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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
(59) 유다 사람이 소리지를 때 대하 13:13-18
솔로몬의 아들 르보호암이 아버지 솔로몬에 이어 나이 41세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쪽 10개 지파가 등을 돌렸고 남유다만의 왕으로 전락합니다. 드러나 보이는 이유야 과도한 부역과 세금납부의 문제였지만 숨겨진 영적 이유는 지난 시간 살펴보신대로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의 삶을 살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암몬 사람 나아마는 하나님을 섬기기는커녕, 예루살렘 성전도, 다윗성도 방문하지 못했던 것을 살펴보셨지요? 계속해서 자기의 우상을 섬기며 르호보암을 양육했던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어땠나요? 솔로몬의 신하였던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20년간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가 왕이 될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좇았다면 오히려 남유다보다 10배나 많은 힘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 줄만 알았지, 하나님과 백성들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그릇이 되질 못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왕이 된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길,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도록, 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도 떠나도록 만들었지요. 황금송아지 신상을 북쪽 단과 남쪽 벧엘에 세웠고, 제사장들도 다 해임하고, 일반 사람들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고, 여호와의 절기마저 자기 마음대로 바꿔 버렸습니다. 섬길 대상, 섬길 사람, 섬길 장소, 섬길 시간 그 모두가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백성들의 마음과 발길을 끊어버려야 자기의 왕권이 든든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야말로 오판이요, 악행을 저지르고 말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북쪽 이스라엘 지역에 흩어져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리고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자 했던 백성들이 이제 유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왔고, 그때부터 유다에는 온전한 번제와 예배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어간 백성들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의 나라가 3년동안 강성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되었다고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데, 복을 받고 나니 하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복으로 형통하고 승승장구하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 떠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속에 걱정, 밖에 근심, 나라밖으로는 애굽이 쳐들어와 모든 것을 강탈해갔고, 나라 안으로는 저 여로보암과 항상 전쟁이 있는 것이지요? 늘 싸워야했고 피를 흘려야했습니다. 재산과 강성함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물론, 하나님 주신 평안과 안정이 다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 바로 복주시는 하나님을 교만하여 버린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자,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다음을 이야기합니다.
르호보암이 그렇게 17년의 왕정을 끝으로 58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제 그의 아들 아비야가 남왕국 유다의 2번째 왕 위에 오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야가 유다의 왕이 되고(중략) 여로보암과 더불어 싸울새”
아버지 르호보암이 북이스라엘 여로보암보다 먼저 죽고, 이제 아비야가 르호보암을 이어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아비야가 한 일은 저 여로보암을 향해 전쟁을 치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누구인데요? 네, 아버지가 3년 강성하고 나머지 14년 동안을 싸우며 지냈던 북이스라엘의 왕입니다. 본문이 무엇을 증언하고 있지요? 르호보암은 아들에게 자신의 싸움을 물려주는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로 말미암은 전쟁이 아들대에까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보게 되지요? 누가 생각나십니까? 네, 사울왕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다윗이 생각납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 네, 아들 솔로몬에게 아버지가 맺은 좋은 관계를 물려주었던 사람이지요? 아버지 다윗 때문에 솔로몬은 그저 받으러 와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크고 웅장한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좋은 인맥을 맺어두었고,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주변나라들과 화평한 관계를 물려주었던 것이지요. 다윗 이전에도 있었지요?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였기에, 오늘 그의 아들 므비보셋은 사울의 집안이 다 진멸당하는 중에도 구원을 입지요. 그리고 다윗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은혜와 사울의 재산을 다 돌려받을 수 있는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반면에 사울은 어떻지요? 네, 자신이 싸워야할 싸움을 가만히 있는 딸을 팔아가며 병사들에게 떠넘깁니다. 결국 자신의 갑옷을 벗어, 자신의 칼을 쥐어 주고 다윗을 내보내지요? 다윗은 그것들 다 내려놓고, 자신의 물매와 돌맹이를 들고 나아갔던 것,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아가 싸움에 승리했던 것 다 기억하고 계시지요?
