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疾風)
1976년2월 차가운 날씨지만 김해국제공항 현장은 연일 레미콘트럭이 들락 인다. 콘크리트작업 후반부가 내겐 더 바쁘다. 청구수량이 모자라면 낭패거니와 남는 경우 뒤처리가 고역이다. 제물마감이면 현장을 밤새 지켜야 한다. 찬 바닷바람에 손이며 얼굴이 트고 씻지도 못해 행색이 말이 아니다.
비 오는 날 오후면 미니버스로 부산외출을 시켜준다, 온천을 들려 서면로터리 통닭이 코스인데 선배들은 시내에 남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차엔 나 혼자다.
마감공사가 막바지인데 청사 중앙부 익스팬션조인트가 안정되지 않는다. 조수간만 에 의한 부력을 감안한 설계였고 상부 구조물이 완성되고 마감공사의 하중이 실려 안정될 줄 알았던 문제다. 요즘 같으면 어스앵커로 안정시킬 수 있으련만 당시의 기술로는 건물에 하중을 올려 밸런스를 맞추는 방안이 최선이다. 열흘에 걸쳐 지하2층 대부분의 방들을 콘크리트로 채웠다. 콘크리트 수화반응으로 한동안 청사는 찜통이다.
채움 콘크리트가 끝난 날 직원전체 동래 온천 후 금정산성 염소불고기회식을 했다. 금정산성은 염소를 방목하는 부산 오지로 그곳만 허락된 밀주가 나온다. 그날 선배들 따라 2차로 서면(西面)을 경험했다.
아침 눈을 떠보니 어느 살림방이다. 술집이 이어진 유흥가 들어선 것까지는 기억이 있었으나 그 뒤 기억이 없다. 내가 깬 것을 알고 여자는 레미콘차를 타고 빨리 현장으로 가라했다.
그녀는 내가 일찍 귀임해야 하고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탑승위치를 모른다 했더니 여자가 앞장을 선다. 부전동 개천을 끼고 올라 로타리 동래방향 표지판아래가 레미콘 트럭을 얻어 타는 곳이다.
이 시간에 레미콘은 거의 김해공항 행이다. 그녀의 손 흔드는 모습이 백미러에서 멀어지고서야 속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내 선임은 인하대 출신 현장경력 4년차 대리급, 덕두(德斗)읍내에 방을 얻어 신혼살림중이다. 그에게 구체공사 업무를 배우고 직영인부관리를 돕는다. 당시 중간직급은 인하대출신이 대부분으로 타교출신을 돌리는 풍조가 있었는데 개의치 않고 나를 이끌어 주는 내겐 형과도 같은 분이다.
그에게서 서면(西面)비어홀은 회사가 가는 술집 중에 한곳으로 상호는 바다, 맥주 세병에 안주 하나가 기본으로 술값은 이천 원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레미콘 막차를 타고 서면을 향했다. 골목에 들며 지역전체가 소위 B급 술집 집결소란 느낌이 들었다. 비어홀 바다는 긴 카운터 바라보고로 칸막이가 이어졌는데 실내는 어둡고 맥주의 시큼한 냄새가 배어있다. 나를 반긴 그녀 이름은 수정(水晶), 부산생활 3년째라 했다.
수정은 칸막이를 들락날락 하면서 카운터에서 술을 마시는 내게 잠시앉아 술을 따랐다. 통금이 되서야 영업이 끝났는데. 그녀의 손에 끌려 집에 도착해보니 마당 수돗가에선 젊은 여자들이 세면을 하거나 빨래중이다. 마루를 두고 방이 여럿 되는데 남자들이 누워있는 방도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녀의 손 인사를 받으며 레미콘 트럭을 타는 곳으로 달렸다. 발걸음이 나는 듯 가벼웠다, 밤사이 속옷을 빨아 다린 듯 비누냄새가 났다. 이후 틈만 나면 바다를 다녀왔다.
준공을 앞두고부터 공항버스가 운행됐다. 그 버스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거의 한 달 만이다.
헌데 수정은 뭔 일인지 인사대신 방 열쇄를 줘준다. 집에가 있으라는 뜻이다. 수정의 귀가는 늦었다, 평소보단 취한 듯 했다.
그녀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고난 했던 가 아니면 그리웠던 것일까.
다급해하는 나를 얼레며 내 옷을 벗기고 자신도 벗는다. 그녀에게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농염한 여자 살 냄새다. 이글대는 몸으로 그녀를 안았다. 한 몸이 되었다 . 매미가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지키기 위해 수액을 깊게 빨 듯 그녀의 진액을 빨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자도 진득한 신음을 낸다. 육신을 허물고 서로를 묻었다.
그녀에게서 서로 맘이 통하면 팁을 주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됐고 그럴수록 팁은 필요하다는 것을 들었다. 호스티스의 역할이 생각보다 광범위함을 알게 됐다.
당시 월급이 십여 만원, 부모님께 송금하고 밥값 담배 잡비를 제하면 남는 사만여 원으로 부산을 드나들다보니 돈이 부족했다. 이에 비해 선배들은 술집에 드는 비용을 개의치 않는다, 다들 뒷돈을 챙기는 것이다.
아침이면 각 업체 총무들이 출력일보를 제출하는데 내 도장이 필수다. 방식을 바꿔 일일이 출력 따졌더니 효과가 나타났다, 일보 밑에 봉투가 딸려있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가 담겨있었다.
미뤄왔던 웨이터, 마담에게도 팁을 주고 수정의 낡은 선풍기도 바꿔주었다. 뒷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11월 화물청사까지 완공되어가면서 인원철수가 시작됐다. 중앙동 부산청사 소장이 나를 지명했지만 소장은 지방을 떠돌기에는 아직 어리다며 서울 잠실 주공5단지 신축현장으로 가라 했다. 소장은 내가 서면을 드나든 것, 업체 총무들에게 돈을 챙긴 것 그간의 행적을 다 알 고 있었던 것이다.
소장은 바로 떠나라 했다.
이임 사흘 내에 부임해야 한다는 사규를 알고 있었지만 수정에게 작별인사 없이는 부산을 떠날 수 없었다.
홀연 나타난 남자가 기약도 없이 떠난다고 하니 기가 막힌 듯 수정은 눈물이다. 어느 때쯤 오느냐 다시 볼 수 있느냐 고 물을 수도 없는 허망뿐이다. 사무침을 풀기에는 하루저녁만으론 부족했다. 이틀 후 기차에 올랐다. 차장으로 흐릿한 초겨울 들판이 지나친다.
질풍노도의 사랑이 그렇게 끝났다.
2021년 6월8일 안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