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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가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요나단
나를 평화 위해 쓰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나를 평화 위해 쓰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운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후렴]
오 주여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살게 하소서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며
나를 평화 위해 쓰소서
용서받기 보다는 용서하며
나 모든 것을 줄 때 얻으며
내가 죽을 때 살아 영생 얻으리
주여 나를 평화 위해 쓰소서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찬송의 가사에는 "--하소서", "--쓰소서" 등의 치음(齒音)이 많습니다. 이를 표현할 때 자음은 짧고 가볍게 소리 내며 모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만일 평상 대화처럼 "ㅅ" 발음을 강하게 내면 매우 산만하게 들리게 됩니다. 2000년 4월 2일
독창의 결과는 독창자 자신의 명예와 뜨거운 갈채에 대한 희열, 그리고 때로는 그에 합당한 경제적 수입 등일 것입니다. 반면 합창은 좀 다릅니다. 합창의 중심은 상부상조에 있으며, 우리는 조화 (調和)로 인한 기쁨으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2000년 2월 13일.
제가 우리는 간혹 시편등에서 antiphon (교창)을 접하게 됩니다. 이 antiphon이란 시편 (Psalm)이나 Canticle (찬미가)등의 전후에 부르는 또다른 짧은 노래이며, 두 합창대가 번갈아 노래하는 응답가 (應答歌)이기도 합니다. 2000년 2월 13일.
제가 10년전에 존경하던 여러 음악인들 중 몇은 지금 낙엽과 같이 그 존재가 사라져 세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연구의 소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분들은 마음속에 늘 '나도 옛날엔 누구보다도 잘 했는데...'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월 14, 15, 16 그리고 17일 고신대학교 교회음악연구소에서 주최하는 [2000 교회음악강습회]가 서면교회에서 열립니다. 이 강습회에 많은 대원들께서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는 늘 연구하는 마음과 그의 실천이 꼭 필요합니다. 2000년 2월 13일.
우리는 통상 주일 본 예배 전 4-50분간 연습 후 찬양을 드립니다. 그런데 짧은 '찬송가'이건, 10 페이지가 넘는 긴 곡이건 간에 단상에 올라가기 전에 곡을 가다듬는데 필요한 시간은 여전히 4-50분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으나 첫째로, 어떤 곡이건 온전히 드리고자 하는 찬양에는 소품과 대곡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동일한 영적 준비가 요구됩니다. 둘째, 대곡들의 경우엔 대개 1, 2, 3절 등의 구분이 없는, 소위 '통절' 곡인 반면, 찬송가와 같은 소품들은 각 절마다 그 의미가 모두 다른 '유절'곡입니다. 이 경우에는 그 각각의 가사가 갖는 의미를 합창자들 자신이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청중들께 제대로 인지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추가되며, 그만큼 이에 따르는 시간도 소모되기 마련입니다. 2000년 1월 23일
찬송가 375장 [악보보기]은 6/8박자의 곡으로서, 이와 같은 곡은 그 박자의 표현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8분음표를 한 박으로 보는 것이고, 둘째는 빠른 6/8박자로서, 점사분음표를 한 박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때는 '행진곡풍으로 (alla march)' 연주하라는 주문이 되기도 합니다.