자,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아비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나로 인해 싸움이 끝나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가는 곳마다 이기게 하시고 평화를 주신 나라를 물려주시겠습니까? 나로 인해 생겨난 미움과 증오의 관계를 물려주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내 자식이 사랑받고 복을 받는 그런 관계를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하나님중심 예배중심 말씀 중심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평화와 안정은 물론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과 복을 남겨주시는 귀한 부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시시로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멋진 기념비를 세우시어, 나도 내 이웃들도 내 자녀들도 더욱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복을 누리는 귀한 삶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르호보암과 아비야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3절에 보면 군사 40만명을 뽑아서 전투를 준비하게 했고, 그에 맞서 여로보암은 “큰 용사 80만 명을 뽑아서” 전투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비야가 에브라임 산 중 곧 스마라임 산 위에 올라가 여보로암과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외쳤던 이야기가 5-12절까지 기록이 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 자손에게 영원한 소금언약을 베푸셨다. 그런데 어찌 여로보암이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을 배반하고 등을 돌려 유다를 대적하려 드는 것이냐, 그것이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 일이겠느냐, 그것은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일이다, 더욱이 너는 허망한 황금송아지 신전을 만들었고, 이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다 폐위시켜 추방시키지 않았느냐, 또한 하나님의 절기들도 네 멋대로 바꿔 버리지 않았느냐?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건재하다, 그들이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 너희들은 여호와의 계명을 저버렸지만 우리들은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 항복해라!
이것이 유다 왕이 자기 군사 40만 명 앞에서 ‘큰 용사 80만 명’을 이끄는 여보로암 왕에게 퍼부은 선전포고입니다. 이 전쟁에 명분이 있고 정당성이 있는 쪽은 우리요,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다! 그쵸?
그러나 용사 40만 명과 80만 명, 이미 숫자부터 두 배나 더 많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확인하고 있지만, 남왕국 유다의 군대는 용감한 용사요, 북왕국의 용사는 ‘큰 용사’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더 월등한 군대라는 점이죠. 키도, 체구도 더욱 크고 대단한 용사임을 밝혀주는 것이죠. 또한 남왕국 유다의 군대는 싸움을 준비하였으나, 북 이스라엘은 전투를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한 월등한 군대를 향해 아비야 왕이 겁도 없이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정말로 믿어서라기보다, 아마 경험없는 왕의 호기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본문 13절은 어떻게 밝혀줍니까? 이 모든 외침이, 북이스라엘이 보기에, 하룻강아지의 철모르는 선전포고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유다의 뒤를 둘러 복병하였으므로 그 앞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고 그 뒤에는 복병이 있는지라.” 왜 그렇게 잠잠하게 북이스라엘이 아비야의 말을 듣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장황하고 긴 선전포고가 이어지는 동안,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이미 군사를 유다 뒤로 돌려 놓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남유다 왕 아비야는, 그저 싸울 수 있을만한 남유다의 사내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왕이 되어서 전쟁의 ‘전’자로 모르는 녀석이 와서 까불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지요. 당연한 수순이 이어집니다.
그래요, 어느 새 앞에 이스라엘 사람, 뒤에는 복병입니다, 흥분해서 침 튀겨가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아비야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단 하나 할 수 있었던 것을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이 전쟁의 승패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14절은 읽어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자기 앞 뒤의 적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부니라”(대하13:14)
자세히 보세요. 이 부르짖음은 아비야의 명령에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아비야가 한 것도 아닙니다. 유다 사람이, 불려온 병사들이, 하나님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소리지른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힘을 다해 하나님 우리 여기 있습니다. 목소리보다 큰 나팔소리를 울린 것입니다.
