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 <대한민국사 1>, 한홍구, 한겨레출판
발제자 : 윤태관
작성일 : 2014. 8. 12
이 책은, 시대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저자가 임의적으로 분류한 5개의 주제에 따라 작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각 항목에서도 과거사와 현대사를 엮어서 의미를 추출하고 있기에, 흥미롭게 읽기는 좋은 편이다.
하지만, 역사를 시기적으로 훑어나가려는 학습 의도에 맞추어, ① 시대별로 재구성하여 핵심 요약 및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② 발제자가 주되게 논의해 보려는 항목(사건)에 초점을 두고 다른 자료까지 활용하여 심층 분석 및 문제의식을 제시한다.
<1> 핵심 요약 (시대별로 재구성)
머리말
- 세계는 이해관계의 충돌이고, 결국 역사는 어느 한쪽 입장에서의 정당화이다.
- 하기에 ① 합리적인 의문을 품는 자세, ② 세상일을 판단하는 자신의 관점을 확고히 하는 입장,
③ 자신의 관점에 대해서도 엄격함을 유지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 =>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시다. 그렇다면, 각자 자신은 어떠한 관점에서 세상(역사)을 바라보려고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정리(철학)이 필요하겠다.
구한말, 식민지 시기
(1)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인가 (ㅉ.62)
- 혈통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소중화, 2등 신민의 연속이다. 결국, 국내 외국인들에게 차별과 불관용의 태도를 갖게 한다.
(2) 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ㅉ.143)
- 보수는 수구와 다르다. 보수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다. 우리 역사에서 건강한 합리적 보수는, 구한말 나라를 잃게 되자 목숨을 끊은 이시원, 이건창, 황현같은 분들인데, 그 맥이 끊어졌다. 현대에 와서 저항-진보의 인사가 된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리영희, (정경모) 같은 분들은 그 뿌리가 보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3) 왕정은 왜 왕따당했나 (ㅉ.143)
- 대한제국 이후의 과정에서 군주제에 대한 극복이나 공화제에 대한 충분한 고민이 없이 공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군주제의 실질적 극복도, 진정한 공화제도 이루지 못함
(4) 태극기는 정말 민족의 상징인가 (ㅉ.50)
- 태극기는 중국인의 기본 도안에 일본 국적의 배 안에서 영국인 선장을 산파로 해서, 국내에서 인정받기도 전에 일본에서 사용되었다. 이후 국기에 대한 맹세와 같이 파시즘적 국가권력의 상징물로 사용되기도 했고, 애국민족운동에서도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월드컵을 계기로 태극기에 대한 엄숙주의가 사라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
(1) 딱지는 달라도 수법은 의구하네 (ㅉ.163)
- 해방 직후에는 민족 대 반민족, 애국 대 매국의 구도였는데, 모스크바 삼상회담을 계기로, 그리고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농간에 의해 좌우의 대립으로 바뀌게 되었고, 좌익은 매국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가 축소되고 분열되기 시작했다.
(2) 우리는 무덤 위에 서 있다. (ㅉ.121) / 박멸의 기억을 벗어던지자 (ㅉ.131)
- 6.25 전쟁에서 이루어진 민간인 학살(양민학살은 부적절한 용어)의 잔혹성과 그 후과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제거하려는 박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3) 만주국의 그림자 (ㅉ.89)
-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에 맺은 혹은 그와 관련된 인맥들이, 해방 후 군의 주요 요직에 자리잡게 되었고, 당시 일본의 정계 역시 만주국과 연결된 인맥들이 포진해 있었다.
(4) 친일파에 관한 명상 (ㅉ.100)
- 친일파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 ① 특정 개인의 문제로 폭로하는 방식보다는 뿌리 깊은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고, ②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친일파 문제로 돌리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하며, ③ 친일파에 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게 설정된 것에 주의해야 하며, ④ 프랑스에서의 나치 협력자 청산과 우리의 친일파 청산을 동일선에서 비교해서는 안 된다.
- 이북의 경우는, 탄백(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 받는 것)한 경우에 용서하고 수용했다.