찬송가 375장은 당연히 빠른 6/8박자로 표현해야 하는데, 힘있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자음을 발성 한 후 모음을 '당겨'주어야 합니다. 2000년 1월 23일
고전시대의 음악은 박자나 표현에 있어 엄격함을 요구하였던 반면, 낭만시대 이후의 곡들은 이와는 달리 박자 표현의 유연성과 이에 따른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필요로 합니다. 예를 들어 D. Governer의 곡 '기억하라' (Remember Me) [안산시립합창단 연주 play/download]를 연주할 때 고전시대와 같은 엄격한 격식과 박자로 부른다면 그 곡의 의미를 변질시킬 것입니다. 또한 이 때에는 곡의 색채와 가사에 부합되는 높은 마음 가짐이 요구됩니다. 2000년 1월 16일
쉼표는 음악에서 소리기 나지 않는 기호이며, 음표와 동일한 음가 (音價)를 가집니다. 즉 음이 없는 음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쉼표의 순간에는 발성하는 것과 동일한 마음가짐과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마치 녹음기의 play [▶]와 pause [∥]의 상태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는 [▶]와 마찬가지로 헤드가 녹음 테입에 닿아 있고, 구동 모터도 돌아가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모든 메카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나 소리만이 없는 상태입니다. 즉, 쉼표는 단순히 쉬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또한 phrase를 나눌 때 쉼표는 결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이는 phrase와 phrase 사이를 연결하는 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2000년 1월 9일
2000년 첫 날,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비인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TV에서 감상하였습니다. 악단원은 대부분이 장년이었으며, 이 중 40대가 소수 있어 보였습니다. 특히 현악 주자들의 bowing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활을 그을 때 온 몸의 에너지를 뿜어 내듯이 연주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color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위하여는 '같은 생각'과 '같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합창도 이와 같습니다. 2000년 1월 2일
우리나라 최고의 합창단들도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다고 합니다. 대원 개개인의 기량이 뛰어나고, 늘상 부르는 곡이므로 연습 중 마음을 굳게 가지지 못한다고 합니다. '잘 아는 곡이니까...' 또는 '우리는 무대에 올라가면 잘 하니까...'등의 생각들입니다. 이러한 마음, 즉 영감을 떨어뜨리는 생각을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1999년 12월 26일
찬양대 지휘자 몇 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떤 지휘자께서 "가나안찬양대는 연습을 어떻게 시작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가나안찬양대는 발성연습 자체 보다는 호흡과 마음을 높게 가지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찬송가 117장은 특히 엄격한 호흡관리와 높은 마음을 갖고 부르도록 요구하는 곡입니다. 이 곡에서는 A, B, C, D 네 부분 [악보보기]에서 숨을 쉬어야 합니다. 기타 다른 부위에서 숨을 쉬게 될 경우 한 phrase의 가사를 온전히 연결하여 표현하지 못하게 되어 그 의미가 불명확하게 전달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Gregorian chant)를 들어보면, 한 phrase를 연결하여 웅얼웅얼 하며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한 phrase안에 있는 가사를 온전히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한 phrase를 마칠 때, 마지막 숨을 끝까지 내 놓아 여운을 남긴 뒤, 다음 숨을 깊이 들이 마셔야 합니다. 이러한 호흡으로써 여러분에게 새로운 카타르시스 (catharsis)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999년 12월 12일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성도들이 찬양대의 찬양을 눈을 감고 듣다가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찬양하는 얼굴들은 뻣뻣한 목석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성도들의 마음에 스치는 생각일 것입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늘 보암직하고 들음직한 찬양을 드리도록 밝은 표정과 높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999년 12월 5일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 농경 중심의 동양 사람들은 '땅의 수' 즉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 그리고 4박자의 곡에 대체로 익숙한 반면 서양사람들은 '하늘의 수'인 3, 그리고 3박자의 곡에 익숙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들의 여러 노래와 춤곡들에 3박자가 많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3박자의 곡은 일반적인 4박자의 곡 보다 더욱 세심한 호흡관리가 필요하며, 특히 A부분을 처리할 때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눈을 들리라' Clara Edwards] [악보보기] 1999년 11월 21일
음악의 여운의 중요성에 관해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얼마 전 카라얀과 제시 노먼의 협연을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제시 노먼은 자신의 연주를 끝낸 후 오케스트라의 후주가 흐르는 도중 발성을 마친 바로 그 상태로 표정과 자세를 조금도 흐뜨리지 않고 정지해 있었습니다. 카라얀도 연주를 마친 직후 바로 지휘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여운을 위해 몇 초간 동작을 정지한 뒤 지휘봉을 내렸습니다. 성숙한 관객들 또한 연주 직후 박수를 보낸 것이 아니라, 지휘자의 손이 내려 온 뒤에야 비로소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처럼 음악의 표현에 있어 여운은 매우 중요하며, 찬양은 더욱 그러합니다. 1999년 11월 21일
정확한 음정을 구사하기 위하여는 주변 대원들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들으면 정확히 들리고, '마음'으로 들으면 더 정확히 들립니다. 1999년 11월 14일
제창 (유니즌: unison)으로 부르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하나로 모은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음을 내면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애국가를 '제창'으로 부르는 것이 단순히 소리만을 모으는 것이 아닌 것과 그 이치가 같습니다. 1999년 11월 14일
A. H. Malotte의 주기도문의 끝 부분은 morendo (사라지듯이)로 표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표현할 때 특히 영적인 긴장도를 요구합니다. [악보보기] 1999년 11월 14일
어떤 성부던 간에 자신의 일반적인 음역을 벗어난 발성을 할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A]부분의 B♭ 은 소프라노가 표현하기에는 다소 낮은 음정으로서 "누르듯이" 발성할 소지가 있습니다. 이 때 너무 무리한 발성을 피하면서 되도록 편안하게 들리도록 처리해야 합니다.