여러분 앞뒤에 적이 있을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이요, 제사장들은 힘껏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자리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하셨다고요? 이스라엘의 용감한 군사가 싸운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기도하고 나팔을 불었을 뿐인데,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대하13:15)
여러분, 이것이 다윗이 귀하게 얻은 저 기병들과 병거를 끄는 말들의 힘줄을 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면 이기는 것입니다. 말이, 군사의 용맹함과 큼임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늘 기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승리를 경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한다고요? 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 오늘 아비야는 이 일을 잘 했을까요?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을 유다의 손에 넘겨주시니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승리를 거두는데, 17절에 저 북이스라엘 큰 용사 80만명 가운데 50만 명이 죽고 이제 남은 군대가 30만 명이었는데, 18절에는 그들이 항복했다고, 19절에는 아비야가 북쪽의 벧엘과 여러 동네들을 다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절에는 여로보암이 그 전투에서 패해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기록이 이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아비야는 점점 강성하며”
어디서 많이 보신 것 같은 구절이지요? 네, 하나님이 사울의 집을 약하게 하시고, 다윗의 집을 강하게 하시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도우실 이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부르짖고 찬송하니, 오늘 하나님이 승리케 하시는 것입니다. 무기가 아닙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오늘의 이 놀라운 승리와 강성함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참 잘한 것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남왕국 유다의 왕 아비야,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하나님 앞에 대단히 신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시고, 강성하게 해 주신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기가 쉽죠. 하지만 열왕기상 15장에서 밝혀주는 아비야의 모습은 다릅니다.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왕상15:3-4)하고 증언하죠. 열왕기 기자는 그 야비야가 하나님 앞에 옳게 행한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 그나마 나라가 튼튼했던 것은 바로 다윗의 언약, 다윗이 하나님 앞에 순종한 것 때문에 그런 은총을 누렸다는 평가입니다.
그렇다면 왜 역대기 기자는 열왕기 기자의 관점과 달리, 아비야의 모습을 그래도 선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요? 선전포고를 날릴 때에도 다윗과 언약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고, 북이스라엘 왕국이 황금송아지 신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과는 달리, 여호와의 나라 남유다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중심이 되어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올리고 있다, 그래서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의 수도 두 배나 적었는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되었고, 여로보암은 그 뒤 병에 걸려 죽었지만, 아비야는 비록 3년간 통치했을망정 강성하지 않았느냐, 하는 증언을 남겨두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요. 남 유다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한 까닭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과 약속한 언약 때문에 유다 백성들을 기억하시고 구원을 베푸셨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으니, 저 포로공동체에게,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의 인생, 수많은 전쟁과 싸움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 무너지고 황폐한 땅을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곳으로 재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 중심, 신앙중심으로 나가는 길 뿐인 것을 위기 때마다 부르짖고 외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라고, 힘을 다해 선언하며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서 크고 작은 싸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연전 연승입니다. 오늘 아비야도 승리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중심, 예배중심, 말씀중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오늘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분들이 되심으로 오늘도 모든 곳에 승리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영원히 누리는 존귀한 분들이 다들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들이 악해, 아비얌처럼 죄를 행하고 온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길 축복합니다. 상황과 처지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하룻강아지처럼 서 있다할지라도, 두려움이 닥친 순간에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래요. 오늘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 용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어리석고 죄가 많아서도 아닙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조차도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 때문에 아비야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은, 예수님 때문에 더욱 우리를 지키시고 돌아보실 것입니다.
크고 놀라운 이 자녀됨의 축복, 성경이 명령하고 예수님도 확인해주신 이 부르짖음의 은총을 늘 누리시는 주의 종들이 다들 되시길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르호보암에 이어 아들 아비야가 3년간 통치하면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아비야가 실은 잘 한 게 없지만, 다윗과의 언약을 떠올리며 그가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승리하게 하시고 나라가 강성했다고 일러줍니다. 오늘 저희들도 매사에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중심, 말씀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시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속에 승리하게 하옵소서. 르호보암같이 내 싸움을 물려주는 어리석은 이가 되지 말게 하시고, 다윗과 같이 후손들이 복받게 하는 언약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사도로 점점 더 강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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