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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 / 자본을 넘어선 자본 / 5월 26일 / 철학과 / 200321964 / 홍미애
4장 자본과 잉여가치
1. 가치론의 공리계
정치경제학의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이다 그는 처음으로 부의 본질이 노동이라는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비해서 말하자면 스미스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중농학파에서는 농업노동만이 부를 생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반면 스미스는 모든 노동이 부의 본질아라고 보았으면 상품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리카도는 노동이 가치의 척도일 뿐 아니라,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보았다. 노동이 부의 본질이며 가치를 생산하는 원천이라는 입장을 가리켜 '노동가치론'이라고 한다. 정치경제학은 본질적으로 노동가치론에 기초하고 있다. 정치경제학은 이 노동가치론의 공리들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공리계를 구성한다.
①모든 상품은 가치에 따라 교환된다. 즉 모든 교환은 등가교환이다. (교환의 공리)
②가치는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 즉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다. (생산의 공리)
③가치의 척도는 노동시간이다. 즉 모든가치는 노동시간으로 환원된다. (척도의 공리)
②는 리카도의 주장이고 ③은 스미스의 주장이다. 이 두 공리가 유효하려면 상품이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①이 또다른 공리로 필요했다.
한편 ③은 상품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관한 것인데, 스미스와 리카도는 약간 의견을 달리한다. 리카도는 가치란 상품을 만드는데 투여된 노동시간이라고 말한다. 생산에 직접 투여되는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상 '투하노동가치설'이라 부른다. 스미스는 시장에서 실질적인 교환비율이 가치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교환비율은 '가격'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형성되는 균형가격이다. 통상 앞의 것과 대비하여 '지배노동가치설'이라고 부른다.
시장에서 발생하는 가치와 가격의 괴리는 노동가치론에서 제기되는 근본적 난점이다. 이러한 난점ㅇㄹ 해결하기 위해 가치란 투여된 노동시간이라는 명제를 수용하면서도 가격은 가치에서 끊임없이 괴이되지만 가치로 수렴된다는 '수렴이론'을 채택한다. 더불어 개별상품은 그 가격이 가치와 괴리 되지만, 생산된 상품의 총생산가격은 상품의 총가치와 일치한다는 것으로 가치론으로 해석한다. 가격은 가치로, 따라서 노동시간으로 환원가능하다는 것이다.
④가격은 가치에서 끊임없이 괴리되지만 결국은 가치로 수렴된다. (수렴의 공리)
⑤상품의 연간 총생산가격은 상품 총가치와 일치한다. (가격의 공리)
이 두개의 공리를 추가함으로써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공리계가 구성된다. 그리고 여기서 리카도와 스미스의 고전적 정치경제학과 구별되는 별도의 명제가 추가된다. 투하자본에 발생한 모든 이윤은 잉여가치로 환원된다는 명제이다.
⑥총이윤=총잉여가치 (잉여가치법칙)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는지, 왜 노동시간이 가치량을 결정하는 지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이로써 맑스는 노동가치론의 가장 근본적인 명제들이 남점에 빠지는 곳에 주목한다. 거기서 그는 노동가치론의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찾아낸다.
2.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1)자본의 일반적 공식
『자본』Ⅰ권의 4장에서 맑스는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를 구별한다. 전자는 유통수간으로 가능한 화폐이다. 반면 후자는 그 자체의 양적인 증식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화폐이다. 고리대금업자의 화폐가 후자의 극단적 사례이라면, 쌀을 팔아 옷을 사는 농부의 화폐는 전자의 예라고 하겠다. 이는 상품과 자본의 '유통'을 표시하는 상이한 도식으로 표시될 수 있다. 먼저 화폐가 단순히 상품의 유통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농사지은 쌀을 알아 옷이나 농기구를 사는 농민은 판매와 구매라는 두 단계의 과정을 경과한다. 이것은 C-M으로 표시할 수 있다. 반면 구매는 그 화폐로서 다시 옷이나 농기구를 사는 것이니 M-C'로 표시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표시하면 C-M-C'이 된다. 여기서 C와 C'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 질의 차이, 사용가치의 차이가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게 하는 요인다. 자본가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먼저 화폐를 갖고 시작한다. 그것으로 상품을 구입한다.(M-C) 그 상품은 사용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팔려고 사는 것이다. 그것을 팔아 다시 화폐로 바꾼다.(C-M') 따라서 M-C-M'이라고 쓸 수 있다. 여기서 M과 M'은 모두 화폐이다. 즉 질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 동일한 돈이다. 그런데 이것이 양적으로 동일하다면 이 과정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M'가 M보다 커야 한다. 이는 자본이란 증식을 목표로 하는 유통에 투여되는 화폐 또는 자기증식하는 화폐임을 뜻한다. 이 도식을 비교함으로서 상이한 욕망을 표현하는 상이한 배치임을 보여준다. 배치가 달라지면 M이나 C의 본성 또한 달라진다.