이 곡에서는 테너가 pedal tone [B]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Jack Richards] [악보보기] 1999년 10월 31일
합창에서 노래는 결국 '호흡'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여러 바이올린 주자들이 모두 활을 내리고 있을 때 한 사람만이 올리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이상한 일이 되겠습니까? 합창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이가 연음으로 고요히 발성하는 중 혼자만 호흡을 들이킨다면 이 또한 얼마나 거슬리는 모습입니까?
노래는 결국 '호흡'으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악보의 여러 기호를 잘 지켜 주십시오. 1999년 10월 31일
찬송의 가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의미있는 메시지로', '느낌을 실어서', 그리고 '그 의미를 부여하면서' 노래를 해야 합니다. 단지 가사를 읽듯이 표현한다면 이는 형식적일 뿐 아니라, 가식적으로 까지 들릴 수 있습니다. 99년 10월 24일
반주와 함께 연주를 하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던 합창도 아카펠라로 해 보면 제대로 앙상블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유는 정확한 음정을 구사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A음을 발성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미세한 음정의 차이에 따라 A가 아닌 A♭이 될 수도 있고, A#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한 음정표현이 요구됩니다. 99년 10월 24일
'친구'가 무엇입니까? 혹자는 친구를 ' 그 자리에 함께 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기쁠 때 함께 있어 더욱 기쁘고, 슬플 때 함께 있어 위로가 되는 그런 친구가 친구 아니겠습니까? 다음은 찬송449장의 가사입니다.
1. 이 세상의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시는 이 예수 뿐일세
2. 검은 구름 덮이고 광풍일어도 예수 나의 힘되니 겁낼 것 없네
3. 괴로운 일 당해도 낙심 말아라 영원한 주 능력이 붙드시겠네
[후렴]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쟎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쟎네
우리의 가장 고귀한 친구는 예수님 입니다. 99년 10월 24일
지난 10월 14, 15일 창원에서는 안산시립합창단의 상임지휘자이자, 영락교회 갈보리성가대의 지휘자인 '박신화 교수 찬양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 중 "30분 연습하여 드리는 찬양은, 찬양의 線上에서 제외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연습 시작 시간에 여러 대원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찬양이나, 찬양 연습 못지 않게 시간을 엄수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99년 10월 17일
어떤 곡을 녹음 할 때에는 지극히 악보에 충실해야 합니다. 요즘 같이 디지털 녹음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이유는 아주 미세한 소리, 예를 들어 전체가 숨을 멈춰야 할 시기에 누군가 혼자만 숨을 들이쉰다 던지 할 경우 이 소리가 모두 녹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끊어야 할 부분과 연결할 부분을 정확히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긴장 없이 '여러 번 불러 본 곡이니 잘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은 바로 '잘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99년 10월 17일
얼마 전 텔레비젼에 '꽃동네'를 소개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이 곳으로 구미선진국에서 견학을 온다고 합니다. 사회복지가 극히 잘 정비되어 있는 나라에서 이 곳을 견학하는 이유는 선진국의 사회복지는 의무화, 당연시되어 있어 웃음과 사랑이 없는 반면 꽃동네는 이와 반대라는 것입니다. 이곳의 유명한 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거지이면서도 남들을 보살피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그는 평소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남에게 얻어 먹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99년 10월 17일
성악곡의 구성 요소로서, 음악적 요소는 모음으로 전달되는 반면 그 의미의 전달은 는 자음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자음의 발성이 불확실할 경우 그 곡의 의미 전달과 표현이 매우 밋밋해 집니다. 음절의 첫 자음 발성시에 강하게 "치고 나오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99년 10월 10일
아프리카에 사는 사슴류의 한 짐승은 구애를 할 때 특이한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약 4km 거리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숨을 쉬고 사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각각 그들의 고유한 '울림'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도 하니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개개인의 고유한 '울림'을 찾아야 합니다. 9년 10월 10일
