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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0일 월요일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 영적 담화를 나누며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오빠를 따라 몬테 카시노에 갔던 성녀는 그곳에서 547년 무렵 선조하였다.
말씀의 초대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마을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병자들은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아가 8,6-7)와 복음(루카 10,38-42)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회칙 「찬미받으소서」가 말하는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생태 위기에 놓인 시대에 읽는 창조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다가옵니다. 오늘 읽는 창조 이야기에서는 사제계 전승의 특징대로 하느님의 창조 활동 전반부가 규칙적인 반복에 따라 질서 있는 작업으로 드러납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는]”(창세 1,2)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혼란(카오스)을 질서(코스모스)로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을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 돌보십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는 또한 섭리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을 정성껏 돌보시는 하느님을 잘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병자들을 데려오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됩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보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돌봄의 임무를 위임받은 인류는 그 책임을 소홀히 한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종류대로”(1,11) 조화롭게 땅에 돋게 하신 “푸른 싹”(1,12)을 뒤섞어 유전자 변형이나 종자 조작 등으로 창조 질서를 혼란에 빠트렸고, 기후 위기는 종자 위기로, 식량 위기로, 인류 생존의 위기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빨리 충실한 청지기로서 창조 질서를 회복하고 구원의 보편 성사로 교회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투자와 시간을 할애하신 부분은 아무래도 병자들에 대한 치유 활동일 것입니다. 그도 그런 것이 여기저기 몸이 아프면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집니다.가장 기본적인 것,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다 보니 만사 귀찮아집니다.
육체가 시들시들해지다 보니,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덩달아 병들어갑니다. 점점 목숨은 붙어있지만, 삶의 많은 부분이 점점 소멸되어가니, 그것을 견디어내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치유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분의 하루일과는 A급 연예인 못지않게 스케줄이 빡빡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고 달려왔습니다.
특별히 환자들,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 인생의 막장까지 내몰린 사람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수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계속되는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이쪽 형편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사람들, 때로 무례하게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도 상하셨을 법한데, 조금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개별적인 요구에 일일이 응답하십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 받는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꼬이고 꼬인 인생이 교회에서 제공하는 고객 감동 서비스를 통해서 활짝 펴지게 만드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울적하다가, 우울하다가 우리 교회만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분이 180도 전환되는 곳이 우리 교회여야 하겠습니다.
뜨거운 난로 앞에 눈덩이를 갖다 대면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녹아버립니다. 한낮의 강렬한 태양 아래 단단한 얼음덩어리를 놓아두면 금방 녹아 자취를 감춥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의 갖은 질병, 난관, 한계, 시련은 눈 녹듯이 녹아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한계상황 앞에 섰을 때, 우리가 깊은 슬픔에 잠겨 힘들어 할 때, 우리가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마다 최종적으로 찾아갈 곳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뜨거운 사랑으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을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곳은 모든 뒤틀린 인생길이 활짝 펴지는 곳, 굽은 등이 꼿꼿해지는 곳, 꺾인 가지에서도 새싹이 돋아나는 곳, 모든 만물이 제 색깔을 되찾는 곳...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은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 오면 풍요롭고,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한과 북한은 3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모든 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런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연탄가스, 만원 버스, 암표 장사, 승차 거부, 재래식 화장실, 달동네’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합니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은 경제, 문화, 의료,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하면서 저도 ‘상전벽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이니 25년 전입니다. 본당에 주일학교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5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가정 방문하면서 태권도 사범 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자는 제안을 했고, 자매님은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권도는 본당 사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임진강에 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세례받았고, 부모님도 세례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국기원에 가서 승단 시험도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도 보여주었습니다. 10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제가 떠날 무렵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2010년이니 15년 전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지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도 곤파스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당에 있던 야산의 흙이 흘러 근처 아파트의 축대 벽이 무너졌습니다. 뉴스에도 나왔고, 서울시장도 다녀갔습니다. 저는 시장님에게 야산을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태풍이 불어도 안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시장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야산을 낮추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구청장님도 기꺼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옮겼습니다. 흙은 주민들의 텃밭을 가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산은 10미터 정도 낮아졌고, 성당에는 1,000평이 넘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철쭉도 사고, 벚나무도 사고, 장미도 샀습니다. 아카시아와 잡목으로 지저분했던 야산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윷놀이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올곧은 믿음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고픈
사람과
살고픈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풋풋한 희망 지닌
사람이 있네
살리는
사람과
살아나는
사람
그 사이에
두 사람
곱게 잇고
살며시 물러나는
따뜻한 사랑 지닌
사람이 있네
오늘의 성인
성녀 스콜라스티카 (Scholastica)
신분 : 수녀원장
활동연도 : 480?-555/560년?
같은이름 : 스콜라스띠까 스꼴라스띠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에 그녀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성 베네딕투스를 만난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투스 성인과 수사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몬테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Fleury)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세계의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
성녀 소테리스 (Soteris)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로마(Roma)
활동연도 : +304년
같은이름 : 소떼리스 소떼리아 쏘테리아 쏘떼리아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그의 집안에서 성녀 소테리스를 크게 공경해왔다고 증언하였다.
어느 집정관의 딸이었던 성녀 소테리스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신분과 재산 그리고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까지 포기하고 오로지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과 미모 때문에 수없이 많은 유혹과 위험을 당했기 때문에 모든 장신구를 떼어버리고 평민의 옷차림을 하고 다녔다.