C-M-C'은 사용가치를, 최후에 오는 상품의 질을 그 욕망의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을 획득하면 이 판매와 구매의 운동은 정지한다. 반면 M-C-M'는 끝에 M'가 운동의 목적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운동은 무한한 것이 되는데 첫째, 운동이 끝나는 곳에 있는 화폐 M'으로 시작하는 또 다른 운동의 시점이 된다. 둘째, M'에 포함된 증식분 ⊿M은 그 자체가 M으로서, 앞의 M과 마찬가지로 증식을 추구하는 화폐이다. 따라서 양쪽 모두 양적 증대에 의하여 부 자체로 접근해 가야 할 동일한 사명을 가지로 있다. 이런 이유로 자본의 운동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2)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
자본의 일반적 공식은 자본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가 바로 가치의 증식이고 증식된 화폐로서 '잉여가치(⊿M)'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M'이 M보다 더 커야한다. 그런데 자본에 의한 구매나 판매도, 상품의 구매와 판매인 한 가치법칙에 따라,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공리①) 다시 말해 자기증식하는 화폐라는 자본의 정의는 교환의 공리와 모순된다. 그러나 자본은 구매와 판매로 이어지는 그러한 교환을 통해서만 증식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은 모순에 빠진다. 이러한 이율배반을 맑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이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르면 자보의 증식이 설명될 수 없고 자본의 증식을 정의하려면 등가교환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맑스는 상품에 대한 서술에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노동가치론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환가치를 새로이 생산하는, 그래서 가치증식의 원천이 되는 특별한 가치를 상정하는 것이다. 가치의 원천인 노동(공리②)을 그런 특별한 사용가치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을 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로 정의하면 또 다른 난점이 발생하는 데 노동이 사용가치라면, 마치 공기가 그렇듯이 그 자체로는 자본이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동과 노동력에 관한 맑스의 유명한 구별이 있는데 가치를 갖는 상품, 자본에 의해 구매될 수 있는 상품을 '노동력'이라고 정의하고, 그 상품의 사용가치를 '노동'으로 정의한다면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된다. 즉 자본가는 노동력이란 상품을 사서, 새로운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화폐와 교환되고 거래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고 그 거래는 '노동의 가치'에 따라 이루어지며(등가교환). 노동은 그 노동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가 되는 것이다.
M-C………C'-M'
이 공식에서 점선은 노동력 상품의 사용가치를 사용하는 과정, 즉 노동과정을 표시한다. 이는 상품의 교환과정이 아니라 노동력의 사용과정이고, 그것을 사용해서 상품C'을 생산하는 생산과정이다. 여기서 노동력이란 상품을 구매하는 M-C도, 생산된 상품을 파는 C'-M'도 모두 등가교환에 따라 이루어진다. 여기서 C'와 C와 같을 이유는 없다. 그것은 상품의 유통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서 등가교환의 공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본의 증식을 설명할 수 있다.
3)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관념,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라는 관념이 정말 노동가치론의 공리들에 부합하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첫째 질문 : 노동가치론 공리계 안에서 과연 노동력은 상품으로 정의될 수 있는 가?
노동가치론의 공리에 따르면, 가치는 오직 인간의 노동만이 만들어 낼 수 있으며(생산의 공리), 그것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척도의 공리). 그런데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팔거나 사용하지 않아도 소모되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어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아온 흑인은 노동력을 갖지만 그것은 그의 노동이 만들어 낸것이 아니며 그렇게도 그를 잡은 노예사냥꾼의 노동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 흑인의 노동력이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숲이나 토끼의 뛰는 능력이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 것과 같다. 요컨데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이 생산한 게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생산의 공리(공리 ②)와 대립하게 된다. 노동력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라고 정의 하려면 생산의 공리를 포기해야 한다.