흔히 입술의 모습은 위 (위장:胃腸)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찬양함으로써 소화도 잘 되고, 건강증진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99년 10월 3일
찬양대 지휘와 연주가 일반 합창단에 비해 어려운 점은 일반적인 '아름다운 소리'에 '영적인 충만함'을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참 잘한다' 만으론 안되고, '뼈에 사무치는' 영적인 소리를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99년 9월 12일
찬송가 447장의 후렴 부분에서 숨을 쉴 때 단지 기계적으로 들이 쉬어서는 곤란합니다. 이 말은 단지 호흡의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마디로 곡이 넘어 갈 때 그 여운을 잘 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소리의 에너지를 잘 유지하면서 호흡을 해야 합니다. [악보보기] 99년 9월 12일
발성의 옳은 자세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엉덩이를 뒤로 밀고, 허리를 곧게 하고, 가슴을 펴야 합니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앉아 있는 것과는 정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스페인 세비야 (Sevilla)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 (7th IAAF World Championships in Athletics)에서 본 한 여자 선수의 질주 모습이 기억납니다. 지금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보는 듯 합니다. [그림보기] 99년 8월 29일
오늘은 대원 여러분께 고유공명에 관해 설명을 드리고자 pitch pipe를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보시는 피치 파이프는 그 고유의 울림이 있습니다. - 한번 불고 나서 - 적당한 세기로 불면 잘 울리는데 반해 무리해서 세게 불면 그 고유한 소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너무 약하게 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발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고유공명을 속히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overpace하거나, 그 반대가 되어서도 곤란합니다. 99년 8월 15일
지난 주일 오후 수영로교회에서 열린 서울 영락교회 갈보리성가대의 "경주 부산지역선교 찬양연주회"에 몇 분의 대원들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번 연주회에 참여한 갈보리성가대의 대원은 210명 정도였는데, 수영로교회의 단상이 좁았던 점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찬양에는 190여명만이 찬양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대원들이 J. Rutter의 Gloria를 제외한 전 곡을 암보 (暗譜)로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하는 모습을 알 수 있었습니다. 둘째,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더운 교회당에서 예배하는 도중에 대원들 중 아무도 부채질을 하는 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평소 훈련과 영적인 무장상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셋째, 연주 후 청중의 박수를 받을 때 지휘자가 나와서 홀로 대표인사를 하기 보다는 단상 맨 끝 구석에 앉아 있는 대원에서부터 반대편 구석의 대원들까지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격려하고 박수를 보냈던 것입니다. 바로 지휘자의 대원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러한 갈보리성가대의 지금 모습은 평소 뼈를 깎는 노력과, 많은 사람들의 후원의 기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모습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99년 8월 15일
지난주에는 총무 집사님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교회음악 지도자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극소수의 리더들과 헌신적인 대원들의 자세를 보고 나니 우리나라의 교회음악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찬양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의 리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각 대원들의 음악적 실력과 영적인 충만함이 어우러져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감동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99년 8월 01일