그 즈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녀는 단호히 순교할 결심으로 준비하던 중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되어 재판관에게 끌려갔다.
재판관은 귀족의 딸이기에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회유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성녀 소테리스는 결국 모진 고문 끝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성녀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고 한다.
그녀는 소테라(Sotera)로도 불린다.
성녀 아우스트레베르타 (Austreberta)
활동년도 : 630-704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파빌리(Pavilly)
같은 이름 : 아우스뜨레베르따, 아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뜨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따, 에우스트레베르타
성 프라메칠디스(Framechildis)의 딸인 성녀 아우스트레베르타는 프랑스의 테루안(Therouanne) 교외에서 태어났는데, 신심이 매우 깊었고 항상 교회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어느 날 우연히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데, 자기가 쓰지 않은 베일을 쓴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경험 때문에 그녀는 부친의 결혼 강요를 뿌리치기 위하여 오빠의 인도를 받아 궁중을 몰래 빠져나갔다. 그녀는 성 아우도마루스(Audomarus, 9월 9일)를 만나 아브빌(Abbeville) 수도원에서 그의 지도하에 베네딕토회의 수도서원을 발하였다. 결국 부친의 동의를 얻고 아브빌 수도원에서 지내던 그녀는 수녀원장이 되었고, 후에 노르망디(Normandie) 지방에 새로 설립된 파빌리 수도원의 개혁을 돕기 위해 아브빌을 떠났다. 그녀의 신심과 겸손은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녀는 에우스트레베르타(Eustreberta)로도 불린다.
성 귈리엘모 (Guilielmus)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 말레발(Maleval)
활동연도 : +1157년
같은이름 : 윌리엄, 윌리암
프랑스 태생의 성 귈리엘무스(또는 귈리엘모)는 한때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통회자가 되어 로마(Roma)를 순례했는데, 여기서 교황 성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 7월 8일)에게 보속을 청하였다. 교황의 명에 따라 그는 다시 예루살렘 순례를 한 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는 은둔소에 숨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성덕이 차츰 알려지면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몬테 브루노(Monte Bruno)에 정착했다가 더욱 한적한 곳을 찾아 헤매던 중 마침내 말레발(또는 말발 Malval)에 안착하였다.
그는 1155년 9월에 그곳의 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맹수들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알베르투스(Albertus)라고 알려진 제자 한 명만을 키웠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리날도(Rinaldo)라 불리는 한 의사가 제자로 살겠다고 들어왔다.
그들이 성 귈리엘무스 은수자회, 곧 귈리엘미트회(The Gulielmites)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이 은수자회는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Flandre) 그리고 독일로 퍼져나갔으나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로 통합되었다.
그는 빌리암(William) 또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그에 대한 공경은 120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후고 (Hugh)
신분 : 신부 수도원장
활동지역 : 포세스(Fosses)
활동연도 : +1164년
같은이름 : 후꼬 위고 휴스
벨기에 나무르(Namur) 근교의 포세스 출신인 성 후고(Hugo)는 고아였으나 그 지방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직자이던 프랑스 캉브레(Cambrai)의 주교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는 항상 맨발로 다녔고, 통회자의 옷을 입었으며, 놀라운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다.
1119년 그는 26세의 나이로 사제가 되었고, 성 노르베르투스(Norbertus, 6월 6일)와 함께 프레몽트레회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 후 그는 벨기에의 에노(Hainaut)와 브라반트(Brabant)에서 선교 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126년 그는 성 노르베르투스가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그를 계승하여 프레몽트레회의 총장이 되어 35년 동안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27년에 승인되었다
복녀 클라라(Clare)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리미니(Rimini)
활동연도 : 1282-1346년경
같은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이탈리아 리미니의 부유한 집 딸로 태어난 클라라 아골란티(Clara Agolanti)는 어려서 결혼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었다. 그러나 남편 집안의 반대자들에 의하여 얼마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부친의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살았고 또 조심성이 없어서 많은 빈축을 샀다고 한다. 30세 되던 해의 어느 날, 그녀는 어느 프란치스코회의 성당에 갔다가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 “클라라야, 아무런 잡념 없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한 번만 바쳐보아라." 이때부터 그녀는 아주 신중히 처신하게 되었고, 그 얼마 후에는 같은 성당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하였다. 큰 충격과 더불어 완전히 개심한 그녀는 작은 형제회의 제3회에 입회하여 보속생활을 시작하였다.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던 그녀는 철로 된 고행복을 입고 철저한 고행을 시작하였다. 지난날의 허영과 육욕을 벌하기 위하여 스스로 허름한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고, 자신의 입맛을 희생하였다.
그녀는 가끔 기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였다. 몇몇 부인들이 그녀의 지도하에 재속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어느 해 성 금요일에는 사람들이 그녀의 목에 새끼줄을 매고서 개처럼 끌고 다니게 한 적도 있었다. 또 주님을 본받기 위하여 문전걸식을 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행동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했기 때문에 반대자들도 생겼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목마름을 실감하기 위하여 물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지내기도 하였으니, 정말로 놀라운 사람이라고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수덕생활은 그녀가 죽으면서 즉시 성녀로 공경을 받는 놀라운 빛을 발하게 하였다. 교황 비오 6세(Pius VI)는 1784년에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다. 그녀는 흔히 재속 수도자의 앞길을 밝힌 분으로 공경을 받는다.