둘째 질문 :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라는 새로운 정의는 과연 노동가치론의 공이들과 부합하는가? 예를 들어 초목이 노루를 키우지만, 노루의 가치는 그것과 무관하며 오직 그것을 잡는 인간의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였다(척도의 공리). 따라서 사용가치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못한다. 가치는 양적인 측면이라면 사용가치는 질적인 측면이다. 즉, 서로 독립적이다. 노동가치론의 공리와 가치 개념을 전제하는 한 노동력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라는 정의도, 노동이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란 정의도 허용될 수 없다.
노동가치론의 공리들로 정합적인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가치론의 공리 자체와 상반되는 그런 개념이나 면제가 필요하다는 이율배반이 나타난다. 맑스는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가는 한 한 적합성을 최대화 하려고 계속 밀고 나간다. 그는 가치론의 공리계 내부에 없는 특별한 조건들을 찾아낸다. 이는 논리적이고 개념덕인 것을 수 있지만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것일 수 있다.
3. 노동과 노동력
노동력은 결코 상품이 아닌데 어떻게 하여 현실적으로는 상품으로 거래되게 되었을까? 맑스는 이제 노동은 가치가 아니지만 '가치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지만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치화된 노동'과 '노동력 가치'를 비교하고 영유하여 잉여가치를 착취 내지 포획하는 매커니즘이다.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노동이나 노동력에 관한 개념이 현실성을 획득하여 작동하게 되는 조건을 볼 수 있다.
1) 노동의 가치화
노동을 통해 '증식된 가치'인 '잉여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한 맑스의 답은 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가 아니지만 가치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치화됨으로써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고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양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다. 즉 양화될 수 있다. 이렇게 양화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질적인 것들은 동질화하여 비교하게 해줄 척도가 있어야 한다. 스미스는 노동시간이 이런 척도가 된다가 주장했다. 그러나 화가의 작업과 음악가의 작업을 노동시간을 척도삼아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하려는 노동의 질 자체가 동질적이거나 적어도 이질성의 폭이 작아야만 양화해서 비교하는 게 유의미하다. 그런 경우에만 노동은 양화될 수 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노동이 양화되는 데 일정한 현실적 조건이 있어야 한다. 신분적 조건이 동질화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노동이 어느 정도 비슷해져서 시간을 척도로 비교하는 게 유의미해야 한다. 산업혁명에 의해 기계적인 생산이 시작되고 장인의 숙련이 단순한 노동으로 변형된 후에야 비교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질적인 측면인 노동이 양화되어 비교되고 계산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또 노동의 결과를 양화해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의 결과를 화폐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노동을 양화하는 것은 자본가의 사용하는 이유가 아니다. 노동의 결과가 양화되어 판매될 수 있을 때 그리하여 증식된 가치로 돌아올 때 노동을 양화한 목적은 달성되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의 가치화란 노동의 결과를 화폐에 의해 양화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 자체를 양화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노동을 가치화하기 위해 구매해야 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시간'을 단위로 지불되어야 한다. 이로 인해 기간과 화폐가 중첩되어 가치의 척도로 자리 잡게 된다.
이를 다루기 위해 맑스는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화과정이라는 두 개의 측면으로 구별한다. 노동과정이란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사용하는 질적인 과정이다. 가치화가정이란 동질화하는 어떤 척도와 노동의 결과를 화폐화함으로써 노동을 가치화하는 양화과정이다. 자본주의 노동과정은, 노동이 언제나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항상 가치화과정으로 진행된다. 가치 생산의 공리는 노동자에 들이밀지만, 가치론의 공리와 무관한 방법으로 증식을 위한 방법을 사용하는 그런 자본의 지배가 노동력을 사용하게 된다. 가치화과정은 노동이라는 사용가치를 가치라는 양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증식된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증식된 가치'는 바로 이런 가치화과정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자본가로 하여금 가치화 과정에 나서게 하는 동력이다. 이런 이유에서 가치화과정은 항상 자본에 의한 가치의 증식과정이다. 이로써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구매와 판매를 행하는데도 가치가 증식되는 자본을 설명할 수 있었다.