지금같이 감동적인 찬양을 하면서 어떻게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밋밋하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 거의 기적이라고나 할까요? - 그것은 우리 마음에 감동이 없기 때문이며, 이래서는 청중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뿐 아니라 설교 등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왼쪽 뇌만 자극해서는 안되고 오른 쪽 뇌도 함께 자극되어야 감동이 있습니다. 99년 8월 01일
음악도, 사람의 일상 생활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부딛히고 나서는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연습하는 부분은 알토가 비화성음을 만든 뒤 화성음으로 종결 짓는 과정입니다. 이 때 알토 이외의 타 성부는 양보하는 마음으로, 알토의 화성 진행을 끝까지 잘 들으면서 노래해야 합니다. ['주께 감사드리세' Henry Smith][악보보기] 99년 7월 25일
소리의 근원은 목이 아니라 허리입니다. 그만큼 노래할 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허리를 곧게 펴고, 엉덩이를 뒤로 민 상태에서 발성을 해야 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대 관리나 목 관리라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올바른 자세에서 올바른 발성을 할 경우 나이에 관계없이 좋은 소리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좋은 합창을 만드는 비결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귀를 여는 것 입니다. 99년 7월 18일
고전음악을 연주할 때 한 곡을 끝낸 뒤 바로 다음 곡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잠시 여운의 시간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도 합창을 마칠 때 여운을 남기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요, 그래야 '음악적인 여운' 후 '설교'라는 다른 형태의 메시지가 성도들에게 잘 연속적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소리의 여운만이 아니라 착석 또한 중요합니다. 우당탕 시끄럽게 앉으면 여운이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99년 7월 18일
지금의 우리처럼 합창을 할 때 늘 반주를 곁들인데 익숙해 있는 집단과, 거의 늘 반주 없이 즉, 아카펠라로 노래하는 집단과는 분명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주로 러시아의 합창이 그러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합창 도중 음정이 떨어지는 현상은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용납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노래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천사의 노래' Dimitri S. Bortniansky] 99년 7월 11일
각종 음악 콩쿨에서 심사위원이 채점할 때 곡을 끝까지 모두 듣고 점수를 매기는 일은 오히려 적습니다. 그래서 처음을 잘 못 하게 되면 중간이나 후반부에 무척 잘 해도 초반의 점수를 만회하기 힘듭니다. 그만큼 첫 인상, 초반의 발성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입니다. 요즈음 백화점 세일의 성패는 주차 문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리고 첫 인상 또한 중요하여 각 백화점들은 주차 안내원들에게 교육시킬 때 우렁차고 상쾌한 목소리와 몸짓을 요구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첫 발성에서부터 우렁차고 힘있게 찬양하여 성도들을 은혜로 잘 안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99년 7월 11일
찬송 468장은 점차 고조되는 음정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내 맘 (A) 에 한 노래있어 나 즐 (B) 겁게 늘 부르네, 이 노 (C) 래를 부를 때에.." [악보보기] 99년 7월 11일
배음의 원리는 넓은 저음이나 좁은 고음이나 같다고 보아야 합니다. 소프라노나 테너의 경우 자신의 음역을 벗어난 낮은 소리를 발성할 때 누르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소리를 내게 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알토나 베이스가 높은 소리를 낼 경우 음이 흉성에서 두성으로 바뀌면서 음의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높은 음이나 낮은 음을 내기 전 자신의 소리로 인하여 전체적인 균형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눈을 여소서' K. Lee Scott] [악보보기] 99년 7월 04일
음표가 길고 호흡이 많이 남아 있을 때, 이를테면 첫 음을 길게 내야 할 경우 바이브레이션이 걸리기 쉬우므로 이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자의 귀한 몸' R. Lowry] [악보보기] 99년 7월 04일