(5) 이근안과 박처원, 그리고 노덕술 (ㅉ.121)
- 고문치사 사건의 뿌리는 무법천지였던 1948년으로 거슬러 간다. 물론 일제 시대 악랄한 고등경찰까지 가야하지만. 이 부분은 <변호인>으로 이해가 넓어졌다.
(6)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ㅉ.17)
- 근대 시민 혁명 없이 이루어진 공화제와 보통선거였기에, 정당한 개인주의적 사고가 메마르고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4.19와 5.18, 80년 서울의 봄과 신군부집권, 87년 6월 항쟁과 노태우의 집권에서 보듯이, 민중 주도로 과거 권력을 한번도 청산해 보지 못했기에, 패배의식과 보수성이 뿌리 깊게 자리잡게 됨.
분단, 미군, 반미, 병역의 의무
(1) 누가 좌우대립을 부추기는가 (ㅉ.151)
- 연방제는 현실에서 거의 유일한 통일방안이다.
(2) 맥아더가 은인이라고? (ㅉ.201) / 정전협정의 저주받은 유산 (ㅉ.212)
- 맥아더의 만주폭격설은 제3차 대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전 협상이 진행 중일 때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UN과 북한군, 중국군이었기에 이후 평화협정 체결 논의에서 남한이 배제되는 상황이 발생함. 이제는 6.25 대신 7.27을 기억하자.
(3) 주한미군, 뻔뻔할 자격 있다? (ㅉ.121)
- 주한미군의 지위는, ① 1945년 9월 8일, 점령군으로 온 미군정 하에서는, 한국인들이 미군 법정에서 영어로 재판을 받아야 했다. ② 1948년 8월 24일, 미군이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한 시기에는, 미군, 군속, 가족의 전속적 관할권을 미군에게 보장하였다. ③ 1950년 7월 12일, 대전협정 시기에는, 한국인이 미군 또는 그 구성원에게 가해행위를 했을 때 미군이 한국인을 구속할 수 있었는데, 이는 형사주권을 포기한 것이며 헌법에 위배되며 국회의 비준을 받지 않았다. ④ 1966년 7월 8일, 소파(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시기에도, 대부분의 형사주권은 미군이 행사하게 된다.
(4) 반미의 원조는 친일파였다 (ㅉ.236)
- 1936년 7차 코민테른에서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게 되자, 사회주의자들은 반미를 거두게 되었고, 친일파들은 반미에 적극적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친일파들은 친미가 되었고, 6.25 전쟁과 민간인 학살 이후 반미 의식을 가진 사람은 거의 죽었다.
- 이남은 반민의 무풍지대였다가 1980년 광주 이후 거세게 반미 운동이 일어났고, 2002년 촛불을 기점으로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운동권식 반미는 지나치게 엄숙했기에, 보다 대중적인 방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반미는, 로드니 킹 사건이나 이슬람과 비교해 봤을 때 지극히 차분하고 이성적이다.
(5) 징병제에 관한 문제
- 조선시대 군역으로부터 병역은 부당하게 부과되었고, 그 시기부터 회피는 시작되었다. 현재의 징병 제와 군인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진지하게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 문제 의식 (토론 거리)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
- 깨어있는 시민이고자 하는 우리 회원들의 경우, 오늘의 자신(자신의 성향, 자신의 역사관)을 있게 한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가? 민주주의나 인권, 혹은 자주화와 분단 극복 등의 문제를 떠올려볼 때, 점점 나아지고 있고 앞으로 나아진다고 생각하는가?
현실 변화에 대한 과제
- 왕의 목을 한번도 쳐본 적 없는다는 말이 의미하듯이, 과거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청산은 복합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친일파 문제, 민간인 학살 문제, 의문사 진상규명 문제, 민주화운동 인정 문제 등의 경우, 미흡하게나마 제도적 측면에서 해결의 과정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을 때였다. 이런 과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인가? 결국 해결 의지를 지닌 세력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것인가?
<3> 주목해 볼 장면(사건)
과거사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필요한 부분
현재에 대해 인식의 개선이 필요한 부분
2014년 8월 - 대한민국사1 - 발제문.hwp
첫댓글 ‘진보’를 말하면 ‘종북’이 되고 ‘민주주의’를 외치면 ‘빨갱이’로 몰린다는 대한민국 법치 현실의 화두를 던진 한홍구 박사의 글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