2) 노동력의 상품화
타인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면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할 이유가 된다. 이처럼 노동력을 사는 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이다.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다. 노동력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다. 그것을 애초에 만들어내는 것은 자연의 능력이지 인간의 노동이 아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노동력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러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노동력의 처분권을 자신의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노동력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먹고 사는데 별 문제 없는 사람이라면 노동력을 판매하려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선 일해야 하는데 일하기 위한 생산수단을 모두 빼앗아버리면 일하기 위해서 돈을 가진 자본가에게 오게 된다. 이때 비로소 '노동의 상품화'는 가능하게 된다. 이를 맑스는 신분으로부터의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이중의 해방이라 부른다. 노동은 상품이 아닌데 상품화하기 위해 이처럼 참혹한 사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노동력의 사용인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러한 현실적 조건 때문이었다. 노동력이란 상품은 그 사용가치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매하는 방법도 계산하는 방법도 남다르게 특별하다. 노동력을 판매한다고 해서 노동력의 소유권이 자본가에 넘어가지는 않는다. 또한 노동력이란 최저가치는 먹고 살 수 있는 최소비용이다. 이런 배용은 생물학적 최소치와 사회적 최대치 사이에서 정해지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통상 '임금'이란 이름으로 지불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동의 가치화와 노동의 상품화 과정을 고려하면
도식1) M-C(노동력)
노동-C'(상품)-M'
M-C는 상품화된 노동력의 구매를 표시한다. 즉 C는 노동력이란 상품이다. 노동하게 해서 생산한 것이 C'이다. 이는 노동력을 사용한 생산에 의해 획득한 결과물이기에 C와 질적으로 양적으로 다르다. 노동력 상품화에 투여된 화폐 M과 노동의 가치화를 통해 획득한 화폐M'의 차이가 증식된 가치이다.
3) 노동의 개념
노동이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고 노동력의 사용이다. 여기서 맑스는 노동자가 하는 행동이 노동이라는 통념을 깬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이 노동이며, 그런 사용에 의해 노동력의 판매자는 비로소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처럼 노동력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노동은 가치화된 활동이다. 가령 노래방에서 노래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지만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노동이다. 어떤 활동이 타인에 의해 구매되어 사용되는 경우에 비로소 노동이 되며, 활동하는 사람은 비로소 노동자가 된다. 요컨대 노동자가 있고 그의 노동이 있고, 그 다음에 매매되는 게 아니라 노동력의 와 사용이 있고 그것에 의해서 노동과 노동자가 정의된다는 것이다.
4. 착취와 잉여가치
1) 비교와 가치화
왜 생산적인 활동은 노동이 디면 고통과 인내를 포함하는 활동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결과를 상품화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활동 자체를 가치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치를 증식해야 한다는 자본의 강압적의지, 자본의 권력 아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래방에서 하는 노래와 백코러스가 무대에서 하는 노래의 차이 일 것이다. 가치화는 불가피하게 비교를 항상 내포하고 있다. 먼저 자본가는 노동이 결과를 자신이 투여한 자본과 비교한다. 비교를 통해 가치화의 결과가 가치의 증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비교는 가치증식에 대한 요구를 명령어로 함축하고 있다. 잉여가치에 대한 요구의 실질적 원천은 비교 자체보다는 비교형식으로 나타나는 자본의 소유권이다. 노동에서 ‘이윤’을 추출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은 도식1)을 통해서 보면 윗줄은 노동력 상품화의 계열을 아랫줄은 노동이 가치화 계열을 표시한다. 수직축을 비교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노동력의 가치화 가치화된 노동의 차이로서 ‘잉여가치’이다. 반면 “남들만큼은 해야지”하는 비교는 노동을 가치화해서 얻은 M' 사이에서 행해진다. 이 비교는 수평축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노동력의 가치가 동일하게 지불된 조건에서 획득하는 추가적인 이득과, 혹은 산출된 ‘노동의 가치’가 동일한 조건에서 지불되는 ‘노동의 가치’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다.
