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저자사항
편자(編者) 조기영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순조 6년(1806)조흥진의 아들인 조운추와 김성집(金成集)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여 조장진(趙長鎭)의 아들인 조운빈(趙雲彬)의 양자로 들어갔다. 조장진은 촌수로는 멀지만 조부인 조흥진이 양자로 옮기기 전의 친형이며, 조운빈 또한 생부가 조흥진이다. 본래 이름은 ‘영화(永和)’였으나 개명하였다. 자는 치기(稚祈)이다. 헌종 원년(1835) 유학으로서 증광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고종 9년호조참판까지 승진하였다. 고종 5년(1868) 11월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암행어사이돈상(李敦相)의 보고에 따라 표창을 받았고, 고종 8년 2월에 숭덕전(崇德殿)과 여러 능침(陵寢)의 공사에 공헌한 사람들을 시상할 때 경주부윤으로서 가자(加資)를 받았다.
「경란일기」의 편찬자이며 이 책의 내용상 주인공인 조흥진(1748-1814)은 조재세(趙載世)와 이현보(李玄輔)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큰아버지 조재임(趙載任)에게 입양되었다. 자는 수보(秀甫)이다. 영조 50년(1774) 정시(庭試)에 급제하여 홍문록(弘文錄)에 오르는 엘리트 코스로 진출하였다. 순조 10년(1810)의주부윤이 되어 위화도의 개간을 주도하였으며 홍경래의 난 때는 의주를 굳게 지키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참여하였다. 홍경래의 난 이후 특별한 포상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순조 13년평안도 암행어사이서(李垿)가 재정 부정을 보고하여 고신을 빼앗기는 처벌을 받았다가 이듬해 영의정김재찬(金載瓚)의 건의로 사면되었다. 이후 병조참판, 한성부우윤,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순조 18년에는 이미 사망한 뒤였지만,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중에 의주 사정을 파악한 판부사한용구(韓用龜)의 건의에 따라 포상이 내려졌다. 이조판서에 이어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처음 숙정(肅靖)이었으나 충헌(忠獻)으로 고쳐졌다.
「용만기사」의 편찬자인 조운추는 조흥진의 아들로서, 조기영의 생부이다. 생몰년이나 과거 급제, 관직에 대한 특별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크게「충헌감서록서」「경란일기서」「경란일기」「용만기사서」「용만기사」, 「용만기사」의 발문, 「절혜시말」「제충헌감서록후(題忠獻戡西錄後)」「추발(追跋)」로 구성되었다.
「충헌감서록서」는 조흥진의 증손자 세대에 속한 조병창(趙秉昌)이 작성하였다. 조흥진이 의주 방어는 물론 정주성에서 농성하던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암행어사의 무고를 받았다가 순조 18년한용구(韓用龜)가 그 공로를 국왕에게 보고함으로써 포상을 받게 된 사정을 밝혔다.
「경란일기서」는 후대에 의주부윤을 지낸 여동식(呂東植)이 썼다.「경란일기」 본문은 홍경래의 난이 지속되고 그 뒤처리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의주부의 사정과 그 구성원의 활동을 날짜별로 정리하였다. 순조 11년 12월 20일 공문서 전달을 맡은 관속이 올린 보고서를 통해 의주 관아에서 홍경래의 난의 발발을 확인한 사항으로부터, 이듬해 6월 9일 국왕이 의주의 조흥진, 김견신, 허항에게 포상한 기사까지 실려 있다.
「용만기사서」는 개성유수를 지낸 정조영(鄭祖榮)이 헌종2년(1836)에 작성하였다. 개성과 의주가 상업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의주 사정을 알 수 있었으며,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려 비상시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용만기사」는 앞머리에 순조 10년(1810)의주에 홍수가 나자 의주부윤조흥진이 위유어사(慰諭御史)로 내려온 조종영(趙鍾永)과 당시 평안도관찰사이만수(李晩秀), 영부사이시수(李時秀)의 주선에 힘입어 곡식을 풀고 이듬해에는 위화도에서 경작할 수 있게 하는 조처를 받은 사정이 간략이 정리하였다. 본문은 의주부윤조흥진의 사적과 평가에 대한 관련 문헌을 모은 것이다. 위화도를 개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주부윤조흥진의 상소, 평안도관찰사가 조흥진에 대해 매긴 포폄, 순조 13년 5월 평안도 암행어사이서(李垿)의 서계에서 의주부윤조흥진의 회계 부정을 지적하여 처벌을 요청한 내용, 그에 대한 조흥진의 진술, 그 사안에 대해 전현직 의정인 이시수와 김재찬(金載瓚)이 건의한 내용, 3년 정배로 처리하자는 의금부의 의견, 병조판서서영보(徐榮輔)의 조흥진 두둔 상소, 비변사의 보고, 여동식이 대신에게 보낸 의견서, 홍경래의 난 당시 조흥진의 활동상황, 의주 주민인 김진(金璡), 향교 훈장 홍최(洪最) 등이 평안도 감영에 바친 청원서, 의병장 출신 김견신이 비변사에 올린 문서, 순조 15년의주 주민들이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에게 올린 청원서, 그에 대해 정사홍의호(洪義浩)와 부사조종영(趙鐘永), 서장관조석정(曺錫正)에게서 받은 제사, 순조 18년여동식이 한용구에게 올린 문서, 한용구가 순조 18년 10월 국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조흥진에게 포상할 것을 건의한 내용, 이조판서를 추증할 것을 명령한 내용, 의주인들이 학봉(鶴峯)에 사당을 짓고 사정을 고하는 제사를 지낸 축문 등, 순조 15년조종영의 글과 신위(申緯)의 글씨로 세워진 조흥진의 기적비(記蹟碑), 홍경래난의 시기의 의주 사정으로부터 조흥진 사당의 건립에 이르는 사정을 다시 정리한 「부록」, 조운추의 발문으로 구성되었다.
