면 항상 살집이 있는 어린 나를 향해 살 좀 빼라는 소리를 하던 외삼촌을 떠올리면서 공감돼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외할머니 사진도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말끔히 가르마를 반으로 갈라 하나로 묶어 비녀를 꽂은 모습이 그 시대 할머니의 모습이다. 그 사진을 가리키며 ‘우리 엄마’라고 말하는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로구나 라고 생각했다.
앨범을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면서 엄마는 당신과 함께 찍은 사람들을 보며 세월에 깊게 묻힌 기억을 하나씩 하나씩 꺼냈다.
“18살 때 처음 서울 올라가서 전자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
그때 시절을 이야기하시는 어머니 표정은 즐거우면서도 그리움이 묻어났다.
서울에서 찍은 엄마 사진들을 보면 내가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보았던 서울 모습이랑 너무 달라 낯설었다. 높은 건물이 없어 산이 도드라져 보였고 건물 외벽과 간판들이 밋밋했다.
특히 학교 교복을 입은 막내 외삼촌과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에서 뒷배경으로 있는 남산서울타워를 보고 놀랐다.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인데, 비포장도로와 나무만 있는 초라한 타워로 보였다. 그때 당시 남산서울타워는 전망대가 막 준공되었고 아직 개장하지 않았을 때였다고 한다. 50여 년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옷들도 신선했다. 옷 무늬가 단순해 점잖아 보이고 밑단이 넓게 펄럭이는 나팔바지를 보며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도 나팔바지 입은 사진이 많은데 그 당시에 나팔바지가 유행했고 당신은 옷을 잘 입고 다니는 편이라고 하셨다.
앨범이 막바지에 이르자 엄마는 잠깐 고향에 내려 왔다가 미래 시어머니에게 붙잡혀 아빠랑 결혼하시게 되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셨다는 말씀을 끝으로 처녀 시절 이야기를 마치셨다.
엄마의 처녀 시절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니와 나를 반반 섞어 놓은 듯하다. 지금은 엄마는 세월에 쓸려 겉모습은 주름지셨지만, 그때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볼 때마다 기억 속에 묻은 젊은 시절을 떠올리시며 얼굴에 순수한 꽃을 피우시는 모습이 소녀 같다. 현재 삶이 지칠 때 엄마와 함께 추억이 가득 담긴 앨범들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그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