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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우면 별이 잘보인다
메이플 가로수와 가로등이 즐비한 동넷길을 걷는다. 밝다.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안의 불을 끄니 별 같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이야기다. 나를 무척 따르던 “에스터”란 이름을 가진 친구의 딸은 앓고 있는 나를 위해 굴까지 넣 고 담군 깍두기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SAT시험 준비가 바빴을 터인데도 먹고 어서 나으라 했다. 감동으로 나는 글썽였고 그 눈물은 열 오른 몸과 마음을 깨끗이 낫게 해 주었다. 그 후 나는 쾌차되었고 깍두기 에스터는 그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남편의 직장 따라 서울로 주거지를 옮긴 친구와는 전화 통화만 여러 번 그 후 일상의 빠른 물살 속을 헤엄치던 나와는 연락이 뜸해졌다. 자연스럽게 깍두기의 고마움은 잊어졌고 에스터는 어느 대학으로 진학했을까 궁금해지는 정도였다. 어느 식탁에서나 깍두기를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기억이 영락없이 떠오른다.
투병의 경험이 있어서 인지 그 후 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감동하기를 잘한다. 내 가슴은 눈물겨운 감격에 휩싸일 때가 참으로 많다. 작품을 쓰느라 내면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가 탈고의 순간이 그렇다. 꽃 색깔이나 모양이 절묘하게 아름다운 얼굴로 바람에 흔들릴 때면 환성을 지르며 애처럼 좋아한다. 희열의 물줄기는 이렇듯 저절로 밖으로 흘러나온다. 촉각이 민감하게 날을 새워 열린 감성이 박수치며 반응하곤 하기 때문이다. 암 투병 중인 소녀가 아주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 허핑턴포스트 오늘 같이 지쳐있을 때 눈 감으면 조용히 찾아오는 감동의 기억들이 있다. 수집은 듯 피부에 와 닿는 조카네가 사는 스위스의 미풍과 그 맑은 호수, 또 장엄한 융프라우가 가슴을 저리게 했다. 너무 깨끗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이었다. 바다위로 붉게 숨어드는 일몰을 지켜보면서 집안 가득 채우는 모짜르트는 감동으로 몰려와 감정처리는 흐르는 눈물이 다해냈다.
좋은 글을 접할 때도 가슴이 먼저 읽고 감동해 버린다. 한 인간이 그토록 진지할 수 있었고 정성과 마음을 다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영혼구원을 그의 삶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전문적인 지식과 학벌 그 모든 것 내려놓고 선교에 헌신한 <내려놓음>*은 문필로서 진리를 끌어내어 세상 영혼을 흔들어 주었다. 완벽하게 가식 없이 진실을 엮었기에 문학성이 놀라웠다. 세계를, 온 인류를 울리는데 그의 진실은 관통하고 만 것이다. 감동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눈물은 아름다움과 진실 앞에 더 없이 맑게 피고 어둠을 몰아내는 반짝이는 무수한 별로 떠오른다. 이 모든 느낌에는 늘 가슴이 앞질러 간다.
성서에 <에스터>가 있다. 깊이 알고 싶어 졌다. 구약의 “에스터”는 과연 어떤 여자일까. <에스터>서를 읽고 또 읽었다. 결국 나를 감동시킨 에스터의 깍뚜기 에피소드는 나에게 <성서>라는 냇가로 가는 지도를 펼쳐주었고 <에스터>와 더 가까워지도록 차표 역할을 한 셈이다. 새로운 눈뜸이었다. 목이 추겨지고 가슴에 일던 모래바람이 잔잔해지고 있었다.
원래 <에스터>는 별이란 뜻으로 구약성서 가운데 <릇기>와 더불어 유일하게 여자 이름을 주제로 삼았다. 희생적인 애국심을 발휘하여 자기 민족 유대인을 위험직전에서 구출하는 통쾌한 승리의 개선행진곡으로 몰고 간다. 그로부터 페르시아 억압 하에서 고생하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자유와 평화를 얻게 한다는 이야기가 줄거리 전부이다. <에스터>서는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 의의,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는 걸작은 아니지만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 통쾌하기 까지 하다. 인과응보 사상이 하나님의 보편적 진리로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에스터> 서에는 있어 내 가슴속 깊이 간직되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터 4:16) 에스터의 회답, 목숨을 건 결단의 대사가 가슴을 감동으로 젖게 만든다.
베르린 장벽이 사라졌다. 기아선상에 있는 많은 이북 어린이들, 그 가난은 38선 만큼이나 슬프다. 받은 생명을 나누는 것은 창조 섭리에 참여하는 일이다. 주위에 에스터란 이름을 가진 젊은 친구들이 많다. 깍두기 에스터를 선두로 말이다. 모든 “에스터”는 슬기롭다. 애국정신, 희생정신, 결단성과 용기의 여인으로 간주되곤 한다. 맡겨진 중대한 과업을 침착하고 재치 있게 성취해 나가는 성경의 에서터만 봐도 그렇다. 역사의 물줄기 흐름을 바꾸어 놓은 어제의 “에스터”가 있었다. 오늘은 우리 주변을 어둠에서 빛으로 방향을 옮겨 놓는데 많은 에서터가 필요하다. 구원역사의 물줄기는 흘러 지금도 이어져가고 있다.
친구 딸 “에스터”는 작게는 깍두기 치료사 같아 좋은 예가 된다. 그녀는 어딜 가던지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피스 메이커다. 정성 다해 담군 깍두기로 아픈 이웃을 위로 해 줄줄 아는 따뜻한 마음이야 말로 바로 작은 의미의 이웃사랑 나아가 애국이 아닌가 싶다. 무쪽 한 알 한 알이 믿음과 화목과 희생의 개체로 존재하다가 사랑이란 양념으로 잘 버무려져 -나는 죽고 너 깍두기로 하나의 큰 맛이 되는 의미- 또 다른 목적과 그 성취에 동참한 숨은 <에스터>의 사랑 맛이 나 또한 미세한 지체임에 불과하다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 안에 불필요하게 켜진 불을 끄니 그제야 밤하늘이 보이고 총총한 별이 보인다. 내 가슴이 어두울 때 마다 만나러 가는 <에스터>, 그 별은 내 어두운 가슴에서 더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다. 깍두기 처방으로 내 병을 고쳐준 에서터는 두 자녀의 엄마별이 되어 남가주에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지금 잘 살고 있다. 3/26/2017
*이용규선교사 <내려놓음>의 저자, 세상적으로 잘 나갈 수 있는 조건(서울대 학석사, 하바드 박사)을 고스란히 내려놓고 몽고의 오지를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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