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心(심), 意(의), 識(식)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 셋을 다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유식학파의 팔식론(八識論)은 원천적으로 잘못된 이론이다. 하지만 한국 및 중국불교에서 6~7C부터 지금까지 心(심), 意(의), 識(식)에 대해 경전이나 학자에 따라 다른 해석을 보이며, 설왕설래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 화엄학 불교에서는 깨닫기 위해서는 제8아뢰야식을 모르면 안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국불교에서 많이 논구(論究)돼온 心(심), 意(의), 識(식)에 대해 정확하게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여기에 정리해둔다.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은 산스크리트어 ālaya vijñāna(알라야 비즈냐나)를 번역한 것으로, 이것은 無沒識(무몰식), 藏識(장식), 種子識(종자식) 등으로 한역돼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종자를 이 식 안에 저장하여, 없어지는[沒] 것 없이[無] 모두 저장[藏]하고 있는 식(識)’이라는 뜻이다. 아뢰야식은 그 안에 온갖 것들의 종자, 즉 물질과 정신의 모든 종자를 다 저장하고 있는 식(識)이다. 제8아뢰야식은 업의 종자를 모아 저장[積集]하는 기능이 있고, 인연이 갖춰지면 저장된 업의 종자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봤다. 이것은 마치 씨앗 속에 그 개체에 대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가 조건이 되면, 그것이 발아하여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아뢰야식의 이러한 기능은 종자(種子)와 집기(集起)의 의미로서의 心(심)과 부합한다고 봤다.
제7말나식은 ‘思量識(사량식)’ 또는 ‘집착식(執着識)’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아뢰야식을 ‘나’라고 잘못 인식하여, 그것을 '나'라고 여기는 자아의식(自我意識)이다. 즉 말나식은 아뢰야식에 대해 아상(我相), 즉 “나”라는 인식을 만들어, 거기에 집착하는 의식이고, 이 집착이 윤회를 계속 하게 한다. 중생들이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은 이 말나식(manas)이 있기 때문이다. 말나식의 이러한 성격은 인식[思量]의 의미로서의 意(의)와 부합한다고 봤다. 그래서 말나식의 산스크리트어 원어 말나(manas)는 보통 ‘意(의)’로 번역돼 있고, 意(의)는 ‘인식’이라는 뜻의 思量(사량)으로 해석되고 있다. 思(사)는 생각한다는 뜻이고, 量(량)은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6식(識),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은 여섯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지각(知覺)하는 것이므로 식별[了別]의 의미로서의 識(식)과 부합한다고 봤다.
팔식론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필자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기존 해석들을 살펴본 뒤 쉬운 말로 종합, 정리한 것이다. 기존 해석들 가운데 이와 다른 뜻으로 해석해놓은 것들도 있지만, 이렇게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유식학파의 팔식론은 아주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엉터리 이론이다. 한국불교는 천사오백 년 동안 순진하게도 이 유식론(唯識論)에 속았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팔만대장경 속의 경론(經論)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의 경론들 중에는 부처님의 법을 왜곡하거나 파괴하고, 자신의 사이비 이론을 설해놓은 것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