「절혜시말」은 정부에서 조흥진에게 시호를 내린 사정을 조기영이 정리한 것이다. 첫머리에 철종 8년(1857) 9월 지돈녕부사이학수(李鶴秀)가 순종의 묘호를 순조로 고칠 것을 요청한 상소문을 수록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우의정조두순(趙斗淳)이 순종의 묘호를 순조로 고친 것을 기념하여 홍경래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신하들의 사적을 모으고 포상할 것을 요청하였고, 2월에는 비변사에서 의주부윤조흥진에 대해 시호를 하사하고 그 아들을 등용하라는 조처를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3월에는 영의정정원용(鄭元容)이 편찬한 시장(諡狀)을 시호를 관장하는 태상시(太常寺)에 보냈다. 이때 시호는 숙정(肅靖)·경민(景敏)·혜간(惠簡)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고, 고종 원년(1864) 7월 영의정조두순이 조흥진의 시호에는 충(忠)이 들어가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내어 충헌(忠獻)·충간(忠簡)·정간(貞簡)이 후보로 올라와 9월에 그 손자 조영화(趙永和)의 임지인 상주에서 시호 숙정이 하사되었다.
발문인 「제충헌감서록후」와 「추발(追跋)」은 고종 2년과 고종 7년에 조기영이 지었다. 발문 뒤에 선조인 조형(趙珩)(1606∼1679, 시호 忠貞)과 조흥진의 위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서지적 가치
이 책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 소장본으로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 1870-1953]가 1941년에 기증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한 인물의 사적에 관련된 문서와 내용을 집대성한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책 전체에 대한 서문과 발문 뿐 아니라, 책에 포함된 각 문헌에 대해서도 서문과 발문을 붙여 책의 격식을 최대한 갖추고자 하였다. 의주부윤조흥진이라는 한 개인의 사적을 중심으로 정부측 동향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홍경래난 자료로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상소문 등 여기 수록된 정부의 공식 문서의 경우 정부 연대기에서도 그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위화도를 개간하게 해달라는 의주부윤조흥진의 상소는 『승정원일기』순조 11년 2월 15일에 찾을 수 있으며, 순조 13년 5월 의주부윤조흥진의 회계 부정을 지적하고 처벌을 요청한 평안도 암행어사이서의 서계 또한 『일성록』 5월 12일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평안도관찰사가 조흥진에 대해 남긴 포폄도 『일성록』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연대기에 실린 기록이 발췌본임에 비해 이 책에 실린 상소문 등은 원문 기록 그대로인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적 가치
책의 제목을 ‘충헌공이 평안도의 병란을 평정한 기록’이라고 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경란일기」는 19세기의 대규모 반란에 대해 의주라는 한 지역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전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의주 출신 의병장인 김견신(金見臣), 허항(許沆) 등의 활동을 비롯한 군사 작전을 비롯하여, 반란군 우두머리에 대한 현상금 1천 냥을 거는 등의 대민 정책, 정탐장교 등을 풀어 반란군 동향을 조사한 내용, 반란 진압에 지역민이 가담한 사정, 그와 반대로 인근에서 반란이 터진 것을 기화로 그곳에서도 강도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부유한 집을 약탈하던 사정 등 그곳 지방민의 동향에 이르기까지 의주의 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었다. 관속을 비롯하여 의주 인물들의 동향을 자세하게 수록하여 19세기 의주의 사회 변화, 특히 홍경래난 시기의 사회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학계 일각에서는 의주 거상인 임상옥(林尙沃)이 홍경래난에 동조하였던 것처럼 설명하기도 했으나 이 자료에 의하면 그는 반란이 일어나자마자 동료들과 함께 성을 지키겠다고 자원하였고, 그에 따라 민병천총(民兵千摠)에 차임되어 활동하였다는 구체적인 사실이 확인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