2)절대-이윤과 상대-이윤
순순한 비교에 의해 발생하는 이윤에 대해 알아보자. 노동자(A, B, C)는 책상이라는 동이란 상품을 생산하며 동일한 임금으로 고용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한 달동에안 A는 100개, B는 120개, C는 14개를 만들었다고 하자. 만약 노동의 대가로 책상 100개치를 노동자에게 지불한다고 하면 A를 고용한 자본가(a, b, c)는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한다. a와 비교할 때 그들은 임금을 지불한다고 하더라고 b, c는 이윤을 얻는 것이다. B, C는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경우에도 책상 20개와 40개치를 각각 착취당한 것이다 이를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획득되는 이윤이란 의미에서 ‘상대-이윤’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a는 당연히 항의를 한다. 그래서 a는 A에게 80개치 임금만을 지불한다. 이를 보고 b, c가 똑같이 80개만 지불하데 된다. 이는 투자한 자본 내지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조건의 절대성 위에서 획득한 이윤이란 의미에서 ‘절대-이윤’이라고 한다. 잉여가치의 착취는 이처럼 비교에 이한 착취를 통해 얻어지는 ‘상대-이윤’과 소유에 기초해 얻어지는 ‘절대-이윤’이 있다. ‘절대-이윤’은 생산수단의 배타적 소유로 기초하여 노동이 산출한 가치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잉여가치이다. 이는 지출한 것 이상이 산출될 때까지 노동하게 함으로써 잉여가치를 발생하게 한다. ‘상대-이윤’은 생산된 결과의 직접적 비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는 경우에서 착취는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노동의 조직방식을 바꾸거나 노동 강도를 높여가며 획득한다. 이 두 가지 잉여가치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5장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런 의지에 노동자의 의지를 복속시켜야 하는 데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면 노동력은 판매된 후에도 노동자의 신체에 직접 귀속되어 있고 노동자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노동력을 사용하는 양상을 둘러싸고 근본적인 대립과 충돌이 발생한다. 이런 대립을 ‘계급투쟁’이라 부른다. 이런 계급투쟁 속에서 잉여가치를 규정하기 위해 잉여가치를 두 가지 계념으로 구별하였다. 하나는 절대적 잉여가지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적 잉여가치이다. 여기에 ‘기계적 잉여가치’를 추가한다.
1. 상품 가치의 구성요소
노동과정은 이미 자본인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과정이다. 생산수단은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으로 구별된다. 노동수단은 노동과정을 통과하면서 소재변환을 거치지 않는 것이고, 노동대상은 소재가 변환되는 것이다. 가령 제과공장에서 밀가루는 노동대상이라면 오븐이나 쟁반은 노동수단이다. 생산수단에 투여되는 비용은 노동과정을 거쳐도 가치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불변자본’(c)이라고 한다. 반변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로 정의되지만 노동과정을 거치면서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가변자본’(v)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때 증식된 가치를 ‘잉여가치’(s)라고 하고 한다.
W=c+v+s이고 노동과정을 통해 추가로 생산된 부분은 w=v+s이다. 또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을 ‘잉여가치율’이라고 하고 s'=s/v로 나타낸다. 이는 지불된 노동과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비율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착취율을 뜻한다.
2. 잉여가치의 외부성
1)무엇이 잉여가치를 결정하는가?
w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시간, 노동강도, 노동방식 내지 노동생산력 등이다. 그런데 노동시간이나, 노동강도, 노동생산력은 가치법칙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은 생물학적 생존능력의 보존에 필요한 한계 안에서 자본가의 의지에 의해 정해진다. 나아가 그것은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의 의해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지는 사회적 관습과 법 등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강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컨베이어 벨트의 회전속력을 올리는 것은 자본가의 의지와 그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w는 가치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래 외부적이다. 또한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v역시 외부적이다. 이는 나라와 사회마다 다르다 .
2)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결국 w나 v는 모두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하여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욕망이 처음부터 대립, 투쟁하여 산출된 결과가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고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노동과정자체와 가치화과정은 이미 계급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잉여가치의 크기는 계급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절대적 잉여가치
1) 노동의 형식적 포섭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사용과정이라는 점에서 자본가 역시 노동자와 덜불어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하지만 노동하는 자기 아니라 노동력을 사용하고 지휘하는 자로 들어간다. 그 결과 노동력 사용과정은 노동과정인 동시네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 착취과정이 된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에 포섭되며, 자본의 지배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써 노동의 흐름은 자본에 포섭되어 훈육죄고 효율성과 생산성에 의해 평가된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과정을 포섭하지만 주어진 노동방식에 따라 포섭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이라고 한다. 노동자에게 일정 시간 안에 상품을 만들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노동 자체를 장악하여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자본은 다만 노동이 결과물만을 자신의 소유로 영유할 수 있을 뿐이다. 다라서 이러한 조건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은 단지 노동시간이 연장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고 그것에 의해서만 확장될 수 있다. 이처럼 노동시간의 절대적 길이를 연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2) 노동시간과 계급토쟁
노동시간에 대한 자본의 한없는 욕망으로 인해 노동은 처음부터 공격이 되고 자본가가 사용하는 노동력은 소유자에 반하는 상품이 된다. 여기서 이 대립과 적대는 노동력을 사용하는 시간 자체가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동시에 속해있다는 이율배반적 사태에 기인한다. 노동시간 전체를 착취하려는 자본의 욕망과 생존 자체를 위한 노동자의 생물학적 투쟁을 상정해야 한다. 14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영국의 노동법규는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가가 법적인 규제 없이 노동자를 규제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노동을 형식적으로만 포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19세기에 이르면서 노동방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노동과정이 리듬이 기계에 의해 장악되면서 사태는 달라졌다. 절대적 잉여가치에서 상대적 잉여가치로 이전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시간은 거꾸로 절대적 잉여가치가 지배적이었던 시기보다 훨씬 더 연장되었다. 또한 이런 연장이 법의 지원 없이 자본가가 개인에 의해 충분히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제한하기 위해 법의 힘을 요청하게 된다.
