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관에서 출력 트랜스를 없애자
진공관 앰프에서 출력 트랜스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진공관 앰프의 출력 트랜스포머 참조). 하지만 출력 트랜스포머는 어쨌든 밴드 패스 필터 역할을 한다. 소자에서 나오는 음을 스피커로 모두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공관 앰프에서 출력 트랜스를 제거해보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다.
문제는 진공관(출력관)의 출력 임피던스가 높다는 점. 즉 출력관은 임피던스가 높아서 큰 전류를 흘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을 고심하다가 출력 임피던스가 상대적으로 낮은 출력관들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5687, 5998A나 6AS7, 6C19와 같은 진공관들은 비교적 임피던스가 낮아서 다수를 병렬 연결하게 되면 충분히 8Ω ~ 16Ω스피커를 구동할만했다.
지금은 전설이 된 푸터맨(Futterman)은 SEPP(Single-Ended Push-Pull)회로를 근간으로 임피던스가 낮은 진공관을 병렬로 사용하여 스피커와 직결하는 회로를 고안하여 OTL (Output Transformer-less) 앰프를 최초로 상용화했다. 다만 문제는 안전성이었다. 진공관 앰프의 출력관에는 최소 300V 이상의 직류 전압이 걸려 있기 때문에, 혹시 출력관의 바이어스가 틀어지거나 다른 원인에 의해 출력관의 동작이 불안정해진다면 스피커 측에서는 말 그대로 재앙을 겪게 되는 것이다.

푸터맨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대용량의 캐패시터를 출력단에 직렬로 연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캐패시터가 개입하는 – 완전한 출력관의 직결 방식이 아니고, 대출력에서 왜곡이 발생하는 등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진공관 앰프에서 츨력 트랜스가 없다는 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푸터맨은 몇 차례 개선품들을 만들면서 크게 위세를 펼쳤다. 하지만 푸터맨은 극렬 자작파나 앰프 제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 고가의 스피커를 애지중지하는 애호가들에게서는 호응을 받지 못했다. ‘만에 하나 사고가 생기면~’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푸터맨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OTL 앰프의 역사에 굵고 강력한 한 획을 그었다. 이후로 제작되는 OTL 앰프 제작자들은 거의 모두가 푸터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OTL 앰프는 앞서 언급한 ‘안정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웬만한 메이커들은 감히 제품을 발표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제법 인기리에 판매된 제품으로는 카운터포인트에서 발매한 SA4 정도를 들 수 있고, 국내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트마-스피어(Atma-sphere)라는 미국의 하이엔드 앰프 메이커도 푸터맨의 뒤를 이어 꾸준히 수준급의 OTL 앰프를 생산했다. 한편 독특한 메이커에서 제작한 초고가의 하이엔드 제품들이 눈에 띄는데 본지에 소개했던 아리에스 세라트(Aries Cerat)의 콜라치오 II 가 좋은 예가 된다. 그 외에 OTL 앰프는 대체로 매니아가 주도하는 작은 신진 메이커나 극렬 자작파들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국내에서는 – 미그기에서 발견되었다는 – 6C33B를 이용한 회로가 공개되어 자작파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제품화되기도 했다.

출력트랜스를 제거한 OTL앰프는 트랜스라는 ‘밴드 패스 필터’를 거치지 않는 만큼, 광대역 특성을 지니며 생생한 소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애호가들의 우려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아리에스 세라트에서는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면서 망치로 진공관을 깨뜨려도 스피커가 상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보호회로(이름도 방탄회로, Bullet-Proof 회로다)를 개발하기도 했고, 그래도 사고가 난다면 스피커를 고스란히 보상해준다는 보증서를 발매하기도 했다.
반도체 앰프에 출력 트랜스를
반대로 트랜지스터 앰프에 출력 트랜스를 장착하는 메이커도 있다. 먼저 오랜 전통을 지닌 매킨토시다. 매킨토시는 진공관 시절 유니티 커플드 트랜스포머라는 여러 가닥의 권선을 한번에 감아 임피던스를 정확하게 맞추는 기술로 특허를 받은 바 있다. 이 트랜스포머는 마란츠를 주재하던 솔 마란츠씨조차 매킨토시의 출력 트랜스를 사용한 앰프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탄식을 했을 정도로 성능이 우수해서 매킨토시의 명성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트랜지스터 시대가 되어 출력 트랜스가 꼭 필요하지 않음에도 매킨토시에서 출력 트랜스를 고집한 것은, 전통을 살린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우수한 트랜스 제작 기술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매킨토시는 (값싼 보급기를 제외하고) 자신들이 생산하는 대부분의 파워 앰프에 ‘오토포머’라고 부르는 출력 트랜스를 장착하고 있다.

출력 트랜스를 사용해서 좋은 점은 우선은 트랜스포머가 교류만을 통과시킨다는 점이다. 스피커의 보이스 코일은 무척 가늘므로 직류가 들어오면 바로 손상을 입게 되는데, (혹시 고장날 수도 있는) 보호 회로를 사용하는 것보다, 출력 트랜스를 사용하면 근본적으로 안전하다. 또한 출력석들이 변화무쌍한 스피커의 임피던스 변동을 겪지 않고, 트랜스포머를 거쳐 항상 일정한 부하 상태에서 안정적으로 동작하게 되고, 우퍼의 역기전력을 일정 부분 차단해주는 효과도 있다. 결국 제품의 내구성에서 매우 유리해진다. 수십년이 지난 매킨토시의 앰프들이 아직도 현역에서 그 성능을 발휘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출력 트랜스는 초저역이나 초고역을 걸러내는 밴드 패스 필터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양질의 트랜스를 사용할 경우 음색의 튜닝에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를 거친 음은 부드러운 인상을 받게 되는데 CDP 초기 시절 딱딱한 디지털 소리에 질린 애호가들이 CDP의 출력에 인터스테이지 트랜스를 연결하여 소리를 순화시킨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출력 트랜스를 장착한 반도체 앰프는 중역이 충실하고 저역이 안정된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매킨토시 외에 반도체 앰프에 출력 트랜스를 장착하는 경우는 트랜지스터 초기를 제외하고는 드문 일인데, EAR을 주관하는 귀재 파라비치니가 관여했던 알케미스트의 플래그쉽 APD25 모노블록 파워 앰프에도 커다란 출력 트랜스가 장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