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금부 터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 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받았는데
중죄인, 곧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번의 사적지는 터가 많았는데...앞에 두고도 몇번을 ㅜ.ㅜ 찾기를 여러번
전옥서 터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
박해 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많은 성인들이 구금되었고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
전옥서에서 순교한 103위 성인 가운데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
좌포도청 터
한조선 시대 서울 동 남 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손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
수많은 신자들이 좌 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분명하게
좌 우 포도청으로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는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순교하였다.
종로 성지 성당
서울의 중요한 순교터이자 최대의 신앙 증언 터였던 좌 우포도청과 의금부, 형조, 전옥서 등의
관아들이 있던 곳을 관할하기 때문에 2013년 2월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승인하였다.
성당 내에 현양관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 곳은 아주 에전에 어딘지 모르고 기억과 사진만 남아 있던 장소였는데
드디어 그 기억이 종로 성당이었음을 확인하였다.
추측하고 갔던 미사시간과 달라서 미사를 못드렸지만
이 곳은 안내와 설명을 전문적으로 해 주시는 형제님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문 닫을 시간이고 우리도 재방문이어서 길게는 듣지 못했지만
그 형제님의 감사를...
가회동 성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 첫 공식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
1955년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1주일 전에 세례 받기를 원하여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입교 동기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성 대원군 즉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전에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한국천주교회창립 터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의 북경 북당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해 음력 8월 서울 수표교 부근에 있던이벽의 집에 이벽 요한 세례자와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정약용 요한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최창현 요한, 최인길 마티아, 김종교 프란치스코 등에세 세례를 베풀어 신자 공동체를 만듦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