4. 상대적 잉여가치
1)노동의 실질적 포섭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방식의 변화와 결부되어 있다. 노동시간의 절대적 길이가 제한되어 있을 때 노동시간 중에서 필요노동시간을 축소하여 획득하는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방식은 근본적인 변화와 그것을 통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방식의 전환과 기계의 도입은 노동자체가 자본의 손아쉬에 실질적으로 장악되고 포섭되는 결과를 나았다. 이른바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노동방식의 전환은, 혹은 내포적 생산의 전ㄹㄱ 자체는 처음부터 노종 자체를 겨냥한 계급투쟁이었다.
2) 협업과 분업
협업이란 생산수단과 노동자를 하나의 장소에 집결함으로써 노동과정을 집합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본자의 직접적인 지휘와 관리 아래 노동과정을 두게 된다. 협업은 예전과 다른 이득을 제공한다. 단순협업은 실제로는 일정한 양상의 분업을 수반하며 진행된다. 분업이란 이전에 하나고 이루어지던 작업은 부분작업들로 분해하여 그 각각의 부분작업을 한 노동자의 전문적 기능으로 독립시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분할된 작업들은 하나의 전체로 통합하고 결합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단순협업에서 노동과정의 필수적 요소로 등장했다면, 이젠 분할된 부분작업들을 결합하고 통일하는 정신적 능력으로서, 정신적 노동으로서 노동과정의 일부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양상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한 노동이 포섭은 아직도 형식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숙련 노동자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기계와 계급투쟁
이처럼 자본이 노동ㅇㄹ 실질적으로 포섭하고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으로 중심을 이동한 것은 기계와 대공업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다. 이제 노동력의 사용이 노동자의 활동 이전에 기계의 작동이 되게 함으로써 노동과정의 일차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은 노동자에서 기계로 이전한다. 기계의 도입으로 아동 및 여성노동의 도입, 노동일의 연장, 노동의 강화의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권력을 자본가가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이리하여 기계의 도입은 노동자체에 하나의 결정적인 변환을 야기한다. 노동은 기계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동작들로 분해되고 각각의 동작은 지칠줄 모르는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반복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러한 변환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능력을 무력화하며 이로써 노동과정 자체에 대한 노동자의 실질적 장악 능력을 제거한다. 기계의 도입은 노동과정 자체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었던 셈이다. 러다이트 운동은 자본가의 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거의 본증적인 대응이었으며, 기계를 통해 새로이 강제되는 규율과 강제, 단조로워진 노동들에 대한 저항이었다.
4) 공장체제
공장에서는 반복하는 것만이 요구된다. 모든 것이 벽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 자본의 권력 아래 하나의 거대한 집합체로 결합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장은 하나의 물질적 장치이며 권력이 작동하는 하나의 체제임에 분명하다. 19세기에는 공간을 특정한 목적과 기능에 따라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적절한 위치를 할당하며 특정하게 형식화돈 동작들을 통해 신체를 직접적으로 훈육함으로써 삶의 과정을 장악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공장과 대공업은 이러한 훈육체제가 사회전체로 확장되는 결정적인 시점이었다.