우리가 추구하는 은혜롭고 아름다운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것도 함께 중요합니다. 그 중 하나가 '호흡관리'입니다. 매사에 호흡이 빨라지고 가빠지는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서, 때로는 나쁜 건강의 징조이기도 하고, 때로는 돈과 욕심의 산물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숨을 불어 넣어 주셨을 때 아마도 천천히 불어 넣어 주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때 가쁜 숨을 몰아 쉬도록 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 중에는 오랜 세월 동안 머리가 희도록 젊음으로 봉사하고 계신 대원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는 우리의 건강만 허락된다면 넉넉히 나이 70 까지는 가능합니다. 젊은,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합시다. 99년 6월 20일
음이 반음 진행일 경우 반음은 온음보다 그 음의 차이가 더 클 수 있습니다. 바로 불협화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즉, 음의 차이는 '상대적 개념'입니다. ['오, 주여 들어주소서' Bernard Hamblen] [악보보기] 99년 6월 20일
고전시대에 주로 쓰여진 오르간을 위한 곡들에는 crescendo 또는 decrescendo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 당시엔 악기 자체의 속성이 crescendo나 decrescendo를 표현할 수 없었고, 따라서 곡들도 이에 맞춰 쓰여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연주시 곡의 끊고 이어짐이 분명하게 들립니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오르간 곡을 위한 곡을 표현할 때에도 역시 음을 끊어야 할 곳에서 분명히 끊어 주어야 합니다. ['오, 구세주 예수님' John Goss] [악보보기] 99년 6월 20일
고대나 중세에는 왕이 곧 법이었고, 예술가들은 그들의 권력에 의지하여 몇몇 귀족의 즐거움을 위해 그들의 삶을 바치는 위치였습니다. 당시에 '불협화음'을 연주한다는 것은 '불복종'의 의미로 받아들여 졌으며, 이로 인해 단두형에 처해진 음악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다변화된 시대에는 불협화음이란 자연스러운 음의 한 형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구성이 초기엔 2관편성이 대규모로 여겨졌으나 현대에 이르러는 6관편성까지도 존재하며 그만큼 다양한 화성이 요구됩니다. 이와 같이 시대에 따라 음악적인 성격과 요구가 다양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음악은 다릅니다. 교회음악은 기존의 주 골격이 있고, 여기에 살을 붙이는 형태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형식을 파격 (破格)하는 교회음악은 마땅히 경계되어야 하겠습니다. 99년 6월 13일
곡을 연주하다 보면 가사에 관계 없이 음정이나 화음이 곡 자체의 성격에 따라 진행하는 일을 자주 접합니다. 일반적으로 음악과 가사의 한 측면만을 강조할 수 없는데요, 특히 교회음악은 음악과 메시지가 1:1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말하길 "가사에 은혜 받읍시다"라는 말은 위험한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99년 6월 13일
지난 금요일 MBC에서 방영한 안나푸르나봉 등정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보셨습니까? 이번 등정 팀에 참가한 한국인 대장이 더 이상 산에 오를 수 없게 되었는데, 함께 등반하던 한 스페인 대원이 한국인 대장의 팔과 자신의 팔을 함께 묶고 하산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접어 둔 채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지난 번 안나푸르나 등정에서는 정 반대였다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있을 때, 내 몸 하나도 주체하기 어려운 시기에 남과 나를 한 줄로 묶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스스로를 의지하고 믿는 기대감으로 더더욱 남과 나를 묶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묶어야 합니다. 지금 나와 가나안 찬양대를 함께 묶지 않으면 안됩니다. 99년 6월 13일
"내 영혼..."을 발성할 때 작은 소리라고 해서 성대는 열리고, 호흡에너지 또한 떨어진다면 힘 없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성대는 좁히고 호흡에너지를 모아야 작고도 단단한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Philip P. Bliss] [악보보기] 99년 6월 13일
왜 곡 마다 조성이 다를까요? 한 가지의 조성만으로도 소리를 다 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각 조성이 가지는 color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거룩한 주님' Franz Abt]은 #이 네 개 있는데요, 이런 곡은 간절함을 표현할 때 주로 쓰게 됩니다. 반면 ['흰 옷 입은 사람들' John Stainer]은 #이 두 개 있습니다. 이런 조성은 주로 적극적으로, 힘있게, 달려 들 듯이 표현하라는 뜻입니다. 99년 6월 13일
우리의 신체가 서로 각기 다르듯이 개인의 성대도 모두 다릅니다. 각 성대는 고유한 울림 즉 '고유공명'이 있습니다. 이 고유공명은 비단 성대뿐 아니라 사물에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작은 병은 세게 불어야 울리고, 큰 병은 가볍게 불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60명 대원의 음색이 모두 다르고, 따라서 고유공명 또한 다릅니다. 이는 바이올린이 첼로의 흉내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개개 악기의 음색이 다르지만 조화를 이루 듯이, 우리 대원들이 조화를 이루는 찬양대 전체의 고유공명을 찾아야 합니다.
