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견고히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固國保民之方)
··············································································· 한포재 이건명 선생
함경도 과거시험 책제〔北路試士策題〕
묻노라. 관방(關防)의 설치는 변방을 견고히 하여 백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주역》은 ‘문을 겹겹으로 하는’ 뜻을 드러냈고 《시경》은 ‘번병(藩屛)’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으니,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요순 시대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제도를 모두 하나하나 가리켜 분명히 말할 수 있는가?
공자는 《춘추》를 지어 거(莒)나라를 침입한 것에 대한 기롱(欺弄) 하였고, 맹자는 “국가를 견고히 하되 산과 강의 험고(險固)함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경전의 가르침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어째서인가? 성을 쌓고 병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진(秦)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었는데 끝내 멸망의 화를 자초하였고, 변방을 개척하여 위세를 떨친 것은 한 무제(漢武帝)보다 성대한 왕이 없었는데 재력이 고갈되는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국가의 안위는 과연 여기에 있지 않은 것인가? 그러나 진 무제(晉武帝)가 군대를 버릴 적에 사이(四夷)의 출입에 대한 방비가 없었고, 요(遼)나라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서 남조(南朝 송(宋))에 인재가 없다고 기롱했으니, 이는 모두 멀리 내다보고 환란을 염려하는 계책을 세우는 데에 실수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모두 강적과 인접해 있어서, 열성(列聖)의 경영과 모신(謀臣)의 구획에 반드시 비상사태의 대비를 우선하고 방어 대책을 아주 철저히 했지만, 적을 만나면 번번이 궤멸하고 치욕을 설욕하지도 못하였다.
시험 삼아 함경도 한 도(道)로 말하자면, 긴 강이 천연적인 해자(垓子)가 되어 가로막고 있고 겹겹의 고개는 촉도(蜀道)의 험준함이 있는데, 군사용 정자와 누대를 섞어 배치하고 곤수(閫帥)와 진장(鎭將)이 통제하니, 변방을 견고히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데에 처음부터 주도면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년(1592, 선조25년)과 정묘년(1627, 인조5년)의 난리를 당하여 섬 오랑캐가 쳐들어와 여러 군(郡)이 와해되고, 북쪽 오랑캐가 노략질을 일삼아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어찌 사람의 계획은 좋지 못하고 천혜의 험준함은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는 것인가.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진보(鎭堡)가 비록 많아도 병사가 적고 힘이 약하므로 빨리 백성을 모집하여 방수군(防戍軍)을 증원함으로써 변방의 대책을 단단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국초(國初)에 진(鎭)을 설치한 뜻은 본래 야인(野人)과 번호(蕃胡)가 출몰하면서 침탈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오늘날의 근심은 여기에 있지 않고 실은 대대적으로 깊숙이 쳐들어오는 적에 있으니, 요충이 되는 험하고 막힌 곳에 성을 쌓고 병사를 모집하여 그 기세를 막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이야기 중에 어느 것이 타당한가?
또 이른바 나라를 견고히 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방도가 오로지 구구한 관방(關防)의 설치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니, 별도로 다른 방도가 있는가? 제생(諸生)은 변방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반드시 직접 목격하고 속으로 계산해 둔 바가 있을 터이니, 각기 대책문(對策文)에 다 아뢰도록 하라.
[주-1] 주역은 …… 드러냈고 :《주역》〈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문을 이중으로 하고 목탁을 쳐서 포악한 나그네를 대비하였다.[重門擊柝, 以待暴客.]”라고 하여, 미리 방비하는 뜻이라 하였다.
[주-2] 시경은 …… 칭송하였으니 :《시경(詩經)》〈판(板)〉에 “대덕(大德)의 사람은 나라의 울타리이며, 많은 무리는 나라의 담이요. 큰 제후국은 나라의 병풍이며, 대종은 나라의 정간(楨幹)이다.[价人維藩, 大師維垣. 大邦維屛, 大宗維翰.]”라고 하였다.
[주-3] 공자는 …… 하였고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 성공(魯成公) 9년 기사에, 거(莒)나라가 초(楚)나라에게 12일 만에 함락당한 것은 초나라를 먼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로 생각하여 성곽을 수축하지 않는 등 전혀 방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주-4] 맹자는 …… 하였으니 : 맹자가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에 대해 말하면서, “백성을 한계 짓되 국경의 경계로써 하지 않으며, 국가를 견고히 하되 산과 강의 험고(險固)함으로써 하지 않으며, 천하를 두렵게 하되 병혁(兵革)의 예리함으로써 하지 않는다.[域民, 不以封疆之界, 固國, 不以山谿之險, 威天下, 不以兵革之利.]”라는 옛말을 인용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5] 진 무제(晉武帝)가 …… 없었고 : 진 무제가 280년에 3국을 통일하고 나서 조(詔)를 내려, 천하가 통일되었으니 창과 방패를 거두어 깊이 간직해야 하니 주군(州郡)의 병력을 다 제거하고 큰 군(郡)에는 무리(武吏) 100명, 작은 군에는 50명을 두라고 했다. 또 시어사(侍御史) 곽흠(郭欽)이 상소를 올려 사방 오랑캐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금령을 엄격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무제가 듣지 않았다. 《資治通鑑 卷81 晉紀3 世祖武皇帝》
[주-D006] 요(遼)나라의 …… 기롱했으니 : 북송의 기강이 문란하여 내외의 신하와 장수가 용렬한 인물로 채워지는 것을 보고 기롱한 것이다. 《歷代名臣奏議 卷337 禦邊》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9권 /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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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北路試士策題
問。關防之設。所以固圉而保民也。易著重門之義。詩稱藩屛之美。則斯誠有國之不可忽。而其來尙矣。唐虞三代之制。皆可歷指而明言歟。孔子之修春秋。乃有滅莒之譏。而孟子之言固國。不取山谿之險。經傳之訓。有所逕庭何歟。築城屯兵。莫强於嬴秦。而終取 o覆亡之禍。拓邊示威。莫盛於漢武。而不覺虛耗之弊。然則國之安危。果不在此歟。晉武去兵而四夷無出入之防。遼兵渡河而南朝有無人之譏。是皆失於經遠慮患之圖而然歟。惟我國家南北敻絶。皆隣强敵。列聖之所經營。謀臣之所區畫。必先陰雨之備。克盡捍禦之策。而遇賊輒潰。有恥未雪。試以北關一路言之。長江設天塹之限。重嶺有蜀道之險。亭臺錯置。帥鎭控制。其於固圉而保民。未始不周且密矣。及至壬丁之難。島夷長驅。列郡瓦解。北虜肆掠。萬姓魚肉。豈人謀不臧而天險有不可恃歟。今之議者以爲 o鎭堡雖多。而兵單力弱。亟宜募民添戍。以壯邊猷。而以爲國初設鎭之意。本爲野人蕃胡之出沒搶略。而今日所憂。不在於此。實在於大擧深入之寇。則莫如就要衝險阨之處。築城募兵。以遏其勢。此二說何者爲得歟。抑所謂固國保民之方。不專在於區區關防之設施。而別有他道歟。諸生生長邊地。必有目擊而心筭者。其各悉陳于篇。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9권 / 잡저(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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