5. 기계적 잉여가치
1) ‘새로운 산업혁명’
부르주아지는 또 한번의 새로운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한다. 이전의 산업혁명이 거대한 기계와 공장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새로운 산업혁명은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프로세서나 결합장치들을 가능한 한 조그만 기계 안에 집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전자가 광범위한 농촌인구를 도시로 공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진행되었던 면면 후자는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체하여 공장 밖으로 노동 밖으로 몰아내면서 진행되었다.1970년대 에너지 효율성 놓은 기계가 도입이 되었고 1980년에 후반에 이르며 개인용 컴퓨터가 공장과 사무실에 보급되었다.
포드주의 체제란 에셈블리 라인을 따라 공장의 경계는 물리적으로 확장되었고 공장 안에서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동인을 제공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이듬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노동 자체는 그러한 기계의 리듬에 부합하는 역학적인 단순 동작으로 탈숙련화되는 것이다. 포드주의를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절약과 금욕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를 강요하였기에 대책이 필요하였다. 금욕윤리에서 소비윤리로 대체하기 위해 돈을 나워주었다. 임금이 많아도 강화돈 노동에 소모되는 노동력이 피폐해져서 과로로 지쳐갔으며 동시에 불량품의 비율이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임금이 하방경직성을 갖는 것과 같이 욕망 또한 그래서 흔히 말하는 3D직종에는 거부감을 표시하였다. 자본은 자신이 이익에 부합하기 위해 과학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을 통과하면서 자동화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또한번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 새로운 산업혁명 또한 이전의 산업혁명처럼 노동과정에 새로운 종류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노동력의 사용방식을 바꾸려는 자본가의 계급투쟁으로 진행된것이다.
2) 노동의 기계적 포섭
새로운 세대의 기계로 인해 기계와 노동자의 관계가 변화가게 된다. 이전의 매뉴팩처가 인간 자신을 기계로 만들었다면 산업혁명기의 2세대 기계는 인간의 활동을 역학적 기계와 대응하는 활동으로 변형시켰다. 반면 3세대의 컴퓨터화된 기계들은 이제 기계적 활동 자체를 정신화 한다. 기계적 활동이 정신화 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기계화도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자동화를 통해 노동자없이 노동하게 하려는 자본가들의 꿈을 현실화 시켰다 이전의 이계들은 정신없는 육체노동을 통해 노동과정 자체를 기계적으로 장악하려는 전략을 함축하고 있다면 이번 기계들은 정신노동마저 기계화함으로써 노동과정 자체에서 노동자를 축출하려는 전략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는 기계와 접속하여 기계적ㅇ로 처리할 수 있는 공간적 영역을 확장했다 그 결과로 작업 자체가 정보적 처리과정으로 변환되었다. 자동화와 정보화는 노동자 없는 노동을 자본이 착취할 수 있는 두 가지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화가 노동자의 육체적 정신적인 활동능력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기계적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가치화하고 착취한다. 이처럼 노동이나 활동을 기계적으로 장악하고 포섭하는 것을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고 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기계적 잉여가치라고 한다. 또한 생명활동 자체를 기계적 활동의 영역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생명 활동 자체가 기계화시킨 것은 생명활동 자체의 가치화하고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가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하지 못한 상태에서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였고 상대적 잉여가치가 기계적 대공업을 통해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한 단계에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였다면 기계적 잉여가치는 기게 자체의 노동을 혹은 인간과 기계와의 접속을 가치화할 수 있게 된 단계에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이다.
3) 기계, 인간, 생명
자동화와 정보화는 인간만이 가치 내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인간학적 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계도 무언가 생산하고 인간 아닌 생명도 무언가를 생산한다. 기계의 활동도 생명활동도 어떤 가치있는 것을 생산한ㄷ. 이는 인간학적, 경제학적 독단이 산물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자본은 모든 가치있는 것을 화폐 꾸고 가치화하려고 한다. 인간의 활동이 노동이 되었던 것처럼 기계적 종합 활동도 생물들의 생명활동도 노동이 된다.
4) 훈육체제에서 통제체제로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노동자를 착취 위해 노동자를 공장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둘 이유가 매우 적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자체의 탈영토성을 강화한다. 또한 노동과정의 분산을 야기한다. 기계와 접속하여 어떤 가치있는 활동을 생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잉여가치를 착취할 수 있는 곳으로 변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사회적 공장이 된 것이다. 이제 훈육의 체제를 규제 메커니즘으로 대체한다. 마케팅이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한 예로 신용카드를 들 수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인센티브 또한 포함된다.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가지 이어지던 훈육사회가 이제 통제사회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혹시 그 미애? ㅋㅋ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