(전체의) 고유공명이 없는 합창이 바로 (개개의) 고유공명이며, 이는 매우 산만하게 들릴 뿐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고유공명을 속히 찾아서 전체의 고유공명에 흡수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99년 6월 06일
제 27마디의 반 박자 쉬는 부분에서 시작이 서로 맞지 않는 현상은 성의 없이 노래한 결과입니다. 서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숨을 들여 마시는 시간적 오차가 듣는 이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합니다. ['사랑은 영원하리' M. Stevens & J. M. Martin] [악보보기] 99년 6월 06일
지속되는 음을 계속 내겠다고 원 상태대로 유지하면 센 소리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런 음을 낼 때는 단순한 ‘수평’이 아니라 타 성부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영원하리' M. Stevens & J. M. Martin] [악보보기] 99년 6월 06일
꾸밈음을 넣기 전에는 몸이 relax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몸이 굳은 백성은 꾸밈음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영원하리' M. Stevens & J. M. Martin] [악보보기] 99년 6월 06일
非 和聲音을 잘 발성하면 非和聲音이 됩니다. 여기엔 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즉, 안 어울리는 어울림이라는 뜻이 되겠죠. 이러한 현상을 자연공명 (natural overtone) 이라고 합니다. 즉, 비화성음도 화성음입니다. ['사랑은 영원하리' M. Stevens & J. M. Martin] [악보보기] 99년 6월 06일
합창에 있어서 표정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전 박치용 선생님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사람의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평소 마음의 여유, 가정 생활까지 드러날 수 있으니 사주관상을 보는 점쟁이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개개인의 밝은 표정으로 인해 서로가 점차 동화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인하여 굳은 모습의 청중들도 동화될 수 있습니다. 99년 6월 06일
얼마 전 FM방송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품어 내는 공기에 색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상태에는 무색인데 반해 화가 났을 때는 색이 있다는 것이죠. 청색으로, 보라색으로... 여러 가지 색을 보인다고 합니다. 노래 할 때도 마음이 즐거우면 소리가 뜰 것이고, 늘어진 마음으로 부르면 맥없는 노래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색의 숨을 내 귀고 있습니까?
어떤 통계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의 30%는 해가 있는 시간에, 반면 나머지 70%는 해가 없는 시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 중 해가 있는 시간에 죽은 30% 중 상당수는 사고나 천재지변 등임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행사 후 두 차례의 교환 찬양을 위해 긴장해고 이에 준비해 왔습니다. 이런 행사가 끝나고 단지 주일 예배 찬양 정도의 일밖에 없을 때, 그리고 계절적으로 더위가 찾아 올 무렵 우리의 긴장도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지금 이러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적인 긴장도를 올려야 하겠습니다. 99년 5월 30일
고음을 처리함에 있어서 오선을 넘어가면 head voice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음색의 변화를 최소화하는 것이 바로 기술입니다. 마치 좋은 자동변속 차량은 변속 될 때 그 느낌이 거의 없는 반면 그렇지 않은 차는 그 변속의 시점이 뚜렷이 느껴집니다. 또한 수동변속 차량도 변속의 시점이 부적절하면 그 승차감이 좋지 않습니다. 베이스 파트가 여러 사람을 모시고 운전하는 느낌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도록 노력 해 보십시오. ['기쁨으로 주께 오네'의 제29 마디의 고음 처리를 부드럽게 하도록 주문하며] 99년 5월 30일
빈민촌에는 십시일반 (十匙一飯)이 통용된다고 합니다. 거지 차림으로 빈민촌에서 동냥을 하면 돈이 들어오는데 부촌에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부촌에서는 '내가 한 푼 보태준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나?'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의 적극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되겠나?' 하는 생각은 안 되게 하는 시발점입니다. 99년 5월 30일
음악의 개념은 숫자의 개념과 상통하는 점이 많은데요, 그 중 '3' 이라는 숫자는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하는 '하늘의 숫자'라고 합니다. 한편 동서남북을 뜻하는 숫자, 즉 '4'는 '땅의 숫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7'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숫자라고 하죠. 미사의 첫 곡으로 나오는 kyrie eleison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kyrie eleison을 세 번 반복함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박자가 중간에 바뀌는 곡이 일곱 개인데요, 대개 3박자였다가 4박자로 바뀝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주님 앞에' 라든지 '천성길을 버리고'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 일상 생활에 '세 번 만에 온나!', 사진 찍을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들을 보면 셋이라는 숫자는 우리 생활에도,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때도 적합한 숫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99년 5월 23일
'with expression'의 부분을 부를 때 소리 뿐 나니라 마음과 표정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99년 5월 23일
배음 (背音)을 전달함에 있어 귀로는 쉽지만 마음으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지 여리고, 작고, 퍼진 소리를 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오히려 영글고 단단한 소리를 작게 내야 합니다. 99년 5월 23일
게으른 사람은 '확실히'를 '학실히'로 밖에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二重 母音의 '오'와 '아'의 '오'가 미리 나가 있어야 '확실히'로 발음할 수 있겠죠. 게으른 사람이 '갱제'를 했으니 경제가 잘 될 리 있겠습니까! 99년 5월 23일
백화점에 들어온 고객은 무엇을 살지 여부를 단 4초 만에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 짧은 4초 만에 뭘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시간에 점원과의 첫 눈 마주침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바둑의 첫 포석이 중요하듯, 와이셔츠의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듯 우리의 노래도 첫 발성이 중요합니다. 99년 5월 23일
바로크 시대에 'fermata'는 '쉰다'의 의미였습니다. 지금도 이태리의 버스 정류장을 fermata라고 부릅니다. 러시아에서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건물일지라도 우리 나라의 잘 지은 교회보다 울림이 좋습니다. 이런 건물 내에서는 반주가 필요 없이 아카펠라로써 충분히 울림과 화음을 전달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천사의 노래' Dimitri S. Bortniansky]는 러시아 곡인데요, 중간에 쉼표가 많지요? 이 쉼표의 때에 주위 사람의 울림을 충분히 들으면서 노래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99년 5월 23일
지난 주 오후 예배 찬양에 초청된 플루티스트는 산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 분의 두 딸 이름이 각각 '안나'와 '푸르나'이니, 사람들이 그의 딸들의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아빠가 산을 좋아하는지 알 정도이지요. 얼마 전 안나푸르나 봉을 정복 한 뒤 하산 도중 추락사한 지현옥씨에 관해 산악부 동아리 남자 후배가 쓴 기고를 보겠습니다. 그녀가 여자로서 산악부의 회장으로 있을 때 후배들에게 매질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남자 대원들이 이에 대해 한 마디도 못 했다고 합니다. 남자인 자신보다 여자 회장인 지현옥씨가 더욱 산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휘자인 나도 영적으로, 예술적으로 대원들 보다 더욱 성숙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대원들도 이에 따라 주십시오. [지현옥씨에 관한 신문의 기고문을 오려와서 한 말] 99년 5월 09일
'사랑이 예 오셨네'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주로 소프라노 맨 앞줄의 미스 대원들을 바라보며) 바로, 바로 이 자리에 사랑이 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예 오셨네'의 첫 소절 연습 도중 무미건조하게 무르지 말도록 주문하며] 99년 5월 09일
[출처] 어느 찬양대지휘자에 동감하면서|작성자 라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